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참 쉽지가 않아요. 일단 액션연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부담이 큽니다. 제작자들이 기피할 수밖에 없죠. 소속사로서도 배우가 다치기라도 할까봐 몸을 사리는 입장이고요."
"스턴트맨을 쓴다고 해도 그런가요?"
"음, 캐스트의 부담이야 줄어들겠지만 비용의 문제가 발생하니까요. 저 개인적으로도 출연작의 장르가 한정되어버리는 느낌이 들어서 필모그래피를 다양화시켜보고 싶은 생각이야 있지만 도리 있나요. 할리우드 수준의 액션블록버스터를 척척 만들어내는 한국영화계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우연과 상상>(2021)과 <이토와 샤미센 연주를>(2021)으로 다카사키영화제 최우수조연남우상을 수상하러 온 나카지마 아유무로부터 들었던 토로. '지금까지 연기한 캐릭터들을 아무래도 섬세한 감성이 돋보이는 느낌이 강한데, 혹시 장신(184센티)에 건장한 체격을 활용한 액션연기 같은 데는 관심이 없느냐'는 필자의 사적 질문에 봇물이 터졌다.
그도 그럴 만하지. 어느새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프로젝트 운용을 경영차원에서 극구 회피하려 하는 행태가 고착화되어버린 일본영화계의 제작환경 상 200억, 심지어 300억의 막대한 제작비를 투여해 만드는 대작은 꿈같은 이야기다. 물론 사토 신스케의 <킹덤> 시리즈나 시라이시 카즈야의 <고독한 늑대의 피> 시리즈 같은 예외의 사례들이 없는 건 아니나 그들은 이미 몇 번에 걸친 흥행기록을 통해 스스로의 능력을 입증한 경우라는 점에서 예외에 가깝다. 평균적인 규모의 영화들은 대개 예산이 10억이나 적게는 그 이하, 많다 하더라도 20억 정도에서 그치는 '고만고만한' 규모들뿐. 구로사와 아키라가 세계적인 명성을 구가하는 가운데 활극영화와 임협영화로 대표되는 액션대작들이 일세를 풍미했던 1950년대 일본영화 황금기를 생각하면 왠지 서글퍼지기까지 하는 현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익율에서 애니메이션과는 비교자체가 되지 않는 이른바 "실사작품(자본주의적 질서를 생각하면 별 수 없는 이야기지만, 꼭 원작이 있는 게 아니라도 애니메이션이 아닌, 배우가 나와 연기하는 모든 장르의 영화를 가리키는 명칭은 '실사'다. ※ 주)"을 만들 때, 상정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험부담을 각오해야 하는 액션영화는 환영받기 어려운 기획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데뷔작 자체가 액션영화(2001년 작 <버수스>)였고, 지금껏 출연해 온 40편의 작품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액션영화였던, 심지어 무술감독은 물론 더러 시나리오에 연출까지 도맡으면서 '맨주먹 붉은 피'로 온 몸을 던져 온 영화인도 있다. 대선배 부르스 리나 이소룡, 혹은 소니 치바의 계보를 이으며, 무술감독으로서의 위치와 명성이 한국영화계의 정두홍과 겹치는, 사카구치 타쿠.
그는 브루스 리만큼 수다스럽지만 타란티노 영화처럼 희화화하기는 힘든 액션 히어로다. 적어도 77분 원 신 원 컷의 검투를 피로한 전작 <무사: 400 vs 1>(2020)를 떠올린다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초청작 <원 퍼센터>(2023)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과도한 안전주의가 오히려 크리에이터의 발목을 잡는 일본영화계에서 강철 같은 육체와 결기로 버텨온 사카구치 타쿠의 지향점이자 존재 증명으로 '상위 1프로'의 리얼즘 액션을 카메라에 오롯이 담아냈다. 거기에 스포일러를 가히 범죄로 격상시킬 만한 반전은 '오직 극장에서'의 미덕을 일깨운다.
영화는"타쿠마 토시로(사카구치 타쿠 분) 씨, 당신, 배우, 액션배우지요?"라는 의미심장한 질문 뒤에 이어지는 자신감의 화신 같은 주인공의 인터뷰로 시작된다. 첫 주연과 무술감독을 겸한 타쿠마는 이 신작으로 실전활극의 메시아가 될 참이었다. 하지만 10년 후의 현실은 절망 그 자체. 촬영장에서는 '운동 좀 했다'는 신인이 시비를 걸고 제자들은 떠나간다. 게다가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려는 생각으로 향한 촬영 현장에는 그의 영화와 삶을 송두리째 바꿀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번 인터뷰는 사카구치 타쿠 이외에도 함께 BIFAN을 찾은 야마구치 유다이 감독, 오타 타카시 프로듀서(영화제작사이자 사카구치 배우 소속사인 위버 대), 그리고 '최종보스' 오시마로 분한 무술인(절권도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다. ※주) 이시이 토고 배우와 함께했다.
