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의 영화일기] 2023년 7월 10일
[이상용의 영화일기] 2023년 7월 10일
  • 이상용
  • 승인 2023.07.16 1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비밀의 언덕>, <드림팰리스>, <붉은 사막>

여름을 가장 멀리하는 입장에서 극장은 최적의 피서지다. 날씨든, 영화든 극장을 나오면 뜨거운 현실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은 동일하지만, 이왕이면 스크린 앞의 뜨거움이 반갑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요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더위와는 다른 종류의 괴로움이 몰려들 때가 늘어난다.

사람들이 극장을 찾는 이유는 그 어느 때보다 명백해졌다. 뚜렷한 액션이나 큰 스크린으로 보아야 체감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세워둔다. 화면빨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얼마든지 OTT를 통해 관람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과거에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규제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전쟁 특수로 인한 경제적 풍요로움과 함께 가정용 텔레비전의 보급이 본격화됐다. 1959년에는 텔레비전이 가족당 한 대씩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194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방송 프로그램과 채널도 늘어났고, 보급대수가 팽창하면서 보편적인 문화로 잡기까지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할리우드는 안방극장이라는 상대 앞에서 긴장해야 했다. 우위를 내세우기 위해 세운 전략 중의 하나가 화면 사이즈의 차이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스필버그의 <파벨만스>(2022)의 초반부에 등장한 <지상 최대의 쇼>(1952)의 감독 세실 B 드밀은 네덜란드 이민자의 가족이었는데, 그는 이 시기에 스크린을 점령한 인물이 되었다. <삼손과 데릴라>(1949), 과거 자신의 무성영화를 유성으로 만든<십계>(1956) 등을 선보이며 대표적인 흥행 감독이자 아카데미의 단골손님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시기에 제작한 <지상 최대의 쇼>와 성서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표면적으로 달라 보일지 몰라도 본질은 같다.

<지상 최대의 쇼>의 줄거리는 스파이물을 뒤섞은 상투적인 내용이었다. 이를 대신하여 스크린이 제공하는 즐거움은 이야기가 아니라 쉼 없는 볼거리, 즉 스펙터클의 연쇄적 반응이었다. <파벨만스>의 주인공이 반응했던 기차의 충돌 장면처럼 머리가 아니라 눈을 사로잡는 것은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 성서 영화에는 분명한 줄거리가 있었지만, 실상은 줄거리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영화였다. 대다수 미국인은 모세나 삼손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결국, 문자적 상상력을 어떻게 화면의 스펙터클로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세실 B 드밀이 만들어 낸 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친숙한 것을 바탕으로 한 '볼거리'의 추구였다. 그것은 거대한 스펙터클을 통해 구현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 ⓒ 디즈니

요즘의 한국영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김한민 감독표 '이순신'의 신화를 때마다 감상하고 있으며, 이미 알고 있는  '마동석표' 프렌차이즈 시리즈가 천만을 돌파하는 유일한 지표가 된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친숙한 것이 토대가 되는 극장의 문화다.

국내만의 현상은 아니다. 마블이나 DC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친숙한 프렌차이즈 캐릭터들이다. 그것은 시리즈라는 명칭으로 엇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새롭게 스크린을 통해 선보인 DC의 <플래쉬>의 경우도 이야기의 설정으로 참고한 것은 1987년에 시작된 시간여행의 프렌차이즈 <백 투 더 퓨처>다. 여기에 마블의 전략처럼 배트맨과 슈퍼맨 등의 DC히어로들을 적극적으로 소환해 낸다. 프랜차이즈는 그 자체로 명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캐릭터를 모을 때 최적화된다.

이러한 모습의 단적인 대중문화가 아이돌 그룹이다. 여러 캐릭터를 모아둔다는 것. 이 상상력은 안정된 세력을 얻고자 하는 조합이다. 마블은 이를 두고 'assemble'로 명명한 바 있다. 어셈블은 프렌차이즈의 안정화 방식이자 확장의 전략이다. 

이러한 방식을 두고 영화 산업의 생각없음을 운운하는 것은 단순한 판단이다. 사태는 오히려 반대다. 194,50년대의 대표적인 제작자이자 감독이었던 세실 B 드밀의 고민이 이러한 결과를 내놓았듯이,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가 오늘날의 양상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이 좋은 결과라는 뜻은 아니다. 바둑의 오래된 격언인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가 오늘날의 문화적 결과일 수 있다. 

