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쪽 오른편에서 나는 거의 견디기 어려운 광채를 지닌 무지갯빛의 작은 구체 하나를 보았다. (…) 알레프의 직경은 2~3센티미터 정도 되는 것 같았지만, 우주의 공간은 전혀 축소되지 않은 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각각의 사물(예를 들자면 거울의 유리 표면)은 무한히 많은 사물들이었다. 그것은 내가 우주의 모든 지점들에서 그 사물을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 p.209)
케빈 가넷이 하워드의 렌즈로 다이아몬드 오펄을 들여다볼 때, 성운(星雲)을 연상시키는 형형색색의 빛이 오펄 안을 떠돈다. 그 빛 위로 흑인의 역사, 식민지와 노동의 이미지들이 중첩되며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마치 우주의 실루엣 위에 인류의 역사를 올려놓듯이. 이 환상적인 몽타주는 케빈 가넷의 팔꿈치를 받치고 있던 유리 진열대가 갑작스레 깨지면서 멈춘다.
<언컷 젬스>(2020)의 카메라는 그 오펄로 총 두 번 진입한다. 먼저 에티오피아 광부들이 광산에서 오펄을 캐낼 때. 카메라는 줌인하며 오펄 안의 불규칙하고 기하학적인 공간을 유영하다가 하워드의 대장 내부를 촬영하고 있는 대장 내시경 모니터로 빠져나와 뉴욕의 한 병원에 도착한다. 그리고 케빈 가넷이 하워드의 보석상에서 오펄을 들여다볼 때. "공룡이 쳐다보던" 또는 "1억 1000만 년 이상은 된" 오펄 속에 21세기라는 영화적 시제의 맥락을 무시하고 인류 역사의 조각들이 (자세히 말하면 흑인의 노동과 식민지의 역사들이) 진열된다. 이 두 번의 움직임(moving)으로 카메라는 공간과 시간을 비약적으로 점프한다. 아니, 오히려 시공간을 접어버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이동의 묘사는 기이한 경로를 거친다. 그렇게 압축된 시공간은 오펄이라는 하나의 돌, 유사-구체(球體)로 모인다. 그러나, 그것을 특정 공간을 차지하는 명확한 물성을 가진 물체로 정의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카메라가 끊임없이 진입하여 실재계를 비틀어 놓을 수 있는 '틈'이고, 비정형화 되어 수없이 변화하는 '비-장소'이자, 공간과 공간, 시대와 시대를 잇는 일종의 '구멍'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2014)가 물리적으로 구현한 웜홀과 블랙홀이 삼차원 상으로 구의 형태를 띠었던 것처럼, 유사-구체의 오펄은 사프디 형제가 그리려는 거대한 부조리의 우주로 진입하기 위한 '구멍'이 될 수 있다. 그 구멍은 세계를 보는 그들의 '눈(시선)'이 될 수 있으며, 그 눈과 세계를 잇는 '카메라'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 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할 '우주-세계-눈-시선-카메라-영화' 따위의 단어들은 결국 같은 말의 반복인 셈이다. 사프디 형제(Safdie brothers)의 영화에서는 이러한 어법이 가능해진다.
케빈 가넷이 들여다보는 다이아몬드 오펄은 불현듯 보르헤스의 '알레프 aleph'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단편 소설에서 하나의 상상적인 사물로 소개되는 알레프는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있는 장소"이다. 또는 현실과 초현실, 과거와 미래, 모든 시대의 장소와 사건을 한데 모은 거대하고 유일무이한 사상의 집적체이며, 보르헤스가 텍스트 간의 차이와 의미의 지연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그 자체이다. 그것 안에는 "거울에 있는 것처럼 자신들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무한한 눈들"이 있고, "우편엽서를 보내고 있는 한 전쟁의 생존자들"이 있으며, 보르헤스가 절망감에 빠져 그리워하는 한 여자가 있고, 그 여자가 생전에 갖고 있던 "암"이 있다. 보르헤스가 "우주 만물과 모든 시간을 축소하지 않고 3cm에 담은 구슬"로 세계를 써 내려갈 때, 사프디 형제는 뉴욕의 한 도박 중독자 보석상의 손에 들어간 오펄로 세계를 포착한다. 보르헤스의 환상적이고 기이한 이야기들이 '문학적 알레프'라면, 현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 실재와 복제, 과거와 현재, 개인과 세계 사이를 꿰뚫는 현미경, 또는 만화경과 같은 사프디 형제의 카메라는 하워드의 오펄, '언컷 젬스 uncut gems', 즉 '영화적 알레프'이다.
