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잇다
영화를 잇다
  • 배명현
  • 승인 2019.11.11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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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닥터 슬립(Doctor Sleep, 2019, 미국, 152분)
감독 '마이크 플래너건'(Mike Flanagan)

 

오래된 영화를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는 영화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고백해야 할 것이 있다. 영화를 보기 전 선입관이 강하게 작용하는 편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고전영화를 리메이크하거나 리부트하는 일, 혹은 원작의 다음 시리즈를 제작할 때는 더욱 그렇다. 과거의 작품성(예술성, 완성도 그리고 재미 등 여러 가지)을 따라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들로 말이다.

이미 프랜시스 베이컨이 지적한바 있는 '극장의 우상'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이란 걸 알면서도 말이다. 때로는 고정관념이 '내 취향'에 맞는 영화를 선별해주어 시간과 경제적인 절약을 이루게도 하지만 결국 글을 쓰는 사람으로썬 좋지 못한 모습임이 틀림없다. 그 때문에 최대한 선입관을 배제하려 하지만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닥터슬립>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이라는 거대한 우상에게 도전하는 영화이다(이 전에도 소설 원작자인 스티븐 킹이 드라마로 제작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미 스티븐 킹의 소설은 여러 번 영화화되어 흥행에 성공했지만 큐브릭의 영화는 다르다. '영화'라는 장르 안에서 신적 존재이기에 그의 영화 '이후'를 만들기란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먼저 감독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닥터슬립>은 <샤이닝>과 예술성에서 동등한 위치에 둘 수는 없다.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 말하자면 이건 선입견에 의거한 실수가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감독은 큐브릭을 존경하긴 하지만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을 받았다. 물론 이 이야기가 더 낮은 레벨로 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영화가 가진 성취는 <샤이닝>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동시에, 할리웃에서 가질 수 있는 흥미의 요소로 연결지점을 만들어 내어 '두 영화'를 엮어냈다는 데 있다. 물론 여기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의문에 다시 의문을 던지고 싶다. <샤이닝>의 뒤를 이을 영화가 왜 팝콘 무비가 되어서는 안 되는가.

<닥터슬립>은 큐브릭의 영화를 새로 결말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니가 오버룩 호텔의 유령을 상자에 넣으며 오버룩 호텔의 트라우마를 종결짓는 것 처럼 보여준다(물론 이 결말을 새로운 이야기를 위한 시발점 이긴 했지만). 이야기는 40여년의 시간을 흘러 현대로 이어진다. 샤이닝을 가진 자가 다른자의 능력을 흡수하여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산다는 설정을 보여주며 말이다.

이 설정으로 영화는 초능력자들의 싸움이라는데 설득력을 얻게 된다. 2시간 3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그리 지루하지 않게 만들 수 있던 이유는 '엑스맨'을 떠올리게 만드는 능력자들의 싸움과 스펙터클 덕분일 것이다. 또한 영화 후반에 보여주는 오버룩 호텔의 인디언 장식을 모조리 지운 데에는(원작의 해설을 알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샤이닝>이 인디언의 피로 쓴 미국의 건국 신화를 비판하는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이다.) 원작 영화의 다른 길로 가겠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씬이다. 

이는 2019년에 과거의 영화를 새롭게 부활시키려는 의도가 함께 보이는 장면이다. 영화는 재생시키되 바뀐 시대정신을 반영하자는 전략(물론 미국이 인디언에게 빚을 갚았다는 말이 아니다.) 때문에 <닥터슬립>은 원작을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불친절함이 있다. 거기에 더해 과거 장면을 그대로 차용하거나 오마주한 장면이 곳곳에 드러난다. 오버룩 호텔로 들어가며 찍은 버드아이뷰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심지어 원작의 사운드 트랙까지 함께 사용하여 원작의 팬이라면 관람에 있어 즐거움이 배가되는 요소들을 배치시켜두었다.

 

사진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사진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그렇다면 <닥터 슬립>은 <샤이닝>이후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원작에서 문제의 시발점이었던 '오버룩 호텔'은 이번엔 문제 해결의 종착지가 된다는 점에서 재미가 있다. 이는 마치 트라우마 해결과 비슷한 구도로 전개된다. <샤이닝>이 '국가'의 틀에서 '간과한 것들'(오버룩)을 돌아보자고 말했다면 <닥터슬립>은 개인의 극복과 소수인의 연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인디언에서 인종으로, 그 인종 중에서도 '여성'을 이야기하고 여기에 더해 소수 중에서도 어떤 이데올로기를 가진 자와 함께 해야 하는 것인가를 영화는 질문한다. 이는 '로즈와 친구들'로 은유 되는 자들이 혹시 '근본주의자'를 의미하는 건 아닌지 나는 의심해본다. 다만 이 영화에서 pc를 다루는 지점은 꽤나 훌륭하게 연출했다고 판단한다. (최소한 할리우드에서 강박적 혹은 관성적으로 다루어지는 방식의 연출은 피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이렇게 영화는 40년에 가까운 시간을 지나 '시리즈'의 재탄생을 이야기했다. 과연 <닥터슬립>은 이어질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 아쉬웠던 지점들(떡밥 회수가 완벽하지 못했던 시나리오와 불필요한 인물…)을 해결하고 또다시 새로운 결말로 찾아와 주었으면 한다. 큐브릭의 재탄생이 아닌 샤이닝의 재탄생을 응원하며 말이다.

 

사진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사진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코아르CoAR 배명현 에디터, rhfemdnjf@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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