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에 대한 무수한 의심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악에 대한 무수한 의심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2]
  • 이현동
  • 승인 2024.03.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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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을 수도 없고 발견될 수도 않는 악"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는 악은 존재가 아니며 자연도 아니라는 점을 밝혔다. 저지르는 악, 현재 일어나는 악의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한 키르케고르도 악의 존재를 분명하게 규명할 수는 없었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영지주의자와 마니키아니즘에서는 이 악을 '자연', '본성'을 가르치는 라틴어 Naturale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3)에서 악의 존재는 무엇인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서사 전체를 위기상황으로 유도하는 마을 사람들과 도시 사람들의 갈등은 단순히 위계 사회에 관해 논평으로 치부될 수 없다. 이는 이 영화가 축조하고 있는 전략을 축소하기 가장 쉬운 오독이 될 수 있다. 영화의 가장 주요한 이해는 하마구치 류스케도 말했듯이 "궁극적으로 악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제목이 사람들에게 생각을 제시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랬다"는 지점에 있다. 감독은 그러한 무수한 존재를 알 수 없는 것으로 환원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2021)의 공동 작업자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이시바시 에이코(Eiko lshibashi)가 이번 작품에도 함께 참여하면서 대사가 없는 30분 분량의 시각적 반주를 통해 '악'이란 것을 '자연'이란 공간 안으로 침투시킨다. 감독이 강조하듯 음악을 들을 때와 자연을 보았을 때 즉흥적으로 체감되는 어떠한 감각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느낌으로의 감상을 요하기도 한다. 이는 시선의 문제가 악으로 촉발될 수 없다는 점까지 포함한다. 사실 악의 느낌, 자연의 느낌, 곧 이는 느낌일 뿐,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 이미지인 바람, 물, 나무, 빛의 자연은 그 움직임은 영화의 잔상으로 남지만, 주제 의식을 도출하기 위해 남용된 것이 아니다. 자연의 재료들이 시선 위로 스쳐 지나갈 때 이를 보며 누군가는 감각적이고 심히 아름다운 숏이다라고 상찬할 수 있겠지만, 이 숏에서 남는 건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인물들의 행방이자 공허한 느낌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어쩌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접목한 것처럼 보이는 구조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가 『영화의 이론』 다큐멘터리 챕터에서 제시한 자연적 재료에 의존하면서도 그 재료의 이용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영화라 할 수 있으며, '조형적 충동이 리얼리즘의 경향을 제치고 존재감을 발휘'한 어떤 구조 영화에 가깝다. '코로나'로 인해 발생한 보조금에 대한 언급은 리얼리즘으로 둔갑시키면서 무의식적으로 픽션과 현실이 왕복하는 지각으로서의 의심을 증폭시킨다. <해피 아워>(2015)와 <드라이브 마이 카>, <우연과 상상>(2021)의 세 번째 챕터에서 관측되었던 인위적인 연기의 돌출이 있었다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는 오히려 인위적인 프레임이 영화를 채운다(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전 영화 제작에서 사용했던 카메라 움직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가령 무수한 트래킹과 패닝으로 인물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않거나 아예 사이드에 배치해서 시선을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렇다. 중심을 이탈하면서 발생하는 영화적 기능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루돌프 아른하임은 『중심의 힘the power of center』에서 시각이 지각되는 방식인 중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시각적인 대상들은 힘들이 집중되는 한 중심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 중심은 시각적인 공간 내의 어느 곳에든지 존재할 수 있다. 다양한 시각적 대상들 간의 상호작용이 힘들의 중심으로서 구도의 기반이다."

이 말에 따라 탈중심적 영화란, 도리어 다른 중심을 지각하는 데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말이 된다. 이는 중심이 되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주시하게 되며 동시에 가리키는 대상에 대한 의심을 가동하게 된다. 결국, 이 영화에서 의도적인 불편함이 추동하는 효과는 메시지에 대한 의심이자 악에 대한 의심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 그린나래미디어

