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어느 작품보다 영화적 조건을 의식하게 한다. 그간 그가 선보인 방대한 대화체에 관해 연극적이라거나 회화적이란 표현이 따라붙곤 했지만, 이 작품에선 어울리지 않는다. 또는 그걸 끊어내는 영화의 매체적 속성이 인상적으로 작동한다.

대표적으로 영화의 오프닝은 하늘을 수직으로 올려 찍은 긴긴 트래킹 쇼트로 구성된다. 해당 쇼트는 하늘의 희멀건 상태나 사방을 가로지른 나뭇가지의 종자가 서로 다름을 알아차리기에 관대한 정도로 오래 지속된다.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본 인물의 시점 쇼트라는 판단이 유력한 가운데, 이 완벽하게 하늘과 수직을 이룬 형태는 자연스럽기보단 '인간이 이토록 곧은 시선과 걸음을 유지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식의 물음을 유발하는 쪽이다. 여기에 트래킹 쇼트를 거칠게 중단하며 타이틀이 표기된 검은 화면이 거듭 끼어들 때면 이 같은 인물의 시점이 영화(카메라)의 개입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대개 감추기 마련인 영화적 특성을 오히려 의식하게끔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한 영화적 특성은 관객이 극 속에 매끄럽게 유입되고 밀착되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그러지 않도록하는 쪽이다. 엇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는 산속 마을의 삶, 소규모로 이뤄진 인물들의 관계가 보여주는 잔잔한 흐름을 부자연스럽게 툭 끊어내는 영화적 장치가 거듭 발견된다. 한마디로 연속적인 리듬에 제동을 건다. 예컨대 인물들은 그저 숲을 거닐거나 자연 풍광 안에서 눈에 띄지 않는 몸짓으로 무언가를 행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대화를 길게 이어가고 있어서 관객의 주의력을 과도하게 요구하지 않는 듯 보인다. 특히, 원경 쇼트 안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산의 평연함이나 화면을 은밀히 가로지르는 낙엽 한 장의 움직임 등을 그대로 담아낸 쇼트들은 보는 이에게 그 앞에서의 묵상의 정취를 제공한다고 인지되기 쉽다.

 

오히려 극 바깥을 의식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제대로 느껴야 할 것은 그러한 이미지가 제공하는 시간의 순수성이 아니라 그것의 현혹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극의 유동적 성질은 예기치 않게 침투한 이질적인 요건에 의해 재차 중단되고 성질이 바뀌며 우리의 시지각적 감각의 연속을 방해한다. 장시간 침묵하는 풍경 속에 주체 없는 굉음을 급속히 터트리는가 하면, 장엄하게 흐르는 음악을 거칠게 끊어내 그에 기인한 감정적 풍족함이 갈피를 잃는 순간이 적지 않게 발생한다. 자연 앞에서의 추상적인 감각의 영역뿐 아니라 작중 사건과 연관된 문제를 사고하는 데 있어서도 그러하다. 글램핑장 건설을 두고 상반된 이념을 드러내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지원금 수령을 위해 사업을 추진해야만 하는 직원들의 관계는 극이 후반부로 이를수록 얼핏 호의와 합리성에 근거해 정돈되는 모양을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끝끝내 그들의 관계가 단일한 줄기로 수렴되지 못함을 드러내는 구간을 발생시킨다.

다시 말해 영화가 제동을 걸 때 우리는 감각으로의 내맡김이든, 사고의 확장이든, 직전까지 화면 앞에서 수행한 무언가를 중단하며 그것을 재인식해야 한다. 일종의 각성을 요구받는다. 서로 다른 시공간,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 인물들의 쇼트가 태연하게 교차되고 뒤섞이지만, 그런 편집술로 강화되는 건 하나의 프레임에 동시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인물들이 반복해서 놓이는 상황 중 하나는 인적 드문 개울에서 물을 퍼담고 나르는 모습이다. 맑은 물을 서두르지 않고 옮겨 담는 몸짓이나 개울에서 자동차 트렁크로 이어지는 긴 동선에 담긴 평온은 (특히 타쿠미와 직원들이 나란히 방문했을 땐) 계산된 말의 무능력함마저 포용하는 듯한 힘을 가진다. 그러나 그 평온의 말미엔 반복해서 사슴을 사냥하는 총소리가 끼어들고 타쿠미는 하교하는 딸 하나를 데리러 가겠다던 약속을 너무나 늦게 기억해 낸다. 타쿠미와 직원들이 숲 곳곳을 거닐며 아무리 사슴과의 공존을 궁리해도 사냥꾼의 총성은 울리고 만다. 화합의 길을 모색하는 동안 하나는 길을 잃는다. 영화는 화면 속 대화와 그 분위기에 몰두하던 우리에게 모습을 단 한 번도 드러내지 않은 사냥꾼, 볼 수 없는 시공간 속에 위치한 존재를 의식하게 하며 외화면의 영역으로 주의력을 분산시킨다.

