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의 영화일기] 2023년 12월 31일
[이상용의 영화일기] 2023년 12월 31일
  • 이상용
  • 승인 2024.01.0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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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마무리가 안되는 마무리를 위하여"

원래는 올해의 한국영화에 관한 글을 쓰면서 영화일기를 슬쩍 끼워 넣는 편법을 고려하고 있었다. 문제가 여러 가지 생겼는데 무엇보다 한국영화에 대한 글이 자꾸 뚱뚱해지기 시작했고, 근래에 본 영화의 편수도 제법 늘어났다. 이래저래 미루다가 12월 마지막 날에 일기를 완성한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 일기는 해석이나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기록을 위해서다. 종종 이 글의 성격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또한 글의 숙명이려니 생각하면서도 다시 한번 기록을 위한 것임을 돌아본다. "새해 복 많이들 받으세요."

 

ⓒ 영화 <앙투안과 콜레트>(1962)

트뤼포 생각

최근 아트나인에서 '프랑수아 트뤼포' 기획전을 맞이하여 거의 끝날 무렵에 앙투완 두아넬 시리즈의 마지막 편으로 강연을 했다. 현장에서 느꼈던 소회 중의 하나는 '더 이상 트뤼포가 기억되지 않는 시대를 맞이했다'는 느낌적인 느낌. 누벨바그라는 이름과 함께 항상 필수 옵션이었지만, 반복적으로 상영되는 <줄 앤 짐>(1962)이나 데뷔작 <400번의 구타>(1959) 정도를 제외하고는 정작 트뤼포는 이름과 영화가 분리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트나인에서 상영한 두아넬 시리즈를 살피면서 들었던 생각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트뤼포가 영화 전체를 통해 책과 음악의 애호가임을 쉼 없이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는 고다르보다 더 지독한 독서광이다. 또한 누벨바그를 촉발시킨 격문으로 알려진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에서 문학을 각색한 영화들을 공격한 트뤼포임을 생각해 보면 역설적이다. 그 누구보다 트뤼포는 독서광임이 두아넬 시리즈를 통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이 시리즈는 <400번의 구타>, <앙투안과 콜레트>(1962), <도둑맞은 키스>(1968), <부부의 거처>(1970), <사랑의 도피>(1979)를 가리킨다. 이 중 <앙투안과 콜레트>는 단독적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 옴니버스 영화 중 하나였고, 단편 분량으로 촬영되었다. 나중에 이 작품은 앙투안 시리즈에 묶여 주로 소개되거나 상영된다.

<앙투완과 콜레트>에서 두아넬은 레코드 회사에서 일을 한다. <400번의 구타>가 워낙 유명세를 누린 작품이었던 만큼 다시금 등장한 두아넬의 모습은 반갑기가 그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십대다. 어떻게 어린 나이에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는지 따져볼 수 있는 문제이지만, 트뤼포가 실제로 일을 한 곳은 음반 회사가 아니라 영화와 관련된 일이었다. 앙투완을 통해 자신을 반영하지만 비틀어 반영한다. 그게 반영(reflection)의 정확한 뜻일 것이다.

이 시리즈를 보면서 두 번째로 들었던 생각은 반영에 본격적인 문제다. <앙투완과 콜레트>에는 앙투완 두와넬의 출발점이자 전작이라 할 수 있는 <400번의 구타>가 인용된다. 일종의 영화를 통한 캐릭터의 역사 쓰기인데 흔히 말하는 페르소나의 문제가 아니다. 페르소나는 특정 배우가 특정 감독의 캐릭터나 자전적인 성향을 반영한다는 뜻인데, 엄밀히 말에 앙투완 두아넬은 페르소나적 성격도 있지만 영화를 통해 한 인물의 역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허구적인 인물을 실재하는 것처럼 써내려간다는 것. 그것이 영화이 제작 시스템과 일정하게 호흡을 맞추고 있다는 것. 같은 배우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앙투완 두아넬 시리즈의 진정한 놀라움 중 하나이며, 이를 위해 트뤼포는 전작을 뒤에 만든 영화 속에 인용한다. 그런 점에서 앙투완 두아넬 시리즈는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만든 <보이 후드>(2014)의 진정한 선배다.

