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에게>는 걸어가는 진아로 시작한다. 이내 목적지에 도착한 진아는 군중들 앞에서 시를 읽는다. 씬이 바뀌면 진아는 침대 위에 누워있다. 그리고 그사이에 어떠한 새로운 대사나 인물이 등장하지도, 카메라가 보고 있는 대상이나 그를 감싸고 있는 시공간이 변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카메라는 누워있는 진아를 가까이서 한번, 조금 멀리 떨어져서 한번 보여준다. 두 번의 점프. 시를 읽고 있는 씬에서 침대 위에 몸을 누인 씬으로의 점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숏에서 멀리서 힐끗 눈 흘겨보는 듯한 숏으로의 점프. 우리는 <한강에게>에서 이와 유사한 기이한 점프 내지는 충돌의 순간을 반복해서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점프를 작동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또는 이 점프가 작동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한강에게>는 선형적 이미지들이 만드는 시간의 흐름을 멈춰 세워야 한다는 듯이 연속상에서 돌출된 이미지를 끼워 넣고, 그 시간을 복기해야만 한다는 듯이 이미지를 반복시킨다. 이것은 이 영화의 주제와 맞물려 죽음과 애도의 시간을 경험하게 하려는 자의식적인 일종의 제스처처럼 보인다. 죽음은 시간을 멈춰 세우고, 애도는 시간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첫 번째 점프 사이를 잇는 것은 '잠'이다. 영화에서 진아는 종종 침대 위에 누워있다. 어느 때는 깨어 있고, 어느 때는 잠들어 있다. 아니, 영화는 고집스럽게도 누워있는 진아에게로 자꾸만 돌아오고야 만다. 중요한 것은 그 이미지가 '잠에서 깨고 있다' 혹은 '잠에 들고 있다'라는 진행형의 운동이 아니라, '깨어있다' 혹은 '잠들어있다'는 완료형의 상태임에 있다. 한마디로 <한강에게>에서 지속해서 등장하는 잠은 완료형의 정지된 숏이다. 반면 그 점프 앞에 붙는 이미지들은 운동하는 숏들이다. 진아는 304 낭독회에서 시를 읽으며 동시대 시인으로서 움직임을 보여주고, 그 뒤로는 길우의 사고 이전과 이후를 부단히 오가며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비선형적 시공간에서 유영한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던 영화가 다소 뜬금없는 순간에 누워있는 진아의 이미지, 즉 잠의 이미지로 점프할 때마다, 영화는 갑작스레 멈추는 것처럼 보인다.
<한강에게>가 이런 멈춤의 순간에 오고야 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꼭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그것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쇼트의 연결과 충돌이 만드는 표면적인 형상을 읽어냈을 때, 운동의 이미지 뒤에 붙는 잠의 이미지는 적지 않은 영화들이 꿈에서 깨는 순간을 묘사할 때와 유사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그런 감상이 충분할 정도로 잠의 이미지는 이전의 숏들이 꿈이었다고 말하는 듯이 갑작스레 침투한다. 그렇다면 <한강에게>는 결국 진아가 꾸는 꿈이라고 할 수 없을까. 그렇다면 잠의 이미지(깨어있는 이미지와 잠들어있는 이미지)는 진아가 꿈에서 깬 순간이자 꿈 밖에서 꿈을 꾸는 스스로를 응시하는 시선일 것이다. 그 꿈은 지금이라는 사후의 악몽일 수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전의 기억일 수도 있다. 이렇게 진아는 자꾸만 기억으로서의 꿈을 돌아보고, 꿈이라고 믿고 싶은 현실을 돌아보고, 그 꿈을 꾸고 있는 자신을 돌아본다. 이 반복은 지금의 세계를 의심하고 질문하는 진아의 욕망이다.
두 숏의 충돌을 통해 변화하는 서사적 역학을 읽어냈을 때, 멈춤의 순간은 진아가 영화 내내 하고 있던 행동을 멈추게 만든다. 운동하는 숏에서 정지된 숏으로. 여기서 말하는 '운동'이란 숏 안에서 이루어지는 물리적 형상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세계 내 존재로서 그 상태로 내던져진 '타인과의 상호작용', 나아가 '세계와의 상호작용'이다.
