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개된 미국영화는 모두 다 '영광스러운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 <파벨만스>(2023), <바빌론>(2023),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 등 모두 다 입을 모아 20세기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흠뻑 예찬한다. 할리우드를 직접 관통하지 않더라도, 폴 토마스 앤더슨의 <리코리쉬 피자>(2021)처럼 현재를 바라보는 사례가 다소 드물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영화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선 시네아스트들이 '지금, 여기'를 외면하게 된 이유인 '우울증'을 파헤쳐야 한다.
우울증은 미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개념이다. 우울증은 존재가 소중하게 여겼던 대상이 사멸되거나 실종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원인이다. 여기서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극복하면 우울증으로 이어지지 않지만, 그 사실을 부정하며 회고나 꿈에 침잠할 때 우울증이 발병된다. 우울증은 대체로 생의 활력을 앗아가기에 극복해야 할 정신 질환으로 규정되지만, 예술에 한에서는 창작의 크나큰 동력이 되기도 한다. 소중한 것을 강박적으로 소환하고 미화하려는 태도가 고풍스러운 '바로크 양식'이랄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의 사례로 발현되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잃어버린 소중한 것은 20세기 할리우드 그 자체이거나, 거기에 내재된 어떤 정신이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발생하지 말았어야 할 사건을 제외하고선, 당대의 할리우드를 고스란히 옮겨오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는 진실과 가상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추함이나 어설픔을 편집으로 제거한다. 또 스턴트맨의 액션 연기가 배우의 행위인 양 둔갑한다. 그런데 타란티노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불완전한 배우의 민낯을 낱낱이 폭로한다. 그 이후 배우가 스턴트맨에 준하는 액션 연기를 할 수 있게끔, 즉 '진실'을 표현할 수 있도록 성장시킨다. 타란티노는 가상 이미지가 넘쳐나는 오늘날과 비교해서 그 당시 할리우드의 휘황한 이미지엔 최소한의 진짜가 담겨져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한편, 코엔 형제는 20세기 초반 할리우드에서 다른 가치를 길어온다. 코엔 형제의 모든 영화는 <시리어스 맨>(2009)에서 언급되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관통하고 있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등장인물들이 기대하거나 계획한 바가 있지만, 작고 열등한 인간의 머리로 품어낼 수 없는 거대한 세계가 인간이 그려본 미래를 불확정적으로 배반한다. <헤일 시저!>(2016)가 다루는 1930년대의 할리우드에서도 우발, 충동, 즉흥이 가득하다. 감독, 각본가, 배우 중 어느 누구도 영화 촬영 계획을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영화계에 내재한 스캔들을 좇는 기자들 역시 골칫덩이다. 그런 와중에 이들의 불확정성을 통제하는 '총괄 프로듀서'가 구세주처럼 나타난다. 불확정성이 머릿속에 그려본 아름다움을 깨트리며 '불쾌함'이나 '추'를 가져다준다면, 이 모든 불확정성을 차단하는 총괄 프로듀서의 초인과도 같은 힘이 아름답고 웅대한 할리우드를 탄생시킨다. 코엔 형제는 당대 제작자의 엄격함과 절제 덕분에 할리우드의 황금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어쩌면 그 초인과도 같은 통제력이 오늘날엔 부재하는 것일지 모른다.
또 데이미언 샤젤은 <바빌론>에서 '시각 예술'로서 영화의 이미지만을 우직하게 지향하던 무성영화 시절을 예찬한다. 샤젤은 오늘날의 영화가 타 예술 매체에 기대며 고유의 힘을 잃어간다고 느끼는 듯하다. 그래서 샤젤은 매 작품에서 차용하는 음악의 리듬감이나 박자를 '편집'에 반영하며 영화로서 승화하고, 이로써 시각 매체의 본령을 지켜나가려 노력한다. 웨스 앤더슨 역시 <프렌치 디스패치>(2021)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20세기의 예술과 영화를 그리워한다. 샤젤과 앤더슨은 잃어버렸거나 겪어보지 못한 영화의 정수이자 본질을 그리워한다는 점이 동일하나, 둘의 관점은 미세하게 다르다. 샤젤은 영화가 가진 이미지의 힘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반면, 앤더슨은 현재·현실과 '상대적'으로 다른 시대 및 매체를 예찬하고, 그것이 보편성을 띠게 되면 금세 또 다른 것을 욕망한다. 이러나저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과거의 예술이 더 곱거나 특별하게 보이는 것은 확실하다. 이는 오늘날에 더 새롭거나 나은 것을 창조할 수 없다는 나약함의 고백일지도 모른다.
