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아이리시맨' 스코시즈의 마지막 인사
[NETFLIX] '아이리시맨' 스코시즈의 마지막 인사
  • 배명현
  • 승인 2019.11.24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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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리시맨'(The Irishman, 미국, 2019, 209분)
감독 '마틴스코시즈'(Martin Scorsese)
사진 ⓒ넷플릭스 코리아
사진 ⓒ 넷플릭스 코리아

1.

인생이 영화이고 영화가 인생인 감독들이 있다. 예를 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티븐 스필버그, 리틀리 스콧과 우디 엘런, 여성으로썬 얼마 전 타계한 아녜스 바르다. 마지막으로 마틴 스코시즈.

마틴 스코시즈. 돌아왔다. 최근 마블 영화에 대해 ‘시네마’가 아니라고 한 발언이 화제이기 때문일까. 그의 영화. 그러니까 그가 만든 ‘시네마’가 궁금해졌다. 이미 수많은 영화를 만들어 더이상 증명할 필요도 없지만. 다만 궁금하긴 하다. 그가 확신에 찬 언어로 ‘최근 영화의 동향’을 걷어찬 ‘지금’ 만든 시네마 말이다. 그 영화는 과연 어떨까.

앞서 말한 문장을 다시 써보자면 인생이 영화이고 영화가 인생인 감독들이 있다. 그리고 스코시즈는 자신의 인생을 총 마무리하는 듯한 시네마를 가져왔다. 인생의 말로가 얼마 남지 않은 자의 편지 같다고 말하고 싶다.

편지의 형태는 갱이었다. <좋은 친구들>에서 보여준 영광을 다시금 재현하려는 것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그는 영화와 자기 삶의 굴곡을 겹쳐 <아리리시맨>을 그려냈다. 무려 209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으로 말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하기에 209분은 짧지만, 영화가 되었을 땐 그렇지 않다. 이 영화는 훌륭하게 그의 삶과 원작을 스크린으로 길게 옮겨왔다. 

영화는 프랭크 시런이란 인물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첫 쇼트는 요양원의 복도를 따라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가볍게 복도를 지나 의자 앞에 안착한다. 그리고 늙은 프랭크를 마주한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전기를 듣는 동시에 관람하는 우리는 총 세 명의 프랭크를 마주한다. 이야기해주는 프랭크. 과거부터 현재까지 점점 늙어가는 프랭크. 조직의 보스인 러셀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는 프랭크. 영화는 서로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프랭크를 따라간다.

조금 벅찬 초반부를 견디면 우리는 영화를 금방 따라갈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인물은 이야기해주는 늙은 프랭크이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 우리는 트럭 운전사였던 프랭크가 어떻게 조직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삶의 곡선을 어떻게 상승시켰는지 알게 된다.

 

사진 ⓒ넷플릭스 코리아
사진 ⓒ 넷플릭스 코리아

그는 조직을 위해 고기를 밀매하다 머지않아 미국 최대 화물 운송노조 ‘팀스터스’의 위원장 지미 호파와 함께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일하며 인정받은 그는 노조의 간부까지 올라가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때 지미는 케네디 정권이 들어서며 몰락하게 된다. 그는 감옥에 수감되고 노조는 새로운 자를 허수아비 삼아 공석을 메꾼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틀어지기 시작한다.

지미는 조직으로부터 마음을 돌리고 고집불통스런 모습을 보인다. 프랭크는 조직과 지미를 연결해보려 하지만 지미에게 그럴 기미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긴 시간이 흐른 뒤 러셀은 프랭크에게 지미를 죽이라 명령한다. 이 순간 우리는 <아이리시맨>이 실화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 원작임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론 호퍼는 실종되고 미제사건으로 남아있지만 스코시즈는 실화에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프랭크는 러셀과 지미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나 여느 영화처럼 고뇌에 찬 모습을 보여주거나 내면의 이야기를 외재화된 음성. 그러니까 내레이션으로 ‘들려’주지 않는다. 스코시즈는 ‘보여’준다. 이 보여줌은 영화의 초기부터 시작된 로드무비. 그러니까 러셀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는 프랭크를 통해 시각화된다. 영화는 처음부터 그의 고뇌와 함께 세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고민하며 달린 것이다.