잠의 이미지를 제외하고 진아는 그의 연인 길우, 친구 기윤, 가르치는 학생들, 시집의 담당 편집자 등, 항상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다. 진아가 홀로 숏 안에 놓일 때는 갑작스레 흔들린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든 이해하고자, 즉 세계와 상호작용하기 위해 시를 쓸 때, 자신의 시집에 들어갈 시를 고를 때, 그리고 엔딩 시퀀스뿐이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듯 진아가 말한다. "요즘에 가가운 사람들 만나는 게 너무 힘들어. 자꾸 괜찮냐고 물어보니까.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말해야 되잖아." 잠의 숏은 이 말에 대한 대답 또는 대안으로서의 숏이다. 그곳에 진아는 홀로 있다. 그 프레임에 놓인 존재가 진아뿐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 이미지에는 세계 또한 없다. 진아는 그저 세계와 단절한 채 꿈꾸고, 꿈꾸는 자신을 응시하는 인물로서만 그곳에 존재한다. 그곳은 '가까운 사람들과의 만남', 즉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멈추고 자기 자신과 독대하는 공간이다.
두 번째 점프는 그 형태를 조금씩 변형하며 세 번 등장한다. 첫째는 앞서 말한 누워있는 진아의 장면이다. 영화의 첫 시퀀스인 낭독회 장면 뒤에 붙는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방 안 침대 위에 누워있는 진아를 가까이에서 정면으로 한번, 문밖에서 문틀을 프레임 삼아 떨어져서 한번 보여준다. 누워있는 진아의 정면을 보았을 때, 그 숏은 우리에게 '진아'라는 인물이 '잠들었다'는 상황으로 다가온다. 눈앞에 놓인 정지한 진아의 몸은 그 존재와 존재의 행위(몸짓과 몸의 자세)를 동시에 대변한다. 잠의 행동은 멈춤이기 때문이다. 또는 이 멈춤은 죽음의 행동이다. 이 영화가 304 낭독회 장면으로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잠든 진아의 정면은, 그 정지된 몸의 자세와 형상은 잠의 행동이자 죽음의 행동을 숏 전면에 퍼뜨린다.
그리고 숏은 문밖에서 진아를 바라보는 숏으로 점프한다. 물리적으로는 대상과의 거리가 변했고 그것이 주는 효과적인 측면에서는 프레이밍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변했다. 카메라는 이미 진아의 존재와 행동을 보았기 때문에 숏을 전환하면서까지 대상을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 대상을 다시 본다는 것은 사실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또 다른 대상을 환기하려는 시도에 있다는 것을 놓쳐선 안 된다. 카메라가 방 밖에서 방안을 들여다보는 프레이밍의 수정 과정에서, 카메라는 그 안팎의 경계를 점프한다. 방안이 <한강에게>라는 꿈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자, 진아가 자기 자신과 독대하는 공간이었다면, 카메라는 그 꿈과 꿈의 자각에서 빠져나오듯이 방 밖으로 점프한다. 그렇기에 이 점프가 강조하는 것은 대상의 존재가 아니라 점프 그 자체, 그리고 그 점프로 인해 변화한 카메라의 물리적 위치, 정확하게는 그 위치의 변경으로 인해 만들어진 시선 그 자체다. 대상의 숏에서 시선의 숏으로.
이 시선은 누구의 것일까. 진아의 집 아래에서, 진아의 꿈을, 그리고 진아가 꿈꾸는 공간을 응시하는 유령. 이 유령은 집 안을 떠돌거나, 방 밖에서 그저 지켜보고만 있지 않는다. 유령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이 기이한 점프는 <한강에게>라는 꿈 안에 잠복해 있다가 이따금 불쑥 튀어나온다. 가령, 진아가 기윤과 단둘이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앞선 많은 장면이 그러했듯 둘의 대화를 분절 없이 원씬 원컷의 투 숏으로 담는다. 그러다 대화가 끊기는 어느 순간에서 갑작스레 화면이 암전되더니 진아의 단독 숏으로 컷 된다. 카메라의 앵글은 거의 변화가 없으며, 볼 수 있는 것은 이전 숏보다 조금 더 가까워진, 그리고 프레임 속에 홀로 존재하는 진아의 옆모습이다.
