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ABOUT] 게임사회 : 또 다른 현실의 리얼리즘
[TALK ABOUT] 게임사회 : 또 다른 현실의 리얼리즘
  • 이현동
  • 승인 2023.08.28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게임사회》

2019년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게임을 도박중독과 같은 질병 코드인 ICD-11에 등재하고 공식적으로 공표했다. 이는 큰 파장을 일으켰고, 많은 국가에서 "게임은 OO이다"라는 캠페인을 열기도 했다. 작년 초 대한민국에서는 게임을 비롯한 모든 문화 콘텐츠를 비교하며 게임을 질병으로 규정하려 했던 윤석열 캠프에선 각종 여론에 반발로 이를 빠르게 철회하기도 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게임을 하는 유저와 하지 않는 유저 사이는 꽤 큰 '갭'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뿐더러 이제는 게임이 사회에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표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되는 《게임사회》는 게임이 사회로 틈입하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현상을 주목한다. 여기서 파생되는 질문은 왜 '게임예술'이 아닌 '게임사회'라는 이름으로 전시회가 개최되었느냐는 점이다.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문제를 제기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미국 영화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로저 에버트'(Rober Ebert)였다. 그는 2005년도에 「비디오게임들은 절대로 예술이 될 수 없다」(Video games can never be art)라는 글을 썼다. 이 글의 논지는 예술의 목적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는 예술이 점수와 목적, 그리고 결과와 관계없는 것이라면 게임은 승부를 목적으로 한 명확한 이유가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진술했다. 지금으로서는 게임의 모든 요소를 '승부'(Win)로만 결부시키는 빈약한 주장으로 보이지만, 당시 에버트의 영향력이란 굉장해서 많은 이들에게 많은 논쟁의 여지를 주게 되었다. 이 글에는 무려 5,000건 이상이 되는 코멘트가 달렸고, 이후에 비평가와 게임 프로듀서, 연구자들은 이 주제를 진지하게 탐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염두에 둘 것은 에버트와 게임 전문가 사이에는 확연한 '간극'이다. 앞서 말했듯이 게임을 하는 유저와 하지 않는 유저이 사유할 수 있는 범위란 극히 협소한 것이고, 심지어는 에버트 같은 사람의 의견은 취향에서 머무는 것으로 비평적 관점이라 볼 수 없다. 마치 선입견에 매몰된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당시 로저 에버트는 과연 어떠한 게임을 해봤을지 궁금하다.

 

ⓒ 서울국립현대미술관

초기에는 '목적'으로만 사유되었던 게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미적'으로도 향유할 수 있는 게임이 등장한 건 그리 먼 시대가 아니었다. 여기서 '미적'이란 다채로운 서사와 캐릭터, 실사와 판별할 수 없을 정도의 그래픽 발전, 각종 멀티미디어 요소가 그 예들이다. 에버트와 같은 전근대적 사유를 갖고 있는 예술 근본주의자들에게 이러한 진화는 게임을 한편으로 예술이라 부르지 않기가 어렵게 됐다. 행위를 촉발해 내고, 사유 방식을 유기적으로 변환시키는 게임은 미디어아트를 포함해 점차 종합예술로 융합되기도 시작했다.

작년에 워크룸프레스에 번역되어 출간된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도 이 일환으로 유의미한 분석을 실행했다. 간략하게 말해 이 책은 각종 게임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사례를 종합하여 게임이 한편의 행위이자 예술로 규명하는 작업임을 천명한다. 그는 게임의 실천성(practicality)이 사회적 가치로 접근을 꾀할 수 있으며 윤리, 도덕, 교육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염두하고 있다. 이 글은 서울현대미술관에서 진행중인 전시 《게임사회》로 진입하기 전에 필요한 예비 작업이 무엇인지 조망해 보고자 한다. 50여 년이 된 게임의 역사를 전부 파악하기보다 사회화의 욕구를 촉발하게 된 몇몇 게임들을 통해 이것이 예술을 넘어 사회를 형성하는 데 어떤 작용을 하는 지를 개괄하여 볼 것이다.

 

게임사회와 '오픈 월드'

게임은 현재 우리 삶에 깊숙이 잠식해 있다. 과거 TV를 통해서 집에서만 할 수 있었던 게임이 이제는 확장되어 어디에서나 핸드폰 혹은 태블릿 PC 등을 이용하여 쉽고 편리하게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오늘날 게임이 '미술관'으로까지 확장되어 예술로 이행되고 있다는 점은 단순히 여가 활동을 넘어서 사회와 문화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코드로 호명되기도 한다. 특히,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게임은 소수가 모여 향유하는 오락이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플레이어들과 범지구적으로 서로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는 사회화 작용도 할 수 있게 됐다. 게임의 사회화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도 등장하는 매력적인 상상이다. 대표적으로 VR 슈트를 통해 완벽한 가상현실을 구현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2018)과 가상공간에 갇혀버린 이야기를 기점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소드 아트 온라인> 등은 게임을 현실이란 영역으로 끌고 온 사례였다.

