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의 메타 코멘터리] '멍'에 관하여
[이상용의 메타 코멘터리] '멍'에 관하여
  • 이상용
  • 승인 2024.03.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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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경험 그리고 영화의 인플레이션 시대"

신조어들이 늘어나는 것은 진기한 현상이 아니다. 정보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정보의 유통이 빨라질수록 언어와 사물을 구별하고, 소유하기 위한 말들이 제작된다. 그런데 최근 신조어의 공통된 특징은 줄임말을 바탕으로 압축의 형태나 기존의 언어들을 혼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신조어이기보다는 언어의 재활용에 가깝다.

이러한 언어를 두고 세대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질없다. 과거나 지금이나 새로운 세대는 언어 혹은 다른 무엇이든 차이를 강조하며 다름을 강조해 왔다. 중요한 것은 신조어의 속성이 동시대의 어떤 특징을 건드리는가 하는 점이다. 축약되고 압축되며, 세대를 가르는 '은어'일 뿐만 아니라 '밈'을 통해 '대량 유통'되는 흐름에는 시대의 표정이 있다.

 

ⓒ 영화 <싱글 인 서울>(2023)

오늘날 흔히 들을 수 있는 신조어 중의 하나가 '멍'이다. 불멍, 비멍, 물멍, 파멍(파도멍), 바멍(바람멍), 기멍(기차를 타고 내다보는 멍) 등. 카페에서 경험하는 커멍(커피멍), 카멍(카페멍) 그리고 책멍도 있다. 이 언어는 편리하다. 온갖 사물에 "멍"을 붙이면 언제든 멍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런데 이때 일어나는 멍은 무엇일까. 불멍은 불이 일으키는 집중의 작용일까? 아니면 다른 경험으로의 안내일까? 책멍을 보자. 중요한 것은 책이 아니다. 통상적으로 책을 통한 경험은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멍은 집중이기는 하지만 책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 집중하는 태도다. 책멍에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것이 여기에 있다. '책과 멍이 과연 가까이 놓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멍은 책을 통한 집중이 아니라 책을 이탈해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지향한다. 오히려 책은 읽지 않기에 멍의 도구가 된다. 오늘날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독서인구를 생각하면, 멍의 증가와 반비례하는 이 현상은 자연스럽다. 책은 읽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읽지 않기 위한 도구가 된다.

불멍이나 비멍도 마찬가지다. 불멍은 불을 앞에 둘 뿐 불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불에 손을 집어넣지도 않으며, 불로 물을 끓이거나 온기를 확보하지 않는다. 물도, 비도, 파도도, 바람도 마찬가지다. 멍은 사물의 사용가치에는 관심이 없다. 멍 앞에 놓인 사물은 멍으로 가기 위한 관조의 대상이며,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멍은 일어난다. 개인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멍도 출현할 수 있다.

생명체를 두고도 멍은 가능하다. 꽃멍이나 정원멍처럼 살아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대상일 때 물이나 불처럼 쉽게 관조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꽃을 바라볼 뿐이지 꽃을 연인에게 선물로 주거나 사용하지 않는다. 움직이는 생명도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강아지나 고양이도 멍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멍멍이거나 냐멍의 가능성은 생물을 관조할 때 일어난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 동물에 대한 것이 유독 많은 것은 이를 보며 귀여워하거나 즐거워하는 경험을 얻기 위해서다. 유튜브의 고양이에게 직접 먹이를 주지 않으며, 인스타의 멍멍이의 꼬리를 쓰다듬지도 않는다. 어떤 표정, 어떤 몸짓을 바라볼 뿐이다.