홍상현
사카구치 배우와의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588명을 상대로 77분간 노컷 액션 시퀀스를 선보여 '칼을 든 존 윅'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던 <무사: 400 vs 1>에 대한 언급 아닐까 합니다. 아시아 장르영화의 위업이기도 하거니와 '액션배우, 사카구치 타쿠'의 존재감을 영화계에 각인시킨 계기였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카구치 타쿠
원래 러닝 타임 10분 동안 아무 연출 없이 액션연기를 촬영해보자는 기획이 있었는데요. 당시 프로듀서와 의견이 맞지 않아 현실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촬영이 무산되긴 했지만 촬영장비라든가 의상, 소품 같은 건 이미 다 확보가 돼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한 70분 넘는 분량만 있으면 장편영화를 만들 수 있으니까 딱 하루만 촬영을 해보기로 한 겁니다. 다만, 컷을 여러 개로 분할하려고 하면 하루가 모자랄 수도 있으니 원 신 원 컷으로. 그렇게 태어나게 된 작품이 <무사: 400 vs 1>이죠. 10분짜리 단편을 위해 1년 동안 훈련을 했었는데 일곱 배나 되는 분량을 정말 촬영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었는데요. 결과적으로 손가락뼈와 갈비뼈가 골절되고 이도 네 대나 부러지긴 했지만 아무런 연출 없이, 실전과 아무 차이가 없는 장시간 검술대결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보람이 느껴지는 경험이었죠.
홍상현
검술대결 부분을 다 찍고 나서 바로 장편영화가 완성되었던 건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오타 타카시
그렇습니다. 검술대결 부분을 찍어둔 건 영화가 완성되기 7, 8년 전의 일이에요. <리:본>(2016)의 감독인 시모무라 유지가 쿠라타 액션클럽의 멤버였는데 제가 열세 살 때부터 삼년 동안 거기서 같이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한 30년 만에 만나서 아침까지 술을 마시는데 대뜸 '요즘 영화를 만들고 있다'면서 데려가 보여준 게 <리:본>이었어요. 그러더니 또 '7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 준비한 영화가 있다'면서 <무사: 400 vs 1>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더라고요.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다 감동한 제가 판권을 살 테니까 영화를 완성해보자고 제안했죠. 그렇게 최대한 빨리 오프닝과 엔딩 부분을 촬영해서 붙인 것이 제가 프로듀서로서 참여한 첫 번째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홍상현
사카구치 타쿠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제 머릿속에서는 부르스 리라는 이름이 떠오릅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특수효과나 다른 눈속임을 거부하는 리얼 액션을 추구하신다는 점과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계신 점, 거기에 감독으로서의 능력은 물론 스스로 창시한 무술까지 있다는 점에서 그렇지 않나 하는데요.
사카구치 타쿠
브루스 리는 정말 거대한 분이시죠. 절권도를 창시하고 보급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뿐더러, 저는 물론 이번 <원 퍼센터>의 제작에 참여한 모두에게 액션영화에 대한 신념을 심어준 존재이기도 합니다. 다만,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기에는 세상에 남겨놓으신 필모그래피가 양적인 면에서 너무 부족하지 않나 싶어 안타까워요.
스물여섯에 데뷔한 이래 정신없이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당신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살고 있는데요. 그 세월이 헛되지 않도록 제가 창시한 무, 웨이브를 바탕으로 새로운 액션을 끊임없이 선보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홍상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원 퍼센터>에도 등장하는 사카구치 배우의 무술, 웨이브에 대해서 좀 더 들어보고 싶은데요.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 또 어떤 체계에 의해서 본인만의 '특기'가 아닌 '무술'로 불릴 수 있는 것인지요.
사카구치 타쿠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무술'보다는 '전투술'이라는 호칭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몸의 근육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예컨대 산악지형에서 전투를 하게 될 경우, 체력을 소모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거 일본의 무사들은 근육보다 뼈의 움직임에 의존해왔지요. 물론 지금처럼 먹을 게 많지 않다는 환경도 한 몫 했을 테지만요. '웨이브'란 바로 이 '뼈'를 이용해서 우리 몸에 파도를 일으키는 걸 기본으로 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신체의 조작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 무척 오랜 시간을 들여 제가 나름의 형태와 철학을 확립해 놓았거든요.
