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가까운 일상들에 대하여 ['다섯 번째 흉추' #1]
이토록 가까운 일상들에 대하여 ['다섯 번째 흉추' #1]
  • 이현동
  • 승인 2023.08.08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독립영화와 <다섯 번째 흉추>

박세영 감독의 <다섯 번째 흉추>(2022)를 단순히 독특하다 정도로 평가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에서의 독특성은 그 시기에 주류로 분배된 전형성을 넘어설 때 비로써 수식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가령 장선우 감독의 실험 영화 <나쁜 영화>(1997)나 이장호 감독 초현실주의 영화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8)는 당시에 평가가 엇갈리긴 했지만 '독특하다'의 반열에 있는 영화임을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21세기에 들어 비평가와 대중에게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던 박찬욱, 봉준호, 홍상수, 이창동, 김기덕 등은 어떤 식이 되었든 부재해 보였던 영화 문법을 갱신하는 데 역할을 했다. 현재에도 이들이 활발하게 거론되고 있는 것과 독립영화의 상관관계는 여기서 다룰 사안은 아니지만, 이는 공통으로 한국영화가 갖고 있는 현재를 바라보게 한다.

 

ⓒ 인디스토리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건 한국독립영화에서 살짝 삐져나온 듯해 보이는 <다섯 번째 흉추>의 '위치'다. 언제부터인가 한국독립영화에서 유행처럼 번진 가족 서사와 사회 문제를 겨냥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는 이 세계를 한정 짓듯이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는 독립영화가 갖는 장르적 한계를 통계로 측정한 사례들이었다. 이것은 2016년 인디포럼 카탈로그에 적힌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그러하다. '독립 장편 극영화가 여전히 주류영화의 문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 일례로 10년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과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대표적인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림자들의 섬>(2014), <초능력자>(2015), <이월>(2017), <김군>(2018), <휴가>(2020),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2021)와 같은 작품이다. 언제부턴가 한국 독립 영화라고 하면 멈칫하게 되는 이유도 이 리스트에 있다. 작년 제법 훌륭한 작품으로 주목받았던 김세인 감독<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2)도 이러한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도 동일한 이유다. 물론, 이 가운데서 두각을 나타내는 작품이 없진 않으나 형식과 스타일, 미장센을 포함한 기존 문법에서 결코 자립하는 영화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박세영 감독의 <다섯 번째 흉추>는 어찌 됐든 그런 의미에서 반가운 작품이다. 주류를 답습하는 영화 가운데서도 약동하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예술원 출신으로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단편 <캐시백>(2019)을 시작으로 다수의 실험 영화, 유명 브랜드인 루이비통(BTS와 작업한), 버버리 광고 등을 촬영하기도 하고 사진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실험 영화의 구조와 극 영화 사이에서 자신의 역량을 대범하게 표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배급사에서 이 영화의 장르를 '비욘드 시네마'(Beyond Cinema)라고 호칭한 건 실험 영화와 극 영화의 간격을 결합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 인디스토리

흉추와 곰팡이가 안에서 밖으로

신체는 가깝고도 먼 존재다. 우린 제목을 들었을 때나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다섯 번째 흉추'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는 이 영화가 흉추의 정의와 기능을 배제하고 다른 요소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우리 몸에서 '다섯 번째 흉추'는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부위다. 생명을 관장할 정도로 중요한 부위지만, 신체 내부에 은폐되어 있기에 비가시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영화에서 주요한 요소는 식별이 불가능한 내부를 덩어리를 안에서 밖으로 끄집어내는 데 있다. 영화는 계속해서 인간의 흉추를 꺼내먹는 곰팡이를 통해 인간의 형상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게 한다. 이 과정에서 서사의 경로를 차단하고 각각 인물에게도 알 수 없는 관계의 공백을 새겨놓음으로 감각을 적용하게 한다. 감각은 능동적이기도 하면서 이미지로부터 의존하는 속성을 지닌다. 관객은 이를 자립시키기 위해 스스로 감각을 해방해야 한다. 우린 이때부터 영화가 동일하게 소묘하고 있는 이미지를 관찰할 수 있다.

