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그레타 가르보'라는 신화
[Critique] '그레타 가르보'라는 신화
  • 함윤정
  • 승인 2024.02.0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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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극장에서 발견한 광휘"

오래된 극장에 다녀왔다. '시네마테크 부산' 얘기다. 1999년에 출범해 영화의전당으로 자리를 옮긴 지 13년차이니 따지고 보면 실로 오래된 것도 아니지만, 그동안 극장 관람 기회가 희박한 영화를 상영하며 꾸준히 오래된 극장을 자처해 온 이곳이다. 그렇게 미지의 고전과의 만남을 매개했던 장소가 본연의 의의에서 벗어난 기획에 중점을 두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일 년이 되어간다. 외부 입장에서 쉽게 단언할 수 없는 복합적인 사정이 있겠지만, 이러한 상황의 지속은 여전히 관객으로서 무엇을 보탤 수 있고 보태야 하는지를 궁리하게 만든다.

그런 와중 돌아온 연례 기획전 '오래된 극장'은 '여배우의 초상, 그 치명적인 아름다움들'이란 부제로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세 여배우(그레타 가르보, 안나 마냐니, 최은희)를 현재의 스크린에 불러들인다. 프로그램 노트에 따르면, 극장이란 물리적 조건을 수반한 감상 경험은 “바로 켜고, 즉시 바꾸고, 어쩌면 당장 멈출 수 있는 유혹에서 벗어나, 반강제로 그리고 끈기 있게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을 갖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동의할 만한 말이다. 더군다나 오늘날 주기적으로 극장을 찾아 오래된 배우의 얼굴을 진득이 바라보는 경험은 더욱 희소하고 특수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질문하는 시도가 '기획'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력에 대한 개요 이상의 시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오래된 극장을 자처하는 장소가 소환한 오래된 얼굴들은 객석을 향해 미래의 초상을 요청하고 있다. 나는 이를 함께 그릴 동료를 찾기 위해 자꾸만 그곳으로 발걸음을 떼는지도 모르겠다.

 

ⓒ 영화 <격류>(1926)

영화사의 분기점을 관통하다

그레타 가르보는 무성영화 시기부터 유성영화의 등장 이후까지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며 성공을 거머쥔 흔치 않은 배우다. 같은 시기에 미국을 대표했던 다른 여배우와 비교하더라도 그녀의 행보는 독보적이다. 가령, 릴리언 기시(1893~1993)는 유성영화가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화계에서 잠정 은퇴한 후 연극에 매진했다. 중년에 들어 <백주의 결투>(1946), <사냥꾼의 밤>(1955) 등에 출연하며 노년기까지 영화와 텔레비전을 넘나드는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지만, 그가 유성영화 시대에 접어들며 어떤 결심의 갈림길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명해 보인다. 메리 픽포드(1892~1979)는 첫 유성영화 <코퀘트>(1929)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지 4년 만에 은퇴를 결심한 뒤, 영화 제작자로서의 경력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이들과 달리 그레타 가르보는 매체의 역사적 전환기를 매끄럽게 관통하며 배우로서 자신을 알렸다. 무엇보다 그는 밀랍 인형과도 같은 가녀림(릴리언 기시)과 아담한 곱슬머리 소녀의 천진난만함(메리 픽포드) 대신, 특유의 성숙한 이미지로 관능적인 성적 매력이 요구되기 시작한 시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했다.

최초의 토키 <재즈 싱어>(1927)의 주인공이 스크린 안팎으로 '당신은 아직 무엇도 듣지 못했음'(You ain't heard nothin' yet!)을 소리치며 영화사에 길이 남을 농담을 던지기 불과 일 년 전, 모리츠 스틸러의 주도로 MGM과 계약을 맺고 미국으로 건너온 그레타 가르보는 무성영화 <격류>(1926)로 할리우드에서의 신고식을 치렀다. 스페인으로 건너가 유명 가수로 성공한 여성이 고향으로 돌아와 겪는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아직 스크린 너머로 인물의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던 시기, 조만간 도래할 유성영화란 새로운 형식과 합일될 그레타 가르보의 매력적인 음성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키는 단초가 된다. 그리고 첫 유성영화 <안나 크리스티>에서 그레타 가르보는 이를 극적으로 증명한다. 이후로도 때로는 사랑의 비극을 감내하는 인물을, 때로는 운명의 바퀴에 쓰러지는 인물을 연기하며 장르의 조건에 따라 자신을 유연하게 변용할 줄 알았던 그레타 가르보의 재능은 더할 나위 없이 탁월했다.