또는 진아와 길우, 기윤이 한강 근처에서 폭죽놀이를 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진아와 길우 두 사람을, 기윤이 프레임 인 한 뒤로는 세 사람을 원씬 원컷으로 담는다. 그러다 폭죽을 터뜨리는 세 사람의 행동에 대답하듯 폭죽이 터지는 밤하늘로 컷 되더니 카메라는 다시 세 사람에게로 돌아온다. 그러나 세 사람에게 다시 돌아온 숏은 폭죽이 터지는 밤하늘이라는 앞선 숏과 완벽하게 조응하지 않는다. 그사이에는 어떠한 시간의 공백 또는 생략이 있다. 이 숏 또한 카메라 앵글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세 사람과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을 뿐이다. 그리고 두 숏 모두 컷 전환과 함께 사운드가 자취를 감춘다.
카메라는 이 두 숏을 통해 대상의 이미지를 반복하고, 약간의 변형을 가했다. 이 불필요해 보이는 반복은 방안에서 방 밖으로의 점프와 같은 맥락으로 작동한다. 점프 이전의 숏이 존재를 위한 숏이었다면, 점프 이후의 숏은 존재를 보고 있는 시선을 상기시키는 숏이다. 그 시선은 진아의 방 밖에서 방안을 지켜보던 유령의 것이다. 그리고 유령의 숏은 길우의 것이다. 길우의 유령은 시간을 멈춰 세우고 반복하는 기이한 숏의 형태로 현현해 진아가 꾸는 현실의 악몽 곁을 맴돌고, 과거의 기억으로 환생한다. 살아남은 진아가 길우를 추억할 때, 잠들어버린 길우는 진아가 꾸는 꿈을 잠깐이나마 말(사운드)없이 바라본다. 밤하늘을 밝혔다가 금세 사그라드는 폭죽의 작은 불씨처럼.
<한강에게>는 움직이는 진아로 끝난다. 집에서 빨래를 개고, 출간된 자신의 시집에 서명하며, 그 아래에 길우의 이름을 적는다. 그리고 한강을 본 뒤에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시선의 대상이었던 진아는 이때 한강을 '보고'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창밖을 '봄'으로써 주체로서 세계에 시선을 던진다. 이 엔딩은 기억과 악몽이라는 꿈에서 깬 진아가 방 밖으로 나오는 삶의 운동이다. 자책하듯이 꿈꾸는 자신에게로 수렴하던 위축된 시선은 세계 밖을 향한 시선이자 미래를 살아가야 한다는 다짐으로 변한다. 여기서 진아에게 세계를 본다는 것, 즉 세계와 상호작용한다는 것은 곧 '산다'는 의미가 된다. 진아의 목소리로 진아의 시가 흘러나온다. 이 시는 말 없이 진아를 바라보던 길우의 유령을 향한 것임이 분명하다.
진아가 첫 번째 점프로 질문할 때, 길우는 두 번째 점프로 대답한다. 진아가 첫 번째 점프를 통해 존재를 증명할 때, 길우는 두 번째 점프를 통해 응시한다. <한강에게>가 긍정하는 것은 숏 안에 놓인 존재의 힘을 뛰어넘는 응시, 즉 카메라의 힘이다. '지금 이곳에 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는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라는 대답. 진아가 계속해서 시를 썼던 이유는,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이 유의미한 이유는 이 깨달음과 대답의 순간 때문이다. <한강에게>는 오로지 서로를 향한 응시가 합일하는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 애도하는 대상과 애도의 대상이 서로를 마주 보는 기적 같은 순간.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한강에게
To My River
감독
박근영
출연
강진아
강길우
한기윤
이영숙
최원용
배급 인디스토리
제작연도 2019
상영시간 89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19.04.04.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