멍의 신조어, 멍의 유행은 오늘날 이미지가 범람하는 매체와 테크놀로지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이미지는 바라봄의 대상이며, 그것에 탐닉할 뿐이다. 이러한 비접촉의 교환은 열광의 수준을 넘어 아이돌 문화와 소비문화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어쩌면 연인 간 사랑도 비슷한 것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연인을 바라보기 보다는 연인의 인스타를 더 많이 관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상대를 향한 가장 완전한 사랑의 형태를 "죽은 이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했을 때, 그의 통찰은 다가올 세기를 예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완전한 사랑은 완전한 관조의 대상이 될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 여기에 덧붙여 이미지의 어원인 이마고(imago)가 "밀랍으로 만든 죽은 이의 초상이나 죽은 이의 가면"과 관련을 맺는 '죽음'을 가리키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멍의 언어적 기원은 무엇일까. 국립국어원 2022년 4월 9일 자 게시판에는 이와 관련한 질문이 올라와 있다. "'멍때리기', '멍 때리다' 할 때, 멍의 어원과 뜻이 있나요? 어디서 멍이라는 단어가 유래되었는지 알고 싶어요! 그리고 멍 뒤에 왜 '때리다'라는 말이 붙나요?" 게시판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로 '멍'과 '때리다'가 결합한 '멍때리다'가 쓰입니다. 그런데 '멍'이 '멍하다(뜻: 정신이 나간 것처럼 자극에 대한 반응이 없다.)'의 어근이라는 정보 외에 다른 어원 정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문의하셨는데 정보를 충분히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명사형 단어를 이루는 멍은 정작 명사 '멍'과는 상관이 없다. 멍하다는 상태를 표현한 형용사의 어근일 뿐이다. 그럼에도 어근 멍과 유사한 계열의 말이 있기는 하다. 이러한 말을 찾아 소개하려다가 멈춘다. 말의 유사성이 멍의 어떤 본질을 품을 수는 있겠지만 말의 재활용은 현재의 맥락에서 재탄생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언어의 뿌리를 파악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재활용과 재연결을 만들어 내는 '고리'(사이, 흔적)를 읽는 것이 더 흥미롭다.

어근 멍이 보여주는 것은 '정신'과 관련된다. 멍하다는 정신이 일반적이거나 정상적이지 않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신조어의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가 형용사의 어근으로 쓰이던 것이 명사의 어미로 재활용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미로 쓰이는 멍인 불멍, 물멍, 비멍의 경우에도 정신을 포함하기는 마찬가지다. 명사에 멍이 붙는 순간 정신을 놓는 작용을 보여준다. 불멍은 불을 통한 이완이고, 물멍은 물을 통한 휴식이며, 비멍은 비를 통한 이탈감이다.

이러한 멍의 유행은 현대사회가 수많은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 이뤄져 있음을 대변한다. 이러한 스트레스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지만, 멍의 유행은 그 자체로 현대인의 일상 심리를 대변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일터에서건, 학교에서건, 병원에서건, 심지어 휴양지에서도 우리는 멍을 필요로 하고(어디에서건), 멍이 붙을 가능성은 널려 있다(어느 말에나). 멍은 어느새 전지적 시점으로 변모해 간다. 

 

ⓒ 영화 <싱글 인 서울>(2023)

멍의 역설

그런데 멍은 자체발광을 하지는 못한다. 아무 곳에서나 어느 순간이든 멍때리기를 하면 그만일 텐데, 항상 무엇인가를 동반한다. 불이 있어야 하고, 물이 있어야 하며, 비와 파도가 있어야 하고, 최소한 음악이라도 있어야 한다. 이처럼 멍은 의존적이다. 멍이라는 말 자체는 이탈을 향해 있는데, 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멍이 자유롭게 창조되는 말이 아니라 어딘가에 달라붙어 작용하는 행위임을 대변한다. 신조어 멍은 기존의 공동체나 도시부터의 완전한 이탈이 아니라 일시적 이탈이며, 일회적인 구별이다. 일시적 휴식, 일시적 이탈, 일시적 이완이야말로 멍의 유행이 대규모로 확산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무엇보다 일시적이거나 일회적이기에 멍을 누리고 유포하는 것에 대한 책임은 한없이 가벼워진다.

이러한 멍을 둘러싼 언어의 양상은 다채로운 양상을 띤다. 그 중에 하나가 대체 가능한 언어의 수입이다.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욜로(YOLO, You Only Live)를 필두로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이 중요한 라이프스타일의 언어 혹은 트렌드가 되고, 퇴근 후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또는 혼자서 보내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의미하는 북유럽(노르웨이, 덴마크)어인 휘게(Hygge)가 쓰이기 시작한다. 말들의 공통적 뉘앙스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휴식, 쉼, 안식, 평화, 휴양, 태만, 게으름, 눈감음 등이 욜로, 워라벨, 휘게와 같은 수입어들을 통해 보다 더  '휴식'을 강조한다. 이 말은 모두 한글이 아니다. 이것은 쉼과 휴식이 일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언어의 전략이다.