리얼(real)을 아카이브 하기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지. 지하실 계단은 아주 가팔라. 그래서 삼촌들은 내게 그 계단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했어. 그런데 누군가가 그 지하실에 하나의 세상이 있다고 말했어. (…) 나는 몰래 내려갔고, 금지된 계단에서 뒹굴고 말았어. 그런 다음 눈을 떴을 때 나는 '알레프'를 보았지." (같은 책, p. 206)
모든 감독들이 영화와 처음 만났던 그만의 순간들이 있겠지만, 사프디 형제가 영화와 운명적으로 마주한 순간은 특별하다 못해 괴상하다. 일찍이 이혼한 아버지가 부모의 집을 오가며 생활해야 하는 10살 남짓의 두 아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80)라는 이혼 소송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여준 것이다. 독특한 영화광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프디 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영화감독을 꿈꾸었고, 결국 보스턴 대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한다. 그 무렵 둘은 '레드 버켓 필름스'(Red Bucket Films)라는 인디 제작사를 설립하고 각자 영화 제작에 몰두하는데, 그때 제작된 형 조쉬(Josh Safdie)의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2008)과 동생 베니(Bennie Safdie)의 단편 <외로운 존의 지인들>(2007)이 2008년 칸영화제 감독 주간에 나란히 초청된다. 그리고 이듬해에 형제가 공동 연출한 <아빠의 천국>(2009)이 칸영화제와 선댄스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사프디 형제는 떠오르는 미국 인디 감독 중 하나로 주목받는다. (형제의 공동 작업에서 조쉬는 각본을, 베니는 편집과 음향 믹스, 연기 등을 맡는다.) 이 시기 그들의 영화는 재즈의 즉흥 연주를 연상시킬 만큼 우연성과 비전문 배우, 시나리오가 없는 즉흥 연출을 특징으로 하며, 그런 점에서 '존 카사베츠'의 독립 영화들과 비교되곤 한다. 또한, 특정한 사건보다는 소소한 일상의 대화와 수다가 영화의 대부분을 이루며 멈블 코어 장르의 영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후 이들은 새로 설립한 제작사 '엘레라 픽처스'(Elara Pictures)의 첫 영화인 <헤븐 노우즈 왓>(2014)을 기점으로 스타일의 변화를 맞이한다. 거리에 흐르는 것은 델로니어스 몽크의 재즈 음악이나 포크 송이 아니라, 토미타 이사오(Tomita Isao)와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Oneothrix Point Never)의 전자 음악이며, 소소한 일탈과 작은 소동들 (그렇지만 단지 장난으로만 보기엔 불편한 비윤리적 사건들)이 일어나던 뉴욕의 거리에는 마약, 자살 시도, 은행 강도, 주거 침입, 폭행, 성행위 등 수위 높은 범죄들이 넘쳐오르기 시작한다. 도로의 한편에서 반대편으로의 걸음(<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 <검은 풍선>(단편, 2012))과, 울타리 앞에서 울타리 너머로의 점프(<존이 사라졌다>(단편), <아빠의 천국>)는 <굿타임>과 <언컷 젬스>의 하염없는 장르적 질주가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들의 영화는 소규모 독립 영화에서 상업적인 동시에 강한 작가적 색채를 띠는 장르 영화에 가까워진다.