물론, <보이 후드>의 또 다른 영향력은 제임스 베닝이겠지만 베닝의 영화가 인물 대신 풍경에 주력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가상이 인물에 관한 역사 쓰기라는 점에서 선구자적 시도가 트뤼포가 만들어 낸 앙투완 두아넬이다. 트뤼포의 인물 쓰기는 한 인물과 그를 둘러싼 여러 여성들의 관계에 한정되어 있다는 측면이 좀 아쉽기도 하지만(역사적인 배경들이나 68혁명의 상황들이 흘러간다. 가령 <사랑의 도피>에는 드골의 사라진 시간을 출간하는 책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한국의 정치상황을 떠올리게 하면서 유머러스한 코멘트로 읽힌다), 68혁명 시기에 내놓은 <도둑맞은 키스>를 포함하여 앙투안 시리즈에는 정치보다는 예술과 연애라는 낭만적 색체가 가득하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트뤼포의 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격문을 쓴 평론가나 시네마테크의 아버지 랑글루아를 돕기 위해 시위에 나선 행동가가 아니라 영화관에서 웅크린 꿈꾸는 소년에 가깝다. 여러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주변사람들은 트뤼포에게 도움을 청하고는 했는데, 시간이 흘러갈 수록 그는 이러한 제안을 거절하기에 이른다. 세월에 대한 당연한 변화일 수도 있겠지만, 앙투안 시리즈를 보고 있노라면 원래 그런 소년이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 영화 <사랑의 도피>(1979)

앙투완 시리즈 중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도둑맞은 키스>였지만, 이미 다른 강연으로 준비된 작품이었다. 좋은 건 누구나 비슷하게 알아보는 법이니까. 하여 초기작보다는 뒤의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부부의 거처>와 <사랑의 도피>를 두고 고민하면서 다시 생각할 기회가 생겼다. 의외로 <사랑의 도피>가 좋았다.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앙투완 시리즈의 여러 작품들을 인용하여 짜집기 한다. 트뤼포는 이 작품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다. 영화의 삼분의 일은 날로 먹는 셈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당대에 꽤 흥행한 편에 속한다. 트뤼포는 이 반응에 의아하게 생각했다. 트뤼포는 자신이 작품에 쏟은 에너지에 대해 생각했겠지만, 관객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한 감독이 창조해 온 인물을 정리해 주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사랑의 도피>는 앙투완의 가장 나이 든 시점을 보여주는 영화이지만, 동시에 그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회고전'인 작품이며, 앙투완에 대한 노스텔지어로 가득한 영화다. 사람들이 사랑한 것은 이 노스텔지어다. 음반으로도 나오고 영화의 시작과 끝을 가득 메우는 팝이 가미된 프랑스 샹송 스타일의 '사랑의 도피'라는 곡도 새롭다기보다는 옛것에 대한 향수가 짙게 배어 있다. 트뤼포를 진정한 프랑스 중 하나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구릿구릿한 낭만성에 있을 것이다.

작품 속에는 콜레트 역을 했었던 마리 프랑스 피지에가 변호사가 되어 등장한다. 애초에 작품 방향 중의 하나가 재회한 두 사람이 '앙투완과 콜레트'의 현재 버전을 찍는다는 것이었는데, 트뤼포는 결국 이 기획을 접는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를 완전한 노스텔어지로 몰고갈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여성을 촬영 3주 전에 끼워 넣는다. 그녀의 영화 속 이름은 '사빈'이고, 두아넬이 펼치는 인생의 동력을 과거의 여성들로만 구성할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도 찾아야 한다는 이유로 발견한 인물이다. 전기에 따르면 텔레비전을 보던 트뤼포가 어린이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도로테를 보고 바로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 첫 장면에 캐릭터 잠옷을 입고 등장하는 사빈의 모습은 이혼하는 크리스틴의 정갈한 느낌이나 변호사가 된 콜레트와도 다르다. 어쩌면 이제 나이간 든 트뤼포가 바라보았던 당대의 젊은 여성이라는 한계도 지울 수는 없다.

