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의 전설' 자유라는 아이러니
'피아니스트의 전설' 자유라는 아이러니
  • 선민혁
  • 승인 2020.01.12 22: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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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열망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을 원하고 좇으며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갈망한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의 주 무대, 유럽과 아메리카를 오가는 버지니아호에도 그런 사람들로 가득하다. ‘자유의 땅’ 아메리카를 향해 떠나는 이주민들, 큰 경쟁을 뚫고 버지니아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그들은 모두 더 큰 자유를 향한 각자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들 사이에 주인공 ‘나인틴헌드레드(팀 로스)’가 있다. 버지니아호에서 태어나, 27년간을 버지니아호에서만 살아온 여권도, 비자도 없는 그는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유년기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 그는 폭풍에 흔들리는 배에서도 피아노를 (바퀴 고정을 풀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채로)자유자재로 연주하며, 배에서만 살아온 그의 연주는 육지에까지 명성이 자자할 정도다.

 

사진 ⓒ (주)라이크 콘텐츠

음악 천재 나인틴헌드레드의 재능이 가장 빛날 때는 즉흥적으로 곡을 만들어 연주하는 순간이다. 버지니아호의 연회장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는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연회를 위한 곡을 연주하다가, 갑작스럽게 독자적으로 자신만의 곡을 연주하곤 한다. 함께 소리를 내는 ‘악단’이라는 조직의 규율을 깨는 행위이지만, 악단의 구성원들은 뛰어난 그의 연주에 부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어떻게 음악을 만들어내는 거냐는 악단의 동료인자 친구인 맥스(프룻 테일러 빈스)의 질문에 나인틴헌드레드는 자신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나인틴헌드레드는 스스로 느껴지는 순간의 감정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만들어낸다.

맥스는 나인틴헌드레드에게 배를 내릴 것을 지속적으로 제안한다. 배에서 내려 나인틴헌드레드의 천재적인 음악도 세상에 알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을 해 아이를 낳는 평범한 행복도 누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인틴헌드레드는 자신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대답한다.

 

I think land people waste a lot of time wondering why?

Winter comes, you wish it was summer.

Summer comes, you live in dread of winter. That's why we never tire of travel.

Doesn’t sound like a good to me.

이렇게 말했던 나인틴헌드레드는, 배에서 내릴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를 묻는 맥스에게 나인틴헌드레드는 언젠가 배에서 만난 승객(가브리엘 라비아)에게 들었던 이야기처럼, 육지에서 바다의 소리(voice)를 듣기 위함이며, 그 소리를 들으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고 대답한다. 맥스는 그가 하선을 결심한 이유가 배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유가 어찌됐건, 배에서 내리려는 나인틴헌드레드를 응원한다.

버지니아호는 뉴욕에 도착하고 수많은 뱃사람들의 배웅과 함께 나인틴헌드레드는 생애 처음으로 하선을 시도한다. 배와 땅을 연결한 계단을 내려오던 그는, 멈춰 서서 뉴욕의 마천루들을 바라본다. 한참을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모자를 벗어 바다로 던지고, 뒤로 돌아 배로 다시 되돌아온다. 이후 나인틴헌드레드는 버지니아호에 영원히 남는다.

 

사진ⓒ(주)라이크 콘텐츠

나인틴헌드레드는 왜 버지니아호에서 내리지 않았을까. 버지니아호가 폭파되기 직전에 나인틴헌드레드를 배에서 꺼내기 위해 그를 찾아낸 맥스에게, 나인틴헌드레드는 자신이 배에서 내릴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유한한 88개의 건반에서는 무한한 음악을 만들 수 있지만, 무한한 세계에서는 어떤 곡도 만들 수 없다고 설명한다.

 

You rolled out in front of me a keyboard of millions of keys,

millions and billions of keys that never end.

And that's the truth Max, that they never end.

That keyboard is infinite... and if that keyboard is infinite,

then on that keyboard there is no music you can play.

You're sitting on the wrong bench... That is God's piano.

 나인틴헌드레드가 육지로 나아가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바다의 소리(voice)를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 큰 자유를 열망하며 무엇인가를 늘 좇아 여행을 하는 육지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나인틴헌드레드는 이미 알고 있다. 나인틴헌드레드의 자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버지니아호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나인틴헌드레드의 음악은 버지니아호 안에서만 음악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음악이 육지로 나가는 순간, 그것은 어떤 제목이 붙은 곡이 될 것이고, 재즈 등으로 분류될 것이다. 나인틴헌드레드가 육지로 나가는 순간, 그는 여권과 비자 등 신분증을 받을 것이며, 사회의 구성원이 될 것이다. 육지에서 나인틴헌드레드는 더 이상 “fuck the regulation”, “fuck Jazz too” 같은 말은 할 수가 없다.

육지 최고의 피아니스트 젤리(클라렌스 윌리엄스 3세)가 ‘재즈’라는 장르를 발명했다면, 버지니아호 안의 나인틴헌드레드는 음악 그 자체이다. 때문에 젤리는 피아노 대결에서 나인틴헌드레드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육지로 돌아가 계속해서 살아가는 젤리와 달리, 나인틴헌드레드는 육지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버지니아호가 폭파되면, 나인틴헌드레드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자신의 자유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기에 더 이상의 자유를 좇을 수 없는 나인틴헌드레드와, 그것을 모르는 상태로 더 큰 자유를 좇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글 선민혁, sunpool1347@gmail.com]

 

사진ⓒ(주)라이크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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