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영화로 세계 속으로] 러시아: 자유를 보존하는 스크린
[박정수의 영화로 세계 속으로] 러시아: 자유를 보존하는 스크린
  • 박정수
  • 승인 2023.12.27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러시아 예술가들의 자유와 이상"

예술은 따분한 일상에 신선함을, 부조리한 현실엔 반기를 들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 싹트기 좋은 조건은 '불만족스러운 현실'이다. 일상이 만족스럽다면 굳이 다른 것을 힘겹게 찾아 헤매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러시아'에선 여러 방면에 거친 뛰어난 예술운동이 끊이지 않고 촉발되고 있다.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의 역사, 현실 참여를 방해하는 혹독한 기후, 그 가운데서 러시아의 예술가들은 자유와 이상을 꿈꾸며 풍부한 표현을 선보였다. 더욱이 러시아의 광활한 국토는 예술을 위한 다채로운 질료를 제공하였으니, 러시아 예술은 다양성과 깊이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러한 러시아의 예술사가 영화까지 이어진다.

20세기부터 21세기까지 소련-러시아에서 허용된 예술이란 오직 '프로파간다' 뿐이었다. 서구권에서 예술의 자율성을 탐구한 '모더니즘'이 전개될 동안, 동구권은 예술이 현실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이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발전시켜 갔다. 초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이 현실에 기여할 수 있다면, 정치 '비판'이나 '반성' 등의 작업도 허용했다. 그런데 이런 작업들은 제 사리사욕만 추구하는 '서기장'들의 시선에 고깝게만 보였다. 이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서기장의 탐욕만 충족하는 프로파간다 이론으로 변질되어서, 현실이 아니라 허구를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정 현실에 봉사하는 영화들은 '검열'되었다.

20세기 소련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을 꼽으라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알렉세이 게르만',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키라 무라토바',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등이 있다. 이들의 색채는 각자가 확연히 다르다. 타르코프스키와 파라자노프가 '시적이고 영적'이라면, 게르만과 무라토바는 '무의식적이고 초현실적'이며, 콘찰로프스키는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들 모두 다 프로파간다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은 동일한데, 그래서 당대 서기장들의 살벌한 검열 역시 똑같이 경험했다. 타르코프스키는 제한 개봉을 버티지 못하고 이탈리아로 망명했으며, 파라자노프는 구금되었고, 외의 감독들 또한 '제한 개봉', '당국의 편집', '제작 제한' 등의 고초에 처했다. 그래서 20세기 소련 영화에서 쉽사리 볼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의 민낯'이었던 반면, 쉽게 볼 수 있었던 것은 '허구의 소련'이었다.

 

ⓒ 영화 <레토>(2018)
ⓒ 영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2021)

그런데 20세기의 살벌한 검열은 여전히 종식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바로 푸틴에 의해서 말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시네아스트들도 독재자에 의해 입막음된 소신을 영화로써 밝힌다. 푸틴 치하의 자유와 부패의 민낯을 말이다. 푸틴을 고발하는 영화를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양대 산맥처럼 이끌고 있다. 그런데 그 이름들을 러시아에서 쉽게 외칠 수 없다. 푸틴에 의해서 제한된, 비밀스러운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즈비아긴체프는 '푸틴의 액자'가 위치한 '관공서'나 '종교 시설' 등이 일개 국민들의 삶을 어떻게 짓밟는지 <리바이어던>(2014)에서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이 작품이 푸틴의 신화에 균열을 가할 것을 우려한 러시아 당국은 온갖 억지 주장을 들어서 검열하였고, 이에 일반 대중 다수가 접할 수 있는 TV 상영은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세레브렌니코프 또한 마찬가지로, 그는 러시아 정교회의 호모포비아 정책이 푸틴과 깊게 결탁해있음을 <스튜던트>(2016)에서 폭로하였다. 또 소련 청년들에게 '자유와 혁명의 열기'를 불어넣었던 '빅토르 최'의 일대기 <레토>(2018)를 연출했는데, 이 또한 당국은 오늘날의 청년들이 독재에 반감을 품을까봐 우려하였다. 그래서 온갖 누명을 씌워 <레토> 마무리 단계에 그를 구금하였고, 해당 작품은 참여한 배우·스태프들에 의해 겨우 완성되었으며, 현재 세레브렌니코프는 타르코프스키처럼 망명하였다.

