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존 포드론' 필름적 현실을 무한히 열어젖히고
[Critique] '존 포드론' 필름적 현실을 무한히 열어젖히고
  • 김민세
  • 승인 2024.02.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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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의 사막에서 길을 잃지 않는 법"

무성영화 시절부터 100편을 넘나드는 작품을 남긴 '존 포드'(John Ford)의 영화 중 가장 손에 꼽는 순간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분명 <수색자>(1956)의 한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인디언에게 납치당한 조카딸을 찾기 위해 수년 동안 사막을 떠돌던 이든이 코만치족 행세를 하는 데비를 마주하고 그를 뒤쫓는 일련의 시퀀스 말이다. 여기서 이든은 인디언의 주둔지를 급습해 쓰러진 인디언의 머리 가죽을 벗기고, 데비를 발견하자마자 권총을 든 채로 그를 추격한다. 데비를 해할 것을 염려한 마틴은 상의를 탈의한 채로 말에 올라탄 이든에게 달려드는데, 이때 마틴을 뿌리치는 이든의 손에 들려있는 권총은 분노와 복수의 정서를 능가하는 충동을 선명하게 시각화한다. 데비를 죽일 기세로 추격하던 이든은 끝내 그를 양손에 번쩍 안아 들며 "Let`s go home, debbie."라고 나지막이 내뱉는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사로잡히는 것의 자유'라는 제목이 붙은 『존 포드론』의 네 번째 장의 한 부분에서 <수색자>의 이 장면이 지닌 숏의 역학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한다. 그것은 존 포드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던지는 것'의 액팅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하스미는 책의 전반에 걸쳐 그 '던지는 것' 내외의 형상을 정확히 직시한 채 존 포드 영화를 돌아볼 것을 요청한다. 더불어 하스미는 무성 시대의 서부극에서부터 반복된 숏의 연쇄를 복기하며, 존 포드의 영화에서 인물(또는 동물, 식물, 소품 따위)이 프레임 안에서 보이는 몸짓이 우리에게 어떤 감각으로 다가오는지 점검한다.

이러한 점검의 과정은 1장 '말 등', 2장 '수목', 3장 '그리고 인간'이라는 세 장에 걸쳐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며, 4장에서 펼쳐지는 <수색자>의 문제적 장면에 대한 논의는 이에 대한 변증법적 결과가 된다. 하스미는 이러한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우리가 보아야 하는 숏을 '필름적 현실'이라 명명하는데, 이에 따라 『존 포드론』은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존 포드에 둘러싸인 영화 외적인 사태를 모조리 추상화하고 오로지 '필름적 현실'에 따라 포드를 보는" 진귀한 체험이 될 것이다.

 

ⓒ 영화 <수색자>

무한히 열려있는 숏

『존 포드론』은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고전적인 서부극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존 포드에 대한 누명을 벗기는 데 서장을 할애한다. 이 장에서 하스미는 장 마리 스트로브가 포드의 열렬한 옹호자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사실상 노년의 저무는 감독으로 불리고 있던 시기에 프랑스 감독이 보인 이해할 수 없는 포드에 대한 관심은 포드를 뒤늦게나마 영화 작가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때 스트로브가 포드를 '가장 브레히트적인 작가'라고 수식한 것에서 시작해 <아파치 요새>(1948)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분석이 펼쳐진다.

