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헤인즈'의 <메이 디셈버>(2023)는 지난해 칸 영화제의 경쟁부문 작품이자 올해 아카데미에서도 여러 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이다. <캐롤>(2015)의 개봉 이후 국내에서 토드 헤인즈의 영화 관객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인간의 관계의 문제와 정체성을 건드리는 헤이즌식 멜로드라마가 폭넓게 수용되거나 이해되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메이 디셈버>에 대한 반응을 보면 '그의 영화를 제한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캐롤>과 <메이 디셈버>를 비교의 대부분은 소재주의라고 부를만한 반응이다. <메이 디셈버>는 <캐롤>와 닮은 구석이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의 영화일 수 있다. 이 글은 토드 헤인즈 특유의 스타일로 <메이 디셈버>를 따라가면서도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선택이 무엇인지에 관한 성찰이다.
둘의 만남은 시작되고
멜로드라마의 세계에서 둘의 관계가 핵심적이라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영화 <캐롤>은 딸 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백화점을 찾은 캐롤과 장난감 스토어에서 일하는 테레사와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캐롤이 찾던 '장난감'은 절판되었지만, 테레사가 '추천'한 장난감을 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캐롤의 장갑을 두고 가는 바람에 만남은 본격화 된다. 손님과 점원으로서의 만남은 연인으로의 만남으로 발전하고 두 사람의 현실이 조여오기 시작한다. 캐롤에게는 남편 하지가 있고, 테레사에게도 파리로 함께 여행을 가자고 청하는 남자친구가 있다. 두 사람의 마음은 이러한 조건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이를 대변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 영화에서 운명적 눈길이라고 부를 만한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백화점 장면에서 테레사가 캐롤을 응시하는 눈길은 직접적이다. '시선의 멜로드라마'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보는 주체와 대상을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문제는 이들을 둘러싼 현실의 시선이었다. 그것은 사회적 시선인 동시에 레즈비언 커플을 바라보는 현재 혹은 1950년대식 눈길이다. 그 가운도 도드라지는 가장 큰 문제는 캐롤의 이혼 소송이었고, 테레사는 이 사태에 개입할 수가 없다. 경제적 차이에서, 나이의 차이에서, 모든 것의 차이에서 테레사는 물러나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물러남의 시선이다. 이와 다른 시선은 두 사람의 여행 혹은 마주하는 시선이다. 밀월 여행은 일종의 탈출기인 동시에 시대로부터, 남성적 시선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마주함과 벗어남은 이처럼 변증법적으로 결합된다). 1950년대 미국 혹은 뉴욕 사회를 중심으로 자신의 욕망을 자유롭게 드러내기 어려웠던 두 여성의 만남과 여행은 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것을 꿈꾸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캐롤은 이혼을 결심하고, 테레사는 백화점의 점원이 아니라 사진작가로 인정받으며 언론사에 취직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두 사람의 이별과 맞물려 있다. 밀월여행의 불법 도청이 법정 증거로 쓰이고,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멀어진다. 그것은 이 관계를 세상에 드러내기 어려운 두려움(현실의 시선과 마주해야 하는)도 있지만, 딸을 지켜야 한다는 캐롤의 모성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 테레사는 점원을 그만두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나선다. 캐롤이 발견하는 자리가 이혼이라면, 테레사가 나아가는 것은 사회적으로 일하는 여성의 자리다. 시간이 흘러 뉴욕의 한 식당에서 두 사람은 재회한다. 둘의 재회가 어떤 결말로 나아갈지는 쉽게 말할 수 없지만 뜨겁게 만나고, 차갑게 헤어지며, 또 다시 만나는 멜로 드라마의 보편적인 전개 속에서 토드 헤인즈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의 쇼트들을 나열하고 연결하며, 반복하고 역전시킨다. 시선의 교차만으로도 둘의 세계는 풍요롭게 구축된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1950년대라는 시대적 한계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을 영화로 옮긴 <캐롤>처럼 <원더스트럭>(2017) 또한 브라이언 셀즈닉의 원작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이 영화는 뉴욕으로 향하는 두 아이의 탈출 모험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후반부의 놀라운 만남을 준비한다.
