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의 영화 일기] 2023년 6월 20일
[이상용의 영화 일기] 2023년 6월 20일
  • 이상용
  • 승인 2023.06.2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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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아니 멈추어진 채 오래도록 보고 싶다"

매달 초에 쓰기로 했지만, 이번 달에는 뭐가 많기도 하고 여전히 분주한 한 달. 그렇게 여름이 시작됐다. 이미 알고 있는 영화들을 먼저 떠올려 보고, 강연에서 다뤘지만 미루어 뒀던 작품들과 이런저런 생각을 적어둔다.

 

<토리와 로키타Tori and Lokita>

장 피에르 다르덴Jean Pierre Dardenne&뤽 다르덴Luc Dardenne|2022

시간을 좀 두고 이전 다르덴 형제의 영화와 비교하여 생각한다. 여전한 다르덴 형제의 영화지만 여전하기만 한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아니었을까.

 

영화 <로제타>(1999) ⓒ 아이 엠(eye m)

아이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로제타>(1999)를 떠올린다. 아마 다르덴 형제가 잘 알고 있었을 것 같은 벨기에의 한 소녀, 도시 주변의 캠핑카에서 살면서 알콜중독자인 어머니와 살고 있는 이야기, "난 정상적으로 살거야"라고 밤마다 말하는 소녀. 그렇기에 직장에서 계약기간이 끝났다는 통보를 받고 불같이 화를 내는 소녀. <로제타>의 첫 장면은 '로제타의 분노'였다. 그것은 이 영화가 무엇인지, 무엇을 다루고 보여주는지 인지를 하기도 전에 시작되는 분노였다. 그런데, 로제타의 분노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는 그런 분노이기도 했다.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소녀의 분노였다. 이 영화로 인해 로제타 법이 만들어지고, 십 대들의 노동에 대한 법률 규정이 생겼다는 것은 부차적인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분노하는 소녀로 시작하는 영화였다는 점, 장화로 갈아신고 집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소녀였다는 점, 자신을 도와주는 리키가 물에 빠졌을 때 망설이는 소녀였다는 사실만이 남는다.

<토리와 로키타>는 아프리카 이민자 아이들을 다루면서 이상하게도 분노가 없다. 그들은 왜 분노하지 않았을까. 말없이 사장의 성적 요구를 받아들이는 로키타가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잠시 자리를 피하는 토리가 있다. 로키타는 자주 운다. 부모와 통화를 한 후, 사장의 요구를 받아들인 후, 이민 대상자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울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분노하지는 않는다. 로제타가 분노하는 소녀였다면 로키타는 우는 소녀다. 그녀가 로제타보다 분노할 수 없는 위치에 놓여 있는 탓일까. 약자 중의 약자이기 때문일까. <로제타>로부터 20년이 흐른 현재의 세계는 더 이상 미약한 분노조차 허락되지 않는, 자본이 모든 것을 잠식해 버렸기 때문일까. 사회적 분노는 더 이상 가치가 소멸되어 버린 것일까. 어쩌면 다르덴 형제가 잘 알지 못하는 소녀였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토리와 로키타> ⓒ 영화사 진진

프랑스 철학자 '스테판 에셀'이 쓴 『앵디네부!』(Indignez vous!)가 떠오른다.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소개되었지만 큰 반향은 없었다. "분노하라" 어쩌면 다르덴 형제가 분노하는 로키타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돕고 따르는 토리의 '우정'과 '연대'를 강조한 것은(분명 이 영화는 이 지점을 더 크게 부각시킨다.) 분노가 상실된 시대를 맞이하여 이미 좌절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제 남아있는 것은 희망의 연대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우정의 연대를 강조한 결과 남는 것은 '연민'이다. 그것은 얼마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을까? 이 세계에 남은 것이 처참한 로키타의 죽음에 대해 분노 없는 우정과 연대라면, 죽은 그녀 옆에서 울 수밖에 없는 토리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너무나 절망적이다. 그리고 절망을 보여주는 영화라면 연대와 희망은 좀 더 희미해질 필요가 있다. 차라리 토리가 총을 들어야 하는 이야기는 불가능한 것인가? 