영화산업의 입장까지 걱정할 처지는 아니지만, 더 우려가 되는 것은 '진지한 영화들의 입지가 매우 좁아졌다'는 사실이다. 이를 작가영화라고 부르든, 예술영화라고 부르든 또 다른 호명을 하든 상관없이 이 영화들은 극장에서는 물론이고 실상 OTT에서도 선호되지 않는다. 

작은 크기의 화면에서 예술영화의 움직임처럼 정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손쉽게 예술영화나 작가영화를 볼 수 있다고 해도, 정작 가장 먼저 외면당하는 것은 이러한 영화들이다. 이 현상은 다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어느새 OTT 사이트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옛날 영화들은 제아무리 걸작이라고 해도 없는 존재로 취급당하기 시작한다. 온라인이 지배하면서 '가상공간'에 올라와 있지 않은 영화들은 유령이 된다. 아주 오래전 볼 수 없어서 유령 같았던 느낌과는 완전히 다른 유령의 존재론이다. 어느 때인가는 볼 수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선택의 목록에서 사라진 진짜 유령이다. 

유령이 늘어날수록 체감하는 것은 영화 존재론의 위기가 아니라 영화 경험의 빈곤이다. 영화의 존재가 가상공간의 유무로 체크당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현실은, 실상 영화에 대한 경험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가장 좁게 영화를 소비하고 있다는 현실에 도달한다. 플랫폼 위에만 영화가 존재할 수 있다면, 담길 수 없는 영화들은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 영화 관람의 환경은 어느 때보다 풍요롭지만, 영화를 접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빈곤하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Where Would You Like to Go?> 김희정|2023

ⓒ 디스테이션

김희정 감독의 영화는 항상 기본적인 것 이상을 보여준다. 전작 <프랑스 여자>(2019)에서도 주인공의 연기와 함께 실내공간을 보여주는 촬영이 돋보였다. 그 가운데 상실, 후회, 죄의식 등의 감정이 주마등처럼 흐르는 방식은 연출의 선택이자 중요한 몫이었다.

김애란 작가의 동명 단편소설을 옮긴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도 마찬가지다. 상실감과 뒤늦게 밀려오는 후회와 회상 그리고 개인적인 죄의식과 이에 대한 공동체의 연대감이 후반으로 갈수록 커져간다. 남편을 잃은 아내, 동생을 잃은 누이와 동생의 친구였던 중학생의 상실감이 조밀하게 다가온다. 물에 빠진 두 사람의 죽음은 동일한 사건이었고, 이로 인해 남겨진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좀 더 직접적으로는 빗대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김애란 작가의 단편이 가리키는 것은 '세월호'였다. 그런데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관객들에게는 '이태원'이 호출될 수 있다. 두 사건의 뿌리는 닮아 있다. 예상하지 못한 죽음과 그에 따른 이상한 반응들. 원작과 영화는 개인의 응시 아래 죽음에 대해 대응하고, 말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시대의 공기를 관통한다.

그런데 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가 호출하는 것은 시대나 사건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머무는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통해 이곳과 한국이 닮아있음을 보여준다. 지인과 함께 도시를 돌아보던 중 자연스럽게 발길이 머무는 곳은 죽음을 기억하는 장소다. 이를 통해 영화는 원작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죽음을 연결한다. 어느 도시든, 어느 장소든 삶이 있는 공간에는 죽음이 함께 머물러 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연결의 영화'라고 부를만 하다. 세월호와 이태원을 연결하고, 폴란드와 한국을 연결하며(영화의 마지막은 이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키에슬롭스키와 김희정을 연결한다.

키에슬롭스키라는 이름은 대화 속에서 등장한다. 그래서일까. 두 삶을, 두 곳을, 물에 빠진 두 죽음을 연결하는 여러 방식은 키에슬롭스키의 <베로니카의 두 개의 삶>(1991, 국내에서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로 번역하지만 이 번역은 영화의 의미를 훼손할 여지가 크다)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후반부에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방식은 삶의 잠재성(가능성)을 상상했던 키에슬롭스키의 세계와 겹쳐진다.

원작 소설의 스코틀랜드(에든버러)에서 영화의 폴란드(바르샤바)로의 변화는 자연스럽다. 김희정 감독이 잘 아는 폴란드를 선택했기에 영화의 묘사는 더 조밀해진다. 원작 소설에서는 편지로만 등장하는 지용이 누나에 대한 묘사들도, 영화는 보충하고 꽤나 많은 장면을 할애함으로써 두 개의 삶을 연결하는 강력한 동기들을 묘사된다.

