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엄밀함을 포기한 영화
[Critique] 엄밀함을 포기한 영화
  • 이우빈
  • 승인 2023.09.29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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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뼈>, '오에 타카마사'의 숨구멍 난 영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2021)에서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와 '미사키'(미우라 토우코)가 '유나'(박유림)와 '윤수'(진대연)의 집을 방문한다. 곧 이들은 함께 저녁을 먹는다. 이때, 네 인물들은 모두 마스터숏으로 프레임에 잡힌다. 가후쿠가 오른손으로는 젓가락을 잡고 왼손으로는 앞접시를 들어서 반찬을 집으려 한다. 컷이 바뀐다. 윤수를 등진 가후쿠와 미사키의 투 숏이다. 그런데 웬걸 가후쿠는 오른손에 젓가락이 아니라 맥주잔을 들고 있다.

더블 액션을 맞추는 일은 비가시 편집의 기초다. 바로 붙는 두 컷에 상기 정도의 균열이 생기는 것은 대개 편집의 오류로 말해진다. 그렇다고 하여 이 컷 전환을 의도된 점프 컷이라든가, 어떠한 함의를 지닌 가시적 편집으로 보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여차저차 포장하기 궁색할 정도의 대충 붙여진 컷이다. 물론, 마땅한 촬영본이 없었을 수도 있고, 대사가 가장 잘 들리는 테이크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대략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식의 기지 혹은 건성이 동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을 본 뒤에 어떤 영화를 보든 다소 강박적으로 더블 액션의 오류를 찾게 된다. 그것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도출하거나, 명백한 오류라고 짚을 마음은 없다. 하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가 그토록 '엄밀하지 않은 태도'로 영화를 찍고, 편집한 사실 탓에 자꾸 고민에 빠진다. 엄밀함을 포기한 영화들의 정체에 대하여.

 

ⓒ 영화 <고래의 뼈>(2022)

<고래의 뼈>, 서사의 더블 액션을 어기다

엄밀하지 않다는 것. 이 설렁거림의 감상을 최근 가장 깊게 느낀 작품은 '오에 타카마사'의 <고래의 뼈>(2022)다. 다만, 그가 <드라이브 마이 카>의 공동 각본가인 사실은 우선 차치하여 생각하고 싶다. 외려 <고래의 뼈>의 설렁거림은 조금 다른 차원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잘못된 더블 액션은 대사와 감정의 흐름을 해치지 않기 위한 대가였다. 반면에 <고래의 뼈>는 영화의 흐름을 해치려는 듯 서사의 더블 액션을 어긋나게 만든다.

영화가 시작하면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의 등이 보인다. 창밖에서 미세한 노을빛이 흘러 들어오고 있긴 하나 집안은 어두컴컴하다. 혼자 잠들어 있는 여인인가 싶은 순간에 주인공 마미야의 보이스오버가 들려 온다. “좋은 생각 같아. 반지 대신 시계로 하는 거. 어디든 차고 다닐 수 있고 우리 손자들도 쓸 수 있고.” 둘은 결혼을 준비하나 보다. 마미야가 프레임으로 들어오고 카메라는 근접하여 마미야의 얼굴을 비춘다. 여전히 약혼녀의 얼굴은 보여주지 않는다. 약혼녀는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얼굴을 돌린다. 이별을 통보한다. 그리곤 등 돌려 문으로 나간다. 잠시 등장한 그녀의 얼굴은 이별의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모든 컷의 편집점은 더블 액션을 준수하게 지킨다. 그런데 이 오프닝 씬엔 무언가가 어긋나있다. 이별의 원인과 결과 사이, 이별을 말하는 연인의 시선 사이에 균열이 나 있다. 몇 마디 되지도 않는 대화는 죄다 변죽이다. 시계든 반지든 영화엔 아무런 영향이 없다. 둘은 서로의 등을 보고 대화한다. 정황상 얼굴을 보고 있더라도 카메라는 그것을 입증해 주지 않는다. 어긋난 숏들이 어긋난 이야기를 유도한다. 한 연인의 평범하고 지루한 이야기인데 이야기의 편집점들이 무척이나 허술해진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컷 전환처럼 <고래의 뼈>의 이야기 전환엔 엄밀함이 없다. 이어지는 분량도 마찬가지다.

