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ABOUT] 한국영화 #5 : 해방된 관객과 자본을 수집하는 관객 사이에서
[TALK ABOUT] 한국영화 #5 : 해방된 관객과 자본을 수집하는 관객 사이에서
  • 이현동
  • 승인 2024.01.0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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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영화관에 간다."

이 글이 정확히는 한국 영화에 대한 산업론이 될지 고유의 미학적 가치를 두둔하거나 비평하는 텍스트가 될지는 알 수 없다. 특히나 한국 영화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보다 그 안에서 부유하고 있는 구조적 이야기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 또한 그런 경우가 있지만, 한편으론 점차 둔감하게 받아들여지는 '한국 영화 위기론'에 대한 자연스러운 수긍은 어떨 때는 좌표 없는 문구처럼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단순히 '한국'을 한정해서 이 위기론을 지엽적인 영역으로 끌고 온다면, 일찍이 산업화 과정을 경험했던 나라와 동일한 질문과 답변을 부과할 수밖에 없다. 먼저 이 질문은 '영화관'을 이용하는 관객하고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원론적으로 자본으로부터 영화제작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뤼미에르 협회에서 교육 서비스를 담당하는 모타르 마우아즈(Mokhtar Maouaz)는 한 인터뷰에서 현재 넷플릭스 등의 서비스로 인해 '영화의 위기'라는 말이 들려온다는 질문에 "영화는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고 응답했다. TV가 사람들에게 유포되었을 때나 다양한 동영상 사업자들의 등장이 영화관이 주는 경험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짚어볼 문제란 영화의 위기인가, 영화관의 위기인가. 우선 필자는 이 문제를 관객의 위기로 규정하고자 한다.

 

ⓒ 영화 <외계+인 2부>

새로운 기술적 조건의 등장은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낳는다는 발터 벤야민의 주장에 의한다면 디지털이라는 시각 효과의 등장에 길들여진 오늘날 관객은 영화에서 스펙터클(spectacle) 이외에 무엇도 발견하기 어렵다. 영국의 비평가 앤드류 달리(Andrew Darley)는 "스펙터클은 그 자체만을 위해 존재하며, 스펙터클을 구성하는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관객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고 자극함을 핵심 목표로 삼는다"고 말했다. 관객에게 있어 영화적 체험이란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는 어트렉션에 탑승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또한 관객은 어트랙션에서 강력하게 결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봉인된 자신을 해방하기보다 도파민의 노예로 굴종한다. 자크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에서 관객은 자신이 보고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긍정할 때 비로소 해방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영화는 '봄'이 아닌 '체험'으로부터 관객의 사유를 강탈하기 시작했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관람을 '취미'라 말하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전의 시네필 문화가 점차 밀레니엄 시기로 이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취미란 영화관이나 영화를 본다는 걸 마치 수집처럼 여기는 태도에 있다. 너도나도 박스 오피스에 걸려있는 영화를 보며 서로에게 의례적으로 관람 여부를 확인한다. 비평가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해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예술에도, 광고에서 나타나는 유사 선전적인 방식에도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만연한 분위기에 더 가까운 것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문화의 생산뿐 아니라 노동과 교육의 규제도 조건 지으며, 나아가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작용한다"

영화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경유하는 모든 영역은 어떠한 방식이든 제약을 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만연한 분위기'가 고조된 시기가 있었다. 이는 한국 영화산업의 부흥을 예고하던 작품인 1999년 <쉬리>가 개봉된 후였다. 전국 관객 579만 명을 동원한 이 영화는 폭발적인 성장 동력이 되었고, 영화종사자들은 산업에 대해 다시금 재고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전 영화산업의 장래는 밝지만은 않았다. 1988년에는 비디오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90년대 중반에는 영화를 전문으로 한 케이블 티브이가 등장했으며, 90년대 말에는 인터넷을 통해 영상매체를 안방에서도 쉽고 편리하게 접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서 <쉬리>의 등장은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흥행은 한순간에 멈추지 않았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 <친구>(2001)는 암울한 전망을 벗어나 희망을 전망할 수 있었다. 그중 총제작비 110억 원이라는 최대 제작비가 투자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의 실패는 이 기세를 한풀 꺾기도 했지만, 그다음 해에 천만 관객을 동원한 <실미도>(2003)는 다시금 영화관의 부흥을 예고했다.