또 하나의 방식은 악과 자연의 관계가 어떻게 맺어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파란색 종류의 의상을 착장하고 있는 타쿠미(오미카 히토시)와 딸 하나(니시카와 료), 타쿠미의 하얀색 차량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설원에 대응하는 색채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이는 아름다움이란 감각에 복무하기 위해 설정된 것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그건 영화 전체로 봤을 때 악의 비존재를 비대하게 만드는 전략 중 하나다. 더 나아가 하마구치 제작팀 멤버 비전문 배우인 타쿠미를 연기하는 오미카 히토시를 주연배역에 선정한 것도 영화가 형성하고자 하는 악과 자연에 부합한다. 의도를 알 수 없는 타쿠미의 표정과 제스처는 이 영화의 정체인 '없음'인 무(無)를 표면에 내세운 또 하나의 사례다. 어떠한 신호도 없이 사운드트랙이 갑자기 절단되는 효과도 마찬가지다. 몽타주와 사운드가 어떠한 필연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음을 공고히 하면서 선이든 악이든 분실된 상태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욱이 단순히 한 마을에 보조금을 빌미로 글램핑을 개설하려는 상류층인 도시 사람들과 하류층인 마을 주민은 설전을 벌이면서 재고를 요청하지만, 이 장면은 오히려 주제를 비트는 트릭에 가까워 보인다. 조금은 이상하게도 타쿠미는 이때 합리적인 경우라면 도와줄 의향이 있다며 마무리한다. 마을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가 강경하게 거부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류와 하류, 계층에 대한 비유를 명료하게 설명한 차이밍량의 <하류>(1997)와 같은 영화도 아니다. 도리어 자신을 반영하는 영화이며 악의 무위함을 투명하게 강조하는 영화다. 보조금을 타기 위한 욕망으로 그득한 연예기획사 사장과 그 뒤에 괴상한 초상화, 여자직원인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와 미세하게 보이지만 차 안에서 그녀와 함께 데이트 앱 이야기를 하며 호감 표시를 하는 듯한 남자직원 타카하시(코사카 류지)의 거울에서, 사슴이 마시는 호수에 반사되고 있는 자연에서 악은 끊임없이 어딘가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는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할뿐더러 그저 공허하게 부표한다.

그리고 몇몇 장면은 두 프레임으로 존재한다. 트래킹으로 나무와 하늘을 길게 찍은 첫 장면과 밤이 된 마지막 장면에서, 우동 집에 공급할 물을 뜨는 두 장면, 미리 하교를 한 하나를 숲으로 찾으러 갔을 때 등이 있다. 이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자주 애용하던 반복과 병렬 구조에서 곧 영화는 구조적인 관계를 형형하게 드러내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는 곧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끊어져 버린다(언급했던 사운드의 절단, 그리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는 아이들의 동작도 이런 이미지를 강화한다). 글램핑 사업이 긍정이든 부정이 되었든 온전히 봉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개시하는 건 단순히 사회와 정치라는 명시적인 논평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덧붙여서 맨 마지막에 실종된 딸을 찾으러 간 타쿠미와 타카하시가 하나를 찾을 때 갑자기 폭력을 사용한 것과 딸을 안고 숲을 향해 나아가는 타쿠미를 터벅터벅 쫓아가는 타카하시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 서사의 부재, 끝맺음 없이 부유하고 결핍된 이미지에서 우린 어떤 악을 발견할 수 있는가.

 

ⓒ 그린나래미디어

끝에 이르러 관객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를 묻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악의 '존재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이를 사유하기 위해서 프레임의 범주 안에서 전제로 하는 구조가 무엇에 해당하고 있는지를 파악하지 않을 때, 우린 존재하는 '무언가'를 찾기에 급급할 것이다. 오히려 영화는 악의 존재를 소거함으로 선 또한 없는 '무'존재를 잉태한다. 계속해서 의도적으로 여러 숏을 건축하고 있지만 이 영화 전체를 추동하고 있는 상호 작용은 오히려 자연의 광활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도리어 '무'에 가까운 설원의 색감을 통해 악의 '무'존재를 규정하며 끊임없이 반영의 이미지를 이탈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모든 시선은 차츰 빗나갈뿐더러 자연의 속성과 알 수 없는 재해의 가능성을 캐릭터로 투영한다. 은유적으로 재해를 다뤘던 하마구치가 재해의 '무'를 드러냄으로 이 영화는 결말은 어떠한 위로도 격려도 없는 알 수 없는 형체로 존재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악이 가진 오독의 가능성을 관객에게 지시하면서 자연의 숨결을 통해 고고하게 악을 은폐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좋은 의미에서도, 나쁜 의미에서도 텅텅 비어있는 영화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 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Evil Does Not Exist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Hamaguchi Ryusuke

 

출연
오미카 히토시
Hitoshi Omika
니시카와 료Nishikawa Ryo
코사카 류지Ryuji Kosaka
시부타니 아야카Ayaka Shibutani

 

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6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4.03.27.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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