사프디 형제의 서사와 장르적 스타일을 이끄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말(대사)'이다. 이해관계와 권력의 문제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서로 치밀하게 밀고 당기길 반복하는 말들은 겹쳐지고 분열되며 결국 '무(無)화' 되기에 이른다. 예를 들어 <언컷 젬스>의 하워드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밤을 보내고 겨우 잠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는다. a)그는 오펄의 경매에 대한 전화를 받다가 (이때 시계를 수리하는 소음이 통화를 방해하자 수리공에게 작업을 중단하라고 말한다), b)케빈 가넷의 상관 재닛의 전화를 받게 되며 (정확한 용건에 관한 이야기는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한 채 통화가 중단된다), c)전날 밤 다툰 연인 줄리아와 통화를 하고, b) 다시 재닛의 전화를 받는다(케빈 가넷이 오펄을 빌려 가 돌려주지 않는 건에 관련한 내용이다). b') 결국 케빈 가넷이 직접 보석상을 찾아오자 하워드는 전화를 끊고 그들을 맞이한다. 그리고 오펄에 관해 다투던 와중에, d)주치의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b')그 사이에 케빈 가넷은 자리를 떠나버린다. a) 오펄의 경매를 위해 서둘러 나갈 때, c) 그를 찾아온 줄리아와 마주친다. 이 모든 일이 하나의 씬 (혹은 보석상 내부에서 외부 복도로의 공간 변화를 포함한 두 개의 씬) 안에서 일어난다. 자연스러움을 넘어 산만하고 난잡한 이들의 대사 처리 방식은 파편화된 입체적인 말의 풍경으로 인한 신경과민적 체험을 일으킨다. 이렇게 사프디 형제의 영화 전반에 넘실대는 '불안'과 '신경과민의 상태'는 장르적 선택과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효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들이 부조리로서의 현실을 영화 안으로 불러오기 위한 독특한 작가적 태도로 읽힌다.
또한, 이들은 영화로부터 현실을 효과적으로 불러오기 위해 현실의 조각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는 방식을 택한다. 망원렌즈는 멀찍이서 (예를 들면 차도를 기준으로 반대쪽에 있는) 거리 위의 사람들(여기에는 영화와는 관련 없이 뉴욕을 떠도는 행인들이 포함된다)을 포착하고, 단편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2008)와 단편 <골드맨 V 실버맨>(2020)에서는 관찰 실험 영상과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넘나들며 허구에 대한 현실의 반응을 관찰하거나, 현실의 한복판에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교란시킨다. <헤븐 노우즈 왓>(2014)과 <굿타임>(2017)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마약 중독자를 연기하고 있는 아리엘 홈즈와 지적 장애인을 연기하고 있는 베니 사프디이지만, 실제로 약에 취해 길에 널브러져 있는 마약 중독자들과 장애인 보호소에서 교육 받는 실제 장애인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언컷 젬스>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케빈 가넷의 은퇴 전 실제 경기 영상을 푸티지로 삽입한다.
어쩌면 극과 극에 서 있는 듯한 초기작과 최근작의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사프디 형제의 영화는 언제나 '리얼 real'로부터 시작한다. <아빠의 천국>은 유년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영화에 대한 그들만의 특별한 경험으로 만들어졌고, <헤븐 노우즈 왓>은 뉴욕 거리를 전전하는 마약 중독자 홈리스의 자전적 소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언컷 젬스>는 아버지의 직장 상사였던 보석상 '하워드'를 상상적으로 재구성해 만든 영화이다. 다시 말해 사프디 형제는 수없이 거닐었던 뉴욕 거리로, 평범하지 않은 유년 시절을 함께 한 아버지에게로, 그리고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보고 느꼈던 (다소 과격한 그들의 말 그대로 표현하자면) '아주 엿 같은 very fucked up' 순간으로 계속해서 돌아온다. 그곳에는 카를로스 아르헨티노가 보르헤스에게 설명한 "학교에 들어가기 전, 금지된 계단에서 보았던 하나의 세상"이 있다. 10살이었던 조쉬와 8살이었던 베니는 그 순간을 통해 영화는 '현실 real'로부터 시작함을 피부로 느꼈으며, 영화로 그들의 상황(현실)을 파악(재인식)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환상의 크리처와 유령의 얼굴들
