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수의 싸구려 이미지 시대] 21세기의 패관문학, '스타크래프트'와 '최동훈'에 관하여
[김경수의 싸구려 이미지 시대] 21세기의 패관문학, '스타크래프트'와 '최동훈'에 관하여
  • 김경수
  • 승인 2024.03.0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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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동체가 필요할 때마다 패관문학은 되살아난다."

어릴 적 아무것도 안 해도 혼나지 않는 나른한 주말 늦은 오후의 시간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어릴 적 살던 아파트는 볕이 아주 잘 들었다. 오후 4시 즈음에 해가 건너편의 아파트단지 너머로 차츰 물러났다. 따스한 볕이 거실 바닥에 크림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거실에 있는 소파에 드러누우면 볕이, 볕에 깃든 온기가 다리를 타고 서서히 가슴께로 올라와 온몸을 감쌌다. 보통 그즈음에는 온 가족이 각자의 방에서 쉬었으므로 집은 한없이 고요했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 서로 건들지 않는 것이 가족끼리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 시간을 완성하는 것은 'TV'다. 공중파는 유명한 프로를 다시 틀어주었으므로 케이블로 채널을 돌렸다. 수많은 채널을 방황하다가 항상 세 부류의 채널에 리모컨이 멈추었다. 한 곳은 투니버스와 니켈로디언 등 애니메이션 채널, 한 곳은 OCN과 슈퍼액션 등 영화 채널, 마지막은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를 방영하는 온게임넷이었다. 그때 방영된 애니메이션과 영화는 지금도 소환되나 <스타크래프트>의 존재감은 서서히 사라지는 중이다. 문득 <스타크래프트>가 생각난 이유는 2000년대 초반의 어떤 이야기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스타크래프트>에 더해진 말 중 가장 인상 깊은 단어는 민속놀이라는 단어다. 한때는 국민이 다 알 정도로 유명한 게임이라는 뜻으로도, 지금은 옛날 게임에 불과하다는 뜻으로도 통한다. 이제는 상식에 가까운<스타크래프트>의 흥망성쇠를 간단히 정리해보자. 2000년대 초중반에 피시방 열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E-Sports를 대중적인 볼거리로 만들기도 했다. 임요환과 홍진호 등 여러 스타 선수가 생기고 그에 따라서 산업의 규모가 확장되는 양상은 마치 초창기 할리우드를 보는 듯하다. 영화에 수많은 제작사가 생기듯 수많은 팀이 생기기 이르렀다. 또한 디씨인사이드의 스타크래프트 갤러리(이하 스갤)로 대표되는 음지화된 서브컬처와 대중문화을 횡단하는 독보적인 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빵셔틀부터 ~알못, 주작, 관광, 정변, 역변, GG, 끔찍한 혼종, 본좌 등은 스갤 등 인터넷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다. 임요환과 대결 구도를 이어갔지만, 만년 2등에 그친 프로게이머 홍진호를 둘러싼 인터넷 밈은 아직 유명하다. 지금도 2등에 관한 뉴스가 보도될 때마다 홍진호가 썩은 미소를 짓는 사진이 댓글에 소환되기도 한다.

<스타크래프트>의 인기는 2010년에 생긴 프로리그 내 승부조작 사건을 기점으로 확 줄었다. 이전부터 내림세이기는 했으나 승부조작 사건이 쐐기를 박은 셈이었다. 이 게임의 후속작인<스타크래프트2>와 프로리그는 이를 상쇄할 만큼의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그새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LOL(리그오브레전드)>가 공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지금도 아프리카TV 등의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서 여러 전직 프로게이머나 전문 스트리머가 인기리에 방송을 이어가고 있다.

고백하자면 스타 프로리그의 광팬은 아니었다. 90년대 중후반이 투니버스에 방영된 <이누야샤>, <원피스>, <달빛천사> 등 온갖 일본 아니메를 즐긴 세대라면,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의 세대는 온게임넷에 방영된 스타 프로리그를 실시간으로 즐긴 세대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겠다. 스타크래프트는 윗세대의 문화라 불러도 무방하다. 송병구나 허영무, 박대호, 변형태 등 여러 선수의 팬이기는 했다. 또 여러 명경기도 기억하고 있다. 다만, 해외 축구팬이 새벽마다 생중계를 챙겨 보듯 모든 경기를 실시간으로 챙겨 보는 편은 아니었다. 신한은행 스타리그, EVER 스타리그 등의 대회가 해마다 열리는 것을 알아도 대회를 직접 보러 갈 만큼 팬심마저도 부족했다. 초등학생이라 용돈도 없던 탓도 크다. 90년대 중후반에 태어났지만 왜인지 스타크래프트를 둘러싼 문화가 흥미진진했다. 투니버스, OCN 등이 훗날에 M세대를 규정하는 문화적인 코드로 소환되기 시작한 데에 비해서 스타크래프트를 둘러싼 문화는 그때 이미 최전성기에 다다랐다.

