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카메라의 저력 ['노 베어스' #2]
보여주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카메라의 저력 ['노 베어스' #2]
  • 변해빈
  • 승인 2024.01.23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단막, 혹은 귀신이 되기로 결심한 영화"

<노 베어스>의 카메라는 자파르 파니히 영화들이 그러했듯, 고정된 지면 위를 수평축으로 과감하게 회전한다(패닝). 극의 시작부, 카메라는 얼마간 거리의 행인들에게 이리저리 옮겨붙으며 좌우로의 무분별한 동선을 그린다. 그러한 서성임 끝에 촬영 중인 배우 자라(미나 코스라바니)를 중심 표적으로 삼는다. 하지만 그 뒤로도 카메라는 인물의 걸음을 따라 분주히 패닝하고, 급기야 출국 금지를 당해 원격으로 현장과 소통하는 작중 영화감독 자파르 파나히(본인)의 모니터 창을 뚫고 그가 머무는 국경 마을로 유려하게 넘나든다. 그러나 이 카메라의 움직임은 위와 아래를 향하고자 할 때 극도로 제한된다. 집주인의 아들 간바르는 파나히가 인터넷 신호를 잡기 위해 지붕 위로 오르려는 걸 저지하고, 카메라는 프레임 내부에 잡히지 않는 상대와 음성으로 소통하는 파나히의 모습을 덩그러니 담는다. <노 베어스>의 카메라는 지면에 붙박인 채, (틸트 또는 크레인 장비를 통해) 위아래로의 시야를 드넓게 확보하거나 이동하는 데 제약을 받는다(파나히가 국경 경계선에 도달해서 내려다본 도심 촬영지의 전경이 주는 각별함은 이를 빼놓고 말해질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시각적으로 제시되는 분주한 이동성에도 불구하고 감독, 배우가 출국 금지와 구금 등에 시달리며 실제로도 원격으로 촬영에 임한 것으로 알려진 영화 바깥(현실)의 상황과 맞물리며 보이지 않는 분계선을 의식하게 한다.

<노 베어스>의 패닝하는 카메라는 지속적인 움직임으로 한 축의 시간을 중단하거나 왜곡하지 않으며 다른 공간과의 동 시간대를 형성한다. 반면 (가로로 광범위한 공간성을 확보함에도) 인물이 동 시간대 물리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영역, 곧 외화면은 '무언가의 바깥', '그 너머'의 상태 그대로 존재하게 만든다. 여기서 감독은 외화면의 무언가를 영화적 형식을 빌려 어떻게든 관객에게 보여주려 하기보다, 불분명하고 알 수 없는 영역 자체로 남기며 도리어 볼 수 없는 영역을 확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무수한 시간의 축을 상기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파르 파나히 영화에 있어, 카메라의 작용은 특정 대상을 보는 행위 넘어, '도달'이라는 실천적인 맥락과 연관된 것이다. 볼 수 없는 영화의 영역은 사유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함을 드러내어 이때껏 은폐되고 박탈된 무언가를 환기시킨다. 눈앞의 존재 양식에 기울어진 인식으로 인해 차단되는 것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 차단되는 그 순간에 저항을 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관심. 그러므로 <노 베어스>에서 함께 주목해야 하는 건 볼 수 없는 영역, 즉 시각적 요소를 차단한 결과 오히려 활성화되는 요소들이다.

 

특정 대상을 보여줌으로써 증명의 요건으로 활용하는 데에 적합한 사물은 사진일 것이다. 하지만 <노 베어스>에는 사진이 없다. 영화 속 굵직한 사건 중 하나는 마을의 젊은 남녀가 함께 찍힌 사진을 둘러싼 논쟁에 관한 것이지만, 정작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로서 그것의 존재 여부 이전에, 사진을 촬영한 것으로 지목받는 파나히는 그러한 남녀가 존재했다는 사실부터 인지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그 피사체는 파나히가 렌즈를 좌, 우로 이동하며 사진을 찍는 동안, 뷰파인더(프레임)의 규격 외부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영화는 파나히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남녀를 찍은 적도, 그러한 사진도 존재하지 않음을 피력해야만 하는 과정을 따라가지만, 끝끝내 그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맹세를 요구받는다.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은 사실상 마을 사람들이 요청하는 바가 모종의 진실이라기보단, 관습의 이탈,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마을에 조성된 어떤 분위기의 유출을 제한하고 외면하기 급급한, 혹은 폐쇄성을 강화하기 위해 두려움을 야기하려는 쪽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노 베어스>는 사진이 없다는 사실 또한 '보여주지'는 않는다. 촬영된 사진을 화면 안에 빼곡히 나열하며, 그 틈에 그저 말로 생성된 사진 따위는 없음을 증명해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는다. 파나히가 사진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요량으로 메모리카드를 살피는 동안, 우리가 직접적으로 확인한 건 그의 말, 몇 가지 제스처에 불과하다. <노 베어스>가 겨냥하는 건, 단순히 관습의 폭력을 드러내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태어나자마자 약혼자가 정해지고 그것을 어길 경우 폭력으로 처리하는 식). 다시 말해, 관객이 실질적으론 본 것 자체보다, 폐쇄적인 관습, 그에 뒤따른 윤리적인 판단에 기반하여 관객인 우리 또한 없음을 눈으로 확인한 적 없는 상태에서,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묻는 고차원적 작업이다. 오로지 음성과 몸짓으로 상황을 운용하는 건 단지 사진이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아서, 혹은 마을 사람들을 문제적인 것으로 단정 짓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이다.

