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최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담기 위해"
[Interview] "최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담기 위해"
  • 함윤정
  • 승인 2023.09.1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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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 강소원 프로그래머

"영화제를 향한 대중과 매체의 관심이 줄어드는 현실에 대해, 관객이 전문가의 의견에 기대기보다 다양한 경로로 정보를 찾고 스스로 콘텐츠를 고르는 시대가 왔다. 뭘 해도 잘 되던 시절은 끝났고 관심을 받기 위해 기를 써야 하지만, 그마저도 좋은 평가를 받기가 어렵다"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을 담당하는 강소원 프로그래머는 전부터 이미 영화제의 기능과 역할, 의미에 대해 좋은 답을 내놓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팬데믹을 겪으며 상황이 더욱 급변했다고 밝혔다. 세계적으로 많은 영화제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산 문제로 규모가 축소되는 사례는 유수의 국제영화제도 피하지 못했고, 국내에 한정해서도 몇 년 새 적잖은 수의 영화제가 자취를 감췄다. 

더욱이 작년 부산국제영화제는 코로나 이후 완전한 정상화를 선언하며 기틀을 재정비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올해 들어 운영과 관련한 내홍으로 공공연하게 진통을 겪은 바 있다. 이에 그는 내부인으로서의 무력감과 점차 심각하게 전개되는 사태 속에서 느낀 참혹한 심정을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제를 지속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는 모습에서 영화제에 대한 강소원 프로그래머의 깊은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1년 중 단 10일의 축제를 위해 나머지 모든 시간을 바친다. 뜻하지 않은 상황이 닥쳐도 그들은 영화제를 무사히 개최하겠다는 일념으로 위기를 버텨낸다. 불 꺼진 극장에 모여 앉은 관객들이 트레일러 영상에 설렘을 느끼는 순간부터, 그 끝에 터져 나오는 박수가 객석 어딘가에 있을 예술가에게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로 전해지기까지. 그 아름다운 만남과 벅차오르는 감동의 순간을 위해 누군가는 더없이 고된 일을 해마다 반복한다. 지난 13일(수) 부산 영화의 전당 근처에서 강소원 프로그래머를 만나 그 고된 과정이 남긴 사금을 들어보았다. 

 

부산국제영화제 강소원 프로그래머 ⓒ 마리끌레르(photography 채대한)

함윤정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영화 담당 프로그래머로서 매년 거듭했던 고민과 올해 새로이 느낀 바가 있다면 무엇인가.

강소원 프로그래머

어떤 해는 뽑을 영화가 너무 적어서, 또 어떤 해는 너무 많아서 문제다. 어떤 작품을 선택하고 배제할 것인가, 이 기준을 반문하는 과정을 매년 반복한다. 쿼터를 줄였는데도 그걸 채우기가 버겁게 느껴지는 때가 있고, 늘였는데도 아깝게 뽑지 못하는 영화가 있을 때가 있다. 초청하고 싶은데 못하는 영화가 있을 때도 있고. 심지어 부산국제영화제가 다큐멘터리 영화제가 아님에도 프리미어 상영을 원하는 감독들도 있다. 무엇이든 매번 정확한 가늠이 어렵고, 이는 프로그래머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점에서 쉽지 않다. 또한, 아시아영화펀드(Asian Cinema Fund, 이하 ACF) 중에는 다큐멘터리 지원 프로그램인 장편독립다큐멘터리 AND 펀드도 있지만,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되는 추세고 이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예산이 줄어드는 상황이라 회복을 못하는 건데, 와중에 다른 영화제는 지원 프로그램의 규모를 키워가는 게 보인다. 우리가 지원하는 영화가 적고, 다른 영화제와 월드 프리미어를 두고 경쟁도 해야 하니까 내 의지로 되지 않는 대목도 있더라.

한국 작품에 한정해서는 해마다 풍년과 흉년 사이 기복이 있다. 특히, 한국 작품은 언제나 출품의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연속이다. 마감 전 며칠 동안 작품이 엄청나게 들어오는데, 가장 많이 들어오는 날이 그중 마지막 날이다. 7월 말에 출품이 마감되고 8월 초에 선정이 끝나다보니 그 사이에 미친듯이 봐야하는데, 채워야 할 자리를 비워놓고 있으면 굉장히 불안하다. 쇼케이스 부문은 2월에서부터 채우고 있는데 말이다. 그 과정에서 갈등도 된다. 미리 도착한 영화 중 단박에 좋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도 있지만, 이 영화를 뽑을까 말까 갈등하며 끝까지 들고가는 영화도 있다. 어떤 영화는 빨리 확신에 초청을 결정하는 영화도 있지만, 그러다 뒤에서 들어오는 영화 중 더 좋은 작품을 발견하면 이미 쿼터를 썼기 때문에 놓치게 될까봐 그 두려움 때문에 자면서도 고민한다.