 

공존 불가한 것의 공존 가능성을 보았다면 영화-기계의 편집술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선 절단되고 틈입하는 각종 쇼트와 장치들의 이음매가 확연히 돌출되어 있다. 이 사실로부터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동시에 존재하기보다 그것이 환영임을 강화한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또 다른 인간, 순수와 야심 사이의 간극을 이어낼 것 같은 환영은 표현 그대로 환영에 불과하다. 그걸 넘어서는 실체가 있다면 죽음의 기운뿐이다. 그런데 두 직원이 그들의 사업이 자연과 마을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단 사실에 모종의 회의를 느끼고, 서로 다른 입장과 이념에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는 흐름으로부터 제기되는 긍정의 징조, 어떤 가능성은 어째서 죽음으로 기울고 마는 것일까. 심지어 빗나간 총은 새끼 사슴을 관통하고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하나가 죽음에 가까운 위치에 놓인다. 특정 상황의 겉에 위치하던 이들이 파괴와 훼손에 대한 일종의 책임성, 그 중심에 놓인 비극을 보려는 것일까. 특정 이념과 상식과 그 가치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것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관계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런데 정확히 말하자면, 가로막히는 건 삶이 아닌 죽음을 확증하는 과정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죽음으로 곧장 종결되지 않고 오히려 생사의 중간지점을 확보하며 멈춘다. 이 중간지점은 오히려 영화가 사실성과 현실성으로 구현할 수 없는 허구적 공간 개념이다. 홀로 귀가하다 실종된 하나가 발견되는 엔딩 장면은 작중 대립각을 이루던 간극이 모조리 끼어든 것 같다. 마치 시공간의 겹침과 시공간의 급격한 이동이 압축적으로 벌어지는 듯한 이 영화의 마지막은 자체로 의식의 축이 실종된 이미지다. 총에 맞은 새끼 사슴을 응시하던 하나의 모습은 현재의 타쿠미 눈앞에 펼쳐진 실재인가, 기척 없는 대상 대신 상연되는 지나간 사실에 관한 짐작인가. 수색에 함께 나선 직원과 그를 기습해 숨통을 끊어놓는 타쿠미 행위 사이 이상한 간극은 도통 흐름을 가지지 않는다. 이 장면이 보여준 시간적 순서는 여태껏 영화가 보여준 시간관과 달리 어딘지 믿음직하지 않다. 직원을 해하는 행위와 미동 없는 하나를 발견하는 것 중 무엇이 앞서는가. 하나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단 사실에 관여하는 것이 죽음인지, 영화와 관객 사이 물리적 거리감인지 그 판단은 끝없이 미루어진다.

 

영화의 물러섬, 관객의 더듬음

엔딩 장면은 인물들의 방대한 대화 속에 붙잡힌 언어들과 달리 날 이미지 그대로 구성된다. 이때껏 촘촘하게 주고받던 대화는 순식간에 무용해진다. 안개로 휘감긴 어두침침한 장면은 자연의 사실적인 형태라기보단 인위적으로 극화됨으로써 보는 이의 정신을 이중적으로 은유하는 장치이다. 불명확한 이미지들의 연속은 사유의 기능적 무능력함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활성화시킨다.

돌이키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엇비슷한 일상과 시공간, 그 장면 안에서 펼쳐지는 상황의 반복을 그리지만 이렇다 할 변화 없는 결론에 도달하곤 했다. 반복-습관은 내장된 무언가의 충격을 흡수하는 대신 사유를 아둔하게 만들어 표면에서만 진동한다. 그 무지각 안에서 자잘히 제동을 건 끝에 영화는 장면 통째로 긴긴 제동을 건다. 통상적으로 정신이 생명 활동의 일부에 속한다고 할 때, 지속가능성으로서의 생명은 죽음을 삶의 연속선상 안에 넣고 자연의 순환성으로 치환해 내는 것으로 개념화된다. 그러나 영화는 글램핑장 정화조 설치 문제를 둘러싸고 인물들이 강조한 물의 흐름, 자연의 순환성은 인간의 세상에 온전히 대입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말한다. 영화의 안개 이미지는 그 순환성 안에 속하지 못한, 혹은 뿌리내리지 않으려는 죽음의 양태를 통해 개념 바깥으로 이동한다. 안개 이미지는 자연과의 합일을 욕망하는 인간의 위선과 기만을 떨쳐내는 자연의 의지이다.