누군가의 딸 혹은 어머니, 매춘부 또는 귀족 부인, 평범한 스키 강사 그리고 비범한 능력의 스파이, 군인, 심지어 스웨덴의 여왕에 이르기까지. 그레타 가르보가 소화한 수많은 인물은 남성 캐릭터와의 관계에 따라 누군가의 상대역으로 압축될 법도 하지만, 그가 오로지 성적인 매력에만 기댄 배우라고 평가하긴 어렵다. 활동 시기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전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보다 '스웨덴의 스핑크스'란 별명에 걸맞은, 낯설고도 친숙한 그의 신화적 이미지가 큰 몫을 차지한다. 루벤 마모울리언의 <퀸 크리스티나>(1933)의 '크리스티나' 는 '안토니오(존 길버트)'와의 사랑을 위해 스웨덴의 왕권을 내려놓지만, 안토니오의 고향인 스페인으로 떠나기 직전에 비극적 결투로 그를 잃는다. 그럼에도 크리스티나는 안토니오가 살던 '절벽에 있는 하얀 집'을 찾아 항해를 시작하는데, 영화의 엔딩에서 서서히 클로즈업되는 그레타 가르보의 얼굴은 막 연인을 잃은 여성의 비애 어린 표정에서 신화적 모험에 앞장서는 선수상의 의기양양함으로 뒤바뀐다. 이 작품에서 그레타 가르보의 캐릭터가 전통적인 성 역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지점은 단순히 그가 남장을 한다거나 왕권을 행사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를 완성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상대역 남성이 끝내지 못한 오디세이를 홀로 완성하려는 의지의 표출로 마련된 엔딩이다. 윤성민 평론가가 최근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에 관한 글에서 언급한 '무성영화적 얼굴'에 관한 논의를 빌린다면, 이때 프레임을 가득 채운 얼굴은 유성영화의 도래 이후로도 굳건히 살아남아 우뚝 선 무성영화적 이미지의 광휘다. 음성으로 지상에 내려온 신이 본래의 성스러움을 잃지 않는 것처럼, 그레타 가르보는 무게감 있는 목소리와 절제된 연기뿐 아니라 다분히 무성영화적 요소인 얼굴로 '유성영화의 도래'라는 영화사의 격동기를 버텨냈음을 증명한다.

영화 속 그레타 가르보의 이미지는 유년 시절을 지난 적도, 노화를 겪을 일도 없는 듯 늘 젊고 아름다워서 마치 불멸에의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물론 30대에 은퇴를 선언한 뒤 대중으로부터 자취를 감춘 탓도 있겠지만, 10대 초반에 이미 170cm에 달하는 신장에 도달했을 만큼 일찍이 성숙미를 갖춘 그였다. 필름의 유실로 지금은 10분여의 소품으로 남겨진 <부랑자 피터>(1922)에서 10대의 그레타 가르보는 나란히 같은 옷을 입고 출연한 두 소녀에 비해서도 완연히 성숙하다. 재목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봤던 모리츠 스틸러는 <괴스타 베링의 전설>(1924)에서 그레타 가르보에게 '엘리자베스 도나' 역을 맡겼는데, 그는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이미 홀로 프레임을 채울 만한 역량을 뽐냈다. 이쯤에서 시도해보는 불가능한 가정. 만약 그레타 가르보와 여섯 편을 함께한 감독 클래런스 브라운이 <녹원의 천사>(1944)의 '벨벳 브라운' 역을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아닌, 같은 나이의 그레타 가르보에게 맡겼다면 어땠을까? (해당 작품의 제작 당시 그레타 가르보는 이미 은퇴한 후 중년에 접어든 시점이니 다시 한번, 이는 불가능한 가정이다.) 성별의 구분이 모호할 만큼 미성숙하고 가녀린 벨벳의 육체가 '그랜드 내셔널'의 결승선을 넘자마자 안장 위에서 떨어질 때, 안타까운 탄성을 자아내는 그 연약함은 확실히 그레타 가르보의 이미지와 결을 달리한다. 벨벳의 상대역인 '마이 테일러'를 연기한 미키 루니의 작은 신장이 인물 설정에 설득력을 더한 것을 떠올리면 이는 더욱 어색한 조합이다. <녹원의 천사>와 그레타 가르보가 교집합을 이룰 수 있는 대목이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아동/스포츠 영화의 엔딩에서 불현듯 오버랩 된 이방인의 뒷모습, 즉 석양 너머로 떠나는 서부극의 신화적 실루엣일지도 모른다.