스테판 에셀의 문장은 여전히 현실에서 유효하다. "분노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귀중한 선물이며, 분노할 것에 분노할 때 당신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의 일부가 된다. 그 흐름이 우리를 더 많은 정의와 자유로 이끈다. 그 자유는 여우가 닭장 속에서나 맘껏 누리는 자유가 아니다."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 루벤 외스틀룬드Ruben Ostlund|2022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현존하는 가장 지적인 감독 중 하나일 것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도식을 세우고, 그 속에 인간 군상의 코미디를 집어넣는다. 이를 통해 아이러니와 역전의 모멘텀을 만든다.

 

영화 <더 스퀘어>(2017) ⓒ 찬란, 아이 엠(eye m)

전작 <더 스퀘어>(2017)가 개봉하였을 때 CGV 명동에서 이 영화를 다룬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충분히 말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다. 이 작품은 한국 사회에 조금 늦게 도착한 PC(political correct)에 대한, 복지주의 국가의 대명사였던 스웨덴 감독의 전면적인 비판문이었다.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인 크리스티안이 겪는 사건은 크게 두 가지인데 모두 pc주의와 관련을 맺는다. 공적으로는 미술관의 프로그램을 홍보하면서 만든 영상이 문제였고, 사적으로는 자신의 지갑을 도난당한 후 되찾는 과정에서 돌린 전단지가 문제였다. 미술관의 홍보영상은 사각형 안에 있는 한 소녀가 폭파하는 장면이 들어있는데 많은 이들은 이 영상이 가리키는 것의 문제보다 소녀를 폭파시켰다는 것 자체에 분노하였다. 국내외에도 비슷한 사례들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몇몇 광고를 둘러싼 논쟁은 그 이미지가 가리키고자 하는 의도를 외면한 채 이미지 자체가 무엇을 연상시킨다는 것만을 강조한다. 그 결과 손가락도, 어린아이도 광고에서 퇴출당한다.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연상시킨다면, 그것이 불공정하다고(혹은 정치적 올바름이라 주장하는 영역을 침범한다고 여기게 되면) 판단을 내리는 과정이 이어지면 애당초 광고의 목적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비난의 댓글이 쏟아진다. 그것은 얼마나 올바른 것인가. 광고의 목적이나 의도가 언제나 합당하거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를 의문시하게 되는 현실이 <더 스퀘어>의 전면에 깔린 태도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고급 식사와 함께 제공되는 원시인 퍼포먼스의 아이러니는 영화와 현실, 예술과 현실, 부르주아와 도락의 경계를 침범하면서 서로에게 폭력을 가한다.

 

영화 <더 스퀘어>(2017) ⓒ 찬란, 아이 엠(eye m)

아무려나 크리스티안의 개인적인 문제는 소매치기를 당한 후 휴대폰의 위치추적을 통해 한 건물을 찾아낸 후 일어난다. 그는 자신의 물건을 되찾기 위해 협박성 전단지를 돌리는데, 물건을 찾는데 성공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한 이주민 소년이 자신의 명예가 침해당했다며 문제를 제기한다. 더 이상 크리스티안이 당한 '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건을 되찾는 과정 중에 벌인 그의 행위가, 이주민 소년에 대한 혐오감을 일으켰다면 그것이야말로 심각한 문제가 된다. 지하철역을 나와 타인을 도우려다 강탈을 당한 그의 지갑과 핸드폰은 이슈에서 사라진다. 

<더 스퀘어>는 이러한  아이러니를 보여주면서 크리스티안이 기획한 전시 '더 스퀘어'가 자신의 발몫을 묶어 버린 허상임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으로 이 안에서는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 한 마디로 이것이 가능하지 않은, 웃기는 현실이다. 크리스티안이 노숙자 여성에게 샌드위치를 사 주려고 하자 그는 크리스티안에게 양파를 빼고 주문해 달라고 요구한다. '더 스퀘어'의 글귀대로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있겠지만, 동시에 크리스티안은 이 요구에 대해 어이없어하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루벤 감독의 유머란 이런 종류의 것이다.