 

ⓒ 마인크래프트 공식 홈페이지

단연 분기점이 되는 요소는 '오픈 월드'(Open World)의 등장이다. 오픈 월드에 기원이 되는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 이하 MMORPG)는 유저들과 특정 세계관에서 각기 다른 직업적 특성을 갖고 정해진 목적을 수행하는 형식을 지닌다. 동맹과 길드 등을 통해 공동목표를 수행하는 길드전, 공성전, 레이드 시스템 등은 현실을 방불케 하는 또 하나의 사회로 군림했다. 대표적으로 <리니지>, <라그나로크>, <스톤 에이지>, <다크 에덴>, <마비노기>, <와우>(World of Warcraft) 등이 해당한다. 

MMORPG와 오픈 월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유도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1997년 9월 25일 발표된 <울티마 온라인>(Ultima Online)은 MMORPG의 시초이면서 오픈 월드의 실마리를 제공한 게임으로 두 종류의 요소를 일정 부분 통합하고 있다. 높은 자유도가 장점인 이 게임은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렙업이라는 단순한 선택지 말고도 30가지의 스킬 조합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캐릭터를 설정하거나 무제한 직업 선택, 집을 건축하는 하우징 시스템으로 선택의 폭을 넓혔다. "We create World!"(우리가 세계를 만들었다!)는 울티마 온라인의 슬로건은 게임이 사회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한 뛰어난 사례가 됐다. 그 이후 창작자가 유저에게 가장 많은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알려진 게임은 단연 <마인 크래프트>였다. 역대 가장 많이 팔린 게임으로 꼽히는 마인 크래프트는 울티마 온라인과 달리 어떠한 세계관도 없고, 서사도 없다. 이 게임의 파급력은 여기에 있는데, 기존에 없던 모드와 세계관, 맵을 유저가 직접 창작함으로 매번 다른 게임을 체험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오픈 월드의 특징을 극도로 살린 마인 크래프트는 2011년 정식 발매 이후에도 여전히 유튜브에서 쉽게 콘텐츠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조금은 결이 다르긴 하지만 <GTA V>(Grand Theft Auto)도 오픈 월드에 해당한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에서 유저는 범죄조직과 손을 잡고 부를 축적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들을 일망타진할 수도 있다. 또한 각종 차량이나 헬기, 탱크 등의 이동 수단을 갈취하거나 지나가는 시민들을 폭행하면 경찰이 출동하는 등의 디테일도 이 게임이 가진 정체성을 대변한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모드를 활용해 캐릭터, 사물, 배경 등의 모델링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어벤져스가 유행하던 시절엔 아이언 맨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모드가 개발되어 유저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기도 했다.

자유도가 높은 오픈 월드는 자기 반영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사회를 구축하는 일원이자 참여자로 정의한다. 네런란드 철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를 사회적 그룹을 형성하고, 예술과 놀이의 효과들 사이에 잠재적 연결 관계가 있음을 지시하기도 한다. 이는 오픈 월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여기서 가장 주요한 것은 게임의 행위를 대상화할 목표가 있느냐의 차이다. 우리는 <테트리스>와 <팩맨>을 하면서 그것이 나를 대신하는 아바타라고 여기지 않지만, 게임을 시작하기 전 취향에 맞게 설정한 캐릭터에는 몰입하며 그것을 '나'라고 여긴다. 그건 단순히 '나'뿐만 아니라 오픈 월드 장르에서 다른 유저들과 집단의식을 공유함으로 발생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같은 목표를 갖고 있는 유저들이 모인 공동체는 게임이란 사회구조에서 또 다른 세계에서의 지위를 갖고 구조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게임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에는 유저가 오로지 룰 안에서 목적을 수행해야만 하는 근대적 행위자에 머물러 있다면 오픈 월드가 활성화된 이후부터 게임은 탈 근대적 주체로 행위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탈근대가 되었다는 건 마치 마르셀 뒤샹 이후의 미술이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었다는 말과도 유사하다. 이전까지 창작자가 규정한 구조 안에서 게임을 대상화했다면 이제는 게임 안에서 '나'를 주체적으로 표현하고 심지어 창작자로 호응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창작자가 생각하는 룰과 그 안에서 룰을 생성하는 유저 사이에서 점차 게임은 유기적으로 구축되는 '사회'가 된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2017)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또 다른 현실의 리얼리즘