엄청나게 많은 영화들을 보니, 이를 판단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순간의 선택 시점도 확신이 안 생긴다. 이런 경험을 매년 반복하며 내가 어떤 경향의 영화를 뽑겠단 관점을 세우기보다 '최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 안에서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올해는 아시아 거장의 이름이 프로그램 내에 꽤 있다. 거장이 직접 만든 영화도 있고, 거장을 다룬 영화도 있다. 왕빙, 모흐셴 마흐말바프, 허안화의 경우가 전자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후자의 경우다. 그렇다고 경쟁 섹션에서 신인 감독이란 기준을 세우는 건 아니다. 몇 년 전에 하라 카즈오도 경쟁 섹션에서 메세나 상을 받았다. 그런데 올해 경쟁 섹션에 선정된 작품은 신인 감독의 영화가 많다는 게 특징이다.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영화를 선택한 건데, 결과적으로 이런 경향이 나타났다.

작품 선정에 있어서 내가 가장 먼저 배제하는 영화는 저널리즘 성격의 다큐멘터리다. 요즘은 방송국 PD도 방송용이 아닌 다큐멘터리를 많이들 제작하지만, 그리고 이런 영화도 기능과 장점이 있지만 우리 영화제의 다큐멘터리 쿼터가 이런 작품을 포용할 만큼 큰 규모가 아니라 극장에서 볼 때 미학적 가치가 있는지를 우선으로 고려한다.

함윤정

지난해 다큐멘터리 특별 기획 프로그램 '21세기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시선'에서 소개한 작품들이 관객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올해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경향과 주요 선정 기준이 궁금하다.

강소원 프로그래머

사실 프로그램 경향을 몇 가지 특징으로 설명하기가 적합하지 않다. 다만, 언제나 '다양성'에 중심을 둔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다큐멘터리 영화제가 아니라, 전체 권역과 섹션 안에서 다큐멘터리가 차지하는 편수가 적은 편이다. 그러니 대단히 다양한 영화를 선보일 수도 없고, 충분히 초청할 수 있는 쿼터도 아니어서 최대한 겹치지 않으려 국가별 안배에 힘쓴다. 개인적으로 몇 년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이를 조절하게 되었다.

쇼케이스 부문은 이와 다르다. 같은 작품이어도 거장의 다큐멘터리라면 아이콘 섹션으로 가기도 한다. 올해처럼 스페셜 스크리닝으로 갈 수도 있고. 여태 그럴 기회는 없었지만 오픈시네마도 가능하다. 쇼케이스 부문 영화들은 이미 다른 영화제에서 소개된 작품이니 좀 더 대중적으로 관심을 많이 받거나, 높이 평가 받거나, 다큐 안에서 뚜렷한 시도를 했다거나, 혹은 상을 받은 작품 위주로 선정한다. 주로 베를린, 선댄스, 칸, 베니스 라인업 안에서 적극적으로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개인적으로 메일을 통해 링크를 보내오는 영화도 있고, 공식적으로 출품하는 영화도 있는데, 어쨌든 해외 영화제를 통해 보는 작품들은 쇼케이스 부문으로 소개한다.

반면에 출품작으로 들어오는 영화들은 경쟁 부문으로 간다.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인지도가 높지 않고, 출품 편수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올해만 두고 보면 다큐멘터리 영화가 대충 30편 안팎이다. 여기서 경쟁을 빼면 스무 편 정도가 남는다. 한국 다큐멘터리는 쇼케이스 부문 작품조차 월드 프리미어다. 아시아 혹은 한국영화가 있는 경쟁 부문 작품들은 모두 월드 프리미어이기 때문에 완전히 '발굴'에 가까운 영화를 선정해야 한다.

함윤정

올해 선정작 중 어떤 권역 혹은 국적의 영화가 많은지.