<태극기 휘날리며>(2004), <왕의 남자>(2005), <괴물>(2006) 등의 흥행은 급속도로 멀티플렉스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으로 당시 강한섭 영화평론가가 2002년도에 발표한 논문인 "한국 영화 붐의 시작과 끝"은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얼마나 인간의 예측이라는 것이 불분명한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1999년 개봉했던 <쉬리>의 여파로부터 발생했던 영화의 붐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으로부터 종언 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는 <실미도>가 개봉한 2003년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 후 21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천만 관객에게 도달하고 있는 영화가 우후죽순 등장한다. 천만 관객이라는 고지를 점령하고자 부단히 애쓰는 산업계의 현실은 다양한 수식어로 표기된다. 손익분기점 이후 제작사는 증가하는 관객의 숫자를 공공연히 매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유포하고 누군가는 천만 관객 배우로 소개되며 관람객 숫자에 따라 공약을 제시한다. 숫자란 자본주의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매개이다. 이는 자본주의를 선전하는 블로거와 유튜버를 양산하기도 한다. 방문자 숫자와 조회 수, 구독자 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은 결국 분위기에 휩싸인 또 하나의 '분위기'로 복제되는 셈이다.

전부는 아닐지언정 천만 관객에 도달한 영화의 제작비를 고려하면 독립영화 감독에게는 꿈꿀 수 없는 높은 수치라는 점에서 한국 영화는 프로덕션에 과도한 의지를 하고 있다. 특히나 자극에 물든 관객의 니즈를 채워야 하는 감독의 입장에선 제작비는 오히려 부담스러운 요소이기도 하다. 감독은 자본이란 부채를 껴안고 제작비를 회수하기 위해 안전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최근 흥행에 참패한 최동훈의 <외계+인 1부>(2022)에는 무려 총 400억 원이라는 돈이 투자됐다. 이 영화는 손익분기점이 730만 명이었지만, 최종 관객 수는 153만 명에 그쳤다. 이러한 결과는 창작은 제동에 걸릴 수밖에 없고, 창작 가능성이 저하될 수밖에 없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이런 형국이 단지 상업영화뿐 아니라 독립영화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만은 아니다. 2005년 제3기 영진위부터 다양성 영화 정책이 확대되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에 독립 영화 편수는 600편 가까이 되었고, 2010년도에 들어서면서는 1000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독립 영화에서 압도적인 관객 수를 자랑하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가 480만 명이란 기적과도 같은 숫자는 작품과는 별개로 문화와 정서적인 요인이 작동한 것이지만, 그간 축적했던 영화관에 대한 인식이 없었더라면 이런 관객 숫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필수 불가결하게도 자본과 영화, 그것은 독립 영화에게도 동일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 영화 <범죄도시3>(2023)