세 갈래의 이야기 중 로드무비의 완결까지 가기 위해 스코시즈는 기다린다. 프랭크는 러셀과 헤어지고 경비행기를 탄 뒤 홀로 이동한다. 그 곳에서 곧장 지미를 죽이러 가지 않는다. 프랭크는 마지막까지 고민하고 고민한다. 표정이나 긴장된 모습은 시각화되지 않지만 이는 기다림이라는 시간으로 표현된다. 지미에게 곧장 갈 수도 있었지만 프랭크는 같은 길은 세 번이나 번갈아 간다. 우리는 이 시간을 프랭크와 함께 견디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을 잡고 있는 듯한 감정을 느낀다.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지만 느끼게 해주는 ‘스코시즈식 하드보일드’의 결정체와 같은 장면이다. 

 

2.

하지만 그 결과를 담는 순간은 허무하다. 그 긴 시간의 고뇌는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다. 머리에 총을 몇 방 쏘고 끝날 뿐이다. 그 어떤 쇼트의 변화나 연결 없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장면이 왜 이렇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영화는 홍콩 누와르영화가 아니다(홍콩 누와르를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영화들을 사랑한다. 다만 다른 장르의 영화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스코시즈는 이 장면을 통해 하드 보일드장르가 가질 수 있는 카타르시스의 절정을 완벽하게 성취하였다. 관객은 이 순간을 절정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장면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스크린에 담음으로써 관객은 당혹감을 느낀다. 이 당혹감은 자연스레 의문으로 이어진다. 지나간 장면에 대해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정의 이입을 철저하게 배제한 쇼트에서 오히려 관객의 감각은 살아난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는 이 쇼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 호퍼는 실종되었으니 아무도 모르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코시즈는 범인을 누구인지 관객에게 명확하게 보여준다. 현실과 영화의 괴리가 가장 커지는 이 순간이 지나면서부터 영화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처음 영화가 시작되면서 나눠진 프랭크의 세 갈래 시간은 두 개의 길이 된다. 하나의 이야기가 모두 끝났으니 말이다. 이후부터는 살아남은 프랭크와 러셀의 ‘생’을 다룬다. 두 인물의 늙어감을 카메라는 집요하게 잡는다. 시간의 흐름이 강하게 느껴지는 영화의 후반은 인생사의 하강 곡선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아마 스코시즈는 ‘사건’의 이후를 통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는 듯하다.

이스트우드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던 <그랜 토리노>와 <라스트 미션>과 바르다가 생의 말로에 만들었던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과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처럼 인생의 끝에서 예술로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주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프랭크와 러셀의 몰락과 동시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낸다.

 

사진 ⓒ넷플릭스 코리아
사진 ⓒ넷플릭스 코리아

우리는 처음부터 프랭크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이자, 늙은 프랭크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영화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이쯤에서 환기해야 한다. 늙었고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는 노인이지만 그의 손에는 조직에서 가장 촉망받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증명하는 반지가 끼워져있다. 이러한 명예를 중시하는 모습 이면에는 딸에게 미안함을 호소하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신부에게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나약해진 측면을 비추며 캐릭터는 인간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어떤 감정도 배제한 체 하드보일드로 일관했던 180여 분과 다르게 후반의 30분은 명확하게 장르가 달라진다. 감독은 이렇게 만들어야만 했을 것이다. 작게는 프랭크의 삶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조금 더 크게 보면 관객이 이 러닝 타임을 체험함으로써 온전히 영화에서 다루는 ‘시간’을 겪게 만들어야 했으니까. 더더욱 크게 보자면 스코시즈 자신의 생의 곡선과 일치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했으니까.

그는 죽음 앞에서 고뇌하고 있는 듯하다. 나약해진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과거의 영광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의미심장하다. 문을 닫지 않기를 부탁한 프랭크가 문 밖을 응시한다. 이윽고 카메라는 문 밖에서 프랭크를 바라본다. 온 몸에 전률이 오를 만큼 완벽한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누군가 바라보고 있기를 청하는 것인가 아니면 프랭크(그러니까 스코시즈)가 계속해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둘 다인가. 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영화의 방점은 다르게 찍힐 것이다. 갱스터 영화로 스펙터클을 가져간 동시에 인간의 심연을 함께 담은 이 영화에 나는 존경을 표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곧 넷플릭스로 개봉될 것이다. 하지만 209분이라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관람한다는 게 쉬운 일일까. 나는 영화 꼰대가 될 생각은 없지만 지금 이 영화 앞에서만큼은 훈수를 두어야겠다. 그것이 거장의 마지막 인사에 대한 예의일 테니까. 한평생 영화를 하며 살아온 감독은 자신의 삶까지 영화가 된다. 그리고 이 작품이야말로 그런 작품이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사진 ⓒ넷플릭스 코리아
사진 ⓒ 넷플릭스 코리아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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