실연한 마미야에게 직장 동료가 스마트폰의 데이팅 앱을 추천한다. 마미야는 앱을 통해서 빨간 옷 입은 여자를 카페에서 만난다. 차에 같이 탔는데 웬걸 여자가 겉옷을 벗으니, 교복을 입고 있다. 마미야는 그릇된 선택으로 그녀를 집에 데려간다. 즉각적인 천벌인지 마미야가 씻는 사이에 여자는 자살해 침대에 널브러져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마미야는 증강현실 앱 미미를 알게 된다. 미미를 이용하면 앱 사용자들이 특정 GPS에 심어 놓은 영상을 재생할 수 있다. 마미야는 '이런저런 과정으로' 죽은 여자가 미미의 인플루언서 아스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마미야는 도시 곳곳에 남겨진 미미 속의 아스카를 쫓으며 그녀의 실체를 알고 싶어 한다. 마미야는 스마트폰을 온갖 장소에 갖다 대며 아스카를 찾는다. 스마트폰은 그의 눈이 되고, 관객은 스마트폰에 찍힌 아스카의 모습을 본다.

 

ⓒ 영화 <고래의 뼈>(2022)

위에서 필자는 스토리를 요약하며 '이런저런 이유나 과정으로'라고 퉁 쳤다. 엄밀하지 않다. 실제로 영화의 이야기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영화 속 모든 우연은 편의적이고 흔히 말하는 개연성도 없다. 서사의 빈틈을 관객이 유추하며 채우게 하지도 않는다. 외견상 추리물 같긴 하다. 그런데 아스카에 대한 단서는 관객에게 예견되지 않는다. 정보의 사전 제시를 통한 서스펜스가 없다. 카메라와 플롯은 마미야가 보고 겪은 것만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볼 수 없는 그의 생각도 알 길 없다. 그러니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그러려니'하는 태도로 영화를 보게 된다. 엄밀하지 않은 관객이 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틀린 더블 액션쯤은 가소롭게 넘길 수 있는 눈과 뇌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고래의 뼈>가 의도하는 바일지도 모르겠다.

한창 아스카를 쫓던 마미야가 밤길을 걷는다. 카메라를 향해 다가온다. 롱숏에서 풀숏 정도의 크기로 변했을 때, 갑자기 화면 오른쪽에 가려졌던 골목으로 들어간다. 지금껏 충실하게 마미야의 시선을 대변했던 카메라는 당황한다. 목표물을 놓쳤다. 카메라는 급박함을 감추지 못한 듯 투박하게 흔들리며 그를 따라간다. 골목이 화면에 들어오자 마미야는 아스카와 함께 있다. 마미야가 스마트폰으로 미미를 사용하는 장면은 중략됐다. 현실과 미미 사이의 편집점이 생략된 셈이다. 그렇지만, 아스카는 화면에 있고 마미야는 그녀와 대화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졌다든가 하는 상투는 여기서 아무런 효능이 없다. 그 상투의 사이를 엄밀하지 않게 대충 절단한 태도에 <고래의 뼈>는 적을 둔다.

 

ⓒ 시리즈 <모두 잊었으니까>(2022)

숨구멍 난 영화

오에 타카마사는 시리즈 <모두 잊었으니까>(2022)의 공동 각본가이기도 하다. 주인공 M의 여자친구 F가 실종된다. 5년 정도 사귄 사이인데,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M은 미스터리 추리물을 쓴다. M이 이런저런 추리의 지식을 사용하여 F를 쫓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질 않는다. 그냥 적당한 불안감만 지니고 본인의 일상을 지낸다. 단골 바와 카페에서 글 쓰고, 사람 만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F는 적당한 타이밍에 나타나고 본인의 변덕을 잘 설명한다. M과 F의 갈등엔 액션과 리액션 사이의 더블 액션이 없다. F의 복귀는 예정 없이 그냥 찾아온다. 추리물의 과정이 별다른 의미 없이 축소된다.