한국 영화계를 타격하는 사건 하나는 코로나19의 등장이었다. 2021년 씨네21에선 충무로 플레이어 6인을 불러 코로나가 진행된 1년을 진단했는데, 그들이 동시에 지적한 내용은 극장 매출과 관객 저하, 제작 편수의 급감, 개봉 딜레이, 다양성 영화를 수입하는 중소 배급사들은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실정들에 대한 것이었다. 이미 제작, 마케팅, 배급을 위한 엔터테인먼트라는 구조가 영화 산업에 단단하게 거치가 되어 있을뿐더러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피해를 보게 되면서 여러모로 영화 산업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영화제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본격적으로 코로나가 발발했던 2020년은 그 여파로 인해 한국영화제를 포함한 전 세계의 수많은 영화제가 잠정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그 명맥을 유지하고자 온라인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그로 인해 활성화된 OTT는 소비 트렌드의 변화를 촉진시켰고, 관객들의 인식에는 영화는 '영화관'에서 볼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특히나 2019년 넷플릭스가 할리우드 전미영화협회(MPA: Motion Picture Association)의 회원이 되고 나서 영화산업은 코로나와 더불어 급속도로 변화되었다. 거대한 기업들이 가세하면서 점차 경쟁이 심화되었다. 자연스럽게 코로나 세대는 영화관을 대체하여 집에서 영화를 접하는 집객(집에서 영화를 보는)들이 늘어났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현실을 너무도 직시할 수 있었다. 코로나가 시작 후에 글을 쓰기 위해 매주 영화관에 들렀지만 혼자 영화를 감상하거나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소수의 관객이 남아 그 자리를 지켰다. 상대적으로 증가한 티켓값과 OTT의 구독료를 비교하면 관객은 플랫폼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다채로운 영화와 드라마들을 편하게 안방에 볼 수 있는 이점을 누리면서 영화관은 점차 쉽게 드나들 수 없는 하나의 '이벤트' 장소가 되어 버렸다. 마치 연말을 마무리하기 위해 공연이나 뮤지컬을 보러 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팬데믹 상황이 점차 누그러진 2022년은 영화관에 관객 수급이 갑작스럽게 이어진 해였다. 한국 영화에서 새로운 히어로 탄생을 알렸던 <범죄도시1>(2017)의 성공에 힘입어 5년이 지나 15세 이상 관람가로 <범죄도시2>(2022)가 상영되었다. 극장가의 회복을 알리는 이 영화는 극장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손석구는 900백만을 돌파하고 나서 무대인사를 통해 저는 여러분으로 인해 '해방되었다'라는 말을 전했다. 냉동되었던 영화와 배우가 해방의 기회를 얻는 것, 이 영화는 얼어있던 영화관의 해방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위에 랑시에르가 상술했듯이 역설적으로 손석구가 말한 해방은 이전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던 어벤져스와 같은 히어로를 재 호명하는 방식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진다. 작년에는 <범죄도시3>도 천만 관객 달성에 성공했으며, <범죄도시4>도 올해 개봉 예정이라는 점은 역시나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마블 시리즈의 등장을 상기하게 한다. 자본에 의해 탄생하는 스펙터클 이미지는 영화를 무엇으로 인식하게 하는가.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호를 신체라고 말한 프랑스의 철학자 보드리야르의 논의는 현재의 스펙터클 이미지를 내세운 영화 산업에도 고스란히 흡수되어 있는 것이다.

 

ⓒ 영화 <오펜하이머>(2023)

작년 페드로 코스타는 Films in Frame과의 인터뷰에서 슈퍼히어로 영화가 파시스트적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신랄하게 이런 영화를 디스코텍에 가는 것으로 말하기도 했다. 라브 디아즈(Lav Diaz)도 이런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MUBI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영화는 산업이 아니고, 문화이며 예술이라 설파하면서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활동(activity)이라 말했다. 유사한 양식을 갖고 있는 두 감독의 반응에서 필자의 우려도 동일하다. 영화관의 해방이 결국 자본에 근거한 해방이었다면, 앞으로도 영화관은 계속해서 자본을 수집하는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것이다. 물론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작년에 전 세계에서 흥행을 이끌었던 영화는 <바비>(2023),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2023), <오펜하이머>(2023),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 Volume3>(2023) 였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을 고려해 보면 잘 알려진 친근한 캐릭터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중 놀란의 영화는 매번 CG가 아닌 아날로그 방식을 사용하여 관객들에 기대감이 고조된 상태였고, 특히나 소재가 '핵'이란 점에서 홍보가 잘 되었다.

스펙터클 이미지에 중독된 관객은 자신이 모르는 영화에 자신의 에너지를 투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영화 감상을 회상하는 기억의 회로가 그 이미지에 경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방된 관객만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한국 영화와 그 산업의 경향에 노출된 관객에게 영화가 그저 '이벤트'로 소급되지 않길 바란다. 예술로 영화를 향유하며 기꺼이 사유와 지각의 영역, 사회, 정치, 문화, 미학 등을 도구를 활용하고 수집보단 사유하길 바란다. 이러한 우려에도 자본으로부터 해방을 노리는 관객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양한 영화를 찾아 극장에 나선다. 코로나가 거의 끝날 무렵 냉기가 가득했던 독립영화 상영관에도 제법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2023년에는 천만 관객 영화가 두 편이 등장했고, 돋보이는 독립 영화들도 꽤 있었다. 그 가운데서 누구는 '돈값'하는 영화가 아니라면 보지 않겠다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시네필이라 자부하면서 영화제와 고전 영화와 독립 영화만을 찾아다녔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구분이 아닌 영화가 어떤 존재인지를 더욱 탐구하는 올 한 해가 되기를 나와 모든 관객에게 조심스레 권유해 본다. 나는 오늘도 그렇게 해방된 관객을 찾아 그리고 해방된 관객이 되기 위해 영화관에 간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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