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을 위한 변명
기생충을 위한 변명
  • 배명현
  • 승인 2019.07.18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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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봉준호(Joon Ho Bong), 영화 '기생충(PARASITE, 2019, Korea)
사진 ⓒ CJ 엔터테인먼트
사진 ⓒ CJ 엔터테인먼트

<기생충>은 개봉 8일 만에 500만을 돌파하였다. 봉준호와 칸이라는 네임벨류 그리고 평단과 미디어의 극찬은 관객의 마음을 달구기 충분했고 500만은 예측 가능한 수순이었다. 개봉을 앞두기 전부터 전국 멀티플렉스관은 예약으로 가득 찼고 관객들은 칸의 영광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극장을 나온 관객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역시 ‘황금종려상’과 ‘윤리의식을 버린 감독의 졸작. 의견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나는 전혀 다른 온도 사이에서 영화가 관객들에 마음을 관통했다는 공통점 밖엔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기생충을 비판하는 관객의 초점은 극 중 동익(이선균)과 연교(조여정)의 유사성행위 장면과 영화 중반 이후 이어지는 폭력적인 장면들에 집중되었다. 이에 반해 기생충을 옹호하는 관객들은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혹은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다.’’예술과 윤리는 무관하다'라는 대응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는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도 중요한 문제이다. 윤리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바라는 인격과 예술이라는 경계 안에 있는 많은 것을 사랑하는 인격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작품에 부도덕한 묘사가 들어가 있을 때, 존경하던 아티스트의 비윤리적 행위가 드러났을 때 나는 두 인격 중 누구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지 고민한다. 늘 같은 결을 유지하려 하지만 오로지 이성만으로 판단하는 인조인간이 아니기에 이중성 짙은 말과 번복할 때가 많다. 이는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작품을 관람할 때만큼은 윤리라는 틀을 벗고 작품에 집중하려 한다. 때문에 여전히 김기덕의 영화는 훌륭하고 <무진기행>은 한국 문학사에서 빼놓은 수 없는 명작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도덕주의라기보다 심미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맹목적인 심미주의자도 아니며 예술이 도덕 위에 있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고 싶지도 않다. 김기덕을 좋아하는 것과 그의 영화를 지지하는 것은 다르며 무진기행 속 여성 묘사에 문제가 없다고 느낀 건 아니니까.

기생충 또한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누군가는 마뜩잖은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충분히 불편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타인에게 강제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본인이 느낀 불편과 윤리적 반감은 본인의 것으로 남기길 바란다. 또 이런 감정을 표출할 순 있겠지만 이를 무기로 감독 혹은 제작진들을 폄하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진 ⓒ CJ 엔터테인먼트
사진 ⓒ CJ 엔터테인먼트

기생충이 보여준 잔혹함은 예술이라는 틀 내에서 충분히 표현될 수 있는 수준이었으며 개연성을 갖추고 있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이 장면들이 없었다면 작품성은 낮아졌을 것이다. 비판하는 몇몇 사람들의 말대로 수위를 낮추거나 등급을 올렸어야 한다는 주장은 충분이 합리적인 의견이다. 그러나 나는 감독의 창작 의도를 존중한다. 봉준호는 ‘그렇게’ 찍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심의 등급은 영상물 등급 의원회가 내린다. 몇몇 이들은 15세 등급을 두고 봉준호의 천만 관객 만들기라는 음모를 제기하지만 대부분의 음모론은 허무하다. 오직 한 명의 이권을 위해 사회 전체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러한 국내의 반응과 다르게 프랑스는 기생충을 전체관람가로 판정했다. 물론 프랑스의 전체관람가 설정과 한국의 15세 설정은 문화적 우열을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는 없다. 이는 두 국가 사이에 문화적 맥락과 사회적 차이를 고려해야 해 보았을 때 충분이 이해 가능한 부분이다. 다만 나는 성과 폭력이 다루어졌다고 ‘성인' 등급을 요구하는 한국의 도덕주의자들에게 한 번쯤 예술과 도덕을 분리하여 생각해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2시간의 러닝 타임 중 몇몇 장면 만으로 영화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손쉬운 판단일지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만약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 세상에 윤리적인 작품들만 존재한다면 그건 중세와 무엇이 다를까. 윤리적인 작품은 작품의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예술을 향한 잣대는 다양해야 한다고 믿는다. 윤리 혹은 한 가지 이데올로기의 단편 만으로 예술을 재단한다면 이는 편협한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다. 예술은 윤리와 도덕을 선전하기 위한 프로파간다가 아니다. 예술은 예술로서 존재해야 한다. 도덕은 그 위에 있지도 아래에 있지도 않다. 나는 예술을 향한 윤리의 잣대가 조금은 유연해졌으면 한다.

 지금도 우리는 늘 그렇듯 예술과 도덕의 논쟁 속에 있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잠시 동안은 도덕 혹은 문화가 승기를 잡을 수는 있겠지만 인류의 역사에 예술이 존재하는 이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이 싸움은 승자를 가리기 위한 대결이 아니다. 이 논쟁은 새로운 차원의 윤리와 예술 이론을 등장시켰고 부차적으로 우리가 가진 인식의 틀은 커졌다. 2천 년 넘게 지속되어온 싸움은 승자를 가릴 수 없기에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생충>을 판단할 윤리적 가치관이나 이론이 아니다. 가치가 다른 이의 의견을 존중해줄 정도의 관용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다른 가치와 잣대를 무시한 채 윤리만으로 작품을 정의하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폭력일 것이다. 우리에겐 윤리와 예술 모두가 필요하다.

[코아르CoAR 배명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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