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류이치 사카모토'의 영화를 기억하며
[Critique] '류이치 사카모토'의 영화를 기억하며
  • 변해빈
  • 승인 2023.04.17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로소 그는 스스로 음악이 되었다"

2023년 3월 28일,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는 영원이 되었다. 71년의 세월이다.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그가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를 시작으로 영화음악가로서 중요한 존재가 되었음은 부러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마지막 황제>(1988)의 사운드트랙으로 아시아 최초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그야말로 거장이다. <하이힐>(1992), <폭풍의 언덕>(1993), <철도원>(1999), <토니 타키타니>(2005),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 <분노>(2016), <남한한성>(2017) 등 다 나열하기도 버거운 많은 영화와 그가 맺어온 깊은 인연은 오랫동안 잊기 어려울 것이다.

사카모토가 병환과 싸우며, 아니, 그의 표현을 그대로 살려 '남은 시간 속에서 음악을 자유롭게 하며'' 작곡한 마지막 앨범 ⟪12⟫의 수록곡이 반영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연출작 <괴물>(2023)이 현재로선 그의 유작이 되었다. 그런데 막연하게 필모그래피를 나열하는 식으로 그를 기억하는 건 어딘지 게으른 접근이란 생각이 든다.

 

삶의 미궁을 간파하는 위무의 시선

알려진 사실로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따름이지만, 내겐 '사카모토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관한 믿음이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2017)에서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기억한다. 그는 과거에 멈춘 달력과 시계의 맥박을 짚어내고 쓰나미에 의해 침수되었던 피아노를 복구하며 "견디고 살아남았다"라고 표현한다. 단지 고장 난 사물로, 또는 암담하고 아픈 기억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은폐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카모토는 무너짐의 여러 상태를 진단하면서 고통의 요소를 들여다보고, 손길을 보내고, 억제된 감각이 제자리를 찾게 하고, 이로써 중단된 무언가를 흐르게 한다.

 

ⓒ 영화 <분노>
ⓒ 영화 <토니 타키타니>

사카모토의 작고를 접하고, 가장 먼저 떠올린 작품은 <분노>이다. 많은 이들이 손꼽는 작품에 비하면 비교적 가까운 과거다. 이 작품에서 사카모토의 음악이 가진 영화의 응집력을 강화하고 정비하는 힘은 확연히 눈에 띈다. 영화의 극 내부 사운드가 절제되거나 극단적으로는 사운드가 암전되면, 그 빈 곳을 채우는 건 사카모토의 곡이다. 영화는 '분노'라는 감정이 제자리를 찾으며 끝난다. 감정의 응어리는 해소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응어리 자체가 '해소'의 차원인 영화에서 그의 음악은 정념을 분출시켜 내적인 언어를 대신하면서도, 무언가를 지켜내는 일에 실패한 이들의 비극과 절망을 감싸 안는 동시성을 갖추고 있다.

   

'지금 제대로 느껴야 하는 감정은 무엇인가?' 그런 물음에 대한 응답과도 같은데, 사실상 이는 사카모토가 시도해온 다양한 변주를 통해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급작스러운 화음의 굴절이 주는 오컬트적인 불안함(<하이힐>), 여러 악기 소리가 뒤섞여 내는 웅장한 규모(<마지막 황제>) 속에서도 그는 심연의 얼굴을 마주하는 방식으로 위무를 건네왔다.

<토니 타키타니>에서 잊기 힘든 장면 또한 그러한데, 주인공의 죽은 아내의 옷 조직 결들이 일일이 클로즈업되는 동안 사카모토의 'Solitude'가 인물 내부에 추상적으로 들어앉은 마음의 결들을 일으켜 세우던 때이다. 인물은 중요한 것을 잃었고, 공허와 허탈감은 모든 능력의 소멸로 이어지는바 마음의 문제를 명료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사카모토의 피아노 선율은 일관된 리듬의 축 위에서 이따금 무언가를 내려 앉히면서 고독의 깊이와 조응한다. 더욱 경이로운 점은, 색채를 잃은 인물의 세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소리를 죽이는 편을 떠올리기 쉬울 테지만, 그의 사운드트랙은 죽은 소리만큼이나 거대한 적막감을 '들려'주기 때문이다.

사카모토 특유의 음울한 정서에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밤과 그늘 따위의 거무스름한 것이 주는 괴리적인 안도감과 편안함 같은 것. 건조함의 운동이라든지, 어둠에 음영을 입힌다는 다분히 감상적인 표현으로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음악엔 깊은 무의식 너머로 빠져드는 체험을 유도하는 힘이 있다. 그는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삶의 미궁을 간파해내게 하며 영화와 우리의 일상 너머로까지 흘러 들어왔다.

