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뛰어넘을 수 없어 아름다운, 나와 당신의 거리
[Interview] 뛰어넘을 수 없어 아름다운, 나와 당신의 거리
  • 홍상현
  • 승인 2023.09.0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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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라이프> 후카다 코지 감독 인터뷰
「러브 라이프」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야노 아키코의 노래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차분한 톤으로 말하려는 내용을 조리 있게 설명하는 감독의 어조와 닮았다. (C)M&M 인터내셔널
「러브 라이프」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야노 아키코의 노래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차분한 톤으로 말하려는 내용을 조리 있게 설명하는 감독의 어조와 닮았다. ⓒ M&M 인터내셔널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사랑할 수는 있어

영원을 생각하는 순간

당신의 미소를 부둥켜안는다.

슬픔조차 기쁨으로 바뀌는

Love Life

― 야노 아키코, "러브 라이프"

신비로움과 쓸쓸함 사이를 오가는 독특한 보이스. 하지만 몇 소절만 들어봐도 전달력이 무척 뛰어난 가사가 귓가에 스며드는 야노 아키코의 이 노래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차분한 톤으로 말하려는 내용을 조리 있게 설명하는 친우, 후카다 코지의 어조와 닮았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밴드 YMO에서 함께 작업했고, 그와의 사이에 사카모토 미우라는 딸을 낳았던 눈에 띄는 개인사를 별개로 하더라도, 재즈와 팝, 테크노까지를 망라하는 폭넓은 장르를 소화하며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사랑받고 있는 이 가수를 예전에는 잘 알지 못했다. 친우로부터 자신의 신작이 1991년, 데뷔 15년째를 맞는 해 그녀가 발표한 4분 46초짜리 곡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전곡을 들어보게 된 것도 동명타이틀 작품을 다 보고 난 뒤의 일이다. 그럼에도 행간 행간에 짙은 고독의 느낌이 배어있는 가사에 영화 속 장면들을 겹쳐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긴,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릴 무렵 SNS 메시지로 평소보다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몇 번이나 화제로 등장했던 작품 아닌가. 가까스로 하늘길이 열리고 도쿄로 돌아가 유로스페이스의 초청시사에서 접한 작품이 주는 감회는 그래서 남달랐다.

 

“영화의 국제화는 여러 나라의 관객이 볼 수 있는 작품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소신을 가진 후카다 코지 감독. (C)M&M 인터내셔널
"영화의 국제화는 여러 나라의 관객이 볼 수 있는 작품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소신을 가진 후카다 코지 감독. ⓒ M&M 인터내셔널

<러브 라이프>와 관련해 떠오르는 감독의 행보는 두 가지다. <하모니움>(2016)과 비슷한 시기 시놉시스를 썼다지만 본격적인 시나리오 집필과 제작이 이루어진 건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던 시절. 당시 그는 방역의 사각지대에서 생존권을 위협받는 사회적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단체에서 홈리스들에게 식사를 나눠주는 활동에 자원했다. 이 경험은 극 중에서 노숙인 생활을 하는 박신지(수나다 아톰)의 인물묘사에 디테일을 제공했다. 다른 하나는 작품의 리얼리티에 매번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그의 한국 현지로케 실현을 위한 노력이다. 영화촬영을 위한 해외로부터의 입국이 사실상 금지된 거나 다름없던 상황에서 후카다 코지는 자신을 포함, 최소인원으로 구성된 제작진 입국을 위해 비자를 신청하고 지난한 기다림을 이어갔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렇듯 남다른 산고 끝에 세상에 나와, 베니스국제영화제부산국제영화제 초청 외에도 필자가 시니어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다카사키영화제에서 최우수조연배우상(나가야마 켄토)을 거머쥐는 성과를 거둔 <러브 라이프>는 '고독'이 서사의 중심에 놓인다는 점에서 <하모니움>과 궤를 같이한다. 아울러 위태위태한 상황을 이어가던 '가족'의 테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제3의 인물'을 그린다는 면에서는 훨씬 초기 작품인 <환대>(2010)와도 연장선에 있다. 아울러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깊은 골, 그러니까, 누구나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고독"이 갈등의 궁극적 원인이 되어, "원래 뿔뿔이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아,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있구나'하며 스스로 상황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을 보여주는 '후카다 코지 판 가족시리즈'의 '파트 3'쯤 되려나. 물론 스토리텔링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의 선택이 <옆얼굴>(2019)이나 <더 리얼 씽>(2020)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관객의 상상을 넘어서는 극적 재미를 선사하는 전혀 새로운 작품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타에코(키무라 후미노)는 이해심 많고 상냥한 남편 지로(나가야마 켄토 분), 구김살 없고 밝은 아들 케이타(시마다 텟타 분) 함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지만 상상도 못했던 불행한 사고와 맞닥뜨린다. 그즈음 행방불명이었다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전남편(박신지). 청각장애를 지닌 박신지는 동정심을 유발하는 처량한 몰골로 그녀의 주변을 맴돈다. 결국 타에코는 박신지를 외면하지 못해 누구도 이해하지만 못할 선택을 하고, 그렇게 사랑과 가족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은 그녀의 선택 앞에 무너진다.

