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이 스토리 4> '우디의 선택'을 이해하기까지
<토이 스토리 4> '우디의 선택'을 이해하기까지
  • 오세준
  • 승인 2020.02.26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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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 스토리 4'(Toy Story 4, 미국, 2019, 100분)
감독 '조시 쿨리'(Josh Cooley)
사진 ⓒ IMDb
사진 ⓒ IMDb

영화의 시작, 우디의 친구인 RC카가 빗물에 떠밀려가기 일보 직전이다. 아슬아슬하게 친구를 구하는 데 성공한 우디와 친구들. 엎친 데 덮친 격. 갑자기 등장한 한 남성이 앤디의 엄마와 몰리로부터 보핍과 양들(램프)을 건네받는다. 그리고 상자에 넣어 차에 실으려는 찰나. 그는 집에 키를 놓고 온 듯 다시 앤디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 순간 보 핍과 양들을 구하기 위해 등장한 우디. 그러나 보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다음 아이의 차례야. 매일 장난감을 잃어버리는 아이는 많아"라고. 그렇게 우디는 생각지도 못한, 차마 준비하지 못한 이별을 겪는다.

이 부분에 대해 허문영 영화평론가는 "가슴 아픈 상황에서도 그 순간 우디는 움직일 수 없고 자신에게 새겨진 하나의 표정밖에 지을 수 없다. 인형의 전적인 수동성이라는 운명의 쓰라림이 그의 부동과 무표정에 담겨 있음을 우리는 느낀다. (...) 이 세계의 가혹한 율법이 요구하는 필연임을 메타적으로 드러날 때, 오히려 풍부한 감정이 표현된다는 점이다."라고 언급한다. [FILO NO.10, <라이온 킹> <토이 스토리 4>에 대한 단상, P59] 어쩌면 <토이 스토리> 시리즈의 팬이라면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이상하다. 영화의 시작이 경쾌하지 않다. 여러 장르가 혼합된 앤디의 장난감들이 벌이는 일종의 소동극이 아닌, 9년 전에 벌어진 슬픈 이별을 보여준다.

 

사진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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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일까. 조금 더 영화 도입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우디는 더는 '앤디'의 장난감이 아니다. 이제 그의 오른쪽 신발 밑창에는 'Bonnie'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위에서 보 핍이 언급한 '다음 아이'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우디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보안관의 상징인 가슴에 달린 별 배지가 제시에게 달려 있다. 더 심각한 건 홀로 옷장에 남겨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보니의 장난감'이지만 그녀의 보안관은 아니다. 이 상황에 대해 친구인 버즈는 "괜찮아 친구? 다음엔 네가 선택 될거야"라고 걱정한다. 알고 보니 우디는 이번 주에만 세 번이나 보니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토이 스토리 4>는 이전 시리즈와 달리 조금 더 우디의 존재와 내면에 집중한다. 관객인 우리가 지켜봐야 하는 것은 무대 위에 오르는 우디의 모습이다. 영화 속 우디의 위치와 역할은 다른 장난감과 비교해 봤을 때 여러 측면으로 다가온다. 유치원에 가기 힘든 보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부분에서는 '현자'나 '조력자'로, '포키'를 구하기 위해서 나서는 모습은 '영웅'으로 그리고 모든 장난감의 소중한 친구까지. 그러나 정작 장난감이라는 그의 존재는, 보니가 소유한 장난감이지만, 보니의 장난감이라 부르기 힘든 결핍감을 가진다. 결국 이 영화는 여러 서브플롯과 함께 '우디가 가지는 결핍'을 채워 넣기 위한 이야기이며, 이 글은 그 결핍을 이해하기 위한 탐구이다.

 

'토이 스토리 2', 사진 ⓒ IMDb
'토이 스토리 2', 사진 ⓒ IMDb

 

비루한 우디의 세속적 희망, 보 핌의 존재에 대한 물음

잠시 <토이 스토리 2>를 떠올려보자. 오른팔이 찢어진 우디는 고대하던 앤디와 카우보이 캠프에 함께 떠나지 못한다. 그렇게 고장이 난 채 방치된 그는 옛 친구인 팽귄 장난감 '위지'를 만난다. 위지는 고장이 나서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아 수리점에 맡길 계획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앤디의 엄마는 앤디가 발견할 수 없는 천장에 숨겨놓았다. 그 순간 우디의 운명은 앤디의 장난감보다 위지와 함께 잊혀질 위기에 더 가깝다. <토이 스토리> 세계관에서 장난감은 결코 영원한 행복을 가질 수 없는 불안전한 존재이다. 물론 그들이 플라스틱에 불과한, 포키와 다를 바 없는 존재이기에 그들 역시 쓰레기라 불러도 무방한 부분도 내포되어 있다.

영화 속 그 어떤 누구보다도 보니의 애착인형인 '포키'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은 오직 '우디'뿐이다. 이것에 대한 근거로 위에서 언급한 '위지'의 존재와 자신이 망가져 본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우디는 '아이들이 왜 장난감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이해, '장난감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서 누구보다 가장 잘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앤디와의 경험'으로 하여금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시기나 그들의 심리에 대해서 잘 관찰해왔기에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디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전 주인인 '앤디'와의 기억인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고, 타인('다음 아이'라 부른 편이 더 알맞은)을 이해한다.