강소원 프로그래머

쇼케이스 부문 작품을 먼저 선정하다보니, 아시아에서는 이란 영화가 결과적으로 많아졌다. 네 편이나 된다. 쿼터를 고려하면 결과적으로 안배 실패라고 할 수 있는데, 흥미롭게도 올해 극영화 부문에서는 이란 영화가 한 편뿐이다. 이란이 워낙 영화 강국인데다 출품작도 많아 이러한 결과에 걱정되기도 했는데, 오히려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채워진 격이다.

 

영화 <청춘> ⓒ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강가에서> ⓒ 부산국제영화제

함윤정

올해의 선정작 중 꼭 극장에서 보아야한다거나 가능한 큰 스크린으로 보면 좋겠다고 생각한 작품이 있나.

강소원 프로그래머

스펙터클이 빛나는 다큐멘터리가 있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난 여전히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걸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라 어떤 작품이든 작은 모니터보다 큰 스크린의 극장 환경에서 보는 게 훨씬 좋겠다고 느낀다. 아이콘 섹션에 초청된 왕빙의 <청춘>은 꼭 대형 스크린을 요구하는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극장에서 본다면 영화 체험의 면에서 확연히 다른 리듬을 맛볼 거라 생각한다.

특별상영되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의 경우, 시각적으로 굉장히 미니멀한 영화다. 흑백의 화면 속 피아노 한 대와 연주자 한 명이 전부다. 이를 어떻게 촬영하고 편집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만족할 만한 퀄리티로 나왔다. 이 영화는 굉장히 좋은 사운드 시스템 하에서 보면 라이브 콘서트를 보러 갔을 때 우리가 느끼는 특별한 감흥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렇다고 그게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는, 굉장히 큰 시청각적 감흥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돌비 애트모스 영화다. 그래서 우리 영화제에서 가능한 최고의 사운드 시스템이 어디일지 생각했고, 중극장과 스타리움관에서, 단 두 번만 상영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환경에서 상영할 때 이만한 사운드 퀄리티가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물리적 조건이 만족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상영하지 말자는 결론을 내린 거다.

함윤정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왕빙의 <청춘(봄)>과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강가에서>, 허안화의 <엘레지>가 상영될 예정이다. 특히, 이란 출신의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그의 딸 하나 마흐말바프와 함께 직접 영화제를 찾을 예정이라 들었는데. 두 남성의 보이스 오버와 마흐말바프 일가의 영화 푸티지를 결합한 <강가에서>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를 시적인 방식으로 감지하게 한다면, 하나 마흐말바프의 작품 <아프간 리스트>는 보다 동시대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다큐멘터리 영화의 소명을 다한다. 두 부녀 감독의 작품을 함께 묶어 상영할 예정인가.

강소원 프로그래머

그렇다. <강가에서>와 <아프간 리스트>는 각각 완전히 독립적인 영화지만,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련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모흐센 감독이 연출한 <강가에서>가 그 자신의 집안 영화를 회고하는 영화에 가깝다면, 동시대를 비추는 하나 감독의 <아프간 리스트>에서는 모흐센 감독이 주연으로 등장한다. 두 편을 함께 상영하면 관객의 입장에서도 흥미롭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사실상 두 작품을 붙이지 않으면 초청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강가에서>의 러닝타임이 50분이라 엄연히 중단편이다. 그래서 부국제가 선정해서 초청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닌데, 마침 두 편을 함께 보내주셨다. 그러다 보니 묶어 상영하는 방법이 있겠구나 싶어 예외적으로 선정하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모흐센 마흐말바프 집안의 영화를 꾸준히 봐왔던 관객의 입장에서 <강가에서>를 보고 다양한 감동이 있었다. 우선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이다. 각 작품이 아주 짧은 클립으로 등장하지만 개별 작품만의 맥락이 새삼 떠오르기도 하고, 이제 이란에서 사는 것조차 힘들어 유럽을 떠돌아야하는 그의 처지도 떠올랐다. 영화적으로 너무 뛰어난 걸작이라기보단, 마흐말바프 집안이 오래전부터 해왔던 것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 그들이 신작을 만들면 이를 소개하는 곳이 당연히 부산국제영화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와주신다는 소식을 들으니 너무 감사하기도 하다.