미국영화 산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대인' 역시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 제임스 그레이의 <아마겟돈 타임>(2022) 등에서 확인할 수 있고, 이들의 회고는 백인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일단 미국의 유대인 영화감독들은 본인들의 '타자성'을 부각한다. 그레이의 모든 작품에서 유대인 선조들은 미국 주류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여 '불법'에 가담하거나,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그 여파가 현재까지 이어지기에 이들은 자연스레 원인으로서 과거를 다루게 된다. 그래서 스필버그는 이젠 현재로 나아갈 수 있게끔 <미지와의 조우>(1977)나 <E.T.>(1982) 등에서 일관되게 '타자 환대'를 부각한다. 홀로코스트 이후 서구 문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유대인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20세기에 발발한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하며, 인간성을 회복하고 선진적인 문명으로 거듭나려면 타자를 열린 마음으로 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타자 환대의 정서를 스필버그는 항상 영화에 반영한다. 타 민족, 인종뿐만 아니라 저 미지에서 날아온 '외계인'까지 반기며, 그들은 결코 적이 아니라고, 오히려 유한한 인간을 확장시켜주는 친구일 것이라 주장한다.
스필버그의 '환대론'은 백인에게 건네는 메시지임과 더불어 자기반성을 포함하는데, 유대인 사회의 폐쇄성 또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레이의 작품 속 유대인인 주인공들은 항상 갈림길에 선다. 유대인 가족 및 공동체는 주인공이 '유대인으로서' 적합한 선택을 내리길 강요한다. 반면 주인공은 민족적 정체성을 따르지 않고 개인의 자유를 꿈꾸는데, 끝끝내 주인공은 거대한 유대인 공동체 앞에서 좌절하고야 만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이중적으로 지닌 '아리 애스터'나 샤젤 역시 마찬가지다. 아리 애스터의 경우, '유전'이나 '폐쇄적인 공동체', '선조의 낙인' 등 개인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선천적으로 속한 가족, 인종, 공동체, 역사 등의 폐쇄성을 영화에서 매번 부각한다.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유대인 학교에 다녔던 데이미언 셔젤은 자신이 선택한 적 없는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즉 태생적인 굴레에서 달아나려는 혈투를 영화에 항상 반영한다. 이는 미국 바깥의 유대인 영화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으로 '레베카 즐로토브스키'나 '라마 버쉬테인' 등 '여성 유대인 영화감독'들은 유대인 여성에게 강요되는 가부장적인 유대교 문화를 늘 비판하고, '칸테미르 발라고프'의 경우 유대인의 폐쇄성을 '근친상간'에 빗댄다. 그래서 유대인의 시간 여행은 이들의 현재를 구속하는 늪과 같은 역사에서 비롯한다.
다만, 폐쇄성에서 달아나고 싶어 하는 유대인의 열망은 지지하고 동조하되, '미국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피해자'로 묘사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미국의 문화산업에서 유대인이 피해자로 그려지는 경향을 학자 '노엄 촘스키'와 '노르만 핀켈슈타인'은 맹렬하게 비판한다. 그 이유는 '유럽 유대인'들은 2차 대전과 반유대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반면, 미국 유대인들은 기득권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 유대인들은 2차 대전 전후로 유럽 유대인들을 차별·조롱해왔는데, 대뜸 태도를 180도 전환하여 문화 산업을 이용해 유럽 유대인들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홀로코스트 배상금 문제에 있어 미국이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 영화'로 여론을 조성하고, 유럽 유대인들과의 계보를 주장하며 배상금을 독식하였다. 정작 직접적인 피해자인 유럽 유대인들에게 돌아간 배상금은 푼돈에 그쳤다. 또한 기득권인 미국 유대인들에게 '반유대주의'는 아주 매력적인 '방패'와 같았다. 유럽 유대인과 자신들을 동일시한 미국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문제 등 정당한 비판을 제기하는 이들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매도하며 비판을 교묘히 회피했고 논점을 흐렸다. 그래서 그레이가 <아마겟돈 타임>에서 냉정하게 묘사하였듯, 분명 2차 대전을 경험한 선조 유대인들은 약자였지만, 이후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에겐 유복하고 안락한 환경이 제공되었고, 그 처우는 '흑인'으로 대표되는 진짜 약자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즉 미국 유대인 영화감독들의 시간 여행은 유럽 유대인이나 미국 내 흑인, 라틴계의 약자성을 빌려오기 위한 역사 왜곡이자 침략일수도 있나니 항상 의심이 필요하다.
