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ABOUT] 실사화 영화 #1 : "2D는 과연 '실사화'의 꿈을 꾸는가"
[TALK ABOUT] 실사화 영화 #1 : "2D는 과연 '실사화'의 꿈을 꾸는가"
  • 배명현
  • 승인 2023.07.14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르에서 장르로 차원 이동하기"
영화 <은혼>(2017) ⓒ 미디어캐슬

"일본이 넷플릭스에 독을 풀었다." 몇 해 전 커뮤니티에서 일본의 애니메이션 실사화를 조롱하는 시리즈에 달린 제목이다. 물론 작품에 대한 조롱이기에 과잉된 반응이 댓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한 차례 걸러 생각해보면 완전 이해 못 할 반응도 아니라는 점이 문제적이다. 일본의 너무 많은 실사화 작품이 원작 애니메이션을 그대로 옮기는 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로'라는 어휘의 사용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으려는 게으름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개선이 가능하다는 뜻이니 말이다. 불행하게도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장르는 장르 자체로 대상을 수용하는 사람의 자세를 세팅한다. 만화(망가, 그래픽 노블, 카툰, 코믹 스트립스)와 애니메이션(아니메, 애니메이션, 스톱모션, CG애니메이션) 그리고 영화가 같은 똑같은 서사와 내용 그리고 움직임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차이가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림과 연속 그림과 움직이는 이미지는 탄생과 발생 수용의 각 단계에서 특징이 생성되고 차이 그 자체가 장르를 구분시키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 <드래곤볼 에볼루션>(2009)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다시 일본의 실사화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그들은 원작을 현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원작에 무게를 싣는다. 코스프레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의 외형, 과잉된 연기, 현실의 구어에서 한참 먼 대사, 그 밖에 수없이 복사한 원작의 특성, 이러한 점 때문에 원작이 현실과 거리가 멀수록 실사화 영화에 부여되는 거부감의 무게는 배가된다.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으로 보이는, 인간이 연기하는 인간이 아닌 어떤 것. 그들은 운하임리히(프로이트 특유의 거세 불안으로 집약되는 결론을 제외한다면)의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이 기이한 낯설음이 일본의 실사화에서 이야기해야 할 특징이자 핵심이다.

'기이하고 낯설다'(Unhomely)고 명칭한 감각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선 일본 만화와 연결된 영상계의 산업적 특징과 원작의 팬덤과 작품 사이를 밀접하게 연결하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언홈리'(Unhomely)한 감각은 우리(수용자)의 것이지 일본(생산자)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장르별로 달라지는 수용의 민감성 정도는 우리와 다른 일본의 문화적 맥락에서 기인한다. 우선 산업의 경우는 단순하다, 일본은 원작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금전적 리스크가 크지 않다. 원작 사용료가 비싸지 않고, 원작 팬덤이 든든한 수요층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보다 들여다볼 부분은 팬덤과 작품의 관계이다. 그들은 원작에 충실하지 않다면 '가짜'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만화를 그럴듯한 현실의 상태로 옮기는 순간, 그들에게 원작은 파괴된 것이라 생각한다.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드래곤볼 에볼루션>(2009)은 원작자인 토리야마 아키라조차 가짜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수많은 독을 만들어냈지만 여전히 쉬지 않고 똑같은 '현실화된 원작'을 만드는 이유는 원본을 현실이란 필터를 끼고서 보고 싶은 욕망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원작을 현실의 형태로 보고 싶어 하는 마음. 불가능할 것 같은 이 욕망을 일본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인어공주>(2023)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2차원을 무대로 올린 작품을 일컫는 2.5차원이란 단어가 있을 만큼 일본은 현실화의 역사가 긴데 그 역사적 맥락의 시초라 볼 수 있는 작품이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베르사유의 장미>이다. 1974년에 초연된 공연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다카라즈카 극단을 다시 부흥시킨 공연이었다. 이 상업적 성공은 '제2의 베르사유의 장미'를 꿈꾸며 만화를 현실로 옮기는 수많은 작업이 이루어지게 했다. 현재까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실사화는 불가피하게 사람들의 장르적 감각을 훈련 시키는 측면을 지니게 되었다. 실사화가 긴 시간 쌓이면서 보다 친숙해지고 어색하지 않게 된다. 물론 일본 인구 모두가 같은 감도를 가진다는 말은 아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비슷한 문화를 형성하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어렴풋한 감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은 일본 외부에서 찾아보기 힘든 그들의 고유한 실사화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원작(현실의 거짓인)을 현실(원작의 거짓)로 옮겨 놓으려 하지만 후자의 거짓조차 원작을 진실로 만들려는 과정과 결과물은 어쩌면 하나의 장르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지역적인 색채를 가지는 '이 장르'는 켄달 월튼의 '믿는 체하기(make-believe)'를 떠올리게 한다. 작품은 현실에 사실로써 존재하지 않기에 허구이지만 수용자는 작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의 사실성을 구성해낸다. 우리는 허구의 인물에게 현실의 인물에게서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유사 감정(quasi-emotion)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작품은 허구적 참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을 과잉되게 믿어버리면 현실을 왜곡해버린다. 그러니까 '이 장르'가 사실적 원작을 만들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댈 때 완성되는 것은 현실적 원작이 아닌 만화화된 현실이다. 공교롭지만 현실은 만화화의 꿈을 꾸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본이 아닌 곳이라면 어떨까. 편의상 '할리우드 실사화'라 호칭할 이곳에선 다른 방식으로 실사화 영화를 만들고 있다. 여기에서도 원작은 허구적 참이며 우리는 이것을 믿는 체한다. 다만, 현실로 옮겨올 때 우리는 원작의 꼴을 그대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원작을 허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장르를 먼저 인식하기 때문이다. 실사화를 통해 원작을 재구성할 때 현실이란 장르의 톤 앤 매너를 요구한다. 이 때문에 할리우드에서 중요해지는 건 '원작의 재구성'이 아닌 '고증의 충실성'이다. 원작이 현실의 탈을 쓰고 나왔다면, 그 작품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때 필요한 건 'CG 기술'이다. 아이언맨의 변신이 보다 현실적으로 보일 것, 헐크의 피부가 보다 그럴듯한 것으로 보일 것,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이 보다 자연스러울 것. 우리는 한번도 본적 없는 그것들의 현실적 고증을 요구한다. 현실에 원래부터 없는 것이지만 현실 어딘가에 있다고 속이는 것. 이것이 바로 할리우드 실사화의 핵심이다.