영화에서 현실은 종종 뒤틀린 굴절상으로 스크린에 도달한다. 사프디 형제의 영화에서는 그 상(相)이 크게 두 가지의 인상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결핍과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환상'이 왜곡된 형상으로 현실을 비집고 불쑥 튀어나온다. 비교적 초기작에 속하는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과 <아빠의 천국>의 환상(또는 꿈) 시퀀스가 그러하다.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에서 뉴욕을 떠돌며 도벽을 일삼는 엘레노어는 결국 소매치기범으로 경찰에 연행된다. 그를 연행하던 경찰차는 우연히 동물원에서 멈추게 되고, 엘레노어는 수갑을 찬 채로 동물원을 구경하다 북극곰을 발견한다. 우리에 갇혀 있는 북극곰을 보던 엘레노어는 산속 개울물에서 북극곰과 뒤엉키며 물놀이를 하는 상상에 빠진다. 한편, <아빠의 천국>에서 레니는 두 아들과 전시관을 구경하다가 유리 상자 안에 전시된 대형 모기의 박제를 보게 된다. 신기한 구경거리에 신난 어린 아들들에게 레니는 이전에 이렇게 큰 모기를 잡아 죽인 적이 있다며 농담을 한다. 그리고 며칠 후, 레니는 그 대형 모기에게 피를 빨리는 이상한 꿈을 꾼다. 이 유사한 두 개의 시퀀스가 기이한 이유는 다소 엉뚱한 상상력과 개연성에서 벗어나는 뜬금없는 맥락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환상(엘레노어가 상상한 북극곰과 레니의 꿈속 대형 모기)이 영화적 상(相)을 통해 재현될 때, 크리처의 물리적 조악함 때문이다. 북극곰의 어색한 움직임은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 탈을 쓰고 연기하고 있음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대형 모기 또한 각 관절에 연결된 실로 움직임이 조작되고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사프디 형제는 오히려 크리처의 엉성한 형상과 운동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환상이 또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그만의 물리 법칙을 존중한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조악하지만 단순한 이데아의 어설픈 모방이 아니라 비-장소에서 그만의 법칙으로 작동하는 또 다른 현실의 실재이다. 그 환상 뒤에 남는 것이 서늘함과 처연함 뿐일지라도 사프디 형제는 그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 굴절상은 환상이 세계 그 자체가 되는 판타지나 환상이 단순한 현실의 재현을 압도하는 모더니즘보다는, 현실과 또 다른 현실의 가능성을 사유하게 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에 가까운 태도에서 기인한다.
또한, 현실은 고정되지 못한 채 스크린 위를 떠돌고 계속해서 스스로 변장하는 '유령'이 된다. 여기서 '유령'이라는 단어를 수식하고 있는 '떠돎'이라는 말은 영화의 중심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주변부를 맴돌 수밖에 없는 장소성을, '변장'이라는 말은 산만하게 펼쳐진 얼굴의 풍경들이 결국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하는 듯한 존재의 모호함과 반복성을 설명한다. 이를테면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에서 처음 보는 엘레노어와 탁구를 하며 소소한 주말을 보내는 동양인과 <존이 사라졌다>에서 음식을 주문한 사람을 찾는다며 아파트 안을 30분 동안 헤매는 중국인과 <헤븐 노우즈 왓>에서 할리의 부탁으로 오토바이 묘기를 하는 마약 거래자는 모두 엑스트라로, 서사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주변인이지만 묘하게 비참하고 쓸쓸한 뉴욕의 현실을, 그 어떤 캐릭터보다 인상적으로 표상한다. 또는 <외로운 존의 지인들>에서 주유소 마트에 들어와 강도인 척 권총을 들고 장난을 치는 마트 직원과 <아빠의 천국>에서 길거리에서 다짜고짜 권총을 꺼내 레니에게 CD를 강매하는 괴한과 <존이 사라졌다>에서 중고 컴퓨터의 작동 여부를 확인하고 싶다며 커터칼을 들고 집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래 상대에게 갑작스레 권총을 겨누는 존의 친구는 결국 동일한 인물처럼 보인다. 더불어 이러한 사프디 형제의 '유령적' 인물들은 <헤븐 노우즈 왓> 이후의 최근작에서 하나의 거대한 알레고리를 표상하려는 것처럼 작동하기 시작한다. 보르헤스의 작품 중에서 한 마을의 실제 크기와 동일한 축척으로 제작된 지도(시뮬라크르)가 도리어 그 마을을 뒤덮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 다다라서는 그 알레고리가 사프디 형제의 영화 자체를 집어삼키기에 이르는데 그 작품이 바로 <굿타임>이다.