홍상현
대단히 흥미로운데 인터뷰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 그 내용을 다 들어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최근 일본영화계에서는 제작비와 안전상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사카구치 배우께서 추구하시는 이른바'리얼 액션' 영화의 제작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어요. 이런 환경 속의 본인의 의지를 실천해가려면 어려운 일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사카구치 타쿠
연기자가 다치지 않도록 사고를 예방하는 건 당연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로서는 일단 액션연기를 하는 이상, 어느 정도의 타박상은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에 딱히 '부상'이라고 간주하지는 않고 있어요. 조금 과격한가요?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저 개인에 관한 기준이니까요. (웃음) 또, 컷의 분할이나 영상속도의 조절, 와이어액션, 특수효과 등을 활용하면 액션장면을 연출하기는 쉬워질 테지만 배우라면 역시 신체를 사용한 표현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원 퍼센터>를 제작하면서 의도한 바의 하나는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파되었던 유일한 무술인 절권도와 겨뤄보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일본 내에서 절권도의 일인자로 알려져 있는 이시이 씨를 굳이 섭외한 이유도 그래서였고요. 링 위에서 맞붙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서로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접전을 벌이는 모습을 담아내려 노력했어요. 물론 무술이란 자기수련 외에도 상대를 제압하는 데 쓰이는 게 사실이지만 <원 퍼센터>의 제작에 있어서는 서로를 제압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심각한 부상을 유발할 수 있는 타격은 최대한 자제하는 가운데 촬영을 진행했지만요.
홍상현
마침 이시이 배우께도 질문을 드려보고 싶었는데 이야기를 꺼내주셨네요! (웃음) 액션의 완성도가 정말 상당한 수준이던데 현장에서는 어땠나요?
이시이 토고
(웃음) 방금 타쿠 씨도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갔었다고 언급하셨는데, 제가 배우라기보다는 무술인 이잖아요. 그리고 제가 하는 무술인 절권도에서는 상대방과의 간격을 중시합니다. 그런데 절권도를 수련하면서 대련을 할 때도 사고가 나면 안 되기 때문에 수련자간에 급소타격이나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공격을 자제하거든요. 이번 촬영에서도 바로 이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고요.
홍상현
야마구치 감독님 자체가 아무래도 불필요한, 그러니까 모양새만 추구하는 액션을 자제하기로 유명한 분이시니 두 분(사카구치 타쿠, 이시이 토고)과 호흡을 맞추기도 어렵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야마구치 유다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웃음) 작품 특성상 '허세'가 필요할 때도 있죠. (웃음) 그런데 <원 퍼센터>에서는 화려함보다 오히려 전문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촬영을 진행했어요.
홍상현
사카구치 배우님은 평소 유튜브 채널도 운영 중이신데요. 무술인이 자신의 무술을 SNS로 전수하는 건, 이를테면 기업의 영업 비밀을 전달하는 것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데, 심지어 그걸 <원 퍼센터>의 제작사이자 사카구치 배우의 소속사이기도 한 위버에서 운영하고 계시는 걸 보고 좀 놀랐습니다. (웃음)
오타 타카시
무술이라는 게, 콘텐츠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뭔가 '위험한 매력'이 있잖아요. (웃음)
신체에 큰 타격을 주는 이른바 '필살기'같은 것도 많이 있지만, 그런 건 일상에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강도를 구분해서 공개하는 게 중요하지요. 그런데 무술인마다 입장에 차이가 있다 보니까 이시이 씨한테 처음 <원 퍼센터> 출연을 제안했을 때는 거절을 당했어요.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 이시이 선생이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무술에 전념하게 되면서 아무래도 홍보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는지 두 번째 제안을 받아들이고 영화에까지 출연해줬죠. 저로서도 영화 속에서 사카구치 타쿠의 카운터파트(counterpart)라는 포지션을 설정해 절권도의 매력을 영화에 충분히 담아낼 자신이 있었기에 함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홍상현
20년 넘게 액션 영화의 대가로 활약하면서 많은 후배들을 길러오셨는데요.