한글은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생산성과 결부되기 쉽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는 휴식과는 거리가 먼 사회였고, 그 속에서 자라난 한국어에는 노동을 찬양하는 이데올로기가 배어 있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한글로 아무리 휴식을 강조하여도, 뭔가 속이 시원하지 않다. 외국어는 한국 사회와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타자성으로 인해 다른 것을 꿈꾸게 한다. 유행하는 말들인 욜로, 휘게가 영어가 아니라는 사실에서도 이 점은 강조된다. 기왕에 외국어라면 영어가 아니라 보다 외부적인 것일 필요가 있다. 이들을 언어를 통해 단순한 바깥이 아니라 바깥의 바깥을 꿈꾼다. 

최근에 새롭게 주목받는 말은 크로아티아어인 프야카(Fjaka)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평온함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쁨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휴식을 가리키는 이방의 언어는 다른 세계를 지향하면서 그 속에서 보다 완전한 이탈의 이데올로기(적 언어)를 내세운다.

 

멍이 신조어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조어 또한 기존의 언어 사용법에서 이탈함으로써 구별 짓기가 좋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멍인가 하는 궁금증이 여전히 남는다. 완전한 신조어가 아니라 멍하다의 어근이 아니라 기존 명사에 빌붙어서 멍이 재활용되는 것에는 어떤 심리적 연유가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언어가 의존적인 것(그 자체로 발광하지 않는 것)에는 동기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또 다른 멍과 연결된다. 단독적으로 쓰이는 멍은 명사다. 사전에 등장하는 명사 '멍'의 첫 번째 뜻은 상처다. "심하게 맞거나 부딪쳐서 살갗 속에 퍼렇게 맺힌 피." 그런데 멍은 신체적일 뿐만 아니라 마음과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멍이 지다"는 팔이나 다리에 생긴 멍의 현상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쓰라린 고통의 흔적이 남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지난 시절 대중가요의 가사에 쓰인 "멍"은 신체적이기보다는 흔히 마음에 남은 상처를 가리켰다.

이 멍을 치유하거나 치료하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접촉은 필수적이다. 그리하여 이 멍은 다른 것을 불러들인다. 불멍을 할 때, 기존의 상황과 시간으로부터 이탈하는 경험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기존의 상황이나 시간으로부터 생긴 마음(멍)을 해소하는 가능성으로 나아간다. 명사 멍은 상처를 가리킬 뿐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결합된 말은 형용사의 작용이든, 명사의 뿌리이든 이 멍들을 어떻게든 해소해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앞세운다.

불멍은 불을 통해 멍을 해소하(태우)는 것이며, 물멍은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를 씻고자 하는 것이다. 물로, 불로, 비로, 또 다른 무엇으로 멍을 치유하기를 원한다. 멍은 다른 말(사물)과 붙어 시간의 중단이 되며, 시간으로부터 도피하고, 시간의 재창조를 위한 활동을 보여준다. 멍은 기존의 충실하거나 강제되는 시간과는 '다른 시간 정치'(시간정책, Zeitpolitik)를 향해있다. 이러한 시간정책을 위해 일상 속의 장소와 사물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그 장소와 사물은 멍을 가능케 하며, 멍울진 것을 해소해 준다. 도시에서 예술을 관람하고, 경험하고자 하는 노력의 핵심에는 멍을 때려는 목적과 추구가 있다.

 

ⓒ <아사코>(2018)

전시멍, 미술멍 그리고 영화멍

도심에서 멍을 때리기 가장 좋은 장소 중의 하나는 미술관(박물관)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과거보다 전시회가 증가하는 것도 멍의 유행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런데 그림멍, 명화멍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 장소들이 침묵과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바티칸 시티를 두 차례 방문했을 때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나 《피에타》만큼 인상적이었던 것은 경비원들이 속삭이듯 말하는 단어였다. "실렌시오"(SILENCIO)

통로마다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많은 이들이 모인만큼 소음은 컸다. 바티칸 성당은 그 자체로 거대한 미술관이자 예배당이다. 침묵은 필수적다. 경비원들은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치듯 속삭였다. "실렌시오."

