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BEST]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자문
[2023 BEST]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자문
  • 변해빈
  • 승인 2024.01.18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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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빈 영화평론가의 2023년 베스트 필름

아래의 영화들은 시간과 감정의 관계, 그 영향을 받아 선정한 열 편이다. 처음 보았을 때 생겨났던 감정적 무게가 머리와 마음, 두 가지에 고르게 분산된 현재, 혹은 어느 때, 다시 관람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것을 자문해 내는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고민했다. 물론 열 개의 리스트 안에 모두 포함하지는 못했다.

 

<애프터썬Aftersun> 샬롯 웰스Charlotte Wells | 2022

ⓒ 영화 <애프터썬>(2022)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인물, 혹은 영혼의) 몸부림을 불완전한 시선으로 담아내며 기억을 더듬는 (카메라의) 몸짓을 구현한다. 누군가의 등 뒤, 문틈, 짐작에 그칠 뿐인 것들을 피사체 삼으므로 실질적으로 파악되는 것은 실재보다 교묘하게 엇나가있지만, 그 미세한 파편을 넓게 펼쳐내는 일이야말로 (삶 안에서의) 영화의 일이고 감독의 재능이란 것을 새삼 깨닫는다.

 

<초콜릿 고마워Merci pour le chocolat>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 2000

ⓒ 영화 <초콜릿 고마워>(2000)

올해 리마스터링 개봉. 클로드 샤브롤 세계의 명맥을 잇는, 유전되고 옮겨붙는 불운에 관한 작품. '고상하고 품위 있는' 가족이 서서히 파멸 되어가는 과정을 정교하게 설계했다. 핏줄이 예언한 대로 '불가피'하게 하나의 집에 모여들지만, 인물들은 저마다 그 운명에 서서히 이유를 '붙인다'. 그들은 하나의 공간에 공존하면서 밀실 안에 갇힌 존재들이다. 서로의 파국적 미래를 내다보지만 좀처럼 거부하지 못하는데, 이 끌림의 종류를 말하자면 외로움의 지나친 달콤함. 무엇보다 극의 막판, 가족이란 이름으로 섞여 들지 못하던 외부 세계의 인물이 내부 세계를 산산조각 낸 뒤 자기 외로움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모습에서 느껴지는 왜소함이란. 언제나 그렇듯 감독이 무심하게 올려보낸 엔딩 크레딧과 어우러져 무엇도 수습되지 않은 상태는 영영 박제된다.

 

<사랑의 고고학Archaeology of love> 이완민LEE Wan-min | 2022

관계의 문제를 영화의 시간을 들여 일일이 쌓아 올리는 시도는 관객들이 느끼는 진입장벽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에치던 방>(2018)에 이어, 이완민은 그것의 뼈저린 공허함과 고독을 누구나, 손쉽게, 아무렇게나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전한다. (진부하게 표현할 따름이지만) 내가 나를 사랑으로 대하는 일, 내 본능을 꽉 붙잡고 세계와 살아간다는 것, 버텨내려는 의지 내지는 절실함, 끈덕진 갈망과 끝이 보이지 않는 방황. 그런 피로한 것들과 구태여 호흡해 내는 영화는 귀하다.

 

<카일리 블루스Kaili Blues> 비간Bi Gan | 2015

ⓒ 영화 <카일리 블루스>(2015)

현실에서 자기 심신을 정착시킬 곳을 잃은 존재가 비현실로의 도피에 실패하는 이야기. 현실을 탈각시키는 게 아닌 더 분명한 현실로 이행하는 통로로 향하는 이야기이다. 비간은 부식되지도 망각되지도 않지만 동시에 채워지지도 않는 시간, 기억, 무의식의 속셈을 간파한다. 기어이 그것과 어울리며 상실감과 외로움으로 비몽사몽, 어딘가에 정신을 내맡긴 삶을 그려낸다. 극이 진행됨에 따라 장면의 빈틈은 메워지기보다 앞의 장면들을 일일이 의심하게 만들고, 급기야 '나'의 의식 작용을 운용하는 주체성마저 소각시킨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 '살아있는 아픔'을 아는 건 시간 위의 모든 존재라고 하여 알 수는 없는 희소 질환이란 사실.

 

<쇼잉 업Showing Up>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 | 2022

ⓒ <쇼잉 업>(2022)

이 영화는 단출하고 조그마한 공간, 심심한 일상과 사물, 어떤 대상을 매만지는 손끝의 다양한 힘, 공기의 영향으로 채워져 있을 뿐이지만 그러한 극미한 것들이 일으키는 진동과 전율을 장면마다 발생시킨다. 이것이 가능한 건 예술을 통해 삶의 질감을 만드는 조용하고 비-권위적인 예술가의 자세가 깃들어 있기 때문. 자기 주변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막, 오로지 그것을 잘 붙잡는 데에 몰입하는 태도로부터 예술에 아름다움이라는 윤곽이 형성되고 세계가 창조됨을 전한다. 직관적으로 표현하자면, 만지고 싶은 풍경을 펼쳐놓은 영화. 이 영화가 제시하는 규칙을 깨고 그 질긴 스크린 막을 뚫어 저 너머 삶의 감촉을 느끼고 싶다.