 

지로 역의 나가야마 켄토 배우(오른쪽)는 「러브 라이프」로 일본의 국내영화제로서는 가장 긴 역사를 가진 타카사키영화제에서 최우수조연배우상을 수상했다. (C)M&M 인터내셔널
지로 역의 나가야마 켄토 배우(오른쪽)는 「러브 라이프」로 일본의 국내영화제로서는 가장 긴 역사를 가진 타카사키영화제에서 최우수조연배우상을 수상했다. (C)M&M 인터내셔널

홍상현

<러브 라이프>는 후카다 감독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최초의 한국 극장 개봉작이기도 할뿐더러 2018년 <바다를 달리다> 이후 4년 만의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이기도 하니까요. 물론 그동안 칸, 베니스 등에도 다녀오셨지만 지난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에서 방문하신 첫 번째 통상개최 영화제였다는 점에서 특히 감회가 깊으셨을 것 같은데요.

후카다 코지

부산국제영화제가 워낙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보니 초청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그에 더해 이런 타이밍에 불러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코로나19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나 세계적으로 영화업계가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다는 게 기쁘고요.

 

홍상현

20대 무렵 야노 아키코 씨가 부른 동명타이틀의 곡에 영감을 받아 이번 작품을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 4분 45초짜리 노래 한 곡에서 영감을 받아 어떻게 이런 파격적인 스토리텔링의 작품을 만들어내실 수 있었는지, 저로서는 말 그대로 '경이로울'뿐인데요.

후카다 코지

한 친구가 야노 아키코 씨의 DVD를 소개해준 게 스무 살 무렵의 일이었는데, 특유의 매력에 빠져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다보니 어느새 열성팬이 되어있더라고요. (웃음) 그 과정에서 '러브 라이프'라는 곡을 만났습니다. 듣자마자 매료되었고, 지금도 일본어로 된 노래 중에 가장 좋아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데요. 특히, "떨어져 있어도 사랑할 수 있다"는 가사처럼 사랑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게 와 닿았어요. 개인적으로 연애와 그로 인한 고양감의 긍정적인 측면만 나이브하게 부추기는 사랑노래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사람들은 모두 고독하다고 전제하면서 사랑을 노래한다는 점도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홍상현

그런데, <러브 라이프>에서는 단순히 사랑·연애의 범주를 넘어서는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계시지 않나요?

후카다 코지

그렇죠. 애초에 "러브 라이프"를 이성간의 연애에 관한 노래로 접했지만 반복해서 듣다 보니까 꼭 그 소재에만 한정된 내용이 아니지 않나 싶더라고요. 그 결과, 제 상상력이 '어쩌면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을 노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지점에 다다르면서 영화 <러브 라이프>의 요지는 물론 '러브 라이프'를 부르는 라스트 신의 이미지도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게 제가 스물세 살 때 일인데요. 일단 '이 영화 최고의 타이밍에 노래를 삽입한다'를 작품구상의 최대목표로 정해놓으니까, 나머지도 연상게임처럼 자연스럽게 맞춰져 가더군요.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던 시절. 방역의 사각지대에서 생존권을 위협받는 사회적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단체에서 홈리스들에게 식사를 나눠주는 활동에 자원했던 감독의 경험은 「러브 라이프」의 인물묘사에 디테일을 더해주었다. (C)M&M 인터내셔널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던 시절. 방역의 사각지대에서 생존권을 위협받는 사회적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단체에서 홈리스들에게 식사를 나눠주는 활동에 자원했던 감독의 경험은 「러브 라이프」의 인물묘사에 디테일을 더해주었다. ⓒ M&M 인터내셔널