<사랑의 도피>에 드리워진 또 하나의 영향력은 트뤼포가 곧바로 완성하여 내놓은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1977)였다. 이 영화의 주인공도 <사랑의 도피>에 등장하는 앙투완처럼 작가다. 여기에 영화에 대한 영화로 알려진 전작 <아메리카의 밤>(1973)을 뒤섞은 결과물이 <사랑의 도피>인 셈이다. 트뤼포가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이 작품이 <아메리카의 밤>과 닮아 있다는 소리였다고 한다. 애써 달아난 영화이기도 한 셈이다.

자기반영적인 <사랑의 도피>를 오랜만에 살펴보면서 한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스스로 정리하고, 그 속에서 아쉬움을 남기고, 그렇게 한 시절이 흘러간다는 것에 대한 소회를 생각하게 됐다.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가 되면 모아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반영이 된다. 일기를 쓰는 것도 그런 목적이다. 무엇인가 생각했던 것에 대한 반영. 엄밀한 의미에서 흔적 같은 반영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ema) 선정 2023년 영화

계속해서 프랑스다. 예전에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선정작에 대한 기사나 글들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 또한 달라진 상황을 말해주는 것으로 사료된다. 카이에의 BEST 10은 다음과 같다.

 

ⓒ 영화 <트렌케 라우켄>(2022)

1위. 로라 시타렐라, <트렌케 라우켄>(2022)

이곳저곳에서 계속 언급되는 영화이다 보니 정말 궁금하다. 올해 전주 상영작이었고, 아마 거기에 있었다면 이미 보았을 영화이겠지. 뭐 오래도록 궁금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최대한 천천히 보기로.

2위. 빅토르 에리세, <클로즈 유어 아이즈>(2023)

실제로 에리세를 만난 적이 있다. 아르메니아의 영화제였고, 심사부문은 달랐지만 심사 일정이 모두 끝나고 게스트들이 함께 세방 호수로 향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이곳은 터키, 조지아, 이란 등의 국가에 둘러싸여 있어서 바다와 접해 있지 않다. 터키와 접한 아라랏산과 함께 세방 호수가 이곳의 안식처인 셈이다.

실제로 대화를 나눈 것은 에리세의 아내였다. 그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고(필자 역시 비슷했지만), 아내 분은 영어에 능숙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도 친숙했다. 통역일을 했다고 하던 아내 분은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를 통역한 일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종종 겐자부로 이야기를 섞어서 나눈 기억이 있다. 그 후 에리세가 만든 서신 교환 영화를 보기도 했지만 이처럼 온전한 장편으로 언제 돌아올 것인가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돌아왔다. 이 작품은 올해 부산에서 상영된 바 있다. 코아르에도 이 작품에 대해 소개된 글(「[28th BIFF] '클로즈 유어 아이즈' 영화의 기적이 사라질 시대에 바치는 레퀴엠」)이 있으니 참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최대한 빨리 보고 싶은 영화다.

3위. 저스틴 트리엣, <추락의 해부>(2023)

칸에 소개되었을 때 경쟁부문 작품 중 큰 기대가 없었지만, 결과를 보고 나니 가장 궁금한 영화 중 한 편이 되었다. 그린나래에서 수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적절한 때에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영화 <파벨만스>(2022)

4위. 스티븐 스필버그, <파벨만스>(2022)

국내에는 3월에 개봉되었고, 이 작품에 대해서는 이미 글(「[Critique] 도대체 영화란 무엇인가?」)로 쓴 바 있다. 여전히 근래에 만들어진 중요한 영화 중 하나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5위. 아키 카우리스마키,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

12월에 개봉한 영화. 수입사 찬란의 대표가 종종 기가막힌 작명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작품도 절묘하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아틸라 마르셀>이라는 작품을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2013)이라고 작명하여 아트버스터의 효시를 이뤘고, 여기에 작명 센스의 중요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덕분에 공동수입한 전주영화제로서도 이름값을 톡톡히 누렸다. 개인적으로 이 값을 돌려주기도 했다. 미아 한센 로브의 <다가오는 것들>(2016)은 필자가 제안한 제목이었다. 능력의 차이가 있다. <아틸라 마르셀>에서 <마당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한참을 번지 점프해야 하는 작명이고, <다가오는 것들>은 영문 원제를 충실히 따라가는 수준이었다. 전자가 훨씬 난이도가 높아 보인다.