이에 국제 영화계에서는 러시아 내부에서 상영되지 못한 영화들을 전 세계적으로 소개하기 위한 노력을 끊이지 않고 있다. 즈비아긴체프와 세레브렌니코프 외에도 러시아 당국의 탄압을 반영하는 작품으론 올해 8월 개봉한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2021)와 알렉세이 게르만의 아들인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의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먼저,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2021년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프리미엄된 작품이다. 그리고 어지간한 작품들은 영화제 최초 프리미어 이후 1년 이내로 최소한 자국에선 개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1년이 넘어서도 러시아에서 개봉하지 못했고, 이에 해외 배급 일정 또한 죄다 꼬여버렸는데, 그 이유가 스탈린의 '대숙청'을 소재로 하는 해당 작품이 푸틴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 또한 1980년대 소련에서 검열을 당했던 작가, '세르게이 도블라토프'의 전기를 <도블라토프>(2018)로 영상화하며 오늘날 푸틴 치하에서 박해를 받는 예술가들의 얼굴을 간접적으로 비춰냈고, 그 예술가들이 어떤 고초를 겪는지 <가택 연금>(2021)에서 상세히 묘사하였다.

 

ⓒ 영화 <페트로프스 플루>(2021)
ⓒ 영화 <러브리스>(2017)

이렇듯 러시아의 시네아스트들은 현실에 맞선다. 여기서 현실에 대항하는 방법이 오직 '정공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회'적인 방법도 택하는데, 바로 꿈이나 무의식을 빌려서 대신 말하는 작법이다. 20세기 소련 영화는 알렉세이 게르만의 초기 전쟁 영화와 친정부적인 '니키타 미할코프'의 영화를 제외하고는, 매우 '어지럽고 복잡하며 어렵다'라고 인식된다. 꿈과 기억·현실이 마구잡이로 뒤섞이는 타르코프스키의 시적 미장센, 무분별하고도 변덕스러운 광기가 지배하던 러시아-소련의 역사를 포착한 알렉세이 게르만의 후기작과 키라 무라토바의 작품이 그렇다. 이들은 현실-현재를 도피하거나(타르코프스키), 광인들의 신빙성 없는 증언으로 점철된 영화를 연출하여 검열을 우회함과 동시에, 권력자의 사리사욕과 변덕에 의해 좌우된 러시아-소련의 역사를 비판(게르만, 무라토바)한다.

이들 중 게르만과 키라토바의 계보를 이어가는 감독이 바로 세레브렌니코프다. 국내에 소개된 <레토>에서도 선배들과 닮아있는,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어지러운 편집이 그의 특징이었는데, 만연한 국가폭력에 의해 혁명을 노래하기란 기껏 꿈속에서만 가능하거나, 설령 현실에 존재했더라도 금세 존재하면 안 되는 금기였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 영화제에서조차 제대로 소개하지 않은 <페트로프스 플루>(2021)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해당 작품은 소련 붕괴 직후의 러시아를 묘사한다. 서방의 압박 때문에 러시아는 명목상 개방되었지만 정작 자유는 허울뿐이었기에, 바로 그 자유를 러시아의 국민들은 꿈속에서 노래하였고, 세레브렌니코프는 당대에 불가능했던 개개인의 꿈과 열망을 보존하기 위해서 게르만과 무라토바의 분방한 연출을 빌려온다. 그러나 그 꿈은 한갓 가상에 그쳐선 안 된다. 그래서 세레브렌니코프 영화에서 현실과 꿈은 온전히 분리되지 않고, 역으로 현실에 침투하며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그렇게 현실에 실현되길 바라는 꿈은 주로 '성'과 연관한다. 즈비아긴체프의 <러브리스>(2017), 세레브렌니코프의 <비트레이얼>(2012)과 <스튜던트>, '나타샤 메르쿨로바&알렉세이 추포프' 콤비의 <은밀 부위>(2013), <모두를 놀라게 한 남자>(2018) 등 감독은 다르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성을 급진적이고도 도발적으로 묘사한다. 이들이 성을 파격적으로 다루는 이유는 러시아 정교회 및 러 당국이 주도하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성 정책을 반대하기 비롯한다. 정치권력은 오직 '출산율'과 연관한 성만을 허용하기에, 쾌락을 추구하는 동성애, 성 역할이나 성 관행을 따르지 않는 행위, 성별을 뒤바꾸는 수술 등을 엄격하게 금지한다. 이는 출산율에 이바지할 수 없고, 궁극적으로 국가 '경제'에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당국의 숨 막히는 탄압은 러시아 시민들이 일반 윤리, 도덕조차도 불신하게 만든다. 이를 두고 메르쿨로바와 추포프 콤비는 러시아 당국이 국민들을 '가축'처럼 대한다고 진단한다. 이들 작품에서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출산율과 경제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여 '방치'되는 경우가 잦다. 그렇기에 잔뜩 억눌러진 성이 폭발하듯 분출된다. 많은 검열을 당한 만큼 무언가를 돌려받으려는 '보상 심리'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영화들에선 어지간한 쾌감으로는 만족되지 않는, 아주 자극적이고 부도덕한 성관계가 판을 친다. 즈비아긴체프의 <러브리스>와 세레브렌니코프의 <비트레이얼>에서의 '불륜', <페트로프스 플루 > 속 사도마조히즘처럼 당국의 검열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통용되는 도덕 또한 위반하는 극한의 쾌락이 판을 친다.

