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다노는 스크린에 비치는 배우가 아닌, 스크린을 비추는 감독이 되었다. 이 노선변경은 놀라웠다. 동시에 약간의 걱정을 했다. 폴 다노가 감독을? 많은 배우가 훌륭한 감독이 되었지만 우리는 안다. 그보다 훨씬 많은 배우가 실패했다는 것을.
아마 우리는 <데어 윌 비 블러드>로 그를 처음 기억할 것이다. 광기와 카리스마로 점철된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대면하는 모습으로, 혹은 <미스 리틀 선샤인>일 수도 있다. 왜소한 체형에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배우로서 말이다. 하지만 그가 감독이라니. 그가 어떤 영화를 만들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그 걱정을 안고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영화 시작 첫 쇼트로 나는 내가 얼마나 오만한 걱정을 했던가를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픽스드 카메라로 시작하는 영화는 끝까지 정적인 무게를 이끌고 간다. 이 카메라는 후술하겠지만 '오즈'의 영향이었다. 폴 다노는 배우인 동시에 시네필이었으며,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유심히 영화를 보아왔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한 <와일드 라이프>는 장장 7년이 걸렸다고 한다. 영화는 그 시간 동안 시나리오를 집필하며 배우이자 여자친구인 조 카잔이 함께 있었기에 가능했다. 둘은 시나리오를 집필하면서 하나하나 의논했다고 한다. 때문에 완성도 높은 대사와 함축된 대사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이와는 별개로 7년동안 각본을 집필하며 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어쩌면 영화를 만드는 것 보다 더 힘들일 일지 모른다 생각했다.
영화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모든 씬을 훑을 순 없지만 중요한 장면은 꼭 상기해 보아야 한다. 영화 초반부 화목한 가족이 나온다. 세 명이 함께 웃는 쇼트. 이 영화의 방향성을 결정할 장면이었지만 나는 영화가 끝난 뒤에야 알았다. 이 지점에서 독자분들에게 신뢰를 잃을 수 있지만 변명을 해야 겠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 그 최소한의 정보조차 배제한다. 시놉시스조차 읽지 않고 영화를 본 나는 초반 5분 동안 화목한 가족 이야기 인 줄 알았다. 영화 포스터조차 그렇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플롯의 구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폴 다노는 시나리오를 조 카잔과 작업했지만 현장 촬영은 혼자 갔다고 한다. 대신 여자친구는 촬영분을 받아보며, 촬영에 있어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때문일까. 폴 다노의 영화는 데뷔작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노련한 쇼트들이 보인다. 가족 붕괴의 시작은 아버지의 해고에서부터 시작된다. 영화의 초반 가족이 한 쇼트에 들어가는 순간 이후 영화는 끝날 때까지 한 쇼트에 담기지 않는다. 단 한 쇼트를 제외하고 말이다. 붕괴와 미끄러짐. 이들은 한 화면에 담기지 못하고 단절된다.
아버지가 산불을 진압하러 가고 어머니가 바람을 피운다. 이제 14살의 소년에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이어지고, 더욱 힘든 건 어머니가 자신의 눈앞에서 그 일련의 행동을 실행한다는 데 있다. 부끄러움도 없고 죄책감도 없다.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아버지의 존재를 회상시키는 것뿐이다. 대사로 히스테릭하게 끊임없이 반복하며 아버지의 존재를 불러온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이 소년에게 영화는 자비를 베풀 여지가 없다. 더 대담하게 영화는 진행되고 어머니의 퇴행, 부모로서의 책임 의식에서 벗어나고싶은 욕구가 강하게 실현된다.
그 정당성을 보여주기라고 하려는 듯 어머니는 아들에게 산불 현장을 체험시키러 간다. 다시 말하지만 체험시켜주려 한다. 관객은 이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철저하게 계산된 쇼트들의 연결로 관객은 이 둘과 함께 한다. 산에 들어가는 과정을 점프쇼트로 연결하였다. 아마 폴 다노는 이 길이 얼마나 먼 길인지 동시에 동선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만들려는 뉘앙스를 만들려 했던 것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도착한 산불의 현장. 이곳에서 아들 '조'는 불안을 보게 된다. 어머니 '지네트'가 왜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답과 함께. 지네트의 대사가 함께하며. 니 아빠가 선택한게 뭔지 보렴. 아버지의 귀환만을 기다리던 조는 이제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인가. 존재적 물음에 영화는 가혹하리만큼 답을 주지 않는다. 이 뒤에도 계속해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입을 통해 소환할 뿐이다. 마치 카뮈의 <페스트>에서 인간들에게 닥친 재앙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만을 지리멸렬하게 반복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해결'과는 전혀 무관한 것인데도 말이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