 

<물안에서In Water> 홍상수Hong Sang-soo | 2021

ⓒ <물안애서>

삶은 대부분 미묘하고 막연하며, 그 가운데 이따금 “정신 차려!”(작중 대사)하고 떨어지는 출처 미상의 불호령 또는 계시를 기다리는 과정일까? 그러나 화면을 온통 뿌옇게 흩뜨린 이 영화를 '눈'으로 보며 이미지에서 제거된 것은 오히려 미묘한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막연함은 본성과 달리 더욱이 날을 세우고 다가왔다. (인물들은) 사람을 대하는 데에 미묘함이라는 게 줄어드는 대신 실체 없는 찬사와 고마움이 그 자리를 메워가(는 광경을 보여주)고, 하나(이미지)가 충족되지 못한 것의 대가로 다른 무언가(사운드)를 대안 삼는 게 가능할까, 혹은 애먼 삶에 있어 허비되는 것은 무엇인지, 묻고 싶게 만든다. 한편, 홍상수의 바다와 인물, 삶의 언저리와 죽음의 평원 간의 '어울림'은 계속해서 모종의 감흥을 주고, 계속해서 궁금해진다.

 

<절해고도A Lonely Island in the Distant Sea> 김미영KIM Mi young | 2021

ⓒ 영화 <절해고도>(2021)

고행이 줄 수 있는 미학 이전에 고행의 목적을 택한다. 자격지심, 자기부정, 자기연민 등과 기어이 충돌한다는, 권태로운 주제 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는 와중에, 어긋난 길을 삐뚤어진 걸음으로 가지는 않겠다는 투지가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또 부정하기 위해 순수(propre)하고 연약한 육신이 되기를 마다치 않는다. 그들은 모두 '~이라기보다는 ~가 되어가고 있'지만 저마다 무언가와 어울리는 사람에 근접해지기 위해 계속하거나, 중단하거나, 뒤돌아서는 삶의 선택지를 신중하고 묵묵히 찾아간다. 끝으로, 세속을 떠난 존재들을 통해 무수한 관계지어진 것들 사이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을 그리는 영화의 근력이 인상 깊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Fallen Leaves> | 아키 카우리스마키Aki Kaurismaki | 2023

ⓒ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

영문 모르고 연루되는 사건, 인간의 초라한 지점들, 어긋나거나 채워지지 않는 것, 그리고 무표정이라는 감흥의 영화. 이 세계에서 불행이 도드라지지 않는 건, 이 영화와 관객의 접합제에 측은함이라는 인간의 성정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주 다정하면서도 통제된, 애정에 넘쳐흐르면서도 예의 바른 이 처신”에 대해 “'신중함/부드러움(delicatesse)'이란 이름을 부여”하는 것, “연민의 '건전한' (개화된, 예술적인) 형태”(아가톤)가 있다. 그러한 시선으로부터 냉담하고 어두컴컴한 이 영화의 '구석'은 아직 닿지 못한 거기, 그곳으로 존재할지라도 누군가를 허용하는 자리, 곧 사랑으로 인식되며 번민한 삶의 요소와도 부드럽게 공존할 힘을 얻게 만든다.

 

<아메리칸 타운COMFORTLESS> 김진아Gina Kim | 2023

<아메리칸 타운>(2023) ⓒ Gina Kim

역사와 장소에 대한 정확한 이해, 영화가 형식(VR)으로 유도하는 바와 관객이 체험하고 경험한 것이 일치할 때 (전달이 아닌) '발생'하는 주제 의식, 영화를 통해 관객이 감정을 느끼되 이 영화를 말할 때 있어서 필요한 머뭇거림을 동시에 일으키게 만드는 진중한 거리감. 그리고 무엇보다 감독의 소명. 말이라는 언어의 형식 없이 말 이상의 것을 전하고, 영화의 욕망이 영화의 목적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플라워 킬링 문Killers of the Flower Moon>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 | 2023

ⓒ <플라워 킬링 문>(2023)

허허벌판에 역사를 입히고, 연대기는 이야기를 개척하며, 자의식이 모호한 인물(어니스트)에겐 내면적 사고를 점진적으로 채워 넣는 영화의 힘. 희망과 기적의 액체에서 살인과 욕망의 오물을 뒤집어쓰게 된 액체가 영토를 가로지르는 와중에, 서사의 망설임 없는 흐름과 부합한다. 살점과 감정과 죄의식 따위의 파편이 튀는 동안, 온갖 수난 앞에서 존재감을 죽이고 울던 여자(몰리)의 '자연사'에 담긴 의미에 정점을 찍는 릴리 글래드스톤의 기품있는 연기가 인상적이다.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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