이 지점에서 <인어공주>(2023)가 비난받았던 근원적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믿었던 '인어공주'는 인간의 상반에 물고기의 하반을 가진 공주에서 설정의 끝이 아니라, 적발 백인에 아름다운 외형까지 가지고 있다. 전자는 CG로 구현할 수 있지만, 후자는 내용 고증의 실패로 여겨진다. 아니, 원작에 대한 배신이 되어버린다. 실사화는 단순히 SF영화와 같은 없는 것을 현실로 재구성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작품이 원작을 향하고 있다고 주장 아닌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가 마블의 영화를 원작의 또 다른 차원(Dimension)이라 주장하게 했다. <아이언맨> 시리즈를 더 이상 만화 마블의 실사로 볼 수 없는 독자적인 시리즈가 된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만화를 현실화 시켜 각색한다더라도 배우는 만화 캐릭터처럼 세월의 흐름을 초월할 수 없다. 내용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불가피하게 바뀌게 된다. 이 두 가지만으로 벌써 고증의 충실성과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 영화 <스콧 필그림>

원작과 실사화는 반목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애초에 원작들이 실사화를 염두에 두고 탄생하지 않았기에 질문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둘은 전혀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서 존립하고 있으며, 각기 다른 위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만화는 독자가 멈춘 시간의 컷 속에 분할-반복된 캐릭터를 손가락을 동원해 읽어야 하는 촉각적 성질을 가진 장르이고, 애니메이션은 스크린 안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운동-이미지지만 태생이 그림이기에 만화적 형질(데포르메, 신체 왜곡을 통한 감정 표현 등)을 가진 장르다. 일본처럼 원작을 구성하는 재료 모두를 현실로 구현시킨다고 현실화된 원작을 볼 수 있을 리 없고 할리우드처럼 심장만 가지고 와서 이식한 작품을 원작과 같은 위치를 지녔다고 말하기에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두 장르, 그러니까 2D가 실사화의 꿈을 꾼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꿈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불가능 속에서도 조그마한 가능성이 발굴되곤 한다. <스콧 필그림>(2010),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가 그 예이다. 에드가 라이트의 <스콧 필그림>은 원작이 만화임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현실 영화임에도 화면은 분할되고 시각 효과 또한 만화의 그것을 따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럼에도 <스콧 필그림>은 현실이 만화를 따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만화가 현실을 따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말풍선과 데미지 포인트, 시각 효과선 등등. <스콧 필그림>은 만화를 현실에서 구현해내고자 하는 욕구 대신 실재가 된 '만화가 다시 만화를 꿈꾸는 듯' 보인다. 이것은 만화화된 현실이 아닌, 현실화된 만화를 의미한다. 현실의 외피를 입고 허구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역설적으로 실사화를 성립시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원작이 만화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원작과 영화의 초반부만 비교해보아도 알 수 있다. 둘은 사치가 잠에서 깨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만화는 집 안의 풍경과 인물의 얼굴을 다양한 컷으로 보여준다. 반면 영화는 프레이밍한 카메라를 계속 움직이지만 쇼트의 분할은 훨씬 간결하고 정적이고 대사도 훨씬 적다. 인물의 독백으로 설명하는 설정도 그저 보여줄 뿐이다. 만화에선 잘 사용하지 않는 구도인 다다미 쇼트로 인물을 바라본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서사와 시퀀스로 끊임없이 원작을 의식하며 자신의 기원이 그곳에 있음을 복기한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일본의 실사화와 전혀 별개의 실사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만화에서 보여주고자 한 현실을 길어 올려 스크린 위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원작은 '이렇게 아주 가끔' 우리에게로 다가온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 티캐스트

여전히 많은 원작들이 실사화되고 있다. 허구 영역의 참인 작품이 사실 영역에 서 있는 현실로 진입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현실의 외피를 입은 만화에 머무른다. 혹은 이미 만화를 벗어났음에도 자신은 만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우긴다. 실사화는 내용을 충실하게 옮겨 온다고 해서 성립되지도 않고 모든 걸 가져온다고 성립되지도 않는다. 둘 다 성실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선 안타깝지만 원작에 의존하기만 해선 2D에서 3D로 이동을 할 수 없다. 장르에서 장르로 차원 이동하기란 참으로 지난하기 짝이 없다.

[글 배명현 영화평론가, rhfemdnjf@ccoart.com]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