1927년 뉴저지의 호보켄에 사는 선천적인 농아 소녀 로즈는 배우인 엄마 메이휴를 찾아 페리 선박을 타고 뉴욕으로 향한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말에 치일 뻔한 위기를 겪지만 오빠를 만나 도움을 받게 된다. 1977년 미네소타 컨플린트에 사는 벤은 어머니를 잃은 후 벼락을 맞아 후천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농아가 된다. 소년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찾아 뉴욕행을 결심한다. 여러 번 버스를 타고 뉴욕에 도착하지만 강도를 당하는 바람에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잃어버린다. 다행히도 자연사 박물관에서 친구를 사귀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할머니를 만나기에 이른다.
벤의 할머니가 바로 1927년의 로즈였다. 토드 헤인즈의 페르소나인 줄리안 무어가 노년의 로즈를 연기한다. 아무려나 영화의 제목 그대로 '원더스트럭'은 시대를 초월하여 뉴욕으로 향했던 아이의 혈육 관계와 만남으로 이어진다. 서점에서 만난 두 사람은 로즈의 아들이자 벤의 아버지의 고리를 통해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그것은 뉴욕으로 향하던 두 아이의 만남이기도 하고,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의 탈출이기도 하며,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정전이 된 도시의 밤하늘을 보며 별빛을 응시하기에 이른다. 두 세계, 두 사람, 둘의 만남은 토드 헤인즈 감독이 최근 영화에서 강조해 온 스타일이자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며, 여정을 통해 긴장과 갈등의 드라마를 이룬다.
<메이 디셈버>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배우인 엘리자베스 베리(나탈리 포트만)가 그레이시 부부를 만나기 위해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만남은 부부의 과거를 들춰낼 뿐만 아니라 인물 사이에 일어나는 긴장과 균열을 응시한다. 23년 전 13살 소년이었던 조와 36세였던 그레이시는 펫숍에서 만나 관계를 나눈다. 이 사건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영화의 제목인 '메이 디셈버'는 말 그대로 5월과 12월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가리키는 나이 차가 많은 관계를 이르는 관용적 표현이다.
이로부터 23년이 흘렀지만, 이들의 집에는 여전히 불쾌한 택배가 배달된다(그것이 무엇인지 보여지지는 않는다. 조롱을 하는 물건일 거라는 암시만이 깔릴 따름이다). 엘리자베스의 방문 목적은 이들의 사연을 영화로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줄리안 무어) 역을 맡았고, 이처럼 복잡한 현실적 인물을 제대로 연기해 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엘리자베스의 행적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그레이시의 전남편을 비롯하여 주변 인물들을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현장을 확인하는 인터뷰다. 다른 하나는 그레이시 부부를 만나 식사를 하거나 가족 행사에 참여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취재다. 이 과정에서 토드 헤인즈 감독은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스가 배우(허구)와 실제 인물이라는 간극을 넘어 닮아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연출했다. 이는 배우들의 역량에 기대어 있기도 하다. 세기의 배우라 부를 수 있는 줄리안 무어(그녀는 토드 헤인즈의 많은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다. <파 프롬 헤븐>(2002)이 대표적이다)와 나탈리 포트만의 대결 구도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동력이 된다.
닮음의 이미지는 둘의 반복 속에서 이뤄진다.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에게 화장법을 알려달라고 하는 장면(그레이시처럼 화장하기 위해), 식당 화장실에서 두 사람이 거울을 나란히 바라보거나 마주하는 장면, 그레이시 딸의 졸업용 드레스를 살 때의 거울 장면 등 두 사람은 서로를 거울처럼 마주할 뿐만 아니라 거울을 통해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닮음의 절정은 두 사람의 마지막 마주침이다. 고교 졸업식이 끝난 후 마주하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두 사람 모두 하얀 옷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일순간 구별이 어려워진다. 누가 그레이시이고, 엘리자베스인가.
