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의 맹세 ['노 베어스' #1]
무형의 맹세 ['노 베어스' #1]
  • 이현동
  • 승인 2024.01.17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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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도 픽션도 논픽션도 아닌 내밀화된 부호 찾기"

'자파르 파나히'는 선전, 공모, 국가 안보의 위협을 혐의로 2010년부터 가택 연금의 상태로 지내왔다. 영화 제작과 해외여행이 금지된 상태였지만 그는 자신을 본격적으로 내세운 최초의 영화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2011)부터 <노 베어스>(2022)에 이르기까지 그의 세계관을 한층 더 교묘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미학을 전개할 수 있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먼저, 이란 감독하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고 파나히 또한 존경에 마다하지 않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떠올리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 영향을 받은, 파나히의 영화가 실제 요소를 차용하여 카메라가 가진 속임수를 부각하려는 부정의 리얼리즘은 곳곳마다 사회, 정치를 은유하는 매혹적인 장치로 둔갑한다. 유사하게도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캐릭터에 자신 모습을 투영하는 홍상수도 그와 같은 부류일지도 모르겠다. 문제의식은 다를지언정 그들이 구상하는 시간과 공간이 가진 형식은 구조적인 배열로 인해 다층적인 영화가 된다. 그중에서 <노 베어스>는 두 종류의 공간을 분리하며 다큐와 픽션이란 이중적 공간을 통해 영민한 방식으로 의미를 발산한다.

 

<노 베어스>의 첫 장면은 터키에서 난민 생활을 하던 연인 바흐티아르(바흐티아르 판지에이), 자라(미나 카바니)가 유럽으로 탈출하려 여권을 준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자라에게만 주어진 여권 비자를 쥐여주며 먼저 가라는 바흐티아르의 말을 거부하면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두 사이에 있는 경계에 대한 의문과 앞으로 진행될 파국에 관한 암시로 내부화된다. 둘이 헤어지고 난 뒤에 조감독 레자(레자 헤이다리)는 파나히의 신호에 따라 컷 신호를 내린다. 이 장면은 '픽션'이 원격으로 조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장면은 경계 안에서 활동해야 하는 그의 공간이 언제든 픽션에서 현실로 변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시한다. 파나히가 위치한 터키 국경 근처 작은 마을에서의 영화 작업은 마을 사람들의 환대와 동시에 의심을 사게 되는 사건을 겪으면서 위태로워진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사건이 '카메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파나히는 금지된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고잘(다리야 알레이)와 솔두즈(아미르 다바리)의 사진을 찍었다는 오해를 받게 된다. 초반 약혼식에서 성스럽게 진행되는 세족식은 그들의 순결한 서약과 희락이 넘치는 의식으로 초반에 묘사되는 것과는 다르게 결말 부분에서 그 현장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야곱(자바드 시야히)은 마을 원로들과 함께 자신과 약혼한 고잘(다리아 알레이)과 또 다른 관계를 맺고 있었던 솔두즈를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을 삭제해달라고 윽박지르기도 한다. 동네 아이들도 사진을 찍는 파나히를 보았다는 증거는 파나히의 반문을 점차 무력화한다. 우리는 둘을 찍은 사진의 어떠한 증거도 영화에서 발견할 수 없다. 피사체가 없고, 어떤 목적과 의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건이 포함하고 있는 이미지는 곧 영화 밖의 있는 파나히와 이란 당국과의 관계를 상징하고 있으며 영화 안에서의 오해는 그의 내부화된 심상을 밖으로 분출하기 위한 하나의 선언처럼 선포된다.

사진사와 감독의 카메라는 특정한 피사체를 연출하고 구획하기 위해 사용하지만, 이는 언제든 논파하려는 거대한 힘에 의해 압제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파나히와 레자가 밤 중에 국경을 넘어 마을의 야경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정확하게 국경을 인식하지 못하고 옆에 있는 레자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12년간의 여행 금지와 가택 연금을 당한 파나히의 과거와 현재를 연상하게 하는 이 장면은 그가 실제로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장면에서 유추할 수 있는 파나히의 상실은 픽션을 뚫고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다가오는 장면 중 하나다.