홍상현

그래도 저로서는 여러 가지로 감독의 전작들과의 관련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예컨대 고독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첫 번째 칸영화제 수상작 <하모니움>과 공통점이 있고, 주인공이 무척 독특하면서도 강인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옆얼굴>이나 <더 리얼 씽>과도 일정 부분 닿아있더라고요. 이 모든 것이 단지 무의식의 산물인 것 같지만은 같은데, 감독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후카다 코지

세상에 무의식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죠. 따라서 제가 영화의 내용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차치해두고서라도 제가 의식적으로 '고독'이라는 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영화를 만들면서, 저는 늘 '가장 믿을 수 있는 어떤 것'을 그려보고 싶어 합니다. 그 몇 가지가 이를테면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같은 불가항력적인 일이나 '고독'같은 주제고요.

다음이 여성 주인공에 관한 건데요. 제 작품에 여성 주인공이 많이 등장하지만 딱히 의식을 해서는 아닙니다. 스토리를 생각하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때가 있는가하면, 츠츠이 마리코 배우의 경우처럼 특정한 인물을 놓고 작품을 기획할 때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유를 생각해보면, 사회적으로 좀 더 많은 억압을 받는 쪽으로 카메라를 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지점에 여성이 있더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홍상현

전작과의 연관성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 보고 싶은데요. 감독의 영화에서는 늘 아이가 이야기의 중심부에서 빠져나가는 시점부터 직전의 내용·분위기와 완벽하게 차별화되는 흐름이 이어집니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후카다 코지

이 부분도 제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의 영역'이 될 것 같습니다.

<러브라이프>와 <하모니움>은 비슷한 시기에 시놉시스를 쓴 작품들이고, 두 편 모두 '미처 생각지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폭력'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까닭에 비슷한 점이 있지요. 저 자신 삶의 불합리함에 가장 민감했지만, 저항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어 불안으로 가득 찬 10대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다 보니 '무방비 상태에서 가해지는 폭력'을 상상하면 자연스럽게 그것에 노출된 아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어버리는지도 모르겠어요. 게다가 삶에 대한 불안은 어른이 된 지금도 매일 느끼고 있기 때문에 명쾌하게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행방불명이었다가 불현 듯 나타난 타에코의 전남편 박신지(왼쪽). 그는 처량한 몰골로 내내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결국 타에코는 누구도 이해하지만 못할 선택을 하게 된다. (C)M&M 인터내셔널
행방불명이었다가 불현 듯 나타난 타에코의 전남편 박신지(왼쪽). 그는 처량한 몰골로 내내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결국 타에코는 누구도 이해하지만 못할 선택을 하게 된다. ⓒ M&M 인터내셔널

홍상현

한편 <러브 라이프>에서는 전작과의 명확한 차이점도 나타나는데요. 예컨대 인물을 통한 직접적인 상징(<하모니움>에서 야사카가 입고 있는 옷 색깔의 변화 같은)은 줄어든 반면, 폭력의 직접적인 묘사자체는 피했던 이전의 경향과 달리 장례식장에 나타난 박신지가 타에코의 따귀를 때리는 장면은 대단히 충격적이었어요.

후카다 코지

제 작품에서 신체적 폭력을 묘사하는 대부분의 방법은 '따귀를 때리는 것'입니다. 이는 폭력장면을 가급적 간략하게 그리기 위한 방법이기도 한데요. 그런 점에서 보면 <러브 라이프>도 이전 작품들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이 행위가 각각의 작품에서 하는 역할은 저마다 다른데 <러브 라이프>에서의 경우는 가장 위험한 의미를 내포한 폭력이라 할 수 있어요. 박신지의 행동은 불합리한 폭력에 해당하고 타에코도 이를 결코 긍정하지 않거든요. 그러면서도 '케이타의 죽음이라는 불합리를 타에코 못지않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를 내는 인물이 있었다'는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더해진 묘사인 겁니다. 아울러 박신지와 타에코의 위태위태한 공존·의존관계를 상징하기도 하지요. 결국 이 또한 환상에 불과했음이 나중에 드러나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조하고 싶은 점은 폭력에 반대하는 것과 이를 영화 속에서 그리지 않는 건 명확하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불합리한 폭력이 분명 존재하고, 이것이 인간의 복잡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심리와도 연결되어 있는 이상 영화의 모티브로 삼을 수 있으니까요.