 

ⓒ <마타하리>(1931)

징벌의 대상에서 구원의 주체로

전술했듯 영화 속 그레타 가르보는 늙지 않는 불변의 이미지와 때로는 성별의 경계를 흐리는 신화적 아우라를 통해 독보적인 이미지를 획득했다. 이는 그가 늘 신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스크린 위에 등장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캐릭터들이 서사 내에서 겪는 상황과 그 끝에 맞게 되는 결말은 대부분 사랑으로 말미암은 생사고락의 자장 아래 있으며, 그렇게 이루어진 하나의 얼굴 속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만남은 스크린 바깥의 관객을 매료시켰다. <마타하리>(1931)에서 마치 신화 속 세이렌의 노래처럼 뭇 남성을 유혹하는 그레타 가르보의 춤사위는 엔딩에서 '마타 하리'가 사형대에 오르기 전, 시력을 잃은 연인 '로사노프(라몬 로바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하얀 거짓말과 숭고한 희생의 발걸음으로 바뀌어 서사에 비극적 정취를 더한다. 한편, 그레타 가르보의 첫 유성영화인 <안나 크리스티>(1930)에서 '안나'의 안타까운 운명은 "악마 같은 바다"로 떠난 남성과 홀로 육지에 남겨지는 여성이란 장르적 관습에 복무한다. 개봉 당시 제작사는 이 작품을 "Greta Garbo Talks."라는 문구로 홍보했는데, 이때 그레타 가르보가 발화하는 것의 총체는 자신의 캐릭터가 일생에 거쳐 감내해야 하는 동일한 전통의 반복과 이에 대한 순응이다. 이후에도 그레타 가르보는 <로맨스>(1930)의 '리타 카발리니', <안나 카레니나>(1935)의 '안나 카레니나', <춘희>(1936)의 '마거릿 고티에'를 맡으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좌절하는 인물을 연기한다.

무성영화 <사랑>(1927)의 리메이크작이기도 한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는 눈보라 속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해 재회의 몸짓으로 끝맺었던 전작과 사뭇 다른 끝을 맞는다. 안나의 삶은 '기차역에서의 죽음'이란 타인의 재난을 변주하는 방식으로 종결되고, 액자 속 안나의 얼굴을 비추는 영화의 마지막 숏처럼 그레타 가르보의 아름다운 얼굴은 종종 캐릭터의 죽음 이후에도 재차 장면화된다. 이는 전통적 관습에 반한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맞이한 비극으로서 전시된 초상과도 같다. 한편, <안나 카레니나>에서 불륜으로 집에서 쫓겨난 뒤 남편 몰래 집에 돌아온 안나는 아들을 위해 모형 기차 장난감을 조립한다. 이에 대한 아들의 화답, 곧 재주 부리는 원숭이 인형을 통해 안나가 잠깐이나마 미소를 되찾는 대목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2022)에 등장한 '미치(미셸 윌리엄스)'를 연상케 한다. 현대의 카메라가 포착한 미셸 윌리엄스의 얼굴을 막 목격한 오늘날의 관객에게, 끝내 죽음의 초상으로 제시되는 그레타 가르보의 얼굴은 시대가 요구하는 장르적 관습과 이로 연출의 차이를 확연히 감지하게 한다. 미셸 윌리엄스가 <믹의 지름길>(2010)에서 서부극의 관습을 비트는 여성으로서 주역을 맡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러한 대비는 더욱 흥미롭게 느껴진다.

 

ⓒ <안나 카레니나>

활동 당시부터 은퇴 이후에 이르기까지 연기란 행위 바깥에서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을 꺼려했던 그레타 가르보는 기획전의 프로그램 노트에서 환기하는 것처럼 분명 "숨는다는 것"에 대한 의미부여를 유도하는 구석이 있다. <그랜드 호텔>(1932)에서 그가 연기한 '그루신카야'의 명대사 "혼자 있고 싶어요.(I want to be alone.)"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간 배우의 신비감을 극화하는 데 활용되고, 이를 토대로 그레타 가르보에 대한 수많은 가십이 탄생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스크린 위의 그레타 가르보는 좀처럼 스스로 숨어드는 법이 없다. 오히려 장르적 관습을 따르기 위해 영화가 그의 인물을 서사 혹은 프레임 바깥으로 추방했다는 편이 더 적절한 해석이 될 것 같은데, 예를 들어 <육체와 악마>(1926)의 주인공 '펠리치타스'는 "우정의 섬"이란 은유의 지대 사이, 즉 두 남성의 우정을 봉합하기 위해 얼음물 아래로 익사하며 서사 바깥으로 밀려난다. 두 남성-'레오(존 길버트)'와 '폰 라덴 백작(마크 맥더못)'-이 죽음의 결투 직전 유려하게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 것과 달리, 펠리치타스의 죽음은 철저히 내화면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며 징벌적 결말을 암시한다. “악마가 우리에게 접근할 수 없을 때 영을 이용”한다는 목사의 설명처럼, <육체와 악마>에서의 그레타 가르보는 펠리치타스라는 여성의 육신을 빌려 두 남자의 운명을 조종하는 악마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때의 악마성은 한편으로 인간성과 신성의 두 지대를 가능케 하는 징검다리이기도 하다. 이처럼 미묘한 구도는 '레오'의 두 번째 결투, 즉 '울리히(라스 한슨)'와의 대결 직전의 펠리치타스를 비추는 장면을 통해 꽤 격정적으로 비춰진다. 펠리치타스는 레오의 안위를 걱정하는 소녀의 순수한 기도에 응답하듯 다가가고, 이때 카메라는 한 인물로부터 정념과 고뇌로부터 터져 나온 인간의 포효와 "언니(펠리치타스)를 깨우쳐 달라"는 기도에 대한 신적 응답의 몸짓을 번갈아 포착한다.

