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아름답지만 안전하게 움직인다
[Critique] 아름답지만 안전하게 움직인다
  • 변해빈
  • 승인 2024.03.15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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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라이브즈>에서 발견되는 조건 없는 믿음"
ⓒ CJ ENM

<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한 전반적인 반응을 살피니 대체로 헐거운 내러티브의 문제에 대해 유의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입장인 것 같다. 그 까닭은 대략 다음 이유로 정리된다. 먼저, 영화의 물질적인 매혹(the cinema of attraction)을 일으키는 이미지가 존재하고, 그것이 다원적 감각을 자극하며 관객의 체화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개인적인 경험담)이다. 여기에는 화면을 구성하는 깊은 심도나 인물과의 거리감을 부지런히 조율하는 카메라의 진폭이 뉴욕의 풍경 안에서 떠도는 멜랑콜리한 정념을 고조시킨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더불어 이국적 배경 안에서 '인연'과 '전생' 같은 동양적인 사상이 접목되었을 때의 어떤 신비로움이 이주민이라는 주인공의 정체성과 그에 관한 정서를 표현하는 한 방식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추가로 끌려올 듯싶다. 가령 이전 생애를 이십 년 전의 모국에 '두고 온' 자신으로 정립하는 나영과 인연의 명암을 다양한 측면에서 떠올려 보게 한다는 것. 그리고 앞의 이유를 아우르는 시간과 존재의 관계, 그 신화까지.

그런데 위의 이유들이 내러티브적 허점을 묵과할 만큼 제 몫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서구권 관객들에게 낯선 동양사상이 세계적인 흥미를 끌었더라는 일례 자체가 되레 국내 관객에게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닌지, 영화 바깥의 셀린 송 감독의 자전적 요소(한국계 캐나다인)가 극 내부의 틈을 메워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다. 정작 <패스트 라이브즈>는 인연과 전생에 관한 '정의'가 마치 '이야기'인 것처럼 부풀려진 채 작동하는 쪽이어서 그와 연관한 여러 설화를 접해온, 그러니까 인연과 전생 스토리를 잘 아는 관객에게 좀더 집중된 느낌이다.

 

ⓒ CJ ENM

더 중요한 문제는 인연과 전생이라는 말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발음될수록, 이 말을 책임지는 단일한 장면이 없단 사실이다. 장면, 인물, 관계 여기저기 옮겨붙으며 타성적으로 보는 이의 감정을 활성화한다는 견해를 어떻게 떼어낼 수 있을까. 평평한 캐릭터들은 인연, 전생, 운명이라는 기호의 아우라 안에서 아름답지만 안전하게 움직인다.

이 맥락에서 <패스트 라이브즈>의 '말'(대사)의 문제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말이 많고 또 말을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하다. 시공간적 간격을 여러 차례 뛰어넘는, 그 경계에서 인물들은 상대 혹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지 못하거나 본심을 우회한 말로 관계 정립을 지연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이 가지는 역량은 말의 규격화된 역할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그 말이 서사적인 힘을 가지고, 상황을 진행 시켜 나가는 운동성이 아닌, 청자가 그 말과 부딪혔을 때의 등시적 감각에만 치중된 쪽이다. 오로지 이 영화, 특정 인물, 특정 상황 안에서만이 일회적이고 귀중한 가치를 발휘하는 말이 희박하다는 점도 그렇다. "너를 찾고 있었어", "잠깐 연락 끊자", "넌 왜 나를 찾았어?", "보고 싶어서"와 같은 말이, 아니 이 말들만 거듭 되풀이되며 아련하고 신비로운 말은 계속해서 길을 잃게 하기 위한 도구 역할만 수행한다. 말하자면, 마치 데이트 코스의 회전목마나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처럼 '왠지 이런 상황,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나온 말'.