영화를 대하는 관객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최소 초반부의 40분을 넘길 수 있다면 이어지는 밀도와 몰아치는 감정의 파고를 충분히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근래에 본 완성도 있는 한국영화로 꼽을 수 있는 김희정 감독의 대표작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열세살 수아>(2007)로부터 이미 한참을 자라났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The Glance of Music, Ennio> 쥬세페 토르나토레Giuseppe Tornatore|2021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 영화사진진

'엔니오 모리꼬네'의 전기적 다큐멘터리. 영화음악가로서의 그의 작품과 인생을 다루고 있다. 1961년에 영화음악에 입문할 때만 해도 이 분야는 그다지 인정받는 영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초창기 인생의 동반자라 할 수 있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의 작업은 서부극의 새로운 페이지를 써내려가는 데 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영화보다 더 인상적인 영화음악의 가능성을 열었다. 엔니오는 세르지오 레오네를 거쳐 롤랑 조페의 <미션>(1986)과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1988)을 작업하면서 영화와 구별되는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영화의 일부라고 여겼던 영화음악이 영화보다 먼저 나서게 되는 것은 분명 이례적인 독자성이었다.

하지만 그의 영화음악들은 한동안 아카데미의 후보에는 올랐지만 수상을 하지는 못했다. 영화 아카데미는 2006년에 엔니오 모리꼬네에게 공로상을 수여함으로써 그간의 성과에 대한 인정을 보내고자 했다. 그럼에도 영화음악 작업은 계속되었고,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 8>(2015)을 통해 수상의 영예를 안기에 이른다. 타란티노는 세르지오 레오네풍의 영화음악을 원했는지 몰라도 같은 것을 하기 싫어하는 엔니오는 정통 스타일의 교향악을 집어넣는다. 그것은 세간의 기대를 저버리는 동시에 새로운 지평을 연다. 

이 영화에서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은 같은 것을 하기 싫어하는 엔니오의 기질과 음악을 통한 모험의 증명이다. 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밌다. 워낙에 들었던 음악이 많고, 이 음악이 어떻게 작곡되었는지 일화가 담겨있고, 무엇보다 음악과 영화가 만나 어우러지는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질 때 직접적으로 보고 듣는 경이로움이 있다. 그것은 흡사 <미션>을 작곡할 때 오보에의 연주를 시작으로 민속 음악과 클래식의 영역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순간처럼,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경이로움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에서 짚어낸 장면을 볼 때마다 영화의 잘라낸 일부가 아니라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도 한다.  한 장면을 보고 듣는 것에 멈추지 않고, 영화 전체를 통해 그의 음악을, 이 영화 자체를 경험하고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엔니오 혹은 영화음악의 진정한 힘은 아닐런지.

 

<비밀의 언덕The Hill of Secrets> 이지은|2022

<비밀의 언덕> ⓒ 엣나인필름

문승아 배우를 처음으로 본 것은(직접적으로) <흩어진 밤>(2019)을 통해서였다. 이후 <소리도 없이>의 문승아를 보았다. 그리고 두 개의 단편 작업이 있었고, 또다시 장편 <비밀의 언덕>(2022)의 문승아를 본다. 아주 다른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새로운 감독들에게 문승아를 소비하는 패턴이 생겨난 것일까. 나아가 10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의 일정한 패턴이 생겨난 것일까.

우연의 결과는 아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의 자장 속에 있는 영화들이 있다. 작품이 나올 때마다 매번 달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어느 지점을 파고들거나 넘어갈 수 있을지 고민은 필요하다. <비밀의 언덕>은 잘 만든 영화이지만, 동시에 잘 모르겠다. 이미 예상 가능한 정서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세상의 많은 예술이 그러하듯이 에피고넨이 되어 버린 영화에서 새로움을 찾기란 어렵다. 

 

<드림팰리스Dream Palace> 가성문|2022

<드림팰리스>(2022) ⓒ 인디스토리

가성문 감독의 <드림팰리스>는 영진위 시나리오 공모전의 대상 수상작이었다. 아마 이야기가 지닌 사회적 이슈들이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로 있을 때와 스크린으로 보여질 때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드림팰리스>의 경쟁 상대는 영화이기보다는 드라마로 보인다. 공중파 드라마를 벗어나면 드라마들의 소재나 수위도 요즘은 더 세다. 

아파트 입주, 노동쟁의 이슈, 연대와 파멸 그리고 이기심. 이 모든 게 요즘 드라마의 소재였다면 영화는 이보다 뾰족한 하나의 길을 파고들 필요가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아우를 필요는 없다. 확실한 것을 두 시간 동안 다루고 보여주기만 해도 충분하다. 그것은 분명 '좁은 문'이지만 우리 시대에 왜 영화가 필요할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된다. 