그런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극 앞에 허망하게 멈춰 서는 영화는 아니다. 앞의 자연물을 담은 쇼트들과의 마주침(encounter)이 주는 감각의 팽창을 중단한 영화는 엔딩의 날 이미지들로 재연(반복)을 넘어 보는 이의 사유를 통한 상호작용, 곧 재인(recognition)의 과정을 요구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끝을 마주하며 총성의 울림, 새끼 사슴의 부패된 사체, 하나를 따라붙던 타쿠미의 걸음 등 엔딩보다 앞서 등장한 과거의 파편들을 날 이미지를 토대로 기억해 내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엔딩의 사실 여부를 가르는 과정에는 영화가 앞서서 제공한 암시를 붙잡는 관객의 기억이 필요하다. 기억은 연속성이라는 생명의 본질을 공유하며 따라서 사멸을 극복하는 힘으로써 역으로 무엇도 쉬이 주지 않으려는 장면이 활성화되게 만든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나와 타쿠미가 숲속 나무 종자를 맞추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무언가를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을 은연중에 강조한 바 있다. 나무의 검은 껍질과 빨간 껍질의 차이를 구분하면서도 그것을 직접 비추기 대신 암기하는 하나의 모습만을 담던 영화는 서서히 그들 주위를 클로즈업 쇼트로 일일이 포착해 새긴다. 그 정점이 얼어붙은 호수 곳곳을 담은 쇼트들이다. 사슴의 발자국, 꿩의 깃털, 호수의 언 부분과 얼지 않은 부분, 사슴이 오간다는 텅 비워진 공간까지. 그리고 이 쇼트들은 타쿠미의 스케치로, 하나의 꿈으로, 일부분 왜곡을 거쳐 다시금 장면으로 재상연된다.

반면 타쿠미의 아내는 오로지 액자 속 존재로만 등장하며 우리에게 기억을 제공하지 않는다. 어떠한 설명이 없는 아내의 부재는 정직하게 부재의 형식으로 존재하며 잠재성의 다른 이름으로 개념화된다. 이와 달리 주민들은 마을의 미래를 논하며 자기 과거를 털어놓는다. 현재 자신의 처지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두 직원의 과거 이야기는 글램핑 건설 문제와 다소 동떨어지게끔 흘러가지만, 현재란 보존된 과거이자 전체라는 점에 기인해 그 괴리를 뚫는다. 이들은 서로 다른 듯 동일하게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는가?'하고 묻는 과거를 불현듯 마주하며 깊은 생각에 사로잡힌다. 기억은 단발적 마주침 아닌 사유의 자극제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는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는 틈에서 역류하는 과거의 운동을 살아있는 존재 표현으로서 삶과 매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지각적 기능이 중단된다는 것은 (이것이 영화이기 때문에 더욱이) 두려움을 안긴다. 인물 앞에 펼쳐진 기이한 사건은 관객에게 필연적으로 능력의 결여와 같은 두려움을 준다. 주체와 대상 사이 간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결국 안개 이미지는 직감적 경험을 통한 감각적 중단이 역설적으로 감각의 문을 여는 과정을 생겨나게 한다. 확신의 부족에서부터 다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영화 앞에서의 판단의 결여, 간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간격은 장면 안에 가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무엇, 주체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사각지대로 시선을 옮기게 조력한다. 눈앞에 펼쳐진 작중 상황의 자연스러움 안에서 감춰진 문제들, '균형'이라는 말이 덮은 세상의 실질적 불균형을 사유하게 한다.

일률적 논리가 주는 편리함을 남용하는 존재의 세속적 욕망과 무관심을 경계하는 것,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자연과 인간으로 대표되는 대극적 관계를 그리며, 끊임없이 연결점이 서로를 '빗나가는' 지점을 발생시킨 이유다. 극의 흐름과 예상된 결과가 인물들, 그리고 우리의 욕망과 빗맞는 틈에서 (미래의 모양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기보단)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러므로 엔딩의 착종된 의식의 축은 인간의 미래를 징후적으로 가늠하는 힘으로 운동한다. 불투명한 미래, 닫힌 장면 너머를 투사하는 관객의 시지각적 감각 운동, 새로운 인식 체계와 논리를 요청한다. 이로써 관객과 영화, 자연과 인간을 비롯한 욕망의 주체와 타자성의 자리가 교환된다. 타자의 영역 사이의 거리감을 관객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인식된 실재 너머 징후 속으로 가는 길을 연다. 단속적이면서도 점진하며 결국에는 한발 앞서는 방법을 보여주는 영화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