 

ⓒ 영화 <더 포스트맨즈 화이트 나잇츠>(2014)
ⓒ 영화 <가까이>(2017)

러시아는 '연방국가'다. 소련 해체 이후 많은 공화국들이 떨어져 나간 것은 사실이나,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된 여러 공화국들이 여전히 러시아에 속해 있다. 러시아와 공화국들의 관계도 과거와 유사하다. 20세기에는 소련의 핵심인 러시아를 위해 약소 구성국들이 착취를 당했고, 오늘날에도 러시아를 구성하는 소수 민족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 및 러시아의 시네아스트들은 다양한 지역을 영화로써 조명해왔다. 이 작업에 있어선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가 가장 유명하다. 오늘날에 그는 그윽한 흑백 역사 영화인 <파라다이스>(2016), <친애하는 동지들!>(2020) 등의 정돈된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콘찰로프스키라는 이름은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아주 거친 리얼리즘 영화로 널리 알렸다. 그는 장편 데뷔작 <첫 번째 선생>(1965)에서 소련 수뇌부가 보여주지 않는 키르기스스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비추었고, <아샤의 이야기>(1966)와 <시베리에이드>(1979)에선 '유럽 러시아'의 야욕을 위해서 희생되는 극동 시베리아의 현실을 들춰냈으며, 이런 작업은 <더 포스트맨즈 화이트 나잇츠>(2014)에서 중앙 정치를 위해 희생되는 러시아 북부 아르한겔스크를 포착하며 다시 이어졌다.

콘찰로프스키의 유산은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가 소련의 역사를 비추는 작업인 <페이퍼 솔저>(2008)와 <전자 구름 아래에서>(2015)로 간접 이어진다. 게르만 주니어는 러시아가 착취한 카자흐스탄의 초원과 키르기스인들을 비추며 백인의 역사를 반성한다. 메르쿨로바와 추포프 콤비의 <모두를 놀라게 한 남자> 또한 러시아 당국의 보수적인 성 정책이 폐쇄적인 시베리아에서 더욱 활개 치고 있음을 진단한다.

이보다 더 직접적인 로컬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들로는 '칸테미르 발라고프'와 '키라 코발렌코'가 있다. <빈폴>(2019)로써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도 이름이 익숙한 발라고프는 장편 데뷔작 <가까이>(2017)에서 '카브르디노-발카리야 공화국' 속 발키르인과 유대인의 갈등을 재현했고, 코발렌코는 '북오세티아' 속 현실적인 여성의 삶을 <꼭 쥐었던 주먹 풀기>(2021)로 조명하였다. 이들 작품은 고립된 소수 민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 문제를 '근친상간'이라는 파격적인 상징으로 우회해서 말한다. 폐쇄적인 공화국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는 민족들은 직접적인 근친(<가까이>)이나 근친상간의 분위기(<꼭 쥐었던 주먹 풀기>)를 풍기며, 이로써 폐쇄적인 국가의 사회적인 '유전병'을 계승한다. 또 이들 작품에서는 가부장제에 속한 여성의 갑갑한 삶이 공통적으로 묘사되는데, 거대한 가장으로서 러시아의 승인 없이 어디로도 나갈 수 없는 약소국의 상황을 빗댄다.

 

ⓒ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2022)

러시아 영화인들은 값진 성과 자유를 승화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론을 모색한다. 그 결과는 현실을 과감하게 반영하는 리얼리즘일 수도 있고, 우회적으로 독재자를 소환하거나 꿈을 빌리는 방법론이기도 있다. 이렇게 자유를 향한 처절한 갈망이 러시아 영화의 다채로운 미학을 선도했지만, 푸틴의 폭정이 날이 갈수록 심해짐에 따라서 점차 러시아 영화를 보기 어려워질 전망이다. 즈비아긴체프의 신작은 미국에서 계획되어있고, 세레브렌니코프는 아예 망명하였으며, 발라고프는 모종의 이유로 은퇴를 선언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우린 척박한 현실에서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는 러시아 영화를 조만간 만날 수 있을 예정이다. 세레브렌니코프가 러시아에서 연출한 최후의 작품이 될지도 모를 <차이콥스키의 아내>(2022)가 국내 관객들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