드라마와의 비교를 벗어나면 더 또렷해진다. 켄 로치나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을 보면 일상 속에서 서로를 속이고 배반하는 과정보다는 현실을 차분히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줄 때가 많다. 만일 드라마적인 이야기를 원했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억척스러움은 생활 혹은 생존의 한 단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이야기가 훌륭하게 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비밀의 언덕>이나 <드림팰리스> 모두 작년 영화진흥위원의 배급지원작에 선정되었다. 그것은 이 영화들이 작년 한국 독립영화의 현실적 선택이라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영화를 보면서 안정된 독립영화가 아니라 돌파하려는 의지가 아쉬웠다. 좀 덜 매끈하더라도, 좀 더 후벼파는 현실의 드라마가 지금으로서는 더 눈길이 간다.  

 

<붉은 사막Red Desert>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1964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걸작은 아니다. 그의 첫 컬러 영화였고, 당대의 컬러 영화와는 다른 질감을 만들어 낸 것은 사실이다. 일부 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모노톤이나 세피아톤에 가까운 화면으로 죽어 버린(가는) 공장 지대를 묘사해 낸다. 그 안에서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것은 불안이다. 모니카 비티가 연기하는 줄리아나는 교통사고로 인한 불안증세를 갖고 있지만 자신이 낫지 않았다고 믿으며, 주변의 사람들과 사물들을 불안하게 바라보거나 관계한다.

'신경쇠약직전의 여자'인, 히스테리컬한 여성의 전형적인 캐릭터로도 볼 수 있는 줄리아나를 보는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다소 식상하다. 이미 많은 감독들이 훌륭하게 이를 받아 묘사해 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남편의 친구인 코라도라는 인물과의 관계에서 좀 더 스파크가 튈 수도 있었는데, 어느 정도를 잘 넘어가지 않는다. 뭔가 조심스럽다. 배 위에 올라온 노란 깃발처럼 질병의 감염으로 인한 불안만이 영화의 후반을 '안개'처럼 감싼다.

 

<붉은 사막>(1964) ⓒ 일미디어

안개의 영화라면,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나 이를 영화로 만든 김수용 감독의 <안개>(1967) 혹은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2)을 떠올릴 수 있다. 안개에 관한 시인이라면 기형도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진정한 원조는 안개의 감독 안토니오니다. 공장 지대에 올라오는 연기와 함께 안개는 현실을 가리고, 종종 사라지게 만든다. 그럴수록 인간은 안개 속에서 평온히 숨는 것이 아니라 불안해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누군가에게 드러날 때 오히려 편하기 때문이다. 

안토니오니의 안개는 이러한 역설 속에서 등장한다. 자신이 보이지 않을까,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할까 불안해하는 존재의 근심이 두 시간 내내 따라다닌다. 안토니오니식으로 말하자면, 노출은 인간의 천성 중 하나다. 아마 이러한 요소를 보여주고자 했던 영화가 <헤어질 결심> 혹은 이 영화의 주인공 서래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안토니오니의 영화에는 죽음은 공포로 던져진 채 인물들끼리 뒤엉키는 에로틱한 묘사가 있다. 한 집에 모여든 선남선녀들이 한 방에서 뒹굴거리는 장면인데, 오래 전에는 이 장면이 왜 있어야 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안개가 드리워진 이 세계에서 드러냄의 욕망은 접촉의 에로틱함으로 표출된다. 그 가운데 가장 몸을 사리던 줄리아나는 밖으로 나온 후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갑작스럽게 차를 몰고 떠나버린다. 그녀의 차는 물에 빠질 뻔한다. 달려온 남편과 코라도 그리고 친구를 향해 자신은 보지 못했다고 항변하기 시작한다. "내가 실수했어. 안개 때문에 헷갈렸어."

안개는 보이지 않게 하는 공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할 수 없는 공포를 제공한다. 줄리아나가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바라볼 때 사람들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그때부터 줄리아나의 광기는 시작된다. 보는 내가 이상한 것인지 사라지는 저들이 이상한 것인지. 많은 감독들이 꿈꾸었을 장면을 안토니오니는 대수롭지 않은 듯 보여준다. 

영화의 카메라가 가리키는 것은 불안과 공포에 대한 접근이다. 우리의 눈앞에 있다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사라질 수 있다. 불안은 우리가 속한 세계를 볼 수 없을 때, 나아가 믿을 수 없을 때, 무엇보다 내가 속한 곳이 어디인지 모를 때 일어난다. 결국, 사라지는 대상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공포의 뇌관이 터진다. 이 영화는 그러한 뇌관을 시종일관 따라다닌다. 아슬아슬하게.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