하스미는 군국주의를 찬미한다고 오해받는 <아파치 요새>의 장면에서 그 숏 안에 놓인 필름적 현실을 정확히 직시한다. 그곳에 놓인 것은 인디언이 놓고 간 깃발과 헨리 폰다의 것이 아니고 존 웨인의 것이라 확신할 수도 없는 칼, 헨리 폰다의 초상이 있다. 헨리 폰다의 무모한 작전으로 인해 부하 병사들을 잃은 존 웨인이 그 아이러니한 사물들을 앞에 두고 그는 위대한 군인이었다고 고백하는 이 장면에는 군국주의의 찬미보다는 한 개인의 처절하고 아이러니한 엔딩이 있다는 것이 포드를 브레히트적인 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여기서 하스미는 "그처럼 용감하게 죽음을 선택한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존 웨인의 대사를 다시 한번 곱씹으며, 그의 말이 소환하는 하나의 숏, 적군의 둘러싸인 헨리 폰다가 권총을 꺼내 들고 최후를 맞는 존 웨인의 시점에서 표현된 숏을 언급한다. 존 웨인의 대사는 단순히 아이러니한 고백을 뛰어넘어 헨리 폰다의 최후의 인격적 존엄을 존중하고 긍정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인데, 이처럼 하스미는 여러 평론가와 감독들이 포드에 관해 이야기한 것들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질문하며 필름적 현실을 목도하길 시도한다. <아파치 요새>의 엔딩이 지닌 페이소스를 그 장면 안에서만 한정하지 않고 서사와 앞선 씬의 맥락을 불러와 분석했듯, 하스미가 말하는 필름적 현실은 단일한 숏이 아니라 씬과 시퀀스, 개별 작품을 넘나드는 무한히 열려 있는 숏이다.

 

ⓒ <켄터키 프라이드>(1925)

말, 수목, 그리고 인간

'말 등'이라는 제목의 1장에서는 존 포드의 영화 속에 수없이 등장하는 동물들의 형상에 집중한다. 하스미는 이 중에서 '말(馬)'에 대한 포드의 애정을 언급하면서 말의 형상이 포드의 숏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역설한다. 가령,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시간 남짓한 무성 시대의 초기작 <켄터키 프라이드>(1925)의 첫 장면은 "영화의 카메라라고 하는 것이, 말이라고 하는 이름의 네발 동물을 극히 자연스럽게 프레임 안에 담기 위해 발명된 장치에 다름없다고 하는 확신"을 느끼게 한다며 영화사를 뒤엎는 명제를 제시한다.

또한, <켄터키 프라이드>에서 주인공인 말 버지니아즈 퓨처가 옛 주인과 우연히 만나는 장면의 숏과 시선 교환을 기술하며 '말'이 포드의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존재의 기척'을 느끼게 하는 범용하지 않은 존재임을 주장한다. 이들은 하스미가 해당 장의 후반부에서 지적하듯 제어하기 힘든 동요를 일으키거나, 다리를 구부려 지면에 꿇어보고, 얕은 강을 물을 튀기며 뛰어나거나, 건물 내부로 뛰어 들어가고, 병사들과 나란히 걸음을 맞추어 완만한 운동을 보이는, 다섯 가지 표정을 지닌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숏의 세부이자 주인공으로서의 피사체와 다름없는 것이다.

'수목'이라는 제목의 2장에서는 말과 더불어 숏을 수놓고 있는 '굵은 나무줄기'의 서사적 기능에 관해 설명한다. 하스미는 <젊은 링컨>(1939)에서 헨리 폰다가 책을 읽다 말고 여성과 나란히 걷게 되는 장면과, <조용한 사나이>(1952)에서 존 웨인이 담배불을 붙이며 성냥을 집어던지려다 말고 모린 오하라를 처음으로 마주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굵은 나무줄기'의 형상을 살펴본다. 한마디로 프레임 한가운데 자리하거나 주변을 수놓고 있는 나무줄기 내지는 수목은 인물이 어떠한 액션을 야기하고 반복적으로 특정한 이야기를 기능하게 하는 특권적인 장소인 것이다. 그곳은 만남과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소이자, 걸음을 멈추기에 걸맞은 휴식의 장소이며, 때로는 죽음의 그림자가 맴도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제목의 3장에서는 포드의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갖고 있는 부자연스러운 몸짓에 주목한다. 앞서 『감독 오즈 야스지로』(2001, 한나래)에서 오즈의 작품을 언급할 때 자주 사용되는 '부정의 표현'을 들여다보았듯이, 하스미는 포드의 영화 속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부재'의 특성에 주목한다. <모호크의 북소리>의 긴 추격 시퀀스에 부재한 말(馬)과 화기, 목소리는 서스펜스 없는 부자연스러움을 야기하고, 이는 <태양을 밝게 빛난다>의 장례 행렬, <조용한 사나이>의 존 웨인과 모린 오하라의 걸음과 구경꾼들의 활보, <리오 그란데>와 <황금 리본을 한 여자>의 기병대들이 말에서 내려 한참을 걷는 완만한 몸짓에까지 확장된다. 이와 더불어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인물들과 종종 거울이 아닌 유사 거울에 시선을 두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하스미는 포드적 인물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 영화 <역마차>(1939)