 

영화 <아프간 리스트> ⓒ 부산국제영화제

사실 카불 공항이 지옥이 된 상황에서 마흐말바프 감독이 영화제에 메일을 보내신 적이 있다. 이 사태를 그냥 두면 반 탈레반 진영의 예술가들이 처형될 것이 뻔하니, 부산국제영화제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물어보시더라. 그들을 구출하는 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뭐가 있나 전혀 떠오르지 않았는데, <아프간 리스트>를 보면 이분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제로 정말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린다. 그러고 보면 모흐센 감독의 영화도 그렇다. 극영화 안에서도 다큐멘터리 현실 안에서 시작하는 분이고, 그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실제 영화 속에 반영된다. 그들의 소망이 비극적인 현실 안에서 진심으로 와닿는다. 지금 봐도 훌륭한 영화들이다. 사실 이전의 영화들이 더 좋은데, 관객들이 이번 작품을 보고 그들의 이전 작업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좋겠다.

함윤정

이란의 영화 감독이라 하면 대부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먼저 떠올린다. 마흐말바프 일가의 영화를 보며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와는 또 다른 이란 영화의 세계를 발견하고 개인적으로 놀랐다.

강소원 프로그래머

키아로스타미는 별로 정치적이지 않지 않나. 대신 그만의 고유한 세계가 있고, 좀 더 미학적인 추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마흐말바프는 훨씬 인도적인 차원에서 현실 정치와 밀착해있다. 그에게는 투사의 면모도 있다. 그렇다고 마흐말바프가 키아로스타미에 비해 미학적으로 뒤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각자 다른 작업을 할 뿐 누가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 두 분도 서로의 작업을 존중하기도 했고. 영화제에 김지석 선생님이 계실 때 마흐말바프 일가의 특별전을 진행했고, 다섯 명의 가족 구성원이 모두 부산을 방문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다.

함윤정

다큐멘터리 장르의 특성상 기발한 소재 외에도 형식적인 면에서 신선함을 뽐내는 작품에 눈길이 갈 것 같다. 관련해 언급하고 싶은 작품이 있는지.

강소원 프로그래머

너무 많은 영화를 보다보면, 사실 다 어느 정도 비슷비슷해보인다. 아시아의 꽤 여러 국가가 비극적인 국면을 맞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상황에 놓인 국가도 있다. 이것이 극이 아닌 다큐멘터리가 될 때는 모두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다고 그 영화들이 모두 중요해지지는 않는다. 영화가 중요해지려면 주제 의식이나 메시지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작품으로서 전달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지점을 가져야 한다. 그러니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인 상황 안에서 인물을 어떤 관점으로 다룰 것인지가 명확한 영화들에 주목하게 된다.

사실 다큐멘터리가 꼭 특별한 미학적 시도나 실험을 해야만 신선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올해 선정작 중 하나인 <메뉴의 즐거움>을 연출한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경우, 1960년대부터 똑같은 형식의 영화를 만들고 있다. 스타일적인 혁신과 기술적 발전 가운데에서도 부지런히 같은 형식만을 보여주는 건데, 이를 넘어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왕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단한 스타일적 돌출점이 있는 영화가 아님에도, 이들처럼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이들의 형식이 가장 유효하고 또 중요하다고 느낀다. 앞서 말했듯 특정 인물이나 어떤 국면에 있는 상황 등을 포착하려는 감독의 관점만이 여전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 관점은 단연 형식적인 부분에서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영화 <올빼미, 정원 그리고 작가> ⓒ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유령들의 초상> ⓒ 부산국제영화제

올해 이런 지점에서 돋보인 작품은 아시아 다큐멘터리 경쟁 섹션에 있는 <올빼미, 정원 그리고 작가>다. 비주얼 아티스트로서 전시 활동을 했던 이란 여성 작가 '사라 다우라타바디'의 첫 다큐멘터리 작업이기도 한데, 이란에서 아주 유명한 소설가 그녀의 아버지에 관한 영화다. 감독이 어린 시절의 이야기 속에서 엄마가 하는 이야기, 아빠가 하는 이야기,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가 모두 다르다. 서로 다른 기억 사이의 대화 안에 증언, 기억, 편지, 아버지의 소설의 구절, 꿈이 모두 경계 없이 섞여 있다. 이렇게 말하면 아주 난해하고 혼란스러울 것 같지만, 이 모든 게 아무런 이물감 없이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진위를 판별하는 게 중요치 않은 이 방식 자체가 이란의 현대사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며 자신의 문학을 전진시켰던 감독의 아버지의 삶과 그의 문학 세계를 영화로 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마 그의 문학을 읽지 않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을 거다.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않는 방식이 21세기 다큐멘터리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그 와중에도 자신만의 신비한 색채를 보여주는 영화다.