 

<슬픔의 삼각형>(2022) ⓒ 그린나래미디어

이러한 유머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 <슬픔의 삼각형>(2022)이다. 계급적으로 위아래를 오가는 인물들을 다양하게 포진시키는 것은 여전하지만, 조금은 다른 느낌을 받는다면 이 영화가 영어로 만든 루벤 감독 최초의 작품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뾰족하게 말하고 나아가기보다는 세계를 두루두루 둘러본다는 느낌. 영어라는 언어로 여러 배우들을 통합해야 할 때 생기는 조심스러움이나 전작과 다른 언어에 대한 낯섦이 개입할 수 있다. 지적인 감독이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를 발휘하려면 자신이 잘 아는 영역에서 마구 휘젓고 다닐 필요가 있다.

그래서 스톡홀롬을 중심으로 뾰족하게 끄집어내는 <더 스퀘어>가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든다. 더 미묘하고, 자주 흔들리며, 윤리적 갈등을 일으키니까. 그에 비해 <슬픔의 삼각형>에서는 인물간의 계급적 갈등이 있지만 윤리적 갈등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풍랑에 휘청거리는 유람선 안에서 술취한 두 남자가 마르크스와 자본가(자본론이 아니다)들의 경구를 읊어대는 장면은 두 영역 모두 '자본주의'에 대해 냉철하게 직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쪽과 저쪽이 한배에서 통한들 뭐 어쩌자는 것인지. 냉소적 유머를 배에 가두어 놓은 것만으로 풍자가 어디까지 완성되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아니라 자본주의자 마르크스가 탄생하는 시대라면, 그다음이 무엇인지 지독하게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슬픔의 삼각형>은 이것저것을, 여기저기를 충돌시키고, 뒤섞고, 구멍들을 만들어 보이는데 충실하다. 당신이 현재 호화롭게 머물고 있는 유람선 혹은 무인도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가 동일한 리조트에 불과하다는 결말은 두 차원을 비교하는 차원에 머문다. 냉정하게 말하면, 마르크스주의자와 자본가가 통한다는 비교적 오래된 통찰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유머는 과거 <맨 인 블랙> 시리즈가 이미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는 통찰력이기도 했다(특히 1, 2편에서). <슬픔의 삼각형>을 달리 부른다면 <맨 인 머니>쯤 되려나.

 

 

<206: 사라지지 않는206: Unearthed> 허철녕|2021

6월에 개봉하는 반가운 영화 두 편이 있다. 모두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다. 한 작품은 <206: 사라지지 않는>이다. 이 작품에 대한 사적인 기억 한 가지가 있다. 토론이 오가는 자리였는데,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의문사 진상 조사 사건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해 눈을 번쩍했던 기억이 난다. 이 일이 꽤나 지난한 반복일지 몰라도 오늘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 영화가 다루는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은 재빨리 잊혀졌다. 전쟁기간에 적국이 아니라 같은 편이 학살을 감행했다는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몰라도 전쟁의 역사를 보면 드문 일은 아니다. 이 또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역사의 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근사한 동상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기록하는 것이다.

베를린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당해 파손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언젠가 복원하겠다고 나설지 몰라도(그때가 독일이 가장 위태로울 때일 것이다) 참상을 그대로 기억한다는 것은 망각의 시간 속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서다.

베를린 영화제 기간 유로피안 필름 마켓이 열리는 'Martin Gropius Bau(흔히 MGB라고 부른다. 원래 이런저런 전시가 상시적으로 이뤄지는 공간이다.)' 옆에 세워진 'Dokumentationszentrum Topographie des Terrors'도 기억이 난다. 나치와 게슈타포의 활동에 대한 기록물 보관소인데 이를 둘러싸고 거리와 인접한 쪽에는 과거의 '베를린 장벽'이 세워져 있다. 1989년에 무너진 장벽의 일부을 남겨 이곳저곳에 활용할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기념관에 제공해 주기도 한다. 장벽 중 하나가 한국에도 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것은 기록을 통해 기억을 지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것이다.