권총을 집어던지고, 양손으로 끌어안기까지

수목을 거닐고, 침묵 속에서 하염없이 걷고, 비에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울을 무시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이러한 포드적 인물은 말(馬)과 수목으로 수 놓인 숏 안에서 어떤 몸짓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는 그 몸짓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1장, 2장, 3장에 걸친 논의들은 결국 이 하나의 질문을 좇기 위한 긴서막에 다름 없다.. '사로잡히는 것의 자유'라는 수식과 그 대상이 다소 어긋나게 조응하는 제목을 지닌 4장에서는 모뉴먼트 밸리라는 포드적 공간에서 시작해 존 웨인으로 대표되는 포드적 인물의 형상을 골똘히 응시한다. 포드에게 (유사-)모뉴먼트 밸리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며, 그곳에서는 <리오 그란데>(1950)와 <말 위의 두 사람>(1956), <황금 리본을 한 여자>(1949), <수색자>가 그러했듯, 항상 누군가 사로잡힌다. 그렇기에 수갑을 차고 있는 사로잡힌 자인 <역마차>(1939)의 존 웨인은 또 다른 사로잡힌 자들을 탈환한다.

이렇듯 존 포드의 영화에는 사로잡히는 것과 탈환하는 것의 양상이 서사적 역학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특히 <수색자>에서는 그 양상이 백인 가족을 학살한 코만치족과 그를 뒤쫓는 존 웨인이 마치 거울상을 이루듯이 그려진다. 사로잡히고 탈환하는 주체가 단순히 백인 남성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수색자>의 존 웨인은 인종차별의 경계를 허무는 가장 이상한 서부극의 안티히어로다. 또한 <리오 그란데>에는 "어머니에 대한 고독하고 정서적인 아들의 탈환 시도"와 "인디언에 의한 집단적, 결사적인 탈환 시도"가 마치 호흡을 맞추듯이 전조를 이뤄내는데, 포드의 위대함은 이 두 가지 탈환이 동일한 것이면서도 결국 그 다른 성격의 숏이 주는 이질의 감각을 망각하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이 하스미의 입장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중상을 입고 사로잡힌 자로서의 존 웨인이다. <코레히도르 전기>와 <리오 그란데>, <수색자>에서 존 웨인은 한 팔에 상처를 입어 붕대 내지는 삼각건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지속해서 보여주는데, 그것은 구출에 대한 대가로서 한쪽 손의 동작만이 금지된 필름적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중상은 징벌이고 그로 인한 몸짓은 손을 가슴께로 끌어안는 형상의 권유다. 하스미는 <역마차>의 수갑에 차인 손, <코레히도르 전기>의 붕대에 감긴 손, <세 명의 대부>(1948)에서 아기를 들어 올리는 손이 결국은 권총을 한 손에 치켜들다가도 양손으로 데비를 한껏 들어 올리다가 가슴팍으로 끌어안는 <수색자>의 손이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존 웨인에게서 보아야 하는 것은 취약한 히어로의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몸짓인 것이다. 이렇게 "자유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로잡힌 자"는 <역마차>의 매춘부처럼 엄청난 일을 해낸다.