<메이 디셈버>는 두 사람의 닮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일까.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레이시는 자아가 강하다고 스스로 말하는 여성이며, 23년 전의 일을 너끈히 견디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의 자신감 또한 만만치 않다. 그녀는 자신이 그레이시를 잘 연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자신이 이해하는 그레이시야말로 그녀의 참모습이라고 믿기에 이른다.
하지만 두 사람의 닮음이 드러날수록 눈에 들어오는 것은 차이 혹은 균열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에게 과거의 어떤 일이 있었을 것이고, 이로 인해 당시에 작용하지는 않더라도 나중에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전형적인 정신분석학자의 태도를 취한다. 엘리자베스는 자주 그레이시가 어렸을 적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과거의 일이 "한참 후에야 일어나는 현상이 있어서"라고 호기심의 이유를 설명한다. 이러한 접근은 그녀가 연기를 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실상 그레이시를 이해하는 데는 이르지 못한다. 엘리자베스가 바라보는 그레이시를 보여줄 다름이다.
흥미로운 지점 중의 하나는 인터뷰를 통해 엘리자베스는 과거에 그레이시의 조가 만났던 장소나 일터를 확인하지만 과거를 재현하거나 회상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재현은 엘리자베스가 연기하는 그레이시의 모습을 통해서만 구현될 따름이다. 영화에서 "컷"이 외쳐지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으면 '과연 그레이시가 뱀을 들고 조를 그렇게 유혹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이 작품은 과거라는 사건을 바라보는 현재의 관점만이 있을 뿐이며, 각자의 이야기를 통해 진술되거나 영화로 치환될 따름이다.
엘리자베스는 조를 유혹하기도 한다. 그녀의 유혹을 단순하게 보자면 조를 만난 그레이시의 느낌을 제대로 확인해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녀는 조의 직장을 찾아가고 도움이 되었냐는 조의 말에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미 감이 왔어요"라고 말한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묻는 질문에 엘리자베스는 조를 응시하며 "당신과 몰래 만나는 거요."라며 애써 23년 전의 시간과 분위기로 이끌어 가려고 애쓴다. 심지어 자신이 조와 동갑이라면서 36살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과거 두 사람이 관계를 맺었을 때의 그레이시의 나이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집에서 사용 중인 호흡기를 조립해 달라며(조의 여동생이 호흡기를 사용했던 탓에 조는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침대로 이끄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섹스가 끝난 후 대화를 하던 중 언쟁이 생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생각한 그레이시를 들이대며 조에게 벗어나라고 충고하지만 조는 23년간 살아온 자신만큼 그레이시를 알 수는 없다면서 질타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엘리자베스의 말들에 대해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대사를 던진다. "이건 이야기가 아니라 빌어먹을 내 인생이라고요!"
엘리자베스가 만난 그레이시의 전남편, 펫숍 주인, 그레이시의 친구와 자식들은는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본 그레이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은 엘리자베스가 방에서 들춰보는 그레이시에 관한 '가십 기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메이 디셈버>의 시나리오는 할리우드에서 유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민감한 실화적 이야기를 어떻게 다룰지는 고민들이 많았다.
토드 헤인즈는 그레이시를 연구 혹은 연기하는 엘리자베스를 통해 일그러진 이야기의 초상을 그려낸다. 이야기의 재구성을 향한 열망은 조를 유혹하는 과정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자주 과도한 상상력의 발휘로 이어진다. 가령 펫숍의 창고에서 두 사람의 섹스를 상상하며 연기를 해보거나 가십 기사의 사진을 훑어보며 그레이시의 표정을 연기하는 장면들처럼 엘리자베스의 자위적 오버는 장면마다 툭툭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엘리자베스의 추구는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기에 이른다.