영화에서는 언제 터질지 모를 위기 상황 속에서도 일상적인 순간들이 교차된다. 집주인 간바르(바히드 모바세리)는 물신양면으로 파나히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며 어느 노모는 그를 위해 음식과 허브차, 몸의 피로를 채우는 보충제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이런 순진한 순간이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이 영화가 지닌 공포는 한 개인에게 전시하는 다수의 이미지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파나히의 소명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사진을 찍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한다. 이때 방에 가득 찬 주민들의 시선과 그 분위기를 주도하는 야곱은 "나의 명예가 우리의 명예"라는 말과 공동체의 이미지는 파나히를 마을 밖으로 나가게 하는 원인이 된다.

 

파나히의 상황을 강력하게 반영하는 장면 중 한 주민과의 대화에서 이뤄진다. 그 주민은 맹세하려 집에 찾아가는 파나히를 붙잡고 그 길에는 곰이 있기 때문에 안전하지 않고 자신과 차 한잔을 마시고 같이 가자고 말한다. 여기서 나누는 대화에서 주민은 '맹세하더라도 평화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허용된다고 말한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 나누었던 이 주민은 헤어지는 길에 곰은 겁을 주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이며 곰이 있다는 미신을 이겨낼 때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선지자와 같은 이 주민의 조언은 이란 사회의 팽배한 미신과 공허한 힘, 그리고 무질서한 형태를 묘사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는 비규범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피나히는 카메라로 세계를 찍겠다는 맹세를 파기하지 않는다.

자라와 바흐티아르가 이민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연출하는 도중에 자라는 자신들의 역할이 당신들을 위한 해피엔딩을 만들기 위해서라며 불평하고 파나히에겐 "하지만 이건 모두 가짜예요." 호소하며 프레임 밖을 뛰쳐나간다. 이후 자라가 물에 빠져 생명을 잃고 그 광경을 침울하게 지켜보던 바흐티아르를 향해 레자는 컷 신호를 내린다. 현실과 픽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이 '컷' 신호는 바흐티아르와 레자가 술집 앞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 정체가 드러낸다. 레자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며 그녀를 찾을 거라고 말하지만, 바흐티아르는 그녀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며 자신의 거짓말이 그녀를 파괴했다고 말한다. 결국 영화는 그들이 갖고 있었던 불행의 조건은 픽션이 현실이 될 수 없다는 한계에 대한 갈증으로부터 발견된다. 그러나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그 구분 선을 제거하려는 파나히의 픽션은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적 힘을 갖게 된다.

 

<노 베어스>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지그재그 3부작에 등장하는 길에 대한 묘사를 차용하는 느낌의 숏들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위치한다. <그리고 삶을 계속된다>(1992),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97)에서 지그재그로 구성된 비포장도로를 차로 이동하거나 걷는 장면이 부감 숏으로 연출되는 것을 떠올려보자. 이들이 겪는 재해, 파멸될 위기의 봉착한 여러 관계가 영화로 승화될 수 있다는 희망의 찬가는 파나히에게도 고스란히 전승되는 요소다. 마치 파나히는 이러한 비포장도로를 1인칭 시점으로 달리며 자신을 처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다.

자파르 파나히는 <노 베어스>를 찍은 후, 2022년 7월 6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구금되었다. 영화에서 솔두즈가 야곱에게 총을 맞아 생사의 갈림길에 처한 마지막 장면에서 차를 세워 그가 지나친 현장에 다시 달려갔을 것이라는 추측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한 아이가 숙제를 다른 공책에 했다는 이유로 선생님께 혼난 모습을 본 아마드가 그 친구를 찾아 여정을 떠나고 결국엔 공책을 준다는 이 이야기에서 우린 나아감에 대해 상기할 수 있다. 역경의 삶에서도 다시금 카메라를 들고 돌아가 모순을 추적하겠다는 그의 단호한 신념을 엿볼 수 있는 셈이다. 가택 연금 생활을 보여주는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에서 영화를 찍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노 베어스>에서도 영화를 찍겠다는 신념은 그가 한 주민으로 전해 들었던 화평을 위한 거짓 맹세로 여전히 유효하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 M&M 인터내셔널

노 베어스
NO BEARS
감독
자파르 파나히
Jafar Panahi

 

출연
나세르 하셰미
Naser Hashemi
미나 카바니Mina Kavani
바크티야르 판지이Bakhtiyar Panjeei
바히드 모바셰리Vahid Mobasheri

 

배급 M&M 인터내셔널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7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4.01.10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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