[NETFLIX] '내 몸이 사라졌다' 뒤집어진 주체성
[NETFLIX] '내 몸이 사라졌다' 뒤집어진 주체성
  • 배명현
  • 승인 2020.03.11 12: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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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 몸이 사라졌다'(I Lost My Body, 프랑스, 2019, 81분)
감독 '제레미 클라핀'(Jeremy Clapin)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근대를 알린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여전히 유효한 듯 보인다. 이성이 없는 사회를 어찌 상상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현대로 넘어오며 이성보단 오성과 다양성, 무의식 제3의 세계와 서브컬쳐, 문학과 장르문학의 교접 등등등. 셀 수도 없지 많은 장르, 문화적 경계가 무너지면서 현대에 이르렀다. 포스트 모던이란 이름조차 낡아버린 지금 이성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내 몸이 사라졌다>(원제 J’ai perdu mon corps)는 제목부터 강하게 뇌를 때린다. 단순히 문학적 수사로서 쓰는 말이 아닌 진짜 뇌를 때리는 제목이다. 내 몸이 사라진 상태는 무엇을 의미하는 가. 이 말의 발화체는 몸에 달려있지 않은 상태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 문장을 말하기 위해서는 신체에서 분리된 기관이다.

제목에서처럼 뇌를 거세한 기관이 주체가 된다. 손의 여행기(?)가 메인이되는 이 영화는 신체 절단을 소재로 가져가는 영화이다. 이전까지 신체 절단이 공포물에서 쓰였다면 이 영화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필자는 이 장르를 노동 누와르라 부르고 싶다. 손이라는 매개체를 중심으로, 태어나 현재까지의 역사를 주마등식으로 보여주고(기억을 시각화시키는 쇼트와 몽타주 편집의 앙상블) 잘려 나간 손이 발화체가 되어 활보하고 다니는 과정에서도, 영화는 중간중간 손의 사용을 보여준다.

 

사진 ⓒ 넷플릭스 제공
사진 ⓒ 넷플릭스 제공

절단된 손과 교차로 진행되는 손의 주인(?)인 나우펠의 일대기 또한 손의 촉감을 시각화한다. 손을 중심으로 한 클로즈업과 손의 역할(잡다, 만지다, 더듬다, 쓸다, 집다 등등)을 강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이렇게 철저하게 촉각적 성질을 띤다. (벤야민이 말한 촉각적 성질과는 다른 시각의 촉각화를 말한다) 마치 주체성을 가졌다는 듯 혼자 돌아다니는 손이 만져대는 것과 주인공 나우펠이 만지는 촉감이 영화를 보는 내내 손안에서 느껴진다. 이는 나의 촉각적 기억과 영화의 시각화가 어느 순간 만나게 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영화를 보는데 우리는 촉각을 느낀다. 사실 이 자체는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고어 혹은 스너프 필름이라는 장르를 보며 우리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가. 심지어 어린이 만화 스펀지 밥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마술연필에서도 혼자 움직이는 손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내 몸이 사라졌다>는 새롭다. 그건 아마 손이 ‘내 몸’을 갈망하기 때문은 아닐까. 자신을 실수로 잘라난 내 몸(두뇌)을 증오하는 게 아니라 갈망한다.

상상해보자. 끔찍하긴 하지만, 우리가 사고를 당해 손이 잘렸다고 하자. 그럼 우리는 잘린 손을 들고 당장 병원으로 달려갈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손이 병원을 탈출해 몸에게 다가온다. 잠을 자고 있는 내 몸의 잘린 부분에 자신을 갖다대기까지 한다. 귀엽다라고 까지 생각할 만큼 새롭다. 손의 갈망. 내 몸을 되찾고자하는 욕망이 이 영화에선 뒤집어져있다.

때문에 이 영화는 이성이 뒤집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관의 위치에서 내 몸이라는 욕망의 대상을 갈망한다. 손이 잘린 나우펠은 무기력하다. 이성의 자리 대신 욕망과 감각이 영화를 지배한다. 하지만 여기까지 말하면 영화의 엔딩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할 것처럼 보여지던 나우펠은 아파트에서 점프해 건설 크레인으로 넘어간다. 이 모든 과정은 녹음기에 담긴 소리를 통한 가브리엘의 추측인데. 나우펠은 사라져 없고 잘린 손만이 가브리엘의 시야를 피해 숨는다.

이 영화는 만화이기에 손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지만 세계 안에 있는 인물들에게 이곳은 현실이다. 현실안에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은 벌어지면 안된다. 그렇기에 손은 몸을 강렬히 욕망하지만 만남은 결코 실현될 수 없다. 손은 그걸 잘 알고 있다. 사람의 인기척을 피하고 누가 보기전에 숨어버린다. 손은 주체가되어 적극적으로 몸을 욕망하지만 이런 일은 현실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다.

나우펠은 살았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영화가 그렇게 찍었기 때문에. 다만 어디로 갔는지 모를 뿐이다. 영화 속 어딘가에서 부유하고 있을 것이다. 죽음으로 간 것이 아닌 알 수 없는 세계로. 무너진 욕망을 여운이 대신한다. 손은 몸을 따라 뛰지 못했고 몸은 손을 알지 못하며 무능력한 이성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꼬여버린 지시의 화살은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 한 체 미끄러진다. 이 고독한 파토스는 강한 여운을 남긴다. <내 몸은 사라졌다>는 제목은 결말에 가서야 진정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진 ⓒ 넷플릭스 제공
사진 ⓒ 넷플릭스 제공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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