시각에 권능이 있다면, 시각 외에 동시적으로 제공되는 다른 감각적 반응에 대한 부주의를 일으킨다는 것, 나아가 이러한 인식 자체에 무감한 태도로 순응하게끔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를 지적하기 위해 파나히는 카메라라는 몸체를 영화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즉 카메라로 무언가를 '보고 있음'이라는 상태를 제공하면서도, 끊임없이 시각적인 판단이 미흡하도록 시각 이미지를 차단하는 장치를 개입시킨다. 가령 카메라 사용법에 서툰 간바르가 녹화한 영상물은 포커스가 엇나갔거나 과도하게 흔들려서 무언가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차원과 거리가 멀다. 또는 찍으려던 것이 아닌 게 찍혀 발생하는 난감한 소동도 있다. 마을 사람들은 파나히가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어느 정도는 그의 존재를 두려워한다. 이러한 대화가 녹음에 가깝게 녹화된다. 작중 감독 파나히의 영화를 촬영한 영상물 속 사운드가 (카메라로 찍을 대상으로서의) 배우로부터 발생하는 표정, 몸짓, 분위기라는, 시각과 끈끈하게 결부된 이미지를 초과하지 않는다면, 간바르의 영상물로 특징지어지는 건 시각이 무너지는 때, 오히려 생생하게 초점 맞춰지는 사운드와 그에 대한 귀 기울임이 무의식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의 음성과 말, 사물이 스치는 소리, 여과되지 않은 소음, 숨소리, 혹은 숨죽임이 안내하는 (특정 사상과 관습, 문화적인 것들의 영향을 비롯한) 주어진 환경과 단단히 결부된 제거되지 않은 소리들. 중요한 건 감독이 듣도록 의도하고 관객은 의도치 않게 들음으로써 외부로 밀려난 것들과 접촉한다.

 

파나히가 맹세를 하던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파나히는 사진이 존재하지 않다는 맹세를 기록하기 위해 스스로의 모습을 직접 촬영한다. 이쯤에서, 그간 파나히가 보여준 몸짓은 시종 카메라를 등지거나 각도를 비틀어 누군가 그를 보고 있거나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 쪽이었다. 그러므로 맹세의 순간 등장하는 뷰파인더 속 파나히의 얼굴은 거의 처음으로 정면을 정확하게 보여준 셈이다. 진실한 언어를 표출하는 데 있어 얼굴이 가진 힘은 더 이상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촬영은 (관습을 어긴 약혼녀에 의해) 곤경에 빠진 남자가 자기 처지를 호소하는 고성으로 중단된다. 이를 두고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문제, 혹은 극중 인물 파나히와 실제 감독 파나히가 처한 영화 찍기의 제약과 어려움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조하고픈 건 뷰파인더 속 얼굴, 곧 시각 이미지에게로 영화의 권능이 넘어갔을 때 이것이 실패된다는 점이다. 카메라는 그의 맹세를 포착할 수 없는 기계이고, 진실의 숭고함은 시각 이미지를 통해 증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는 인간 내면의 양심, 믿음, 신념을 비롯해 자기 자신 내부와 관련한 문제를 어떻게 화면 안에 담아낼 수 있는가.