그런데 이곳에서 경험하는 또 다른 침묵이 있다. 위를 올려다보아야 하는 《천지창조》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침묵하게 된다. 그것은 압도감 때문이다. 한국에 처음으로 마크 로스코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음에도 종종 침묵이 흘렀던 것은 로스코의 거대한 색면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림멍은 종종 수많은 정보를 차단하고 눈앞에 있는 작품과 온전한 대면의 열망을 품게 한다. 불이나 비에도 동일한 작용이 있다. 거대한 불길 앞에서 인간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는 그 자체로 혼돈의 경험이다. 이처럼 자연이나 거대한 작품은 기존의 시공간적 인식을 뒤덮고 압도한다. 이러한 미적 체험을 '숭고미'라고 부른다. 칸트나 리오타르가 언급하는 숭고미는 우리의 일상을 뒤덮을 만큼 거대한 인식의 밀물을 가리킨다. 음악에서의 어떤 소리의 조화나 부조화도 종종 숭고미를 일으킨다. 그것은 말로 형언되지 않은, 언어의 인식을 넘어서는 미적 경험이다. 숭고미 앞에서 언어는 침묵하거나 새로운 말들을 찾아 나서도록 이끈다. 멍이, 예술이 언어의 새로운 사태와 관련을 맺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아사코>(2018)

영화에서도 숭고미는 중요하게 다뤄진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2018)에서 바쿠와 헤어진 후 센다이 방파제에 올라가 거대한 파도를 보는 아사코의 클로즈업과 침묵은 숭고의 묘사다. 방파제 앞에서 목격하는 거대한 파도는 아사코의 삶과 동일본 대지진의 진행 상황(방파제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세워졌다) 그리고 자신의 연애와 선택이 가져온 변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몰아친다. 그녀는 비로소 변화를 깨닫는다. 이전 세계(바쿠)와 현재의 세계(료헤이)가 달라졌다고. 비록 바쿠와 료헤이는 동일하지만(1인 2역을 연기했다) 전혀 다른 (내면의) 사람이다. 아사코가 목격한 파도 또한 어제와 오늘의 파도인 동시에 달라진 물결이다. 관객들은 파도를 응시하는 아사코의 얼굴을 보며 그녀의 침묵에 동조한다.

영화는 이러한 경험을 종종 제공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1986)이나 <노스텔지어>(1983)에서 타오르는 불은 영화의 절정을 이룬다. <희생>의 타오르는 집과 죽음, <노스텔지어>의 두 개의 불길과 그 과정의 죽음. 그것은 진정한 희생이자 진정한 그리움(노스텔지어)이며, 세상은 알지 못하는 구원인 동시에 개인의 처절한 선택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와 타르코프스키의 유사성은 예술대학원 시절에 만든 영화와도 관련이 있다. 타르코프스키가 영화로 만든 바 있는 스타니슬라브 렘의 원작 『솔라리스』를 수업 과정에서 하마구치 류스케가 각색하였고, 여러 각색작 중 그의 작품이 선택되어 장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타르코프스키 영화와 달리하면서도 참조할 수밖에 없는 이 지점에서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하마구치 류스케는 동일본 대지진을 경험한다. 그것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위력의 현시였다.

류스케의 영화에는 거대한 순간들이 눈앞을 침범하는 순간들이 자주 등장한다. 본격적인 장편 데뷔작이라 불리는 <열정>(2008)에서 거대한 트럭이 주인공들을 가로막는 일출 시간의 장면, <우연과 상상>(2021)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메이코가 자신의 친구와 과거의 연인이 카페에서 만나는 장면을 본 후(이때 메이코의 환상 장면이 등장한다) 길을 가던 중 공사 중인 도쿄의 풍경을 볼 때 장면 등. 그것은 어제와 달라진(과거의 연인과 헤어진 후의) 세계의 현시이자 증언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불만큼이나 물이 중요한데(<스토커>(1979)나 <노스텔지어>의 끊임없는 물소리와 물의 장면들), 이러한 원소를 통해 근원을 향한 그리움(노스텔지어)과 회귀성을 드러낸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서 어떤 상처와 관련을 맺는다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해피아워>(2015)에서 네 명의 여인이 지닌 과거, <아사코>에서 바쿠가 사라진 후 아사코가 얻게된 기이한 집착과 향수 그리고 <드라이브 마이 카>(2021)에 등장하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주인공 카후쿠의 과거는 거대한 상처이자 흔적으로 영화 내내 인물의 주변을 맴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이후 영화 속 시간과 공간은 급격히 단절되는데, 그 시간 동안 아내의 죽음(이마고)이 일어났고 카후쿠는 체홉의 『바냐 아저씨』의 공연을 위해 히로시마를 찾는다(상처와 관련하여 히로시마라는 것은 너무나 의도적인 지역이기는 하다). 그렇게 영화의 2부가 시작된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을 차로 출퇴근을 돕는 운전기사 미사키를 만나 우정을 나눈다. 그녀 또한 어린 시절 집 혹은 어머니로부터 도망쳤고, 이 과거는 그녀의 삶에 원체험적으로 드리워져 있다. 