<굿타임>에서 백인 남성 코니를 둘러싸고 있는 여성, 흑인, 또는 장애인들은 실재를 가장하는 비현실적 캐릭터처럼 기능하다가, 코니의 세계를 무너뜨리며, 결국 이 영화의 하룻밤이 미국과 자본주의가 꾸는 허무한 악몽이었음을 선언한다.
환상의 크리처와 유령의 얼굴들을 포착하는 사프디 형제의 카메라―동시에 이들의 시선(카메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주인공들―는 낯선 세계 앞에서 상상력을 발휘하고 공포감을 느끼는 어린아이의 눈과 닮았다. 그 세계 안의 주인공들은 영화 내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며, 스스럼없이 물건을 훔치고(<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 <존이 사라졌다>), 화를 이기지 못해 달리는 버스 창문을 부순다(<헤븐 노우즈 왓>). 또는 얼굴이 뜨겁다고 칭얼거리면서 변기 물로 얼굴을 씻어내고(<굿타임>), 아들을 재우기 위해 무작정 수면제를 먹이며(<아빠의 천국>), 피로 물든 얼굴을 연인의 품에 묻은 채 아이같이 흐느낀다(<언컷 젬스>).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이들의 행동을 비판하고 단죄하기보다는 오히려 낭만적으로 옹호하고 장르와 서사를 위해 기능적으로 이용하는 점은 사프디 형제의 영화에서 지적 받는 부분 중 하나이다. 이것을 관객과 인물 간의 거리 두기를 위한 전략이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철없음'의 태도를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욕망과 비교해 볼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이들의 욕망은 유년에서 성장을 멈춘 뒤틀린 욕구에 가깝다. 이 특징적인 존재는 사프디 형제의 유년 시절과 그곳에 있었던 '영화(개별 영화 film가 아닌 시네마 cinema로서의 영화)'를 지금의 스크린 안으로 불러오고 아이의 눈이라는 레이어를 경유하여 영화를 다시 해독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렇듯 사프디 형제의 영화(스크린) 세계(현실)는 그사이에 존재하는 어떠한 레이어를 거쳐 도착한다. 그것은 반영의 측면에서 '거울'이며 굴절의 측면에서 '창문'이다. 또한, 그것은 미시적 세계로 시선을 확대한다는 의미에서 현미경이며 복제와 변형을 반복한다는 의미에서 만화경이다. 그런데 때로 사프디 형제의 영화의 카메라는 현실을 비추고 있는 레이어 그 자체로 시선을 돌린다. <검은 풍선>에서 카메라는 실직 위기에 놓인 방송국 PD, 엄마의 남자친구를 못마땅해 하는 소녀, 돈이 없어 식당에서 일하는 아들에게 먹을 것을 부탁하는 부랑자의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거리를 떠도는 '검은 풍선'이라는 제삼자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굿타임>에서 자본주의 아래 여성과 흑인, 장애인의 현실을 파노라마처럼 지각하는 동시에 실질적으로 따라가게 되는 것은 백인 남성인 코니이다. 즉, 어떠한 대상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할 때, 직접적인 그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비추고 있는 또 다른 대상이 사프디 형제의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된다. 이런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례 중 하나가 래퍼 제이지(Jay Z)의 'Marcy Me' 뮤직비디오이다. 사프디 형제가 연출한 이 뮤직비디오를 그들의 필모그래피에 포함한다면 (다큐멘터리 <레니 쿠크>(2013)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흑인이 주인공인 셈인데, 사실 그렇게 말하기도 모호하다. 뮤직비디오는 심부름을 하러 이곳저곳 뛰어다니는 흑인 아이를 헬기 안에서 순찰을 하고 있는 백인 경찰의 시선으로 따라간다. 백인 경찰은 뮤직비디오의 첫 쇼트부터 등장하고, 반면 흑인 아이의 등장은 지연된다. 백인 경찰은 거리 위의 흑인들을 내려다보지만, 흑인 아이는 백인 경찰이 타고 있는 헬기가 쏘는(shot) 빛의 잔상을 간신히 볼 뿐이다. 백인 경찰의 시선은 전지적이다. 그의 시점 쇼트(shot)는 말 그대로 하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버즈 아이 뷰(Bird's Eye View)이며, 어둠 속에 빛을 밝히는 존재다. (이런 전지적인 시점의 쇼트들은 뉴욕의 건물들 사이로 남녀의 대화를 엿보는 <헤븐 노우즈 왓>의 익스트림 롱 쇼트, 질주하는 코니를 내려다보는 레이의 시점 쇼트, <언컷 젬스>의 CCTV 쇼트 등으로 반복되고 변주된다.) 이 시선은 사프디 형제가 들고 있는 카메라 그 자체이다. 마치 그들의 영화에서 유일한 논리로 남아있는 영화적 알레프 '언컷 젬스'처럼.