반복하건대 <노 베어스>는 시각 이미지가 제기능의 상실했을 때, 비로소 살아나는 것이 소리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미지의 차단이 전제 조건이고, 그다음, 그렇게 해서 들리는 소리가 영화 안에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앞질러서 무언가에 도달하게끔 한다. 이미지를 차단하는 장치는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억압, 절망과 닮아있다. 외화면이 지시하는 것 외에도 인물이 불법적인 선택에 가까워지고, 다른 이들에 의해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처지를 강조하는 설정이 반복된다. 극한의 어둠과 적막감, 갑자기 덮쳐버린 죽음(구금과 고문에 시달렸던 과거를 끊을 수 없이 자살한 자라, 국경을 넘던 중 총살당한 두 남녀), 그 죽음에조차 다가갈 수 없는 카메라의 먼 거리감, 죽음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중단되는 영화 찍기의 명암. <노 베어스>는 이와 같은 장치를 극 안에 직접 펼쳐놓음으로써 억압의 형식을 저항의 형식으로 변주한다. 예컨대 작중 인물들(파나히뿐 아니라 극중극 속 배우들마저)은 다른 이의 눈에 '내'가 보이고 있단 사실을 의식하듯이 카메라를 서서히 등지고, 카메라 뒤편의 존재에게 말을 걸어 대상과 카메라 사이의 관계와 규칙 자체를 파괴한다. 앞의 상황들을 응시하는 카메라, 즉 관객의 시선에 '타자의 시선'이라는 위치를 덧씌우는 것이다. "주체가 어떠한 가능성도 거머쥘 수 없는 죽음의 상황으로부터 타자가 함께 존재하는 실존의 또 다른 특성을 끌어낼 수 있다(레비나스)." 파괴되고 문이 닫힌 영화의 표면적인 변화 앞에서 오히려 절망이 걷힐 조짐을 읽어내게 되는 건 파나히가 이 미래 없는 영화 속에 미래를 가진 관객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 정점이 마지막 순간 펼쳐진다. 카메라를 통해 시야 확보에 실패한 <노 베어스>의 저항은 아예 영화에 어둠을 입히는 것으로까지 심화된다. <노 베어스>의 엔딩에서 스크린이 완전히 암전된 뒤, 즉 영화의 끝을 알리는 표식이 등장한 이후에도 소리는 계속 생동한다. 다음은 그 소리에 대한 추측이 포함된 묘사다. 국경을 넘다 총살된 남녀의 주검을 뒤로하고 황급히 마을을 떠나던 파나히는 자동차를 멈춰 세운다. 문이 열리고 다시 닫힌다. 그 사이 파나히는 어디론가 이동했지만, 영화는 뒤따라가지 않는다. 이후 자동차가 내는 규칙적인 소음만이 지속된다. 파나히가 되돌아왔음을 알리는 소리는 여기 없다. 어쩌면 그는 타자(관객)의 시선이 검게 차단되어서야, 화면 바깥으로 스스로 걸어 나가서야 처음으로 두 남녀가 담긴 사진을 찍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노 베어스>의 마지막은 무언가 일어나야만 하는, 어떤 일이든 발생할 것이라는 강력한 직감을 준다. 반드시 발생해야만 하는 어떤 움직임이 기록된다. 여기서 파나히는 참상이라는 부당한 고통에 대해 타자로서 피할 수 없고 기꺼이 응하여 기록하는 모습을 차단막으로 '가린 채' 보여준다. 어둠은 밝음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둠 속 저항의 움직임을 응시한다. 그것이 절망과 참혹함을 주는 것일지라도 '의식'의 차원에서 반드시 보아야 하는 것을 향해 길을 비춘다. 무엇보다 엔딩의 검은 스크린은 그 너머의 것을 알아내려는 타자(관객)가 참여할 때만이 죽음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생동한다.

죽음은 중단의 다른 이름이고, 주체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앗아간다. 이러한 죽음을 넘어서서 존재가 행해야 하는 것에 관한 파나히의 지속적인 관심은 사실상 영화 바깥(현실)으로 뚫고 나가기 위해 자기 자신을 향한 물음을 강고히 하는 길이다. <노 베어스>의 검은 화면은 더 이상 그 길이 한 개인의 내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길 소망하는 것 같다. 이 마지막 어둠 위로 마을의 한 어른이 '어둠 속에서 소리로만 감지되는 존재'더러 '귀신'이라 언급한 대목이 떠오른다. 귀신은 세계 바깥의 존재이며, 바깥에서 안의 시간과 체계를 휘젓는다. 파나히의 영화는 어딘가에서 또 다른 어딘가로 추방되고 은폐되기 일쑤이지만 언제나 폭력, 그리고 폭력의 극단적 형태인 죽음을 앞지르기 위해 어디 한군데쯤 꺼져있는 영화이길 자처한다. 귀신처럼. 이와 같은 망령의 정서가 깃든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알며, 미래를 앞질러서 염려한다. 고정된 틀을 벗어난 시야를 스스로 개척한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겁을 주기 위해 만들어 낸 허구', "No Bears"의 의미로부터 근간한 <노 베어스>는 그러한 의미가 난폭한 방식으로 통용되는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 미신에 가까운 이야기, 허구적인 영화가 필요하다고 전한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 M&M 인터내셔널

노 베어스
NO BEARS
감독
자파르 파나히
Jafar Panahi

 

출연
나세르 하셰미
Naser Hashemi
미나 카바니Mina Kavani
바크티야르 판지이Bakhtiyar Panjeei
바히드 모바셰리Vahid Mobasheri

 

배급 M&M 인터내셔널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7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4.01.10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