 

홍상현

마침 화제로 등장한 김에 말씀드리면, 박신지야 말로 여러 가지 면에서 큰 의미를 지닐뿐더러,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논쟁적이기도 한 캐릭터 아닌가 싶은데요.

후카다 코지

이 이야기는 구상단계에서부터 한 아이를 둘러싼 슬픔을 통해 엄마와 그 남편, 그리고 전 남편이 서로 간에 존재하는 골의 깊이를 확인해 나간다는 내용이었고, 따라서 박신지 또한 핵심인물이었지만 '한국인 박신지'라는 설정은 나중에 추가되었습니다. 그보다 귀가 불편해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설정이 먼저 추가되었지요. 타에코와 전남편 사이에 어떤 공통의 언어가 존재하는데 현재의 남편은 이를 모른다는 전제를 세워놓기 위해서였어요.

마침 이런 구성을 하고 있을 즈음 도쿄국제농어영화제로부터 영상워크숍 강사 의뢰를 받고 많은 장애인 분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수화가 일본어나 한국어 이상으로 풍부한 표현의 영역을 가진 언어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영상적인 언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요. 아울러 한 가지 의문 또한 품게 되었는데요. '내 영화에 왜 지금껏 청각장애인이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의문이 주인공의 전남편을 청각장애인으로 그리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요.

한국인이라는 설정은 이와 또 다른 경로를 거쳐 정해졌습니다. '떨어져 있어도 사랑할 수는 있다'는 내용의 노래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그리는지는 대단히 중요하죠. 이를 위해 타에코와 전남편 사이에 예를 들면 '다른 직장'정도를 뛰어넘는, 좀 더 먼 거리감이 필요했어요.

 

시부모는 타에코에게 구세대의 대표 같은 존재. 하지만 타에코와 같은 젊은 세대와 가부장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세대가 딱히 어떤 명확한 경계선에 의해 나뉘어져 있는 건 아니라는 게 후카다 코지의 생각이다. (C)M&M 인터내셔널
시부모는 타에코에게 구세대의 대표 같은 존재. 하지만 타에코와 같은 젊은 세대와 가부장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세대가 딱히 어떤 명확한 경계선에 의해 나뉘어져 있는 건 아니라는 게 후카다 코지의 생각이다. ⓒ M&M 인터내셔널

홍상현

그 과정에서 가깝고도 먼, 그러니까 '외관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지만 문화적으로는 무척 다른 면 또한 가지고 있는 한국의 사람'이라는 설정은 대단히 효과적이었겠네요.

후카다 코지

맞습니다. 그렇다보니 일본 국내가 아니라 바다를 건너,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의 사람으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느새 전남편이 '한국인 박신지'가 되어있었어요.

 

홍상현

그리고 또 하나, 박신지 다음으로 세간에서 말하는 보통의 가족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타에코의 시어머니, 아키에(칸노 미스즈 분)가 눈에 띄더라고요. 케이타의 죽음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나머지 입신을 하게 되지만 여전히 마음의 위안을 얻지는 못하잖아요.

후카다 코지

시부모는 타에코에게 구세대의 대표 같은 존재입니다. 다만, 타에코와 같은 젊은 세대와 가부장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세대가 딱히 어떤 명확한 경계선에 의해 나뉘어져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최근의 복잡한 사회적 상관관계를 살펴보더라도 '세대론'이란 크게 의미가 없거든요. 타에코 역시 청년세대이지만 오히려 가부장적 억압에 노출되어있고요.

게다가 <러브 라이프>의 갈등구조는 죽음에 대한 불안(존재에 대한 불안과도 겹치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고독이란 건 모든 세대의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여기서 세대의 차이란 그저 오차범위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케이타의 죽음으로 인해 잊고 지내려 했던 실존의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니까요.