영화라는 단일하고 영원한 이미지
케빈 가넷은 손에 쥐고 있는 다이아몬드 오펄에서 '마법의 힘'이 나온다고 믿는다. 그리고 오펄을 들고 참여한 경기에서 부진한 최근 성적을 딛고 환상적인 경기를 펼치게 된다. 더불어 그 경기에 큰돈을 걸었던 하워드 또한 큰 이득을 보게 된다. (물론 하워드의 행운은 베팅을 취소한 채권자 아르노에 의해서 물거품이 된다.) 이 과정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오펄은 다시 케빈 가넷의 손에 들어가고 하워드는 다시 한 번 베팅을 한다. 이쯤 되면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오펄에서 마법의 힘이 나온다"는 케빈 가넷의 말은 진실인가. 이 이상한 확신 앞에서 영화는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 <언컷 젬스>는 판타지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면 하워드의 거짓말 같은 행운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환상의 실재, 유령의 얼굴이라는 세계에 놓인 사프디 형제의 인물들은 이러한 기이한 마법 같은 순간들을 반복적으로 겪는다. 그것은 현실의 논리와 법칙에 동떨어져 있기에 마술적이고, 환상적이며, 때로는 개연성에서 벗어난 지나친 행운처럼 보인다. 엘레노어가 돈다발과 차 열쇠가 든 가방을 훔치고, 운 좋게도 차 열쇠에 알맞은 차를 찾아 보스턴까지 짧은 드라이브를 떠날 때.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 레니가 구걸하고 있는 홈리스 앞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자 몸 안에 있는 동전들이 마술처럼 거리 위로 쏟아질 때. 그의 아들들이 그린 영화 스토리보드가 바람에 날려 공중에 흩날릴 때. (<아빠의 천국>) 검은 풍선이 소각장에서 터지지 않고 기어이 살아남을 때. 그리고 마치 주인을 따르듯이 뉴욕행인들 주위를 돌며 쓸쓸한 위로를 건넬 때. (<검은 풍선>) 뉴욕 거리 위에서 로봇 인간 둘이 신기한 묘기를 부릴 때. (<골드맨 v 실버맨>) 거리에 앉아있는 할리에게 한 유대인이 적지 않은 돈을 건네는 선행을 베풀 때. (<헤븐 노우즈 왓>) 위기에 놓인 코니를 둘러싼 흑인들이 의심 없이 오히려 친절하게 그를 도울 때. (<굿타임>) 하워드가 전 재산 10만 달러를 베팅한 경기에서 케빈 가넷이 전설적인 경기를 펼칠 때. (<언컷 젬스>) 주인공을 제외한 모두가 그를 위해 연기하고 있다는 듯이 모든 상황은 이상하게나마 순조로운 동시에 유난스럽게 진행된다. 이 명제는 비유가 아니다. '주인공을 제외한 모두가 연기하고 있다.' 뒤집어 보자면, '주인공만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다.' 학교 연극에서 가짜 장치를 이용한 가짜 금화가 하워드의 딸의 입에서 나올 때. 이 거짓말이 진짜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 사람은 그것을 보고 눈을 반짝이는 하워드뿐이다. 즉, 이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착각이며, 개인의 욕망이 세계에 부딪혔을 때 발생하는 불협화음의 잔상이다.