이 시점에서 우린 리얼리즘이라는 주제를 마주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투영한 가상현실에서 리얼리즘이란 개념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즘』의 논의는 유효한 관점을 시사한다. 그는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라이트 노벨을 기반으로 한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으로도 환원할 수 있는)만화 애니메이션 리얼리즘을 서로 구분한다. 자연주의를 토대로 한 근대적 미학이 재현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여 주어진 의미를 찾는 데에 몰두한다면 만화 애니메이션은 매체가 구현하고 설계한 그 '안'에서의 현실을 작동시키는 것에 의미를 둔다. 말하자면 각 시대를 활개하였던 신화와 만담의 시대가 종언되고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변화로 커다란 이야기가 부재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버츄얼 유튜버(Virtual Youtuber)들의 세계에서도 고스란히 통용된다.

버츄얼 유튜버를 보는 팬은 캐릭터 안에 실존 인물이 있다는 사실보다 캐릭터 설정이 얼마나 자신의 취향과 조건에 맞는지를 고려한다. 예를 들어 VR 챗이란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콘텐츠를 진행할 때 캐릭터의 외양과 제스처를 가상현실로 받아들이지 캐릭터 뒤에 은폐된 실제 모습을 상상하며 감상하지 않는다. 여기서 해석되는 '나'는 불투명한 상태다. 버츄얼 세계에서 현실과 가상은 이러한 이중적 세계 안으로 포섭하며 행위자이자 감상자인 스스로와 기묘한 연대를 구성하게 된다. 이때 게임 세계는 뒤틀려 보이기도 하면서 유토피아처럼 보이는 온갖 종류의 혼합체로 구성된 정의할 수 없는 사회가 되기도 한다. 게임에서의 죽음은 나의 죽음에도 해당하지만, 가상에서 주어진 데이터베이스의 기록물에 불과하기도 한 것이다. 캐릭터 컨셉을 롤플레잉하는 유튜버들을 보며 감상자는 유사 신자와도 변모한다. 현실과 가상 세계의 기묘한 경계 속에서 히로키의 말처럼 게임적 리얼리즘은 재현의 요소가 아닌 그 '안'에서 머무는 감상자에게 자율적인 개입이 주는 딜레마가 있음을 말한다. 그가 말하듯 '비리얼리즘의 리얼리즘'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게임은 단지 유희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에버트와 같은 전근대적 감상자들에게 반박할 수 있는 논의는 재현의 원리로만 치환될 수 없다. 게임 그래픽이 현실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그것을 영화로 양식화할 수 있다면, 그는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 현재 계속해서 업데이트되고 있는 언리얼 엔진으로 구동되는 게임 그래픽을 보며 예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현재까지 에버트가 살아있다면 근대적 감상자에서 탈근대적 감상자 혹은 행위자로 게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짚고 넘어가자면 그가 말한 건 비디오게임이겠지만 말이다) 이제는 미적 가치 하나로도 게임을 예술로 언술할 만한 이유는 충분해졌다. 결코 마인 크래프트의 고인 물들을 모여 건축한 건물들의 위용을 보며 이것은 예술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닌텐도 스위치 게임인 <동물의 숲>을 하는 어린 플레이어가 제작한 집을 보며 이건 예술이 아니야라고 말했다간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게임으로 생산되는 행위가 어떤 창조를 통해 다시금 재탄생되고 있음을 목격할 때 게임은 진정 예술로 규정될 수 있다.

 

'Gaman'과 'Gamen'

비디오게임이 등장한 지 50년이 지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띄게 발전한 건 그래픽만이 아니었다. 더욱더 효과적으로 게임에 몰입을 위한 장치도 개발됐다. 콘솔과 조이스틱, 그리고 키보드와 마우스도 컴퓨터 게임을 운용하는 수단이 되었다. 현재는 VR(Virtual Reality)를 체험할 수 있는 기기도 점차 발전되어 게임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먼저, 염두 하고 싶은 점은 게임이 가진 범용성이란 단순히 게임을 조작할 때 있는 것은 아니다. 게임의 경험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을 벗어나 사회적인 것으로 이행한다. 트위치, 아프리카tv, 유튜브 등에서 가장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방송은 단연 게임 방송이다. 방송에서는 게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간다. 그래픽, 조작감, 사운드, 스토리 등의 이야기가 활발하게 오고가는 방송을 보면 게임을 한다는 것은 개인의 관심사가 아니라 함께 하는 커뮤니티 요소를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