그레이시의 큰 아들인 조지로부터 그레이시가 어릴 적에 오빠들로부터 성적인 학대를 받았다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고민하던 그레이시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찾았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이는 엘리자베스의 집착이 가져온 결과일 뿐이었다. 그레이시와 엘리자베스가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에서 그레이시는 집을 나가 사는 조지와 자주 통화를 한다고 말을 하면서 그가 거짓말하는 아이임을 강조하여 들려준다.
"날 이해해요?"
"이해해요"
"그 역겨운 오빠들 얘기가 진짜인 줄 알지 않않겠죠"
"네?"
"구역질 나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지껄이고 다닌 건지…"
"조지한테 들었어요?"
"난 조지랑 매일 통화해요. 자아가 불안한 사람들은 참 위험하다니까요, 그쵸? 내 자아는 튼튼해요. 그 점 꼭 짚어주세요."
이전까지 조지와 그레이시는 단절된 사이처럼 보이지만, 그레이시의 말을 따르자면 "아니었다" <메이 디셈버>는 과거의 한 사건을 둘러싼 한 부부의 모습과 부부가 이뤄낸 가족의 모습을 통해 표층과 심층이 전혀 다른 동전의 양면일 수 있음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 사건으로 인해 병들어 버린 것은 조지일 수 있다. 조지는 끊임없이 자신을 불쌍하게 만들고, 피해자로 만드는 말을 던진다. 그가 엘리자베스와의 첫 만남에서 그 사건이 일어난 무렵에 벌어진 자신의 생일 파티 일화에는 분명한 과장이 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조지는 그레이시의 전남편으로부터 나은 아이이며, 엄마의 스캔들(상대가 같은 십대였다는 사실)은 정신적 충격을 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통해 진술되는 과정과 설명을 통해 그레이시의 말이 사실인지, 조지가 한 말이 사실인지 쉽게 확정할 수는 없다. 다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난 후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엘리자베스가 당혹해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 때 반복되어 온 특유의 균열적 사운드도 등장한다.
<메이 디셈버>는 영화를 위해 찾아본 배우이자 탐정인 엘리자베스를 따라가지만 그가 마주하는 최종 진실은 그 어느 것도 결정할 수 없는 '불확정'의 순간이다. 단지 엘리자베스는 그토록 닮기 위해 자신이 선택한 이야기를 선택했을 따름이다.
이러한 불확정은 엘리자베스 베리의 정체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녀가 머무는 하우스의 카드에는 환영합니다는 메시지와 함께 "<노라의 방주> 팬이에요."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다가올 때며 한결같이 <노라의 방주> 팬임을 언급한다. 흥미로운 것은 <노라의 방주>가 정확히 어떤 작품인지를 설명하는 장면은 부재하다는 것이다. 마치 그레이시의 스캔들처럼, 아들 조지의 말처럼, <노라의 방주>도 사람들의 반응으로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아마도 소프트 포르노에 가깝거나 농염한 정사 장면이 있는 영화로 짐작할 수 있다. 절대로 일류 배우라고 할 수 없는 엘리자베스에게 그레이시의 이야기는 기회의 작품이고(고등학교에서 특강을 하게 된 엘리자베스가 줄리어드 대학 출신이라는 장면이 등장한다. 또한 그레이시와의 대화 중 자신의 부모가 교수였으며, 특히 어머니가 쓴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관한 인문학 서적이 꽤 유명함을 언급한다. 잠깐 언급되는 철학책의 내용을 쉽사리 영화 전체에 적용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메이 디셈버>가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다루는 영화라고는 할 수가 있다), 그녀는 머물러야 하는 기간을 초과하면서까지 이 기회를 부여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기를 쓸 수록, 오히려 진실은 미끄러지고 멀어진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훌륭한 연기를 해야하고, 그 결과 좋은 영화를 만들어 한다는 목적만이 남기 때문이다. 목적을 향한 비대한 욕망은 눈을 멀게한다. 우리는 이를 "맹목"이라고 부른다. 결국, 두 여성의 만남은 전작들과는 달리 두 여성을 과거의 스캔들로부터 탈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붙잡아 둔다. 강한 자아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레이시는 과거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정신 승리로 지난 23년을 버텨왔고, 23년 전의 일을 영화로 만들려는 엘리자베스는 제대로 연기한다는 맹목 아래 그레이시의 허상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연기하려고 애쓴다. <캐롤>이나 <원더스트럭>과 달리 둘의 관점에서 이 영화는 과거에 더 강하게 사로잡히는 이야기다. 그리고 토드 헤인즈는 탈출을 꿈꾸는 자를 두 여주인공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새로운 존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의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가운데 새로운 성찰을 보여주는 인물은 '조'다. 그는 두 여성 사이를 오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조의 장면 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대목 중 하나가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이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등장하는 조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다가 담배를 피운다. 아버지에게 자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두 떠나는 상황을 쓸쓸하게 언급하면서 아버지의 담배를 집어든다. 재털이에는 이미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이 클로즈업은 스캔들의 중심에 놓여 있었던 아버지의 지난 세월의 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현재를 잇는 조의 마음을 보여준다.