또 모두가 함께 열광하며 뽑았던 작품이 있다. 최근 아주 잘나가는 브라질 감독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유령들의 초상>이다. 그의 극영화가 많은 주목을 받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른 작품보다 <유령들의 초상>이 좋았다. 감독이 자기 서랍 안에 모아두었던 8mm, 16mm 카메라로 촬영한 온갖 필름을 모아 영화에 대한 단상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 과정이 굉장히 매혹적으로, 올해 본 가장 좋은 영화 중 하나다. 영화라는 게 사실 모두 과거의 것을 찍어놓은 것이지 않나. 이미 그 시간은 지나갔고, 일종의 흔적으로 남은 거니까. 영화에서 감독은 오래 살았던 동네 이야기를 하는 와중, 자신이 언젠가 보았던 것과 기억 그리고 사라진 것이 나의 필름과 기억 속에 있다고 말한다. 아주 사적인 이야기부터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루는 이야기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남미 영화 특유의 마술적인 기운을 가진 영화로 매우 추천한다.

함윤정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발굴'의 측면에서 가장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나 혹은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작품이 있다면.

강소원 프로그래머

'발굴'의 측면에서는 중국 다큐멘터리 <우리들의 공화국>을 추천한다. 이 영화는 내가 여태 보았던 어떤 중국의 다큐멘터리와도 다르다. 사실 인구가 많아서 그렇겠지 싶지만, 출품작 중 중국과 인도 그리고 이란의 다큐멘터리가 정말 많다. 이 세 나라의 다큐멘터리가 전체 출품작에서 80~90% 비율을 차지한다. 워낙 많다보니 편차도 크지만, 부류도 잘 나뉘는 편이다. 그중 아주 극소수의 좋은 영화가 있는데, <우리들의 공화국>은 중국 영화 중 이런 소재도, 이런 결과물도 처음 본 케이스다. 연달아 두 번을 봤고 이에 사로잡혀서 올해 가장 첫 번째로 선정했다. 영화에는 중국의 히피 청년들이라 부를 법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두 평도 안 되는 쪽방에 온갖 청년들이 모여들어 하루 종일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음악을 듣는다. 말하자면 루저라 할 수 있는, 비생산적인 군상이다. 카메라도 이 공간 안에 함께 있는데, 이걸 대체 어떻게 찍었나 싶었다. 무정부주의적인 면모도 있고, 그들의 이야기가 궤변같으면서도 한편으로 신선한 발상처럼 들리기도 한다. 중국 안에 이런 청년 세대들이 등장한 거라 봐야 하는지, 혹은 이들이 너무 예외적인 것인지 잘 분간이 되진 않지만 어쨌든 정말 처음 보는 인물들이라 흥미로웠다. 이를 보고 관객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 ⓒ 부산국제영화제

개인적으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되살아나는 목소리>이다. 모녀이기도 한 재일 한국인 박수남, 박마의 감독의 영화다. 그동안 박수남이라는 인물이 살면서 어떤 작업을 했고, 그의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를 총망라하면서도 재일조선인과 관련한 거의 모든 소재들이 이 한 편에 담겨있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매혹되었던 부분은 온전히 삶의 주체로서 살아온 한 여성의 모습이다. 재일조선인 여성 감독으로서 작가이기도 한 박수남은 매우 특별한 용기를 갖고 페미니스트이자 투사로서 자신만의 신념을 보여준다. 그러다보니 영화의 모든 장면이 굉장히 강력한 인상을 준다. 재일조선인이 피해를 입은 상황에 울분을 토하거나 이를 비극적으로 다루는 영화는 많지만, 이처럼 모든 일에 당당히 맞서는 인물이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래서인지 영화에 매끈하지 않은 대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물에 대한 굉장한 경외심과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이번에 박수남, 박마의 두 감독님들이 영화제에 찾아와 주신다. 관객들이 꼭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박수남이라는 감독과 그의 영화를 새로이 발견했으면 좋겠다.