 

<206: 사라지지 않는>(2021) ⓒ 찬란

<206: 사라지지 않는>에서도 강력한 것은 이 의지다. 카메라는 민간으로 옮겨간 시민발굴단을 따라간다. 정부의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이 멈췄기 때문이다. 시민발굴단은 국가가 다시 묻어버린 진실을 발굴하고자 한다. '허철녕' 감독은 그 기록뿐만 아니라 그 기록을 꺼내려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무엇이든 망각되지 않기 위해서는 찾거나 기록해야 하지만, 일회적인 활동과 기록으로는 지속성을 갖지 못한다. 기억하는 이들이 살아있는 동안 찾고, 찾은 것들을 기록하고, 기록한 것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또다시 발굴로 이어지는 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 이 영화에 소명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의 기억이 순환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거창하게 "진실, 역사를 찾아서" 등으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 소박하게 우리의 수치를 찾아 나서는 이 행위가 중요한 것은, 모두에게 환영받을 만한 것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해야 마땅한 것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카메라의 윤리적 결단이다. 그리하여 쉽게 사라지지 않는 '뼈들의 이름'과 '뼈들의 사연'과 '뼈들의 증언'을 기록한다. 인간을 구성하는 206개의 뼛조각을 제목으로 앞세운 이 작품을 달리 말하자면, <남은 뼈들의 증언>이다. 살아남았지만 아무런 말하지 못하는 뼈들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게 잔존하여 목소리를 울린다.

 

<수라Sura: A Love Song> 황윤|2022

영화 <수라>(2022) ⓒ 스튜디오 두마·미디어나무

'황윤' 감독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필모그래피를 언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5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그는 자신만의 길을 굳건히 걸어온 한국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스트가 되어 있다.

<작별>(2008)은 동물들과 동물을 돌보는 이들을 보여준다. 여기서 동물은 '동물원'의 동물이거나 한국의 숲에서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이들은 동물원의 사육사이거나 야생동물을 구조하는 수의사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려동물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동물은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차이와 예민함이 황윤 감독의 출발점이라면 출발점이다. 그것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수라>에서 주로 보게 되는 것은 멸종위기의 동물이나 갯펄을 가득 채웠던 새만금에 터전을 둔 동물들이다. 동물들의 존재성 그 자체야말로 황윤 감독의 카메라가 흔들리지 않는 동력이 된다.

같은 해에 선보인 또 하나의 작품은 <어느날 그 길에서>(2008)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위기에 처해있다. 대부분이 다친 야생동물이다. 이들을 위협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도로다. 개인적으로 로드킬의 본격적인 기록인 이 작품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 일이 있었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면서였다. 이른 아침에 이동하거나 비가 온 다음 날 아침에는 도로에 쓰러진 사채들을 항상 볼 수가 있었다. 야생동물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집에서 나온 동물들도 상당수였다. 돌이켜보면,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나 빨리 카메라가 다가갔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좀 더 많이 보여줘야 하는 영화였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지금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황윤 감독의 카메라는 점점 더 자신으로 향한다. 아마 결혼과 출산이라는 과정이 자신에게 카메라를 돌리게 만들었던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자연과 함께 가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성찰이 일어난다. <잡식 가족의 딜레마>(2015)는 말 그대로 육식을 해야 하는 현실을 추적해 가면서 우리가 먹는 돼지와는 전혀 다른 '돼지'의 존재성을 목격하고 그려내고자 한다. 먹어야 한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질문한다. 스스로를 잡식 가족이라고 부르며, 이를 변화시킬 수 없는지 고민한다.

 

영화 <수라>(2022) ⓒ 스튜디오 두마·미디어나무

카메라가 자신과 가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다. 결국 세상에 대한 의문은 자신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감이 밀려온다. 이러한 질문은 <수라>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군산으로 내려온 황윤 감독은 촬영해 두었던 '새만금' 다큐멘터리를 다시 끄집어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멈춘 것은 멈춘대로 이유가 있지만 외면할 수 없는 것에는 더 큰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수라>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정치적 외침이나 새만금 방조제의 수문을 여는 것이나 미군기지 혹은 공항 건설만의 문제가 아니다. 새만금을 둘러싼 정치, 경제, 지자체, 행정 등의 문제는 그 자체로 혼전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진정으로 보여주고는 것은 수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되살아나고 있는 거대한 갯벌과 그 위를 나는 '도요새'때와 마주할 때다.