두 사람은 마지막 여정은 미사키가 살았던, 어머니가 죽은, 무너진 집을 다시 찾는 것이다. 거대한 과거와의 대면이다. 이후 영화의 장면은 곧바로 무대에서 바냐 아저씨를 연기하는 카후쿠의 모습이다. 원래 이 역을 맡았던 타카츠키가 폭력을 저지르고 체포되는 바람에 카후쿠에게는 선택이 주어진다. 자신이 연출자 겸 주연을 맡아야 할지, 아니면 연극을 접어야 할지를 두고 선택의 시간이 주어진다.

다카츠키는 아내와 외도를 한 인물이었다. 카후쿠가 잡혀간 배우를 대신하여 주인공을 연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지향점에는 분명 과거의 청산이라는 것이 작용한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어떤 모호함이 남는다. 이를 해소하려는 듯 무대에 올려진 체홉의 연극 장면에는 가장 유명한 대사가 등장한다.

어쩌겠어요

또 살아가는 수밖에요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그토록 과거에 붙들려 있는 카후쿠에게 무대의 연출과 연기는 삶의 국면을 전환하는 순간이자 다른 시간의 창조, 다른 삶의 가능성, 일시적인 해방감으로 밀려온다. 운전기사 미사키의 마지막도 마찬가지다. 연극을 본 후 또다시 시간이 흘러(그러니까 3부인 셈이다) 한국의 마트에서 장을 본다. 자신의 차에는 커다란 개가 있다. 그녀는 일본을 떠나 다른 국가,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카후쿠의 상처를 미사키의 상처와 마주하면서(상처와 상처가 충돌한다) 해방되고 살아가야 하는 지점들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영화다.

구원을 보여주거나 최소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는 상당수의 영화들은 그 자체로는 낭만적인 결론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안에 고통의 과정과 거대한 인식의 전환이 등장한 후 이러한 결말을 맞이한다면, 최소한의 진정성을 획득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우리가 이러한 영화들에 열광하지는 않더라도 오랫동안 머물게 되는 것은 새로운 시간정책(Zeitpolitik)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센다이 초입의 방파제 위에 올라선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돌아가는 것처럼, 그리고 료헤이의 집 앞에는 여전히 불어난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이를 보며 아사코가 저 강물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인식 전환의 순간은 우리의 삶이 저 밑바닥에서 욕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사코의 모습은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지극히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순도 높은 예술의 차원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멍이라는 신조어 또한 일상의 지저분함과 너저분함을 다른 것으로 전환하려는 언어의 노력이자 행위이다. 

 