사카구치 타쿠
제자양성과 관련해서 액션스쿨 같은 걸 운영해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여기저기서 정말 많이 받는데요. 정작 저는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 지금껏 수업료 한 푼 받아본 적 없습니다. (웃음) 그냥 저한테 배운 친구가 활약하는 모습을 본다는 거 자체가 기쁜 일이잖아요. 다만, 저 스스로도 활동을 열심히 해서 하나의 롤 모델이 되어주려는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방금 말씀드린 액션스쿨 같은 형태로 제자를 많이 받을 수 없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요. 제 액션은 연기라기보다 실제의 무술에 가깝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도 연기에 활용하려면 여러 가지 궁리가 필요합니다. 약속대련처럼 치고받는 움직임을 사전에 정해놓기가 쉽지 않으니까. 그냥 서로의 영혼과 육체가 움직이면서 상호작용을 하는 거죠. 단순한 '싸움', 그 자체라고 할까요? 그래서 말로 설명하기보다 제가 직접, 최대한 많이 표현해 보여드리고 있습니다.
홍상현
작품을 보는데 소니 치바(치바 신이치) 이후 일본 액션 영화의 정상에 서 온 "사카구치 타쿠의 영화인생"을 돌아보는 의미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을 것 같고요.
사카구치 타쿠
말씀처럼 제 영화인생을 돌아봄과 더불어, 앞으로 가야할 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는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일본영화계에서는 인기에 기대보려는 심리에서 전문성 없는 아이돌을 캐스팅해서, 액션물이라고 선전은 하지만 도대체 어떤 재미를 추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어요. 현실감도 없고, 액션은 그저 시늉만 하고 있을 뿐 아무런 박력이 느껴지지 않죠. 그밖에도 할 이야기야 많지만 그보다는 '관객을 속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리얼'한 액션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고, 개발해가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생각을 백퍼센트 이해해주는 오타 같은 친구가 소속사이자 제작사 대표, 즉 프로듀서를 맡아주고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고요.
우리가 걸어갈 길은 좁고, 험하지만 이번작품에서처럼 함께해주는 동료들이 있으니 시간이 갈수록 우리를 이해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관객 분들도 늘어날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 그랬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웃음)
홍상현
그런데, 원래 액션영화 연출자로서 역할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전적인 성격을 띠는 <원 퍼센터>에서는 굳이 감독을 따로 섭외하셨습니다. 물론 야마구치 감독에게는 아무 불만 없지만. (웃음)
사카구치 타쿠
오랫동안 작업을 함께해온 관계라 아무래도 제가 의도하는 바를 충분히 표현해주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니, 능력도 능력이지만 서로 목숨을 걸어줄 만큼 신뢰가 쌓여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가 일단 큰 메리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웃음)
야마구치 유다이
아닌 게 아니라 사카구치 본인이 '내가 주연하는 영화는 연출하고 싶지 않다'는 말도 종종해요. 그도 그럴 것이, 워낙 한 분야에 집중해서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거든요. 전에 BIFAN에서 초청해주셨던 <야쿠자 웨폰>(2011)의 경우도 공동연출이었는데, 연기와 연출 두 분야에서 집중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면서 저한테 부탁했던 거예요. <돌격! 남자훈련소>(2007)에서 처음 주연과 감독을 같이 맡았을 때 너무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홍상현
이시이 배우는 딱히 걱정 같은 건 없었습니까? 데뷔작이셨는데요.
이시이 토고
네. 진짜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영화출연인데 의외로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어요. 만나기 전부터 <리:본>을 보고 타쿠 씨의 스타일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거든요. 인사를 하고 나서는 영화작업 말고도 유튜브를 통해 교류하면서 신뢰를 쌓아갔고요. 그밖에 제 스스로도 모처럼 주어진 기회니까 전심전력으로 노력하겠다는 결심이 서있었습니다. 물론 그 기저에는 타쿠 씨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는 안정감이 있었지만.
홍상현
촬영 당시 가장 찍기 힘들었던 장면이 뭐였는지 궁금합니다.
야마구치 유다이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사카구치 배우와 이시이 배우의 결투장면이었습니다. 연기가 아니라 두 사람의 진짜 무술실력을 겨루는 형태로 촬영되다 보니까 촬영하는데 사흘이나 걸렸어요. 하루 내내 싸울 수는 없으니까 일단 어느 정도 촬영을 해 놓고 남는 시간은 다른 신을 찍는 데 투자하는 방법을 썼죠.
사카구치 타쿠
제 개인적으로는 사흘이 아니라 합쳐보면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촬영한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야마구치 유다이
타쿠 씨는 평소처럼 엄청나게 집중을 했었거든요. (웃음)
이시이 토고
덧붙이자면 결투장면을 굳이 하루에 다 찍지 않은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는데요. 역시 체력이 소모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자들의 속도도, 정확도도 떨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영상기술의 사용도 자제하자는 전제를 해 놓았던 지라 저나 타쿠 씨나 피지컬이 최상인 상태에서 촬영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사카구치 타쿠
이시이 씨가 무술인이기 때문에 더 힘들었을 수도 있을 거예요. 무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데 영화촬영은 테이크가 거듭되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서 힘을 주고 어느 부분에서는 빼야할지 몰랐거든요.