이 황홀경이 그토록 외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그것은 분명 제대로 된 현실이 아닐 것이다. <수라>가 기본적으로 성취하는 것은 여기에 있다. 수많은 무책임들 가운데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감독 혹은 가족의 열망이, 갯벌을 보존하고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그리고 안타깝게 죽어간 동물들과 사람들의 사연이 흘러 들어온다. 이러한 흐름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수라>는 황윤 감독의 종합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무엇보다 화면 가득 메워진 새들의 날개짓이 아름답다. 잠깐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아니 멈추어진 채 오래도록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순응자The Conformist>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1970

ⓒ 영화사 백두대간

여러 차례 재개봉했다. 언제부터 이토록 반파쇼적인 영화를 국내에서 좋아했을까. 어쩌면 그 부분을 거세하고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화려한 색감과 흥미로운 점프 컷들로 채워진 영화쯤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지금이 <순응자>의 시대라면, 더 이상 심각한 의미를 생각하지 않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파쇼에 대한 의미는 추방당하고, 현란한 스타일에 순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베르톨루치는 참으로 이상한 영화를 남겼다. 이토록 겁 많고, 파쇼적인 인물에 대해 매혹되도록 만들어 버렸을까.

그런 점에서 <순응자>는 너무나 적절한 제목이다. 시대를 초월해 어느 시대나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순응하는 방식을 나름대로 드러내는 것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순응자'보다 '순응주의자'라는 제목을 더 선호하지만, 오늘날 무슨무슨 '주의자'라는 표현도 이제는 유물이 되어 버렸다. 

 

<카일리 블루스Kaili Blues> 비간Gan Bi|2015

언젠가부터 중국 영화를 보는 일이 드물어졌는데 여전히 많은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런 감독 중 하나가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2019)를 만들고 요절한 소설가이자 감독인 '후보'였고, 여전히 현존하는 시인이자 감독인 '비간'이 있다.

 

영화 <카일리 블루스>(2015) ⓒ 찬란

뒤늦게 개봉한 비간의 데뷔작 <카일리 블루스>는 중국의 새로운 재능들이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사유하는지를 조금 더 이해하게 만든다. 격동의 한가운데 있는 중국의 시공간은 정치와 자본이 뒤엉켜 혼란스럽고 제멋대로다. 그것을 처음으로 이해시켜 준 감독이 6세대로 불렸던 '지아 장커'였다. 초기작 중에 흥미로운 영화들이 많지만, 지아 장커의 <세계>(2004)는 이들의 선배 격에 해당하는 작품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고향인 샨시성 편양을 다룬 <소무>(1997)와 <플랫폼>(2000)을 지나 따퉁의 <공공장소>(2001)와 걸작 <임소요>(2002)를 거쳐 북경으로 진입하여 느끼는 자본주의와 현실의 혼란을 '세계공원'을 중심으로 담아냈던 <세계>는 도시를 집약적으로 담아내는 이후 감독들의 주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이 영화의 중심 장소인 세계공원에는 에펠탑, 피라미드, 피사의 사탑 등이 축소 모형으로 현존한다. 그것이 여전히 유효한 중국 사회의 현재성이라면 현재성일 것이다.

후보는 '코끼리가 있는 그곳'에 가려고 하지만 끝내 도달하지 못한 채 가려고 하는 욕망만을 파편적으로 서술한 바 있다. 아마 그곳에 도달해서도 인식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세계'는 깨어지고 부서진 파편과 축소 모형들이거나 코끼리가 있다는 소문만으로 가득하다. 오래전 지아 장커는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 작품이 바로 <스틸 라이프>(2006)다.

후보나 비간은 지아 장커가 던져두었던 '세계'에 대한 물음을 나름의 질문과 답변으로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카일리 블루스>(2015) ⓒ 찬란

<카일리 블루스>도 '무엇'에 해당하는 것을 찾아가는 영화다. 주인공 천성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조카 웨이웨이를 찾아가는 여정이 대부분을 이룬다. 그리고 끝내 천성은 웨이웨이를 만난다. 하지만 그는 조카를 알아보지 못한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너무나 성장한 모습으로 오토바이를 끌고 천성을 태우러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월성과 변해버린 모습이 <카일리 블루스>에서 중요하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중국 사회가 그렇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중요하다. 그래도 두 사람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언덕길을 오른다.