여기에 <노란 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는 영화의 배경과 비슷한 시기에 영화를 공부했던 이들이라면 굉장히 공감할 영화다. 봉준호 감독이 첫 영화를 만들고, 첫 글을 쓰고, 어떻게 영화 공부를 시작했고, 어떻게 비디오테이프를 수집했는지 등 모든 소소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한국의 90년대 중반은 특정 집단의 사적 이야기를 넘어 한국 영화 문화사 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기점이기도 하다. 이때,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되었고, 예술영화전용관이 만들어졌으며, 많은 영화잡지의 창간과 탄탄한 시네필 층이 수면위로 등장했다. 심지어 해외 영화제들이 한국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한데, 이 다큐멘터리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 다큐멘터리에서 찾기 힘든 풍성한 인용과 리듬을 갖고 있는데, 많은 영화가 자료 화면으로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봉준호 감독의 첫 영화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날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의 친근한 이야기가 그의 입으로 전해질 때 영감을 받고 이에 흥미를 느끼는 시네필도 있을 테다. 사실 내가 굳이 추천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관심을 받고 있어서 많이들 보지 않을까.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진리에게> ⓒ 부산국제영화제

함윤정

특별상영 선정작 중 故 류이치 사카모토의 "콘서트 필름"이라 소개한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가 눈길을 끈다. 5년 전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 상' 수상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던 그였기에 더욱 뜻깊은 상영이 될 것 같다. 더불어 故 윤정희 배우의 작품 <안개>(1967), <시>(2010) 그리고 2019년 세상을 떠난 故 설리의 마지막 인터뷰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진리에게>의 선정 소식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우리 곁을 떠난 이를 추모하는 작품 혹은 이를 상영하는 기획에 관해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강소원 프로그래머

매년 영화제 개막식을 어떻게 꾸릴 것인지 많은 고민을 한다. 무엇보다 개막식 안에서만 할 수 있는, 영화제의 의미를 더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맞추려 하는데, 올해는 '사카모토 류이치'와 '윤정희' 배우의 타계 소식을 듣자마자, 자연스레 그들을 추모하는 시간을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윤정희 배우가 한국영화공로상 수상자가 되면서 다른 형태로 이를 진행하게 됐고, 마침 사카모토 류이치에 관한 영화가 출품되었기 때문에 그들과 관련한 작품을 상영하는 방식으로 스페셜 스크리닝을 꾸렸다.

<진리에게>에 관해 간단히 소개하기로는 설리의 마지막 인터뷰를 다룬 영화라 얘기했지만, 이 인터뷰가 보통 인터뷰가 아니다. 작정하고 어떤 이야기를 끄집어내려 굉장히 집요하게 질문을 던진다. 영화를 보면 설리가 각각의 질문에 굉장히 고심하고 망설이며 말들을 이어간다. 사실 이 영화는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되, 많은 소스들이 자막 없이 소개된다. 친절한 설명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런 만큼 팬들이 이 영화를 볼 때 감흥이 다를 거라 생각한다. 내가 나서서 이 영화에 대해 소개하기보다, 극장에서 이 영화가 관객들과 잘 만났으면 한다. 거기서 시작되는 영화라고 여긴다.

함윤정

작년이 팬데믹 이후 '정상화'를 선언하며 재도약에 시동을 건 한 해였다면, 올해는 행사 운영의 측면에서 변화를 더욱 여실히 체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는 관객의 입장에서 기대할 만한 이벤트가 있을까.

강소원 프로그래머

일본의 '하라 카즈오' 감독을 올해 메세나 심사위원으로 모시며 그의 마스터 클래스를 마련했다. 특별전 형태로 감독님의 이전 영화를 상영하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최근에 <극사적 에로스>(1974),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1987), <전신 소설가>(1994) 등 하라 카즈오의 다큐멘터리를 다시 보며 새로이 놀라고 있다.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나 감독들이 그의 작품을 보고 또 직접 만난다면 아주 많은 자극을 받을 거라 생각한다. 아마 논쟁적인 지점에서 대화를 나누고픈 마음도 들 거다. 10월 9일,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시간이 될 테니 부디 많은 분들이 참여하시면 좋겠다.

[인터뷰 함윤정 영화평론가, badasal2@ccoart.com]

함윤정
함윤정
부산 가덕도에서 생활하며 영화와 바다에 대해 생각하고, 극장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운영하는 꿈을 꾼다. 미학을 공부하러 간 대학에서 영화를 찍은 후로 좋은 관객이 되면 나은 삶을 살게 되리란 이상한 믿음을 갖게 됐다. ‘좋은 관객’이란 무엇일까? 나의 글과 말은 늘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좋은 관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영화를 더 아끼게 되고, 지난밤 꿈에서 본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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