<다섯 번째 흉추>는 자막으로 곰팡이가 탄생할 날짜와 장소를 명시함으로 영화가 가진 근접성에 대한 화두를 계속해서 던진다. 매트릭스는 우리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자 비밀스러운 공간인 침실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신체 안에 위치한 흉추와 대응되는 공간 그 자체다. 원룸, 모텔, 환자실, 그리고 봉고차 등의 모든 장소는 인물과 인물, 인물과 공간, 인물과 곰팡이와 함께 긴밀한 구조,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이며 사적인 관계를 드러낸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클로즈업은 제한된 공간 때문에 설계된 것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이런 근접성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도구가 된다.

 

ⓒ 인디스토리

<다섯 번째 흉추>가 인물들에게 공통적으로 배분하는 좁은 장소에서 곰팡이는 그들의 흉추를 먹고 자라난다. 실상 곰팡이가 자라나는 배경에는 인간의 고통이 함께 존재한다. 곰팡이라는 속성이 습기가 누적될 때 범위가 확장되는 것이라면 여기서 습기를 은유로 표현하는 요소는 바로 '감정'일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매트릭스는 어디서 왔는지 도무지 기원을 찾아볼 수 없다. 어떠한 불법적인 실험에서도 아니고, 미지의 세계로부터 발견된 것도 아니다. 우린 오로지 매트릭스가 발화하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은연중에 감지할 뿐이다.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세입자인 '결'(문혜인)에게 시간이 늦었다며 기다리지 않고 매몰차게 가버린다. 홀연히 남은 매트릭스를 바라보는 결의 쓸쓸한 시선은 영화에 매몰된 감정을 포괄한다. 매트릭스는 누군가에 의해 버려질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트릭스가 잠재하고 있는 이미지는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구속될 수밖에 없으며 곧 감정과 연관되어 있다. 곧이어 방에 등장하는 남자친구 '윤'(함석영)에게 결은 의미심장한 대사를 한다. "사람들이 비밀을 한강에 갖다버리는 거야. 거기엔 얼마나 많은 비밀이 달려 있을까"라는 대사다. 여기엔 영화가 시간과 공간에 얼마나 밀접해 있는지 혹은 이를 이미지로 드러내기 위해서 촘촘하게 구조를 구성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이때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비행하는 새를 중간에 삽입하는데, 이는 끝 무렵에 가서도 동일하게 수미 상관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 둘이 파행될 때 결은 일 하러 가는 윤에게 가면 죽는다고 협박한다. 결은 그를 놔주며 '가, 죽어'라고 외면한다. 다음 장면에는 그녀가 걷거나 뛰는 장면, 입 모양을 클로즈업하며 반복하여 말하는 '죽어'가 계속 교차된다. 나에겐 가장 파격적인 장면으로 보이는 이 씬은 마치 매트릭스에 규칙적으로 새겨진 문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미장센과 몽타주가 어떤 통일성을 지니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곧이어 윤이 누워있던 자리에 곰팡이가 피어나고, 곰팡이는 결국 윤의 흉추를 안에서 밖으로 끄집어내 집어삼킨다.

'곰팡이가 흉추를 자양분 삼아 성장하고 있다'는 영화의 서스펜스는 공간을 이동할 때 그 형상이 더욱 비대해진다. 이별로 인해 매트릭스는 길거리에 버려지고 누군가는 이를 신고하고 누군가는 몰래 이를 가져가 다시 재활용하기도 한다. 모텔이란 공간에서 이뤄지는 시퀀스에도 마찬가지지만, 이 공간 또한 언제든 관계가 소비될 수 있는 편의적인 장소다. 한번만 하자는 남자와 거부하는 여자 사이에서 신경전이 끝나고 둘은 비로소 관계하게 된다. 잠들어 있는 그들에게 곰팡이가 다가가 흉추를 먹는다. 이때 곰팡이가 점점 인간의 형상으로 살이 붙는 장면 등을 제법 긴 시간 동안 타임 랩스로 보여준다. 여기서 두 종류의 에피소드는 SF영화에서 볼 수 있는 공포를 유발하면서도 윤리적 가능성도 시행하지 않는 진공 상태에 머물러 있다. 만약 영화가 이 장면에서 끝난다면 위에 언급한 장면은 그저 박세영 감독이 얼마나 특수효과를 잘 표현하는 지만 남게 된다. 영화에서 가장 큰 분기점이 되는 에피소드는 바로 이다음이다.