 

ⓒ 하룬 파로키 <평행>(2012)

《게임사회》의 전시 카탈로그에는 '사회의 가상현실화', 즉 가상공간의 '사실성'이 일상이 된 배경에서 어떤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지에 대한 주제로 다뤄진다. 게임이 현대예술로 미술관에 전시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는 행위자와 그 행위를 감상하는 감상자가 있음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때 행위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면 감상자는 그 외적 요소를 다양하게 향유하고 고려하는 자다. 물론 이것은 우열의 문제라기보다 시선의 문제에 가깝다. 행위자보다 감상자는 객관적으로 게임을 분석할 수 있는 수용자로 위치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행위자는 창작자의 목적을 수행하는 역할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간파한 감상자인 예술가들은 게임을 한편의 예술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장르가 점차 세분되고 형식의 변화 또한 미학적으로 탐닉하기 위한 준비 과정을 거친 예술가들과 비평가들은 게임을 사회를 구성하는 현상으로도 보았다. 이번 전시회는 재현 가능성의 한계와 게임 예술, 사회로서의 공공성, 인간 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글은 간략하게나마 전시장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작품들과 이 작품들이 사회와 어떤 방식으로 감응하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미술관 지하에 큰 스크린으로 상영되고 있는 김희천의 <커터3>(2023) 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리얼타임으로 게임 속 세상에 있는 캐릭터와 실재를 번갈아 가며 보여주며 그 안에 있는 우리 존재를 탐구하게 한다. 또한 관람객들의 정보를 카메라로 수집하고 작품의 후반부에는 우리가 캐릭터가 되어 움직이기도 한다. 이는 현실과 가상의 공간 안에 틈입하고 있는 게임 세계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우리와 사건이 발생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한다. 결국 자기 반영적 성격으로서의 게임, 그리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공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게임에서 사회가 드러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전시장에서 처음 만나는 작품은 2018년 진행했던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회고전에서도 감상할 수 있었던 <평행 I-Ⅳ>이다. 이 작품은 1980년대 초반에 2차원 그래픽 이미지로부터 점차 정교해지는 비디오 게임 그래픽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며 현실을 어디까지 구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게임의 한계를 지적한다. 맨 처음에 <평행 I>은 게임사를 조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픽 기술의 진화를 설명하는 이 작품은 픽셀로 구성된 단조로운 이미지에서부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암석에 부딪히는 파도, 구름의 움직임, 뱅갈 호랑이 털과 같이 실제와 구분할 수 없는 정도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를 대표하는 작품은 <인터페이스>(1995)에서도 보여주었던 2채널 시퀀스로 병렬 배치를 통해 이를 비교할 수 있도록 한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평행 II-III>은 게임 안의 세계를 탐험하는 방식으로 플레이어의 조작에 따라 개입이 이뤄지는 것을 보게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게임개발자가 설정해 놓은 지도에서 캐릭터가 벗어나려고 할 때 이질적으로 구획될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는 오픈 월드에서 유저는 능동적인 것처럼 보여도, 결국 제한적인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리킨다. <평행 IV>의 배경은 종말 이후의 세계와 서부 사막, 그리고 L.A를 배경으로 하는 세계에서 활약하는 캐릭터를 보여준다. 점차 현실적으로 변모하는 캐릭터와 자유도의 확장은 플레이어에게 행위의 범위를 확장한다. 가령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상점에 들어가 주인을 겁박하거나 차를 강탈하거나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치고 다니며 폭력을 행한다. 하지만 NPC(Non Player Character)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 개발자가 정해놓은 시스템에 의해 규율로만 행동할 뿐, 유동적으로 감응하지 못한다. 하룬 파로키의 <평행 I-Ⅳ>은 게임과 플레이어의 관계를 게임의 발전 과정을 면밀하게 보여주지만 결국 가상이란 구조를 벗어날 수 없는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형식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하룬 파로키'가 이런 한계를 지적하는 건 게임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아닐 것이다. 이는 암묵적으로 게임이나 현실이 지닌 구조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그 과정에 있는 유저의 플레이 또한 그 결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지옥으로의 하강> ⓒ Jacky Connolly