 

ⓒ CJ ENM

그렇게 느껴진 이유는 12년에 이어, 다시 12년이라는 시간의 거대한 폭이 너무 납작하게 접혀있기 때문이다. 세 개의 토막이 그저 '12년 후'라는 자막에 의존해 줄지어져 있다는 느낌. 영겁의 부피나 무게보단 (제목이 말하듯) 이 영화의 시간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지나가 있는데, 그사이 지나감의 흔적 안에 인물들의 삶이 담겨 있지 않다. 그러니까 노라가 된 나영이 아서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사실(해성과의 불가능한 관계 척도 가리키는 것) 외에 극작가로서의 그녀의 삶, 열망과 욕망, 어떤 환멸과 외로움, 이런 것들은 아예 배제되어 있거나 간단한 대사로 정보를 훑어주고선 지나간다. 

무엇보다 두 번의 이민을 거치며 모국어를 구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캐릭터 설정에도 불구하고, 나영의 늘어지고 뭉개진 음(tone) 혹은 낱말 사이 조사의 생략이나 과도한 쓰임 등 지극히 현실적인 말투 변화에 대해 이어지는 관객들의 지적은 이 영화가 24년이라는 시간의 움직임, 간격을 전하는 데 실패했음을 반증한다. 해성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고 과거를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 없이 보편적인 설정 안에 안전하게 들어가 있다. 이를 대신해 말이 지연되거나 엇나가는 상황, 그 말의 행로를 보여주려 하는 이 영화는 발화-주체 사이에 뉴욕의 풍경 이미지를 계속 끼워 넣는다.

24년을 기다려 단 이틀의 여행을 떠나는 동안, 두 사람의 수많은 대화는 공간적 이미지가 자아내는 물질성에 압도되며 흩어진다. 인물들은 점처럼 작게 포착되며 풍경 안에 존재감 없이 섞인다(익스트림 롱 쇼트). 분리된 두 개의 프레임에서 하나의 프레임 속으로, 먼발치에서 아주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거리감으로 이동하는 동안 오히려 인물들의 미묘한 것들은 풍경 위에 흡착된다.

 

ⓒ CJ ENM

다성과 묵음이 가장 핵심적으로 다뤄지는 두 장면도 말해야 한다. 먼저, 해성이 두 사람에게 없는 과거를 상상계 안에서 끊임없이 나열하던 바 장면. 해성은 나영뿐 아니라 남편 아서와 함께 있고, 어느 순간 모국어의 차이로 대화에서 밀려난 아서가 외화면 어딘가에서 두 사람과 공존하고 있으리란 상황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당장 오가는 말의 내용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 수가 없다. 그런데 해성이 '만약 우리가 ~했다면'하는 가정법으로 말을 쏟아낸 끝에 급격히 다른 물살을 타며, "하지만 너는 떠나는 사람인 거야", "우린 인연이 아닌 거야"하고 봉합할 때, 인물의 삼라한 자아와 욕망의 치열한 충돌은 '좋은' 결말 아래에서 삭제된다.

오히려 바 장면의 다성은 뒷장면에서 해성과 나영 사이 발생하는 밀도 높은 침묵과 대치되며 인물의 긴 발언 이후에도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영원히 들을 수 없고 묻지 않을 말들이다. 그래서 어떠한 말을 하지도 묻지도 않는 두 사람의 마지막은 결국 이 영화가 다성과 묵음 사이의 강박적 저울질을 통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 남은 물음들이 관객 개인의 체화된 기억과 경험에 많은 것을 떠넘긴 가운데, 그 앞에서 우리는 모호하게 이런 결론을 그려보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직접 몸으로 부딪쳐서야 그들 사이엔 딱 떨어지는 단어가 없다는 사실, 구체화하지 못한 그런 관계가 그들의 총체라는 것, 그걸 알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것의 허무를 처리하기 위해 운명론의 비개연성에 의존하던 영화는 남음(나영)과 떠남(해성)의 감각을 어딘지 강박적으로 비틀어 안긴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 CJ ENM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감독
셀린 송
Celine Song

 

출연
유태오
Teo Yoo
그레타 리Greta Lee
존 마가로John Magaro

 

배급 CJ ENM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5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4.03.06.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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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열 2024-03-19 18:47:54
또 다른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