 

영원이 된 그의 순간, 우리의 지금이 될 그의 영원

양립 불가한 것들 사이의 화음을 조정하는 사카모토의 양상은 음악 속 울림과 정적의 '공존'에서 이미 예견되었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에서 그는 지속되고 약해지지 않는 '울림'을 가리켜 억지스러움을 벗어난 이 같은 소리를 동경해왔다고 언급한다. 그의 말을 구태여 근거로 내세우지 않더라도 사카모토의 음악에는 길고 짧은 울림의 반복과 울림 간의 '겹침'이 자주 등장한다. 울림을 듣는다는 것은 그것이 형성되고, 번지고, 사라지기까지 시공의 조건을 견뎌야 하는 일이므로, 다른 한편에선 정적이라 이해되어 오기도 했다. 각 소리가 만들어질 당시 사카모토의 마음을 세세하게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를 몸과 마음이 서로의 속도를 따라붙지 못하는 문제에 연루된 존재의 걸음을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진 않을까.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는 울림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탓에, 음악이 끊어졌다는 착각을 유발하는 구간이 종종 발견된다. 몇 번이고 죽음을 넘어선 인물의 끊어지려던 숨, 또는 숨이 끊어지는 고통을 대변하는 위치다. <남한산성>에 찾아온 정적은 눈보라가 부는 황량한 풍경이었다. 사카모토는 울림이 지속되는 구간을 텅 비워두기보다 바람, 물, 풀, 숨의 소리이거나 그것을 형상화한 소리로 채워 넣었다. 소리는 지속성의 중단이 아니라 알아차리기 어려운 미약한 줄기가 지속되어 왔음을 강조하며 다시금 진동하곤 한다. 이를 따라 영화의 사그라들던 생의 활력은 끝끝내 복원의 가능성을 움켜쥔다. 이러한 시도는 흔하거나 무심하게 이뤄진 것처럼 느껴진다.

 

ⓒ 류이치 사카모토 ⟪12⟫

하지만 고정된 '이전'의 음을 마냥 되풀이하는 게 아니라 세계의 명암을 순환하는 리듬으로 이해하기에 가능하다. 사카모토가 겨냥해온 '건들지 않은 자연스러움'이란 이런 것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소리를 잃기 쉬운 세계는 영화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도 있다. 그는 현실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순간의 소리들을 영원으로 만들어 왔다. 그 '소리'가 영화에서 마주하던 고요와 닮아있다면 이는 압도적인 침묵, 강제성에 의한 실언이라기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거나 그것이 최선인 세계의 자연스러운 반영이다. 그리고 천지 만물의 관계에 의한 것을 '지금의 나'의 주변을 에워싼 공기로 받아들이는 사카모토 그의 삶의 태도, 말로는 쉽게 적어 내려갈 수 있지만 말처럼 쉽게 따라갈 수 없는 어려운 길이었을 것이다.

사카모토의 발매곡과 미완성곡을 이미지와 결합한 영상 작업물이 있다(다큐멘터리 제작 당시의 비하인드 클립으로, 오피셜 유튜브 채널 'Ryuichi Sakamoto'를 통해 공개됐다). 고전적인 멜로디와 전자음, 일상의 여러 소리를 융합해온 사카모토는 해당 영상 작업물을 통해 자신의 음악과 영화의 고전적인 기법의 결합까지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선을 거친 세계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인 곳이고, 위태한 흔들림은 전체 중 일부가 되며 유연한 리듬을 갖추게 된다. 편집의 후시 작업에 의한 변형이 아니라 장면 속 인물이 움직임을 직접 조절해낸 결과로써 슬로우모션을 그려내면서 인간과 기계 장치의 움직임은 주변 식물과 바람의 속도보다 느리도록 설계된다. 자연과 사물, 인간, 시공의 체계는 기존과 다른 질서로 움직이며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러움'으로 구별 지음으로써 잃게 되는 무언가에 대한 사유를 격려한다.

 

사카모토는 예술의 특권적인 위치를 마련하기보다, 각자의 일상에서 보이지 않던 예술의 자리를 발견하게 권유해왔다. 그의 얼굴이 유독 흑백의 화폭 속에서 회상되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세상의 숨겨진 밝음을 찾아낸다기보다, 빛을 둘러싼 어두운 면의 존재 이유를 알고, 고독을 마다치 않아 온 진정한 예술가이다. <애프터 양>의 기록영상이자 기억의 장소를 공명하던 그의 곡을 떠올리며 절묘하게 이어진 영화의 구절 하나를 옮겨본다. "우리 감각은 매번 다르게 저장되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그들은 존재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존재하고 더 나아질 수 있다."

마지막 앨범 ⟪12⟫의 각각의 곡에는 녹음 당시 사카모토의 숨소리가 그대로 담겼다. 그의 병환을 생각하면 조심스럽지만, 거친 그대로의 숨소리가 그럼에도, 또다시, 세상의 요철을 부드럽게 융화해줄 것이란 믿음이 강화되는 것은 고행을 겪은 뒤의 가장 숭고하고 정결하며 무엇으로도 모방할 수 없는 삶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그는 스스로 음악이 되었다. 이것은 잡음과 소음으로 규정되는 구분의 경계를 무산시키고, 이 곡들을 듣는 동안 나는 내 생활 속 잡음을 말끔하게 구별할 수 없이 음악과의 뒤섞임 그 자체를 온전한 하나로 받아들이게 되는 경험을 했다. 아마, 사카모토의 시간에서도, 나의 시간에서도 당시에 속한 것들의 조합이 만들어낸 동일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이상한 위로와 안락함을 준다. 사카모토는 단순히 영원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그 영원은 무수한 지금, 이 순간이라고 전한다. 속삭이는 모든 순간 중의 하나로 그는 저마다의 일상에 그렇게 깃들어 올 것이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