한편, 그레타 가르보는 활동 후반기에 두 작품-에른스트 루비치의 <니노치카>(1939), 조지 큐커의 <두 얼굴의 여인>(1941)-에 연달아 코미디 장르를 소화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마치 목석같은 여성 '니노치카'와 '카렌'으로 등장한 그녀는 어느새 상대 남성과 사랑에 빠지고, 영화는 이후 격정에 휩싸여 좌충우돌을 겪는 인물의 모습을 유쾌하게 그린다. 아쉬운 흥행 성적, 출연을 꺼렸다는 후문, 이들의 개봉 이후에 결심된 은퇴는 마치 두 작품을 그레타 가르보의 실패 혹은 단념의 마중물로 해석하게 만든다. 하지만 두 작품의 전/후반부를 나누는 '두 얼굴의 여인'으로서 그의 면모, 즉 사회인이자 직업인으로서 책무에 과도하게 충실한 무표정과 사랑에 빠진 여인의 표정 간 극적인 대비의 효과는 그레타 가르보의 재능이 비극뿐 아니라 희극에서도 충분히 유효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또한 <니노치카>에서 '레옹(멜빈 더글러스)'이 터뜨린 샴페인 병 소리에 총상을 입은 듯 스르르 주저앉는 그레타 가르보의 탁월한 연기는 두 인물이 몸담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시스템의 차이를 은유하는 동시에 그가 소화할 수 있는 장르와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확장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어떠한 농담에도 무표정으로 일관하다 상대의 실수에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니노치카의 얼굴은 서사의 희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그 자체로 개인의 이념을 뒤흔드는 사랑이란 사건, 즉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설득으로 기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 <두 얼굴의 여인>

하나의 얼굴, 두 개의 이름

그레타 가르보는 배우로서 본격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한 할리우드에서의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에서 하나의 얼굴, 두 개의 이름을 갖는다. <급류>에서는 '레오노 모레노'이자 '라 블룬나'를, <두 얼굴의 여인>에서는 '카렌'이자 '캐서린'을 연기한 그다.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 공식적인 데뷔작으로 알려진 <괴스타 베링의 전설>에서 그레타 가르보를 싣고 얼음판 위로 달리던 애환의 썰매는 어느새 그의 마지막 작품에서 급격한 경사의 설산을 가로지르는 유희의 활강이 되어있고, <육체와 악마>에서 얼음물 아래 빠져 생의 끝을 맞았던 여인은 이제 얼음물 아래 빠진 남성을 구하는 여인이 되어 자신의 사랑을 지킨다. 그리고 그레타 가르보는 <두 얼굴의 여인>을 끝으로 영영 스크린에 돌아오지 않는다.

화려한 등장과 군더더기 없는 퇴장. 그 시작과 끝이 미묘하게 반복, 변주되는 액자식 구성을 완성한 뒤 막을 내린 '그레타 가르보'란 세계는 그렇게 한 편의 영화처럼 긴 여운을 남긴 채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영화사의 격동기, 저마다 다른 형식과 장르 속에서도 늘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며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거듭 증명했던 그레타 가르보의 얼굴은 20여 년의 여정을 끝으로 '그레타 로비사 그스타프손'이란 본래의 이름으로 돌아갔다. 이후의 이야기는 무성한 소문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지금에서야 오래된 극장을 통해 그레타 가르보를 처음 만난 나는 언젠가 안토니오가 나고 자란 곳으로의 귀향을 예감했던 크리스티나의 표정을 떠올리며 경험하지 못한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느낀다. 이토록 낭만적인 착각 끝에 남는 것은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배우의 내면적 귀향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길 희구하는 진심어린 마음이다.

[글 함윤정 영화평론가, badasal2@ccoart.com]

 

 

함윤정
함윤정
부산 가덕도에서 생활하며 영화와 바다에 대해 생각하고, 극장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운영하는 꿈을 꾼다. 미학을 공부하러 간 대학에서 영화를 찍은 후로 좋은 관객이 되면 나은 삶을 살게 되리란 이상한 믿음을 갖게 됐다. ‘좋은 관객’이란 무엇일까? 나의 글과 말은 늘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좋은 관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영화를 더 아끼게 되고, 지난밤 꿈에서 본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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