 

홍상현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타에코와의 관계를 유지해가려고 노력하고, 끝내는 비교적 낙관적인 전망을 보여주는 인물인 지로의 경우, 현대의 가부장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인물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후카다 코지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인간의 가치관, 특히 사회나 전통에 뿌리를 둔 가치관은 세대에 따라 쉽게 달라지지 않지요. 지로는 상냥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가사노동을 분담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최대한 배우자를 이해해보려 노력합니다. 그렇듯 나름 진보적인 면도 있는 남성이지만 끝내 가부장제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한계를 지니고요.

 

“키무라 배우의 캐스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건 그녀의 사진이었습니다. 사진에서 본 부드럽고, (좋은 의미에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 보이는 개성이 애초에 제가 구상했던 타에코의 이미지와 아주 가까웠기 때문인데요. 막상 본인을 만나보니까 시원시원하고 심지가 굳은 성격이라 더 재미있었어요.”감독의 술회다. (C)M&M 인터내셔널
"키무라 배우의 캐스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건 그녀의 사진이었습니다. 사진에서 본 부드럽고, (좋은 의미에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 보이는 개성이 애초에 제가 구상했던 타에코의 이미지와 아주 가까웠기 때문인데요. 막상 본인을 만나보니까 시원시원하고 심지가 굳은 성격이라 더 재미있었어요."감독의 술회다. (C)M&M 인터내셔널

홍상현

평안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큰 감정의 동요를 경험하고, 작품전반에 깔려있는 고독의 정서를 완벽하게 체화해준 키무라 후미노 배우의 연기가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연출의 포인트가 궁금해지는데요.

후카다 코지

키무라 배우의 캐스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건 그녀의 사진이었습니다. 사진에서 본 부드럽고, (좋은 의미에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 보이는 개성이 애초에 제가 구상했던 타에코의 이미지와 아주 가까웠기 때문인데요. 막상 본인을 만나보니까 시원시원하고 심지가 굳은 성격이라 더 재미있었어요. 매사에 조심스럽고 어딘가 연약한 타에코가 아니라 사람들의 폭언에도 대거리를 할 수 있는 타에코를 그려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아울러,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부장제의 억압에 더 크게 상처받는 모습을 보이는 의외성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고요.

 

홍상현

촬영현장에서는 어떠셨나요.

후카다 코지

일단 배우와 감독으로서 처음 호흡을 맞춰보는 만큼, 리허설에 충분히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또, 제가 권해드리는 명작을 보고 연기란 무엇인지에 관해 대화를 나눠보는 시간도 가졌고요. 아울러 당부를 드린 점은 감정이나 성격, 그 밖의 캐릭터를 연기로 설명하지 않도록 해주십사 하는 거였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눈앞에 있는 공연자와 제대로 소통하는 연기를 해 달라는 부탁도 드렸고요. 그밖에는 워낙 경험이 많은 연기자이신 점을 감안해 세세한 지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후카다 코지는 자신에 영화에서 결정론적 표현을 극력 배제하는 걸로 유명하다.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모두의 작품이 되어버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C)M&M 인터내셔널
후카다 코지는 자신에 영화에서 결정론적 표현을 극력 배제하는 걸로 유명하다.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모두의 작품이 되어버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 M&M 인터내셔널

홍상현

극 중에서 가족의 시선으로 설정돼 있는 첫 번째 롱 쇼트 외에도 타에코와 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롱 쇼트가 다시 한 번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의도하신 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후카다 코지

이른바 '롱 쇼트'는 이야기의 구성이나 몽타주의 문맥에 따라 수행하는 역할이 달라지기 마련이지요. 저로서는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두면서 따로 설명하는 건 피하고 싶은 부분인데요. 그럼에도 굳이 설명을 해보자면 딱히 등장인물의 시점이 아닐 때의 롱 쇼트는 그 순간 인간을 세계에 매몰된 작은 존재, 다시 말해 이야기의 주체가 아니라 보다 큰 구조 아래 있는 존재로 표현하고 싶을 때 사용합니다. 허나, 여기서 '보다 큰 구조'와 관련해서는 뭔가를 특정해서 사고하지 않으려 노력하고요. 또, 촬영지의 경치에 지나치게 매료되어 찍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결국 영화의 흐름에 맞지 않아 편집과정에서 잘려나가게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웃음)

 

홍상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피로연 장면에서 타에코가 혼자 추던 쓸쓸한 춤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그녀의 외로움을 극대화시켜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찍으신 건가요?