케빈 가넷의 활약으로 100만 달러를 얻게 된 것도 잠시, 경기 내내 이중문 안에 갇혀 있던 아르노의 부하들이 쏜(shot) 총에 맞아 하워드는 쓰러진다. 카메라는 천장에 붙어있는 거울로 재빨리 시선을 돌리며 이미지를 분열시킨다. 총알이 얼굴을 관통함으로서 죽음을 맞이한 하워드는 자신을 찍고 있는(shot) 카메라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처럼 사프디 형제의 마법의 서사는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 속도를 감지하지 못하고 포화 상태에 다다르고, 갑작스레 멈추고 분열한다. 이때 사프디 형제의 인물들은 스크린 너머의 카메라를 쳐다보던 하워드처럼,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거울을 마주 보듯 처연하게 외화면을 응시하는 인상적인 순간을 보여준다. 북극곰의 환상 끝에 경찰차 안으로 돌아온 엘레노어의 쓸쓸한 얼굴, 수면제를 먹고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하는 아들을 두고 상심에 빠진 레니의 얼굴, 갈 곳 없이 트럭의 짐칸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실버맨의 눈, 연인 일리야에게 버림받고 다시 마약상 무리에 섞여 들어간 할리의 황량한 얼굴, 결국 체포되어 철창 사이로 그 너머를 뚫어지라 응시하는 코니의 눈이 그러하다. 눈과 얼굴이라는 (유사) 구체, 혹은 구멍. 오펄을 비집고 들어가는 카메라의 운동은 반복된다. 하워드의 얼굴 한복판에 뚫린 구멍으로 카메라가 들어갔을 때, 도착하는 곳은 아득한 우주(세계)의 풍경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응시하고 있는 맞은 편의 외화면(카메라 뒤, 또는 프레임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워드의 얼굴을 향한, 다이아몬드 오펄을 향한 줌인이 세계 밖으로 튕겨 나가는, 더 큰 거시적 세계의 맥락으로 진입하는 원심력이었다면, 그 운동(moving)의 또 다른 도착지, 사프디 형제가 자꾸만 돌아보고야 마는 마음의 중심, 기억의 중력, 구심력의 지점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프디 형제는 그 끊임없는 구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또 다른 구멍을 마치 관객을 위한 이스터 에그처럼 숨겨놓았다. 영화 영사 기사 레니가 아들을 사랑한다는 의미로 필름의 오른쪽 아래 구석에 숨겨 놓은 노이즈들. 레니는 필름을 돌리며 프레임 바깥에 있는 또 다른 프레임을 들여다본다. 필름이 돌아가고 스크린 위로 빛이 도달하면 그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 원형의 표식이 찰나에 눈앞을 지나간다. 영화라는 도착지. 영화라는 현실. 영화라는 판타지. 영화라는 알레프. 사프디 형제의 인물들의 눈과 얼굴은 모두 그 하나의 단일한 이미지를 응시하고 있다. 10살 남짓의 두 소년이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보았던 그 순간을. 영화라는 이미지로 영원히 남겨지고 강처럼 끊임없이 흐를 그 순간을. 개인과 세계를 잇는 사프디 형제의 '영화적 알레프'는 이때부터 시작한다. 어쩌면 이들은 마틴 스콜세지를 잇는 뉴욕의 시네필 감독으로서 '개인적인 것이 제일 창의적이다'는 그의 말을 그 누구보다 열렬하게 실천하고 있는 작가일지도 모른다. 이들의 영화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와 개인을 향한 새로운 지각의 시간과 영원하고도 단일한 이미지의 순간에 대해서는 아마 보르헤스의 문장이 가장 적절한 주석이 될 것이다.
(…) "모든 지점에서 알레프를 보았고, 알레프 안에서 지구와 또다시 지구 안에 있는 알레프와 알레프 안에 있는 지구를 보았으며, 내 얼굴과 내장을 보았고, 네 얼굴을 보았으며, 현기증을 느꼈고, 눈물을 흘렸다." (같은 책, p. 211)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