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듄'의 이미지와 '드니 빌뇌브'에 대한 단상
[Critique] '듄'의 이미지와 '드니 빌뇌브'에 대한 단상
  • 이현동
  • 승인 2024.03.0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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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어 황무지가 되어 버린 영화"

<듄: 파트2>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근심이 깊어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간추리자면 이 영화는 오락성에 충성하는 영화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미지를 세공하는 기술이 견고하지 않을뿐더러 텅 빈 '황무지'와 같아 보였다.

극장의 측면에서 영화를 보고 있던 나는 힐끔힐끔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는데, 내 의심과는 무관하게 영화에 깊이 몰입하는 관객의 표정이 보였다. 심지어 아이맥스라는 광대한 스크린에 담긴 배경 위에 올려진 캐릭터와 시선이 접촉하는 순간마다 몇몇 관객은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특히, 극장을 진동하는 사운드와 활력의 이미지가 조합된 후반부, 거대한 모래 괴물이 적 진영을 침공하는 숏에서는 나 또한 최면에 걸린 것처럼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영화인 <열차의 도착>(1895)이 처음 상영했을 때도 이와 비슷한 반응 아니었을까. 마치 스크린을 뚫고 기차가 우리 앞으로 진격해 올 것만 같은 그러한 착각. 어쩌면 둘 다 범용한 구도일지언정 여전히 스크린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반동하는 지각은 우리의 의식과는 무관하게 감응한다.

 

ⓒ 영화 <듄: 파트2>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난 후, 지각을 스쳐 갔던 시간이 극히 무용하다고 느껴진 것은 드니 빌뇌브의 <듄> 시리즈가 절대 허용하지 않는 너무나도 강박적인 이미지가 반대로 빈곤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빈곤함'이란 사막의 척박함이 아니다. 아티스트를 매혹하는 사막의 이미지는 실제 경험을 대신하는 영화적 경험으로 군림하는 동시에 이용 가치가 뛰어난 산물이기도 하다.

이와 유사하게도 이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인 '티모시 샬라메는 교묘하게도 사막의 이미지와 결합하면서 미국 영화가 공공연히 복제한 또 하나의 스펙터클한 이미지로 보였다. 이를 분석한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는 원본보다 복사본, 현실보다는 환상, 가상과 본질보다 외양이 선호하는 경향성을 현대 지배 경제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사회적 현상인 스펙터클로써 규명한 바 있다. 애초에 할리우드로 운송된 영화는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렸고 막대한 자본을 기용한 미국 영화의 특성은 결국 규모에 관한 것이 되었다. '이전 영화보다 얼마나 크고 사실적으로 창작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를 고심하게 되는 것이다.

<듄: 파트2>는 이러한 우려를 가시화하는 작품으로 읽힌다. 이전 드니 빌뇌브 영화의 팬이거나 주의 깊게 보았던 관객이라면, 머리를 갸우뚱하게 할 정도로 매력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그 근원으로 관측되는 요소로 '사막'을 지적하고 싶다. 이는 그의 영화를 다루는 최초의 단초로 지시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사막이 어떻게 변용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드니 빌뇌브가 지속해서 증폭하고 싶은 어떤 영화적 욕망이 어디에서 출발하는 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 영화 <듄: 파트2>

'사막'이 강조하는 것

행간에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과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시리즈를 비교하며, 드니 빌뇌브의 <듄> 시리즈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상찬이 여기저기 나열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때, 비교군에 속한 시리즈로 짚어볼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마저도 다분히 미국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미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모종의 '선점 효과'가 이제는 진부하고 무력하다고 보는 쪽이다.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면서 원본이 있는 텍스트를 성공적으로 소환하는 영화가 종종 있지만, 대부분 물리적인 폭격, 즉 자본에 의해 구원받은 영화로 지지를 받게 되는 경우이다. 이러한 우회로를 확보한 감독은 이전의 영화로 돌아갈 수 없는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이를 비껴간 대표적인 감독이 있다면 '존 카사베츠' 정도일까.

드니 빌뇌브 또한 <듄>을 통해 이 대열에 합류하면서 기대감과 동시에 우려가 깃든 건, 그의 영화에서 전개하던 주제와 이미지가 미국식으로 교체되고 있다는 사실에서였다. 특히, <블레이드 러너 2049>(2017)에서 멈칫하던 순간이 <듄>에서 실재가 되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그가 우주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는 영화이자 욕망을 분출하는 영화다. 온갖 기술과 색감이 현란하게 동원되고, 그에 걸맞은 할리우드를 상징하는 배우의 기용과 다양한 인종을 전시하면서 얻으려는 욕망은 다분히 미국적으로 보인다. 또 모순적으로 드니 빌뇌브 본인이 이 영화에서 가동하고 있는 CG를 언급하면서 이것은 도전이지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이중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이후 막대한 자본이 투입된 <듄> 시리즈는 역시 의문을 남긴다.

우선, 나는 그의 초기작이 어떠했는지가 궁금해 첫 작품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현재 스트리밍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인 <그을린 사랑>(2010)보다 훨씬 이전 작품인 첫 장편 <지구에서의 8월 32일>(1998)에서 흥미로운 이미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얀 사막의 이미지였다. 사막이 갖고 있는 불균질한 형상을 평평하게 만드는 이 장면에서 캐릭터 또한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수평으로 존재함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는 <듄>의 폴(티모시 샬라메)과 챠니(젠데이아)의 거리를 대비하는 장면. 둘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서로의 몸을 붙인 채로 좁힌 채로 있는 이미지다.