"천 형. 당마이 강변에 내려주고 바로 갈 거에요. 기차에 그림 그리려요."

"기차에?"

"네. 내가 시간을 되돌려야 양양이 돌아온대요."

"어떻게 하려고?"

"기차에 탔을 때 보게 하려고요. 카일리에서 출발하는 석탄열차가 당마이에서 서 거든요. 기차칸마다 시계를 그려서 연결되게 할 거에요. 여긴 원시인이 사람을 자주 따라다녀요. 이따 배 기다릴 때 조심하세요. 막대기 두 개를 묶어 줄게요"

"어떻게 묶어?"

"팔꿈치에 나무 막대기를 묶을 거에요. 원시인은 사람의 앞뒤를 구별할 수 있어요. 몰래 따라와서 뒤에서 안는다는데 그러면 팔꿈치 몽둥이가 겨드랑이에 닿아서 웃기 시작할거에요. 그때 도망갈 수 있잖아요."(웃는다)

"너 이름이 뭐야?"

"네? 웨이웨이요."

"웨이웨이? 꿈꾸는 것 같네."

꽤나 긴, 오토바이를 탄채 롱테이크의 화면으로 등장하는 대화 속에는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것이 들어 있다. 기차, 시계, 묶는다, 원시인, 웨이웨이. 어떤 면에서 <카일리 블루스>는 좀 유치하다. 그것은 종종 중국 감독들의 영화에서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스틸 라이프>에서 뜬금없이 등장하는 우주선처럼. 하지만 이러한 형태와 상징은 종종 기이함으로 인상 깊게 박히기도 한다.

비간의 영화에서도 유치함을 넘어서는 것은 감독의 능력과 의지의 문제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이 문제가 천성과 웨이웨이를 잇는 세대의 문제, 분열되고 균열된 중국을 이어가는 문제, 변방을 돌며 카메라에 담기는 현실과 감독이 끌어내고자 하는 세계라는 관념의 문제가 흥미롭게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중국식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러야 할까. 압축되다 못해 현실과 꿈의 경계를 식별하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 도달한 근대적 상상력이 결국 어디에 도착하게 될지 궁금하다. 부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잔존하기를.  

그리고 덧붙여 기억해 두어야 할 중국의 감독들을 적어둔다. '다아오이난', '리뤼준', '구샤오강', '웨이슈준'과 '송팡' 등. 여전히 많은 중국이다.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Incredible But True> 캉탱 뒤피외Quentin Dupieux|2022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 ⓒ M&M

프랑스 코미디를 볼 때는 항상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크 타티'처럼 점점 더 온 우주가 펼쳐지는 것 같은 경이로움을 줄 때가 있지만, 코미디를 가지고 이러한 경지를 보여주는 것은 무척이나 귀하고 드물다. 아무튼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는 재미있었다. 진짜다. 단지 초반부(대략 45분 정도까지)까지였고, 그 후에는 확장되는 게 전혀 없으니 설정이 전부라고 할 수밖에.

설정은 확실히 재미가 있다. 새로 산 집에 비밀 통로로 내려가면 3일씩 젊어진다는 설정 덕분에 주인공의 아내는 영화 내내 내려가느라 바쁘다. 그리고 진짜 젊어지는 데 그건 영화 후반에 잠깐 등장하는 정도이고, 대부분의 장면에서는 내려가느라 바쁘다. 그게 코미디이겠지. 

주인공 회사의 사장은 인공 성기를 달았다. 일렉트로닉 성기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고장이 난 후 말썽을 일으킨다. 일본인들이 수리하는 장면도 있었는데 왜 그런 설정을 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인물들의 욕망이 파국을 일으킨다는 것은 프랑스식 코미디의 대명사다. 모파상의 『목걸이』라는 단편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근사하게 보이려고 어렵사리 명품 목걸이를 빌렸지만 파손되는 바람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이야기. 여기서 끝나면 프랑스식 코미디가 아니다. 알고 보았더니 그 목걸이가 이미테이션이었다는 사실. 한 마디로 소설의 주인공은 헛짓을 한 것인데,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식 코미디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에 이 헛짓이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을 과감하게 바꿔본다면 <믿거나 말거나 헛짓이야>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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