카우리스마키의 신작의 영문 제목은 <Fallen Leaves>인데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사랑은 비를 타고>(1952)에서 가져온 작명 센스다. 개인적으로는 좋다. 영화를 보고 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는 고다르를 비롯한 여러 영화들이 슬쩍슬쩍 인용된다. 뮤지컬 영화의 대명사인 <사랑은 비를 타고>도 여러 영화들의 인용이었다. 무엇보다 뮤지컬의 음악을 가리키는 '스코어'의 경우 단 한 곡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기존 곡의 재탕인 영화에 대한 영화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카우리스마키 자신이 만들어 온 노동자 영화의 재탕인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들을 슬쩍슬쩍 인용하는, 개인적으로도 올해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카우리스마키가 선사하는 노동자의 모습과 일상의 유머를 담고 있는 동시에 '제목'처럼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사랑은 비를 타고>가 뮤지컬에 대한 메타적인 영화이듯 브레송, 고다르, 채플린을 경유하면서 할리우드 멜로 영화에 대한 카우리스마키적 해석을 깔아놓는다. 너무나 멜로적인 공원의 낙엽만큼이나 지나간 영화에 대한 사랑이 넘쳐난다.

 

ⓒ 영화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2022)

6위. 시릴-아몬 샤우블린,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2022)

스위스 영화는 유럽 영화의 지형도에서 이곳저곳의 영향을 받으며(스위스의 지리적 위치와 언어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로 이뤄져 있다) 절충적이라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그것도 일정한 선입견이겠지. 그런데 이 감독의 이력은 좀 특이하다. 북경 중앙희극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하였고, 이후 베를린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애초의 선택이 스위스적이지는 않았던 셈인데, 이 작품은 인물이나 공간은 제한적이지만 과거의 시대극이라는 거리감을 만들어 낸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말하는 화술이랄까. 1870년대 스위스에서 지도제작자인 러시아인과 스위스 시계공장의 무정부주의자들을 연대하는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의 유럽적 상황을 건드린다. 노동과 자본의 이야기인 동시에 관조와 응시가 주를 이루는, 서양의 의식과 동양의 움직임이랄까. 그런 것들이 절합되어 있는 독특한 영화다. 2022년에 전주 국제경쟁 부문에 상영된 바 있다.

7위. 라두 주데,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아라>(2023)

루마니아 뉴웨이브 영화들과 묶여 있는 감독으로 언급되고는 하지만, 가장 튀거나 멀리 간 감독이기도 하다. '라두 주데'의 세계는 영화의 제목만으로도 기대를 하게 만든다. <배드 럭 뱅잉>(2021)으로 국내에도 알려진 바 있다. 이 작품은 또 어떨까. 얼른 보고 싶은 영화다. 

 

ⓒ 영화 <더 템플 우즈 갱>(2022)

8위. 라바 아뫼르-자이메쉬, <더 템플 우즈 갱>(2022)

진짜 낯선 이름. 알제리 태생의 감독인데 마그렙 지역의 영화들에 대해 한동안 무지했던 것일까.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적지 않다. <블레드 넘버 원>(2006)은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상영된 적이 있고, <스머글러스 송>(2011)은 로카르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았다. 이 작품의 제목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사우스 터미널>(2019)도 로카르노영화제 경쟁부문에 상영되었다고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반성해야지. 아무튼 알제리 태생이지만 많은 알제리이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그러하듯이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알려진 배우들이 아니라 알제리의 배우들과 주로 함께 작업을 한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기로.

9위. 카트린느 브레야, <라스트 썸머>(2023)

한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다시 카메라를 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궁금했다.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지난번 칸 기사에도 살폈듯이 가족과 성의 세계로 뛰어든다. 과거의 프랑스 영화에서도 드물게 등장하는 이야기다. 핏줄이 섞이지는 않았지만, 엄마와 아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 안느라는 여성이 남편의 전처가 낳은 아들과 관계를 하는 이야기. 과거 프랑스의 남성 감독이 아니라 브레야가 만든다는 것은 어떤 각도를 비출 수 있다는 것일까. <로망스>(1999), <팻걸>(2001) 만큼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국내에서는 호불호를 가져오겠지. 아무튼 건강으로 인해 거의 십 년 만에 장편 영화를 선보였다. 영화란 무엇이기에 그토록 논쟁의 중심에 스스로를 가져가는가.