 

ⓒ 영화 <지구에서의 8월 32일>

<지구에서의 8월 32일>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우연히 교통사고를 당한 여자 시몬은 삶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직업인 모델을 그만둔다. 전 남친 필립을 찾아가 아이를 낳자고 말하면서 사막에서 한 가운데서 관계를 맺자는 조건을 두면서 시작되는 이 황당한 영화는 남녀 사이의 애틋한 로맨스도 없고, 그렇다고 특별한 관계를 조성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정서적이며 물리적 공간에 기생하는 감독의 의도를 추적할 수밖에 없다. 순백의 사막은 캐릭터 간 투명한 관계를 조명하면서도 감독이 갖고 있는 영화적 신호, 어쩌면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흥미로운 담론을 유발하는 장소이다.

드니 빌뇌브가 최고로 꼽은 작품 중에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라는 점을 염두 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두 남녀가 숙박하는 호텔 콘셉트가 우주선이라는 것과 달의 착륙을 연상하게 하는 하얀 사막은 큐브릭을 향한 존경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미지가 갖고 있는 힘을 믿고 있다는 증거로도 대두된다. 더욱이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우발적이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장면은 계속해서 감상자의 불화를 촉구하지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상기해 보면 이 또한 의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반면에 <듄>의 사막은 어떠한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막의 정서는 그 자체로 미국적이며 배우 캐스팅도 그렇다. 미국에서 가장 핫한 티모시 샬라메의 외형과 고고한 매력을 분출하는 사막의 외형은 드니 빌뇌브의 초기에 비해 지독하게 과시적이다. 두 남녀를 묘사하는 거리의 간극, 서사와 이미지를 조합하는 독특함도 이제는 자본이란 토대 위에 너무도 희미해져 버렸다.

<컨택트>(2016)의 우주는 더는 드니 빌뇌브의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다. 해독의 여지를 건네주지 않는 불필요한 친절이 만들어 낸 그의 우주는 더 이상 외화면 밖으로 진출하지 못한다. 그 세계는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머무는 갇힌 세계로 잔재하는 것이다. <듄>을 연호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민감한 촉수를 가진 이가 가진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막에 갇힌 그리고 인물의 외형에 갇힌 이를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여기서 나는 의혹을 가지게 된다. 드니 빌뇌브가 이번에 '이미지'에 관한 발언에 대해서 말이다.

 

ⓒ 영화 <듄: 파트2>

드니 빌뇌브의 이미지에 대한 의혹

<듄: 파트2>를 비평하기 위해 소비되는 방식은 결국 줄거리를 간추려 보기 좋은 문장으로 설명하거나 영화적 경험을 온전히 구현하기 위해 이미지가 어떻게 구성되고 조합되는 지를 규명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더 나아가서는 원작과의 차이를 통해 영화가 구축한 독자적 세계를 긍정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평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의혹에서 시작된 이 글이 발화하는 핵심은,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그의 이미지에 관한 발언에서 촉발된 것이라는 점을 마지막으로 염두하고 싶다.

드니 빌뇌브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난 영화 속 대화를 싫어한다. 대화는 연극과 TV를 위한 것이다. 난 좋은 대사 때문이 아니라 강렬한 이미지로 영화를 기억한다. 대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순수한 이미지와 사운드, 그것이 영화의 힘이지만 요즘 영화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는 TV에 의해 타락했다."

과연 드니 빌뇌브가 언급한 '이미지'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강렬한 이미지를 무기로 장착한 듄의 이미지는 무엇으로부터 조직되는가. 그건 곤고하게도 자본을 모델로 하는 것은 아닌가.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여 로케이션과 배우를 섭외하면서까지 얻는 영화적 체험이란 아이맥스로 촬영한 사막의 압도적인 풍경인가. 클로즈업을 활용하여 배우의 이미지를 강조하며 얻는 듄2의 아름다움이란 감독이 말한 강렬한 이미지에 온전히 부합하는가.

그렇다고 무성영화 시스템에 대한 옹호일 리도 없고, 더욱이 텍스트마저 이미지로 환원하는 고다르와 같은 예술가에 대한 존경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위 발언은 수없이 유출되는 물음을 통과하지 못하고 마치 이번 영화처럼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언행처럼 들린다. 그의 발언은 이미지가 텍스트로도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그가 영화에서 수행해 왔던 무심해 보이는 대화를 통해 얻는 효과들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소히 듄친자들은 <듄: 파트2>를 보았다는 사실을 훈장처럼 새기며 감탄을 공유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한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강렬한 이미지로 둔갑한 영화가 가지는 한계를 자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겐 그가 이미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이번 그의 초기작을 보며 느낀 단상은 그의 욕망의 근원지가 무엇인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첫 번째 장편 <지구에서의 8월 32일>에서 보여주었던 하얀 사막을 애정한다. 이 사막은 어떠한 색으로도 채색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공백이 소멸된 사막을 대체하는 이미지들을 본다. 활공하는 우주선, 석양 아래에서의 일대일 격투 장면, 거대한 모래 괴물, 영화의 절정을 호소하는 전쟁 장면들. 나는 묻고 싶다. 드니 빌뇌브는 과연 스탠리 큐브릭이 되고 싶었던 걸까. 조지 루카스가 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되고 싶은 걸까.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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