 

ⓒ 인디스토리

매트릭스가 당도한 장소가 호스피스 병동임을 눈치챈 순간 우리는 앞으로 벌어질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 '과연 곰팡이가 죽음이 가까운 환자의 흉추를 먹을까' 하는 상상 말이다. 마지막에 여자 환자는 매트릭스에서 담요에 튀어나와 있는 정체 모를 존재인 곰팡이에게 딸에게 보낼 편지를 전달해달라고 말한다. 원하는 걸 다 가져가라는 그녀에게 곰팡이는 흉추가 아닌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잡는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곰팡이에게 감정을 부여한다. 욕망을 위한 관계를 보고 성장했던 곰팡이가 모성애를 학습하게 된 것이다. 몸을 입는 곰팡이는 입과 눈, 코가 생기고 매트릭스 안에서 편지를 보관한다. 마지막으로 매트릭스는 물품을 운송하는 봉고차에 실리고 운전기사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홀로 외롭게 케익을 놓고 생일을 보내고 운전을 시작하는 운전기사의 흉추를 먹은 곰팡이는 미끄러져 어디론가 추락하게 된다. 다만 곰팡이가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운전기사의 흉추를 먹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 이후 연천군 한 호숫가에서 떠 있는 매트릭스를 보여준다. 우린 결의 대사를 떠올릴 수 있다. "강물 따라 얼마나 많은 비밀이 달려 있을까"라는 대사는 시간의 경과, 장소의 변화와 함께 생성되는 일이다. 이후 3328년이 되어 패닝 숏으로 매트릭스 자리에 버섯모양처럼 피어있는 곰팡이를 서서히 조명한다.

이때 곰팡이는 편지를 읽는다. 여기엔 아주 일상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비타민 잘 챙겨먹고, 오메가는 아침에 두 스푼 물에 타서 먹고, 밤에 커피 마시지 말고, 불면증이 찾아오면 가만히 누워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보라는 글이다. <다섯 번째 흉추>는 실험 영화 스타일을 갖고 있지만 주제만큼은 무게감을 덜어내면서 얻게 되는 효과란 안에서 밖으로 이행하는 것이 관계와 사물, 흉추, 곰팡뿐만 아니라, 심지어 편지 봉투 안에 있는 텍스트로 치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미장센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 축적되고 있는 일상을 모아 감각을 위시한 통일성 있는 주제 의식을 드러낸다.

"균류는 종마다 큰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수명이 짧다고 말한다. 어떤 종류는 하루를, 다른 종류는 일주일에서 한 달 사이를 생존한다. 물론 예외는 있는 법이다." ―프롤로그

<다섯 번째 흉추>의 프롤로그를 보며 동시대 영화의 수명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떤 영화는 엄청난 관객 수를 동원했어도 금방 잊히지만, 계속해서 회자하는 영화도 있다. 그러므로 예술이란 얼마나 예외에 해당하는 지를 다루는 영역이 아닐까. 박세영 감독의 영화가 바로 그런 '예외'라 부를 수 있는 영화라 생각한다. 유운성 평론가가 제시한 '이중구속'(현대 미학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동시대적인 장르 영화를 생산해야 하는 것, 쉽게 말하자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지향하더라도 봉준호처럼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런 '예외'를 끊임없이 탐험하는 건 모든 예술가, 그리고 비평가에 대한 책무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된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 인디스토리

다섯 번째 흉추
The Fifth Thoracic Vertebra
감독
박세영

 

출연
문혜인
함석영
온정연
정수민
김예나
홍승기
박지현

 

제작 몬스톤 픽처스
배급 인디스토리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65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3.08.02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