반면 할리우드로부터 주변부로 분류되는 독립영화 감독들은 기득권이 은닉한 주체성을 발굴하는 '고고학', 올바른 방향으로 반성하는 '수정주의' 등 정반대의 작업을 선보인다. 짐 자무쉬, 켈리 레이카트, 토드 헤인즈 등이 대표적이다. 20세기 할리우드가 미화한 인종은 백인이요, 대신 악마화된 이들은 원주민과 흑인 등 유색인종이었다. 실제 미국 역사에서 착취와 제노사이드의 피해자는 원주민과 흑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인은 선량하고도 영웅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자무쉬는 <데드 돈 다이>(2019)에서 무찔러야 할 좀비들의 피부를 새하얗게 '표백'하거나 '빨간 모자'(백인 트럼프 지지자의 상징)를 씌우고, 쫓겨난 유색 인종들이 스크린의 정중앙에 위치할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인다. 라이카트의 두 수정주의 서부극 <믹의 지름길>(2010)과 <퍼스트 카우>(2021)는 지난 세기 서부극에서 야만인으로 묘사되거나 백인에 의해 도구화된 아메리카 원주민, 소, 동양인과 대화하고 친구가 된다. 레이카트가 서부극이라는 역사의 유산을 전면 부정하진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듯, 헤인즈 역시 고전을 전면 배태하진 않는다. 그는 데이비드 린의 <밀회>(1945)를 자신의 작품 <파 프롬 헤븐>(2002), <캐롤>(2015) 등에 오마주하고, <원더스트럭>(2017)에선 흑백 무성 영화를 직접 차용한다. 여기서 형식은 예찬하되, 정신은 반성한다. 백인 이성애자, 동일 인종 간의 사랑, 비장애인만 등장할 수 있었던 고전 멜로 및 드라마와 달리, 오늘날 그의 영화엔 성별과 인종을 뛰어넘는 사랑과 장애인이 등장한다.
과거의 할리우드를 예찬하지 않는 이들은 스파이크 리, 조던 필 등 흑인 영화인들 역시 포함한다. 이들은 백인이 흑인의 구원자이지 않았냐는 '선민의식', 충분히 동등한 친구로 취급해주지 않았냐는 '도덕적 우월감' 등의 위선을 낱낱이 비판하고 까발린다. 이로써 본인들의 목소리를 회복하는 물결은 흑인 외의 유색인종들, 특히 '이민자' 정체성을 가진 영화감독들의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얕게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파블로 라라인, 짙게는 최근 할리우드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한국계 미국인 시네아스트 정이삭, 코고나다, 셀린 송 등이 대표적이다. 전자의 란티모스는 동시대 그리스 영화의 흐름을 묶어내는 사조 '이상한 물결'을 할리우드에 이식하고, 라라인 역시 칠레에서 탐구하던 정치적 소재는 내려놨을지언정 그의 특징인 16mm 필름과 35mm 필름을 결합한 신묘한 연출, 실재-가상의 간극을 탐구하는 주제의식만큼은 미국에서도 이어가고 있다. 후자에 속하는 감독들은 한국인 이민자라는 정체성까지 영화에 깊이 반영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한국의 실제를 묘사하지 않고, 미국인이 기대하는 한국을 느슨하게 묘사한 오리엔탈리즘이 간간히 발견되긴 하지만, 미국으로 이주했던 20세기의 영화인들이 자신들의 작가주의를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과 타협해야 했던 역사와는 정반대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 각양각색의 시간여행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헤인즈는 20세기 할리우드에서 허락되지 않았던 각본을 <메이 디셈버>(2023)로 영상화하며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예찬한다. 더해서 20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미국영화를 고스란히 재현한 알렉산더 페인의 <바튼 아카데미>(2023) 등이 최근 개봉을, 유색인종이 백인의 과거 대신 자신의 추억을 기술하는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2023)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