10위. 켈리 라이카트, <쇼잉 업>(2022)

<퍼스트 카우>(2019) 감독의 신작이다. <퍼스트 카우>밖에 보지 못했기에 <어떤 여자들>(2016), <웬디와 루시>(2008)처럼 스트리밍으로 볼 수 있는 영화들을 포함해서 이 기회에 연초를 보낼까 하는 지대한 계획을 세워본다. 자주 강연을 하는 더 숲시네마에서 '퍼스트 카우 튀김빵'을 판매한 기억이 난다. 우리가 영화를 이해하는, 소비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튀김빵을 통해 켈리 라이카트에 더 다가가는 방식은 무엇일까. 이 또한 이 시대의 사소한 즐거움일까. 아무래도 영화를 봐야겠다.

10위. 피에르 크레톤, <어 프린스>(2023)

공동 10위에 올라와 있는 영화다. 이 영화는 뭘까, 세 남자가 얽히는 연인 관계로 보이는데, '마티유 아말릭'이 프랑스 코미디를 하며 나오는 영화 중 호감을 느꼈던 경우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되던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아주 있지도 않았다. 가장 덜 궁금하지만 그래도 건드리는 건 있겠지.

 

이외에 본 12월과 1월의 영화들 중 좋아한 작품들

<신세계로부터From the New World> 최정민|2021

ⓒ 영화 <신세계로부터>(2021)

<프레스>(2016), <앵커>(2018). 전작의 제목만 들으면 미디어와 사회를 다루는 감독이라 여기기 쉽지만 전혀 다르다. <프레스>는 틀을 만드는 프레스 기계를 가리키는 말이고, <앵커>는 흔히 배의 닻이라고 불리는 것을 가리키는 동시에 이어달리기의 마지막 주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최정민 감독은 이러한 오해를 가져오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개인적으로 <프레스>보다 <앵커>가, <앵커>보다 <신세계로부터>가 더 좋았다는 것. 그 안에 담긴 구원을 향한 열망과 그것이 무너지거나 재구축되는 순간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여전하지만 어딘가 심원해지고, 어딘가 더욱 기이해졌다. 배우들의 힘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한 길을 파고 있는 최정민 감독의 행보에 관심이 간다. 올해 기억될 만한 한국 영화 중 한 편이다.

믿음과 거짓 사이, 탈북자와 시골 동네를 오가며 그녀의 믿음을 격려하게도 되고, 어리석음을 질타하게도 된다. 그 모든 것이 인간이라면, 이 인간의 초상은 아프고도 슬프게 우리를 채운다.

 

<나의 올드 오크The Old Oak> 켄 로치Ken Loach|2023

ⓒ 영화 <나의 올드 오크>(2023)

켄 로치의 영화 세계는 큰 틀에서 '역사 속 사람을 다루는 켄 로치와 사람의 연대를 다루는 켄 로치'로 나눠볼 수 있다. 편의적인 구분이기는 하다. 근래에 올수록 그의 카메라는 '사람의 연대'를 보여주면서 깊어진다. 

탄광의 역사와 시리아의 난민을 하나의 사진으로, 오래된 펍 '올드 오크'로 이어붙이면서 연대하고 또 연대한다. 그 가능성을 향해 직진하는 거장의 감정과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영화. "슈크란!" 

 

<클럽 제로Club Zero> 예시카 하우스너Jessica Hausner|2023

ⓒ 영화 <클럽 제로>

예시카 하우스너는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던져주는 믿음과 의심의 세계 위에 비건과 단식을 얹어놓고, 교사와 학생으로 엮는다.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겠지만 그 생각이 무엇이든 하우스너가 던지는 세계(믿음)의 의혹으로 지독하게 채워져 있다.  

 

<노 베어스No Bears> 자파르 파나히Jafar Panahi|2022

ⓒ 영화 <노 베어스>

현실과 허구(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화술로 이란 사회의 현실과 개인이 처한 극적인 상황을 오가던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는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영화'가 직접 현실에 말을 거는 일련의 장면들이다. 더 이상 허구는 없다. 영화도 현실이고, 현실도 현실이다. 파나히의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그 심연을 들여다보게 이끈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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