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 무너진 경계선 위에서
'경계선' 무너진 경계선 위에서
  • 배명현
  • 승인 2019.10.20 0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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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경계선'에 대해 답해야 합니다."
사진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사진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경계선>은 논쟁적인 영화이다. 제목부터 '경계선'을 다루겠다는 도발적인 제목은 어디서부터 영화를 정의내려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작품은 지금까지 '정석'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을 모두 뒤섞어 놓고 관객을 헷갈리게 한다. 장르, 시나리오, 플롯 그리고 캐릭터의 감정까지. 그렇다면 무엇이 이 영화를 관객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아 그렇다고 오해는 말자. 영화는 기괴하며 관객을 괴롭히는 영화임에는 분명하지만 이 단어들이 영화를 비판하는데 사용되는 단어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불편이 우리가 이 영화를 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티나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남다른 외모를 가진 티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지만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있다. 그녀는 사람의 감정을 냄새로 알 수 있다. 이 능력을 이용해 출입국 감시원을 업으로 삼아 티나는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아동포르노 파일이 담긴 메모리를 운반하던 남자를  포착하게되고 그녀는 수사에 합류하게 된다. 영화는 긴장감을 계속 해서 가지고 가며 장르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타나는 일터에서 멀리 떨어진 숲에서 사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녀의 취미는 자연 속에서 자유로운 산책을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자유를 자연 속에서 느낀다. 신발을 벗고 발로 땅을 느끼고 동물과 모종의 교류를 나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과 놀랍도록 닮은 남자, 보렐을 출입국장에서 만나게 된다. 그녀는 그에게 어떤 향기를 맡았지만 증거품이 없어 돌려보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다시 티나 앞에 나타나게 되고 둘은 본능적으로 끌리게 된다. 이후 영화는 로맨스 영화로 변환된다. 둘은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기괴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교합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아야만 알 수 있는 이 성행위는 정말 기묘하다. 둘의 신체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로맨스에서 판타지로 장르를 바꾼다. 보렐은 티나에게 우리는 인간이 아닌 '트롤'이라고 알려준다. 외모에서부터 풍기는 이 둘의 이질감은 인간이 아닌 '이종'의 존재감이었다. 

둘은 과연 인간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보렐은 자신의 정체를 인지하고 트롤로 살아간다. 반면 티나는 '인간'의 관습과 문명의 학습을 버리지 못한다. 그녀는 고민하게 된다.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자신의 타고난 본성? 아니면 경험과 학습을 따라가야 할 것인가. 이 문제를 잡고 있는 도중 그녀가 가담한 아동포르노의 범인이 잡히게 되고 그 배후에 보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는 환타지에서 범죄로 장르를 바꾼다. 보렐은 티나에게 말한다. 인간 때문에 우리가 죽은거야 과거에는 트롤이 많았다고.  그는 인간에게 복수해야 한다고 티나를 설득한다. 하지만 티나는 설득에 넘어가지 않고 보렐을 경찰에게 넘기려 한다. 하지만 그는 도주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그녀는 소포 하나를 받게 된다. 상자 안에는 아이가 있었다. 티나와 보렐의 아이 말이다.

 

사진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사진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의 설정은 정말 특이하다. 티나는 외형은 여성이지만 남성의 성기를 가졌다. 반면 보렐은 남성의 외형을 가졌지만 여성의 성기를 가지고 있고 생리를 하고 아이를 낳는다. 둘은 인간이 아닌 이종이며 이 둘은 아웃사이더이다. 영화는 이 둘로 현실의 모든 경계선을 넘어 다닌다. 섹스와 젠더 인종과 1등 시민 그리고 2등 시민. 문화와 본성 그리고 본능과 문명. 이러한 경계에서 티나와 보렐을 보며 영화는 질문한다. 현대의 우리가 마주한 복잡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답을 가지고 있는지. 아이를 낳지 못한 여성이 남성의 성기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모성애인가 부성애인가. 우리는 이방인에게 얼마나 경계심을 가기고 그들을 대해온 것인가. 그리고 문명은 어떻게 이방인을 비인간화시켰는지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영화는 답을 원한다. 하지만 바로 답할 수가 없다. 왜? 우리는 준비된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지금까지 대면하려 하지 않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존하지만 직면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이전에 그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 문제는 우리에게 아픔을 주지 않으니까. 그 문제는 우리가 아닌 이방인들의 아픔이니까. 영화는 일갈한다.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 보았냐고. 물론 현실에서 남성이 아이를 낳는 일은 (아직까진) 일어나지 않았고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러 겹의 메타포로 주어지는 질문들의 답에 21세기 포스트 휴먼에 대한 답이 있을 것이다.

<경계선>은 기꺼이 두 번 보고 싶게 만드는 유쾌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함께 보아야 할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과연 이 영화의 질문에 대해 얼마나 답할 수 있을까. 그리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질문들은 얼마나 많고 또 이에 대한 대답은 언제쯤 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의 시간 시작에 이 영화가 있을 것이다.

추기. 영화의 결말은 명백하게 희망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세대는 인간에 대한 호감과 모종의 새로운 개척을 이루리라는 것이라는 것. 하지만 나는 이것이 일종의 기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티나가 인간의 편에 섰기 때문에 이러한 결말이 날 수 있었던 것인데(티나가 보렐과 함께 따나 둘이 함께 아이를 키웠다면 아이는 자연스레 인간에게 악감정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티나는 인간의 편-아니 최소한 인간과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음으로-임으로 트롤의 다음 세대는 조금씩 인간 친화를 이룰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결말은 조금도 그들의 과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여기에 감독이 '인간'이기에 인간의 편을 들어주는 결말을 쓸 수밖에 없던 건 아닐까.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사진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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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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