이시이 토고
페이스 조절을 잘 못했죠. (웃음) 처음부터 모든 체력을 다 쏟아 붓다 보니까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오래 버티기가 힘들더라고요.
사카구치 타쿠
처음에는 속도가 떨어지고 둔해지는 게 싫다면서 식사도 생략하더군요. (웃음) 그래서 제가 영화계 선배로서 "중요한 건 100점을 맞는 게 아니라 꾸준하게 80점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충고했습니다. (웃음)
홍상현
정말 흥미진진한 인터뷰였는데 이제 슬슬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관객 여러분께 한 분씩 메시지 부탁드립니다.
사카구치 타쿠
한국에서의 개봉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데요. 엄청난 히트까지는 못 할지도 모르겠지만 (웃음) 도움이 된다면 몇 번이라도 한국에 찾아가 프로모션을 거들어드리고 싶어요. <원 퍼센터>의 관객 여러분은 제게 단순히 영화를 보러 오신 분들이라는 의미 말고도 제 리얼 액션을 이해해주시는, 혹은 앞으로 이해해주시게 될 분들이라는 의미가 있으니까요.
소중히 하는 가치가 담겨있는 영화를 만드는 일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그 의미가 크다 하더라도 작업의 결과물로서 세상에 나오는 건 결국 '영화'인 까닭에, 그 가치를 인식해주시는 분들의 존재는 대단히 격려가 됩니다. 부디 많이들 보러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시이 토고
무술인으로서 절권도의 진짜 기술을 사용하면서 리얼 액션의 사카구치 타쿠 씨와 호흡을 맞췄습니다. 아무쪼록 영화를 보러 오신 분들께서 속도감 있는 공방과 사실감 있는 묘사에 주목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오타 타카시
처음 야마구치 감독과 같이 일을 하게 됐을 때 제 영화취향을 소개하기 위해 DVD를 건넨 작품이 최민식 배우가 주연하신 <파이란>(2001)이었어요. 한국영화를 정말 좋아하고 드라마도 자주 보거든요. BIFAN에서 뵈었던 한국 관객분이 "<쉬리>(1999) 같은 영화에 사카구치 배우가 나왔으면 어땠을지 궁금하다"고 말씀해주셔서 너무 기뻤습니다. 장차 한국에서 활동하는 게 제 큰 목표중 하나이기도 한 까닭에 아무쪼록 한국개봉이 잘 진행되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인터뷰를 함께한 '사카구치와 친구들'과의 재회는 BIFAN 폐막 후 찜통더위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던 8월 초, 도쿄구 에도가와구의 제작사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그 사이 BIFAN에 왔던 프로그래머에게 픽업된 <원 퍼센터>가 텍사스의 장르영화제 판타스틱페스트에 초청되었다는 소식.
하지만 정작 '굿 뉴스' 주인공인 사카구치 배우의 얼굴이 편해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실은 폐쇄공포증 때문에 장기간 비행기를 타기가 쉽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평소에는 <엽기적인 그녀>(2001)나 <클래식>(2002) 같은 작품을 즐겨본다던 고백만큼이나 의외의 모습. 오타 프로듀서에게 물으니 '그래서 갑옷도 못 입고, 특히 헬멧을 싫어하지 않느냐'면서 장난스럽게 웃는다. 괜찮을까. '아니, 이 사람. 의외로 예민하네'하며 필자도 같이 웃었지만 모처럼 주어진 북미상영의 기회가 물거품으로 돌아가면 어쩌나 싶어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두 달 뒤, 제작사에서 운영하는 사카구치 배우의 유튜브 채널에 텍사스 현지촬영 동영상이 올라온 것을 보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해냈구나.
액션에 아니라 장시간 항공여행을. 영상의 내용 중에는 BIFAN의 GV에서도 선보인 리얼리즘 액션에 인종을 망라한 관객들이 일제히 탄성을 지르는 광경도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수련의 강도와 난이도가 더해가고 그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카구치 타쿠와 이시이 토고, 두 사람의 실전무술.
이래저래 고생이 말이 아닌 그들에게 염치없지만 부디 어려운 현실에 굴하지 않고 살아남아, 앞으로도 오랫동안 필자에게 그 묘한 '날 것'의 환희를 선사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인터뷰 홍상현 영화평론가, krpopper@ccoart.com]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