13세 소년 조는 조숙한 아이였고, 집 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조가 몰랐던 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두 아이가 진학을 위해 집을 떠나는 순간이 다가오자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이 궁금해진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23살 차이가 나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결과로 인해 불어닥친 힐난이 아버지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아버지와의 만남은 재털이에 쌓인 담배꽁초들로 마무리 된다. 그것은 분명 시간의 재일 것이다. 그리고 이와 호응 하는 또 하나의 장면은 지붕 위에서 졸업 후 떠나야 하는 아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아들은 대마를 피우기 위해 지붕 위에 올라왔다. 조는 자신이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면서 처음으로 시도한다. 그것은 아버지로서 아들과의 대화를 열기 위한 과정인 동시에 아버지로서의 심경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약물의 효과 때문인지 아들을 보내야 하는 심경 때문인지 조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들의 무릎에 기대어 운다.
두 여자의 관점에서 <메이 디셈버>는 과거에 왜 그랬는지, 그레이시는 정말 이상한 여자였는지, 그것을 연기하려는 엘리자베스의 욕망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마 대다수의 관객이 따라가는 것이 이 지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변하는 인물, 과거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인물은 '조'다.
23년 전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너무나 어렸던 조는 그 동안 그 세월 속에 갇혀 살아온 인물이다. 오히려 그레이시는 공주처럼 대접을 받으며 자랐고, 자신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행동했던 인물이다. 한 마디로 자존감이 큰 인물이다. 자주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이 또한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우는 그레이시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모습으로 운다(그것은 약함을 보여주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그레이시를 위로하는 것은 순전히 조의 몫으로 주어진다.
23년 전부터 세간의 비난 속에, 그리고 자신을 희생자로 바라보는 시선 속에 의연한 어른 인 척하고 살아야 했던 조는 엘리자베스의 등장으로 자신의 생각이 흔들리는 것을 발견한다. 사실 그녀의 등장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종종 등장하는, 누구인지 모르는 상대와 나누는 조의 SNS메시지는 그가 자신의 현실에 대해 답답해 하고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대변한다.
조의 마음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엘리자베스의 유혹에 넘어가 섹스를 한 후 대화를 나누면서 발화한다. 엘리자베스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일방적으로 그레이시 혹은 자신을 재단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조는 샤워를 한 후 그레이시와 대화를 시도한다. 조는 그레이시를 붙잡고 물어본다. 자신과 그레이시가 과거에 있었던 일의 정체와 의미는 무엇인지. 하지만 그레이시는 조가 먼저 유혹했다며 대화를 회피하고 조에게 모든 책임을 넘기며 거부의 몸짓을 보여준다. 그러자 조가 강하게 말한다. "그런 특별한 사랑이라면 당신과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거 아니야?" 이 장면은 심리적인 관점에서 진정한 클리이맥스다.