 

사진 ⓒ IMDb
사진 ⓒ IMDb

그러나 정작 '우디'는 이러한 자신의 이해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자신이 '포키'를 지키거나 '보니'를 위해서 애쓰는 부분에 대해서 그 어떠한 보상을 받을 수도, 심지어는 자신의 처지(자신이 더 사랑받는 장난감이 되는)가 나아지지 않는 '사실'을 망각한다. 아니. 알 수 없는 희망에 사로잡힌 듯 보인다. 이를테면 개비로부터 포키를 구출하던 도중 고양이의 습격으로 보 핍의 양이 떨어져 다리가 깨지고, 더키와 버니, 기글이 다치는 등 자신을 도와준 친구들이 부상을 당했음에도 포키의 구출에 집착하는 우디의 모습은 분명 보니를 위한 강박으로 다가온다.

한편으로, 우디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박애적인 성격'을 띈다. 스피노자는 "박애란 우리가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하는 욕망이다"라고 설명한다. [스피노자, <에티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디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이다. 그는 포근함과 따뜻함과 같은 '함께 있으면 느끼는 느낌'으로, 즉 '앤디와 함께 했던 기억'(사랑에 가까운)으로 보니, 포키 그리고 개비까지 포용한다. 이러한 그의 방식의 '옳고, 그름'이나 보니의 행복과 무관하게 그의 행복은 여전히 해결할 방도가 없음을 우디는 알지 못한다. 아울러 주인이 어른이 된다는 자연의 법칙에 대해서 계속해서 망각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듯 느껴진다.

 

위험을 무릅쓰고 달리는 차 위에서 뛰거나, 자신의 심장 같은 소리박스를 건네주는 우디의 모습을 관객인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위에 질문을 이렇게 바꿔 볼 수 있다. 우디가 가지는 희망은 대체 어떤 것인가. 이 희망은 그가 '일상에서 보는 희망'과 같은 것인가. 우디는 보니의 행복을 원하지만(우디의 희망), 정작 보니는 우디를 선택하지 않는다(일상의 희망). 독일의 의사 '헤르베르트 플뤼케'는 "일상의 희망은 세속적인 것, 필연적이지 않은 것, (...) 언제나 대상과 관계된다. 그리고 피할 수 없이 허망한 성격을 지난다"라고 말한다. [헤르베르트 플뤼케, <아픔에 대하여>] 인간과 장난감(주인과 노예)이라는 관계에서, 우디는 앤디와 보니까지 심지어 그의 장난감 친구들까지 행복할 수 있도록 나섰지만, 앤디를 지나 보니와의 관계 안에서 '이뤄질 수 없는 일상의 희망'(그들의 장난감으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을 가진다.

 

사진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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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보의 존재'는 가볍게 여길 이벤트적인 요소나 페미니즘적인 관점이 아닌 분명한 이유로 영화 안에 건재한다. <토이 스토리 4>에서 유독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디와 보 핍의 '숏-리버스 숏' 장면이다. 마치 사람 냄새가 난다고 표현할 만큼 두 장난감의 호흡은 분명 사람의 호흡과도 같은 에너지를 가진다. 정작 '보 핍의 존재'가 영화 속에서 빛나는 순간은 부러진 팔을 아무렇지 않게 테이프로 붙여 회전목마 위로 올라가 우디와 함께 카니발 전경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이후에 보는 우디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내 인생을 선반에서 앉아 보내기 싫었어 (...) 바깥세상을 여행해 볼 생각 해보지 않았어?" 그녀의 질문의 우디는 "주인이 없어?"라고 말하며 놀란다.

결과적으로 우디는 보니가 아닌 보 핍을 선택한다. 이 선택이 가진 이유는 결국 영화 처음으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보니의 선택을 가만히 앉아 기다리듯, 그렇게 보 핍이 떠나는 순간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부동과 무표정에 대한 환멸이 빗어낸 결심이다. '헤르베르트 플뤼케'는 그러한 우디의 선택에 대해서 "일상의 희망은 환멸을 안겨준다. 그런데 이 환멸에서, (...) 신비롭게도 다른 희망이 생겨난다. 세속의 희망이 가져다주는 환멸은 분명 그 자체 안에 세속적인 것으로 이끌리는 환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가능성'을 품는다."라고.

우디는 그동안 함께 살아온 친구들과 이별을 한다. 물론 이 순간은 보니와의 이별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토이 스토리>의 시리즈가 지속적으로 긴장을 주고 갈등을 형성시켰던 '사람-장난감'의 관계가 완전히 끝이 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여전히 카니발의 회전목마는 빙글빙글 돌고 있다. 자유를 선택한 우디는 자신의 내면의 주인이 되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시간만이 존재한다. 이것의 그의 앞으로의 일상의 희망인 것이다.

 

사진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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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토이 스토리 4>에서 우디의 무대는 어디였을까. 여전히 보니의 옷장? 기부 상자? 또 다른 아이의 방? 이제 우디는 그를 찾는 앤디의 목소리도, 어느 순간 다시 자신을 기억할 보니의 부름에도 흔들리거나 되돌아가지 않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존재이다. 그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닌,  이제 어디든 다닐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토이 스토리 4>는 '우디의 해방'을 위해 짜여진 영화다. 어떤 순간에는 자신의 무력함을, 또 어떤 순간은 주인의 행복을 위한 노력을, 다른 어떤 순간은 친구를 지켜내기 위한 우정을 그리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는 순간까지. 어쩌면 우디는 보니의 행복이 아닌, 자신만이 보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착각과 타자들에게 자신이 의미있고 가치있는 존재임을 보여 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자신의 모습에 빠져있던 것이 아닐까. 이 영화가 <토이 스토리> 시리즈라는 프렌차이즈 영화로의 관점보다는 아직 끝나지 않은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남아 있음을 증명하고, 그것이 여전히 우리의 친구인 '우디'를 응원하고 스크린에서 마주할 수 있는 기회로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탄생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코아르CoAR 오세준 기자, yey12345@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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