한편, 오에 타카마사는 시리즈 <간니발>(2022)의 각본도 썼다. <벼랑 끝의 남매>(2018), <실종>(2021)을 연출한 가타야마 신조가 연출했다. 장르물의 귀재인 가타야마 신조의 단단함에 오에 타카마사는 송곳 구멍을 뚫는다. 주인공인 시골 경찰관 '다이고'는 마을 유지 가문이 주도한 살인 사건을 수사한다. 그런데 자꾸만 농촌의 목가적인 풍경이 <간니발>을 지배한다. 농사짓는 사람들, 자전거 타고 그들과 인사하는 다이고, 찌르르 우는 풀벌레들이 관객의 시청각을 책임진다. 사건의 단서도 아니고 필요한 장면도 아니다. 긴장감의 이완을 위한 장르적 선택도 아니다. 아주 보기 좋은 시골 풍경이다.

장르적 공식이나 관습에서 M은 F를 열렬히 그리워하고 쫓고 찾아야 한다. 다이고는 쉬지 않고 집요하게 살인범들을 쫓고 잡아야 한다. 오에 타카마사는 이 장르적 서사의 경직함을 용해한다. 다만, 오에 타카마사의 용해액은 죽은 시간을 만들지 않는다. 안토니오니처럼 서사를 지연하여 실제의 시간을 드러내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영화의 죽은 시간은 영화에 드러나야 한다. 오에 타카마사의 영화엔 그 드러남조차 없다. 당연히, 베르토프의 간격도 아니다. 오에 타카마사의 충격은 간격에서 오지 않는다. 그의 간격엔 전후 숏의 충돌이 없고 간격에 내포된 함의도 없다. 오에 타카마사는 그저 엄밀하지 않은 태도로 그 간격들을 허락한다. 단지 허락이다. 그 이상은 없다. 전후의 더블 액션을 맞추고자 하는 의지는 없다. 용해된 서사 군데군데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서사 바깥의 바람이 불어온다. 숨구멍이다.

숨구멍은 채워져선 안 된다. 구멍이 났으니 숨이 들어온다. 신선한 숨을 막을 이유따윈 없다. 예상 못 한 일일지라도 상관없다. 영화의 골자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요소들만 날아가지 않으면 괜찮다. 이를테면 <고래의 뼈>에는 마미야가 있고 아스카가 있다. 아스카는 죽고 마미야는 아스카를 찾는다. 그 방법은 증강현실 앱 미미를 통해서다. 그리고 마미야는 아스카와 재회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그들은 증강현실이 아닌 진짜 현실에서 함께 길을 나선다. 카메라는 더 이상 마미야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렇게 영화가 끝난다. 시작과 끝이 명확하되 부수들은 튄다. 그 부수들을 미세하게 살피며 하나하나의 더블 액션이 맞지 않음을 설명하는 일은 무용하거나 잘못됐다.

 

ⓒ 시리즈 <간니발>(2022)

오에 타카마사의 영화에는 자꾸만 새바람이 든다. 시작과 끝이라는 액션과 리액션의 존재만 챙기고 그것들 사이의 구멍을 방임하기 때문이다. 요소와 요소를 어떻게든 자연스레 연결하려는 인지의 기본적인 의지를 그는 거부한다. 기본적인 의지가 없다는 것은 그가 상궤를 벗어난다는 의미다. 보통 우리의 인지 과정은 어떻게든 현상의 엄밀함을 따진다.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어야 하고, 이랬으니 저렇게 해야 한다. 숏의 구도가 이렇고 컷의 전환이 이러하니 영화의 의도는 이럴 것이다. 아픔이 있으니 이별해야 하고 젓가락을 들었으니, 반찬을 집어야 한다. 이러한 더블 액션의 논리들이 의도적으로 경시된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일도 위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숨구멍을 채워야 한다. 그런데 위 부류의, 일부분의 엄밀함을 과감히 포기한 영화들이 문제다. 이것들의 이미지를 해제하거나 서사를 분석하는 일은 하면 할수록 의미를 잃어간다. 지금도 그렇게 되고 있다. 엄밀하지 않게 건축된 건물은 어차피 언제든 무너지고, 건축가는 딱히 무너짐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엄밀하지 않게 지어진 영화를 보고 예단해봤자다. 이 영화들은 시시각각 무너진다. 그저 무력하고 편안하게, 있는 그대로 영화를 만끽하고 싶어진다.

[글 이우빈 영화평론가, 731dnqls@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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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이 2023-09-30 13:34:56
엄밀하지 않은 영화라는 게 그러니깐 숨쉬어지듯이 지켜볼만한 영화라고 말하시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