ⓒ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집중과 산만

하지만 멍의 일시적 전환이나 영화의 기분 전환은 완전한 해방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신조어 멍이 완전히 이탈이 될 수 없는 사정은 완전한 도피나 전환도 할 수 없는 현실 인식을 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애를 쓰지만 도무지 실현되지 않는 가능성을 두고 우리는 "멍"이라는 말로 자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래전 유행한 '썸'과도 유사하다. 사귀는 것은 아닌, 하지만 관심은 있는 썸의 유행은 직접적인 연애로부터 책임지기 두려워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가리킨다. 멍 또한 쉬고 싶지만 쉬어지지 않는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경험을 끝까지 수행하지 않는 현대인의 기질을 보여준다. 멍은 실천이 아니라 언어의 홍수이고, 언어의 무의미화이며, 경험되지 않는 저 멀리 있는 멍(휴식, 명상, 탈주, 이탈)의 욕망이다. 벤야민의 논문 『경험과 빈곤』은 1차 세계대전 후 많은 이들이 전쟁을 증언하지만 이 경험이 공동체 내에 전달되거나 공유되지 않는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빈곤이 덮쳤다. 점성술, 크리스천 사이언스, 채식주의, 그노시스, 심령주의 등 사람들 위로 덮친, 갖가지 이념들이 이러한 빈곤의 이면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겪는 경험의 빈곤은 거대한 빈곤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 그 거대한 빈곤은 중세 걸인의 얼굴처럼 날카롭고 정확한 윤곽을 띠는 얼굴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양(문명)의 산물 전체는 바로 그 경험을 우리와 연결시키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의 빈곤은 사적인 경험뿐 아니라 인류의 경험 전체가 빈곤해졌음을, 일종의 새로운 야만성을 뜻한다."

1차 세계 대전으로부터 백년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사회를 채우고 있는 것은 경험의 빈곤을 넘어서 파기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빈곤의 수준을 넘어선 파기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제대로 멍을 때릴 줄 모른다.

더 이상 전달되지 않은 채 온갖 것이 넘쳐나는 언어와 문화의 인플레이션 사태는 마주하는 것, 맞닥뜨리는 것, 전환되는 것, 대면하는 것의 어려움을 증언하고 있다. 벤야민은 "전략적 경험이 진지 전쟁에 의해, 경제적 경험이 인플레이션에 의해 그리고 육체적 경험이 배고픔에 의해, 윤리적 경험이 권력자들에 의해 이처럼 철저하게 허위였음이 입증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멍의 유행은 이완과 휴식, 쉼과 전환의 계기가 사물과 언어의 단순한 결합에 의해 철저하게 허위였음을 입증하는 셈이다.

 

그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것은 영화의 빈곤(한국영화의 빈곤)이다. 코로나 시기를 통과하면서 영상의 인플레이션 속에 착시 효과기 증가했다. 마치 K-드라마가 전세계를 장악할 것 같았지만, 이 글을 쓰는 현재 시점에서  OTT 시장의 드라마 제작은 소강상태를 맞이하였고, 영화 제작은 말라버린 지 오래다. 소위 '창고 영화'라 불리는 영화들을 연내에 개봉하고 나면 일어나는 문제는, 다음에 개봉할 영화들이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한다. 마치 재고처리처럼 유통 기한이 지난 상품을 내놓느라 고심했을 뿐, 지속 가능한 유통의 방향들에 대해서는 이제야 서두를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나오는 드라마와 영화에는 거의 기대감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정치적 이슈나 영화의 오락성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다. 한 편의 영화, 하나의 시리즈가 '동시대의 어떤 경험에 주목하고 있는지', '그것은 전달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유행의 거품은 금방 꺼진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사유하는 영화의 아름다움이다. 그 속에서 사유하는 존재(인간)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고, 스스로가 그러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포장지만을 갈아 끼운 채 신선도를 내세우지만 대다수의 작품은, 사유에 있어 유통기한이 지난지 오래다.

그 가운데 외면받는 현실이 일어난다. 마케팅의 일환이자 개봉 전에 흥행성을 판단하고 재편집 등의 목적으로 시행하는 블라인드 시사회에 있어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20대 참여 관객을 모집하기가 요사이 어렵다는 것이다. 더 이상 극장에서의 영화 체험, 개봉 전 영화를 본다는 기대감과 즐거움은 한동안 한국 영화의 주요 관객층이라 불리었던 20대에게서 사라지고 있다. 이쯤 되면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빈곤의 시대가 아니라 경험이 차단되고 사라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최소한 어쩔 수 '있는' 삶의 형식, 영화의 형식, 영화의 문화적 가능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불멍에도, 영(화)멍에도 없다면 이 단절된 경험을 통해 우리는 무슨 사유를 축적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을 소비하고 소진하는 가운데 거대한 클라우드(구름)만을 형성하고 안주한다는 것에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디지털 구름은 우리의 새로운 경험 축적이 될 수 있을까.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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