후카다 코지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 의도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오히려 그녀를 커다란 하나의 '여백'으로 만드는 것이었거든요.

그 여백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는 관객 여러분께 달려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외로움일지, 해방감일지, 혹은 개운치 않은 기분일지는 전적으로 관객 한 분 한 분의 느낌에 기댈 수밖에 없어요. 바로 그 여백이 관객의 상상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2시간에 걸쳐 타에코의 이야기와 그녀를 둘러싼 인간상을 그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홍상현

이제 슬슬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네요. 평소 이런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편이지만 워낙 기대했던 작품이었던 지라 전반적인 감상에 대한 코멘트를 해 보면, <러브 라이프>는 인물 각자의 연기보다 타에코 주변의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상태에서 보여주는 상호작용과 총체적인 표현이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후카다 코지

감사합니다. 영화를 만들 때, 저는 가능한 한 등장인물을 하나의 관계성 안에서 그리고 싶어 해요. 사람이란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지, 누구를 대하는지, 순간순간 성립되는 관계성 속에서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얼굴을 바꾸기 마련이니까요. 게다가 쉽게 속마음이나 진심을 드러내지 않고, 애초에 무엇이 진심인지 본인조차 알 수 없을 때도 있겠지요. 그러니 사람들은 이런 관계성의 그물망 속에서 나타나는 표정이나 행동을 통해 누군가의 기분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작품을 만들 때 우선 관계성과 그 추이를 최대한 꼼꼼하게 그리려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감독은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타에코를 커다란 하나의 ‘여백’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C)M&M 인터내셔널
감독은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타에코를 커다란 하나의 '여백'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C)M&M 인터내셔널

"이번에 한국에서 처음 극장 개봉의 기회를 얻은 제 새 영화, <러브 라이프>에는 잘 아시다시피 한국과 관련한 캐릭터와 현지를 배경으로 하는 장면 등이 등장합니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일단 가장 가까운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이는 역으로 말하면 이런 질문이 나올 만큼 일본영화에서 다른 문화를 다루는 사례가 많지 않았다는 반증도 되겠고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영화의 국제화는 여러 나라의 관객이 볼 수 있는 작품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게 제 평소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러브 라이프>의 한국 개봉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부족하나마 즐겨주셨으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일본에 머물며 현지개봉 신작 리뷰를 게재하느라 진즉에 끝내놓은 <러브 라이프> 인터뷰 게재를 늦추는 사이,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최근 후카다 코지가 준비 중인 새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 열리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 투자·공동제작 마켓인 APM 2023의 공식 선정작이 되었다는 것. 한국의 강윤수 배우가 출연, 칸영화제 ACID 부문에 초청되어 화제를 모은 <야마부키>(2022),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방콕 나이트>(2016)의 오사나이 데루타로 프로듀서가 함께하고 프랑스와 일본 두 나라가 공동으로 제작하는데 오카야마현 나기초가 서사의 무대란다. 그리고 보니 지난겨울, 그가 온통 함박눈으로 뒤덮인 현지 사진을 보내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원고를 정리하던 중 나눈 안부전화에서 내용을 물어보려다 입을 다문다. 한 두 줄짜리 대략적인 줄거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이야말로 후카다 코지 영화의 매력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인터뷰 홍상현, krpopper@ccoart.com]

 

 

러브 라이프

LOVE LIFE

감독

후카다 코지Koji Fukada

 

출연

키무라 후미노Fumino Kimura

나가야마 켄토Kento Nagayama

수나다 아톰Atom Sunada

야마자키 히로나Hirona Yamazaki

시마다 텟타Shimada Terra

나츠메 미토Mito Natsume

칸노 미스즈Misuzu Kanno

타구치 토모로오Tomorwo Taguchi

 

수입|배급 M&M 인터내셔널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23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년 7월 19일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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