 

ⓒ <아파치 요새>(1948)

포드에 관한 뒤늦은 반성

『존 포드론』은 '너무 알려진' 영화 작가이자 '너무 알려지지 않은' 영화 작가인 존 포드의 이중의 운명 사이에서 진동하며 그의 영화 속에서 필름적 현실을 발굴하고자 하는 길고 대담한 시도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한때 존 포드를 당시의 할리우드와 엮어 사유하면서 그가 서부극이라는 장르의 기반을 어떻게 다졌는지, 그리고 그 장르를 어떻게 비틀었는지 집중하던 때가 있었다. 포드의 작품을 필름적 현실로 받아들이기 이전에, '고전적인 서부극의 거장'으로 오해하고 합리화한 탓일 테다. 하스미가 이 책에서 멋진 문장으로 일침을 가하듯, "화면에 지금 보이고 있고 지금 들리는 것을 말하려 하지 않고 이야기의 논리적 귀결 쪽에서 지금 보고 있는 화면을 거꾸로 설명하"고 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마차>와 <수색자>, <아파치 요새>를 처음 봤을 적, 거침없는 말의 질주들은 가슴 떨리는 설렘과 함께 선명히 기억에 남아있다. 아마 『존 포드론』을 접하기 이전의 필자가 포드의 영화에서 필름적 현실을 마주한 때는 그때뿐일지도 모르겠다.

『존 포드론』의 하스미는 수많은 영화에서 자신의 이론에 부합하는 요소를 취사선택하여 성급하게 단정하는, 적지 않은 평론가와 연구자들이 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그는 '수목', '춤', '노래', 그리고 '던지는 것'으로 가득한 포드의 영화적 요소들과 그것이 작동하는 양상을 계속해서 나열하고, 예외를 점검하며 그것이 내밀히 지니고 있는 필름의 역학을 도출한다. 이 중 5장에서 펼쳐지는 '던지는 것(혹은 던지는 동작을 문득 중단하는 것)'에 대한 수많은 (<닥터 불>에서 시작해 <굽이 도는 증기선>, <토바코 로드>. <조용한 사나이> 등까지 이어지는) 세밀한 숏의 묘사는 마치 잊고 있던 숏들, 또는 이전에 보지도 못했던 숏들이 연쇄적으로 눈앞을 지나가는 것만 같은 기묘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포드의 영화에서 '던지는 것'은 "그때그때 변화하는 어쩔 수 없는 유혹의 기호"이며, 현대인들의 "동체시력의 회복"을 위한 "화면에 틀림없는 변화를 도입하는 시각적 운동"이다.

나아가 하스미의 주장은 남성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이라고 여겨지는 존 포드의 영화가 시대를 뛰어넘고 경계를 붕괴한다는 것까지 나아간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와 <리오 그란데>, <수색자>의 여성은 하얀 앞치마를 입고 기다리는데, 이때 하얀 앞치마는 포드의 영화 중에서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시각적 웅변의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끝내 이 하얀 앞치마는 식당 종업원 차림을 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의 제임스 스튜어트에서 반복된다. 가장 진실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지닌 하얀 앞치마를 질투하여 그를 위기에서 구하고도 처절한 고독에 빠지는 존 웨인을 보아내고야 마는 하스미의 눈은 그 누구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을 보는 눈'이라고 밖에 상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영화 괴인 하스미 시게히코의 치밀한 글을 성실하게 따라갔다고 해서 포드를 위대함을 진정으로 느꼈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른다. 정성일 평론가가 오즈의 위대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주의를 기울이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하스미의 글을 보고 하염없이 탄식하거나, 환희에 젖어 웃음을 참지 못하거나, 순간 머리가 멍해져 한동안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눈에 있는 편견의 장막 같은 것을 끝내 벗겨내고 필름에 맺혀있는 현실 그 자체를 마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지와 정념으로 둘러싸인 포드의 사막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은 그것뿐일 것이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존 포드론

On John Ford (John Ford Ron)
저자
하스미 시게히코
Hasumi Shigehiko
역자
박창학

 

출판사 이모션북스

쪽수 434쪽
발행일 2023년 12월 18일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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