게임을 플레이의 대상으로만 설정하지 않고 소스를 해킹하여 창작물로 만들거나 혹은 모드를 활용해서 아예 목적 자체를 바꿔버리는 작품이 있다. '코리 아칸젤'(Cory Arcangel)의 슈퍼 마리오 카트리지를 해킹한 작품인 <슈퍼 마리오 무비>(2005)와 오픈 월드 게임 <GTA V>를 푸티지로 활용한 '재키 코놀리'(Jacky connolly)의 <지옥으로의 하강>(2021)이 그 예시다. <슈퍼 마리오 무비>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공간에 버려진 마리오를 보게 한다. 게임 세계의 규칙이 거꾸로 뒤집히고, 색이 바뀌며 마리오가 공중에 떠오른다. 화면에서 패턴은 익숙한 요소와 기이한 배열이 한 대모여 추상적 기호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은 하나의 투쟁으로 보인다. 그래픽의 발전과 더불어 재현이라는 주류 문법에 대항한다는 지점에서 그렇다. 코리 아칸젤은 테크놀로지에 깊숙이 잠재하고 있는 산업화를 차단하고, 퇴행적으로 여겨지는 이전 것을 복권함으로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세계를 조명한다.

반면에 <지옥으로의 하강>은 조금 다른 맥락 속에 속해 있다. 도리스 레싱의 동명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이 작품은 가상 세계를 통해 영화와 같은 현실 세계를 구현한다. 집 없는 사람들이 곰팡이가 핀 건물 안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거나, 화려한 스포츠카가 굉음을 내며 지나갈 때 어떤 이는 황량한 장소에서 기차를 올라탄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하늘이 붉게 물들며 지옥으로 보이는 상황을 연출한다. 재키 코놀리는 팬데믹으로 인해 현실과 가상 사이에 경험한 소외감을 동기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물론 미국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두 작품에서 표명되는 것은 게임이 단순히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유희의 대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임은 사회를 관통하는 맥락이며 우회적이든 직접적이든 이미지로 언표됨을 시사한다.

 

ⓒ 서울국립현대미술관

물질세계와 세상에 팽배한 편견과 구조에 반기를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다니엘 브레이스웨이트 셜리'(Danielle Brathwaite-Shirley)의 <젠장, 그 여자 때문에 산다>(2021)를 비롯한 작품들과 '루앙'(Lu Yang)의 <유테루스 맨>(2013), <물질세계의 위대한 모험>(2020) 같은 작품들이 그 사례다.

<젠장, 그 여자 때문에 산다>는 플레이어의 반응을 실험하는 작품에 가깝다. 우리가 처음 대형 스크린을 통해 마주하는 문구는 "총으로 흑인 트랜스잰더를 보호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흑인 트랜스잰더를 쏘지 말 것"을 요청하는 안내문을 보게 된다. 우린 여기서 총을 쏠 것인지 그냥 지나칠 것인지를 선택하게 된다. 총을 쏘게 되면 그 행위는 트위치로 생중계된다. 이 게임의 목적은 무의식적으로 부과되는 게임 플레이에 대한 책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의식적으로는 특정한 집단에 가하는 선입견과 행위가 과연 응당한 것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마지막으로 전시 끝에 있는 루앙의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가상현실, 서브컬쳐, 대중음악 등을 조합한 루앙은 국적과 성별, 섹슈얼리티가 갖고 있는 한계를 초월하여 삶과 죽음이라는 궁극적 문제 앞에서 나아가는 실존적 사안에 대해 모색한다. 동양에서 볼 수 있는 기존의 예술 작품의 물신화와 정치화를 단호하게 비판하는 그의 작품은 목적과 수단에서 정체되지 않는다. 종교, 신경학, 인체를 소재로 하는 그의 작품 중에서 모든 요소가 무분별하게 뒤틀려 있는 <물질세계의 위대한 모험>(2020)은 사후세계를 탐험하게 한다. 여기서 많은 질문과 부딪히는데, 가령 "해골에도 성별이 있나요?", "고통을 감지할 육체가 없는 지옥에서 어떻게 영혼이 고문당할 수 있을까요?" 등의 질문들이다. 기존에 사후세계를 신화라는 전통의 영역을 해체하는 루앙의 작품은 우리의 사유를 개방하도록 유도한다. 루앙은 이렇게 말한다. "집 안에서 천 개의 우주를 찾을 수도 있고, 피부 속에서 하나의 우주를 찾을 수도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우주가 있음을 시사한다.

게임의 어원이 기쁨과 즐거움을 뜻하는 'gamen'과 참여나 함께함을 뜻하는 'gaman'는 이번 전시회를 진지하게 탐구할 수 있는 기원이 된다. 왜냐하면 게임 자체가 함의하고 있는 의미는 이미 '사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이 목적이란 선입견을 해방하고, 예술로 전환하기 위해 도약해야 할 요소는 바로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이다. 9월 10일까지 진행하는 《게임사회》는 게임에 대한 고정된 생각을 반전시킬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