영화에는 조가 키우는 나비가 등장한다. 정원에 낳은 나비의 알을 정성스럽게 채집하고, SNS를 통해 누군지 모르는 사람과 나비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끝내 그레이시와의 대화가 좌절된 밤에 꼬치를 벗고 날개를 펴는 나비를 보여준다. 아침에 일어난 조는 나비를 짚으며 눈을 환한 표정을 짓는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지난 세월 동안 진정으로 갇혀 있었던 것은 그레이시가 아니라 조였음을 강조한다. 여전히 불쾌한 택배가 집으로 배송되고, 세상은 비난 어린 시선은 줄어들었을 뿐 사라지지 않았고, 그 가운데 부부의 실화를 영화로 만들려는 여전한 관심 속에서 그레이시는 종종 울기는 하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법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 반해, 조는 자신만이 그레이시를 이해하는 유일한 인물이며, 세상의 시선과는 다른 사람임을 강조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정작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고교 졸업식에서 학교 울타리로 쓰이는 철창 밖에서 바라보는 조의 이미지는 이제 곧 나비가 될 준비를 하는 고치로서의 조다.
아버지가 된 조는 자신의 아버지의 살피고, 자신의 아들과 대화를 나누며 끝내 이 관계를 선택한 자신은 무엇인지를 향해 가기 시작한다. 이 역을 맡은 찰스 멘턴이 각종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받은 것은 응당해 보인다. 그는 변화하는 인물이자 고뇌하는 인물로서 기존의 토드 헤인즈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물이다. 기존의 영화가 둘의 관계를 중심으로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무너지는 과정을 주로 다루어 왔다면 <메이 디셈버>에는 두 여성의 팽팽한 줄다리기 가운데 자신의 길을 발견하는 한 남자의 사연이 핵심을 이룬다. 나비가 탈피하는 장면은 너무나 뻔한 상징이어서 그렇게까지 과도할 필요가 있었는가 싶기도 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서라도 나비가 되려는 조의 모습을 관객들이 알아차리기를 바란 것으로 보인다.
세상 각자의 이야기
영화의 마지막은 촬영 중인 엘리자베스가 다시 한번 촬영을 하자며 "점점 더 진짜 같아지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그것은 그레이시를 이야기로 생각하는, 진짜에 대한 열망일 따름이다. 진짜 인생은 진짜 같지도, 가짜 같지도 않다. 그저 인생일 따름이다. 영화는 허망하게 그레이시의 이야기를 쫓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끝까지 드러낸다.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전남편, 여전히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변호사의 항변, 이제는 좀 안정이 되었다고 말하는 그레이시의 지인, 그리고 "엄마 머릿속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알아야"한다고 말하는 아들 조지 등의 진술이 등장하지만, 그 모두 각자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누구나 갖고 있는 자신만의 고치를 드러낸다. 하지만 진정한 나비가 되는 순간은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해주고 영양을 공급해 주는 고치(이야기)를 벗는 순간이다. 그것이 <파 프롬 헤븐>, <캐롤>, <원더스트럭>과 같은 영화에서 토드 헤인즈가 보여준 여정이거나 결론이었다. 이번에는 난무하는 이야기 속에 인생을 생각하는 한 인물에게 주목한다.
하지만 세상의 관심은 그의 인생이 아니라 세속적인 이야기에 여전히 머물 것이다. 그리하여 인생은 자주 망각된다. 현실의 세상은 조의 탈출에 흥미를 느끼기보다는 엘리자베스가 연기하는 그레이시를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중 영화의 몫은 여기에 주어져 있다. 하지만 토드 헤인즈의 영화를 보았다면, 최소한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진실이 날갯짓하는 순간이 있음을, 탈출의 비상을 시도하는 순간이 있음을 응시하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캐롤> 이후 강렬하게 다가오는 토드 헤인즈의 주요한 필모그래피가 된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 추신
이 글은 3월 23일 더숲 시네마에서 진행된 '이상용의 씨네모어' 강연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메이 디셈버
May December
감독
토드 헤인즈Todd Haynes
출연
나탈리 포트만Natalie Portman
줄리안 무어Julianne Moore
찰스 멜튼Charles Melton
배급 판씨네마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17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4.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