 

ⓒ 영화 <외계+인 2부>

스타크래프트를 회상하게 된 계기는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이다. <외계+인 2부>에 대한 글에서 서술했듯이, 최동훈의 필모그라피는 구술문학을 영화화하는 작업이었다. 최동훈의 작법은 패관문학의 작법과 비슷하다.

패관은 옛날 중국에서 유래한 관직이다. 임금은 조금이나마 더욱 민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시장가에 돌아다니며 민중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전달하는 임무를 패관에게 주었다. 패관은 그 이야기를 수집하고 저마다의 해석을 더한 뒤 임금에게 말했다. 패관이 모은 수많은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낭설도 있고 범죄 목격담과 스캔들, 음담패설 등등 다양한 장르가 있을 것이다. 패관은 최초의 장르소설가, 혹은 전업 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부터 비롯한 패관문학은 민간에 떠도는 여러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에 모아다가 민중의 질펀하고도 상스러운 언어로 그려낸다.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에서 최동훈은 메모를 창작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그는 입에 착 달라붙는 영화 대사를 쓰고자 스물네 시간 메모장을 들고 다닌다고 밝혔다. 소재를 조사하려고 들렀던 현장에서 들린 대사든, 일상에서 들린 대사든 그는 흥미로운 모든 대사를 수집하고 가공한다. 최동훈의 영화는 우리에게 사라져 버린 만화적이고도 상스러운 캐릭터와 그들의 언어를 무기로 삼는 것이다. 때마침 최동훈의 전성기는 00년대 초중반부터다. 스타 프로리그가 한창 전성기에 다다를 시기에 그의 재능이 폭발했다.

패관문학은 민중의 이야기를 모으는 것이므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 하나하나가 빛나야 한다. <타짜>(2005)는 아귀와 짝귀, 평경장 등 타인이 부르는 이름이 곧 그 자신의 정체성이자 운명이 된 캐릭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협의 작명법에서 딴 듯한 이 이름은 그 캐릭터의 인생을 제각기 설명한다. 이는 인간을 해부학적인 시선으로 묘사하는 근대적인 소설과 묘사가 발명되기 이전의 서술에 기반한다.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의 경우, 돈키호테는 원근법에 기반한 시공간에 있는 인물이 아니다. 돈키호테의 성격과 그의 인생에 대한 해설이 시공간에 앞서서 등장한다. 아귀와 짝귀, 평경장도 그들이 머무르는 시공간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나 성격 등으로 먼저 규정된다. 그들의 외양이나 사회적 조건보다는 그들의 성격이 그들을 규정한다. 근대적인 소설과 소설에서 발생한 카메라 시점은 앞서 이야기한 패관문학의 서술을 거부한다. 이같은 거부에는 어떠한 관점을 동원해도 결코 다른 한 인간을 파악할 수도, 정의할 수도 없다는 절망이 더해져 있다. 한 인간은 타자를 볼 수만 있을 뿐 서로의 무의식을 헤아릴 수 없다는 무한한 고독에 빠진다.

패관문학은 서로의 캐릭터를 설정하고 그러한 설정에서 서로를 파악할 수 있는 역할극을 만든다. 공동체에서 한 명에게만 별명이 생기면 별명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 위계와 그에 따른 폭력이 생기는 반면, 모두가 본명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별명을 지니면 역할극이 된다. 저마다의 프로필이 생기는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공간이 막 생기기 시작할 즈음에는 스타크래프트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시작할 즈음에는 최동훈의 영화가 탄생했다. 이처럼 시대의 격동에는 그에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에의 열망이 있다. (싸이월드와 디씨인사이드 등도 마찬가지다.) 특히, <타짜>(2006)는 유선 인터넷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인터넷 문화가 형성된 시기에 생겨난 영화다. <타짜>의 아귀와 짝귀, 평경장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아이디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스마트폰과 화상캠 이전의 인터넷 문화는 정모가 아닌 이상 서로를 보기가 힘들었다. 만나기 전까지 서로의 아이디로만 소통해야만 했다. <타짜>는 실패한 인터넷 정모와 닮아있다.

이는 <스타크래프트>의 프로리그에도 해당한다. 황제 임요환, 폭풍저그 홍진호, 폭군 이제동, 영웅 박정석, 몽상가 강민... 당시 프로게이머에게는 그들의 스타일을 캐릭터화한 이름이 하나씩 붙었다. 이는 만화 스토리 작가로 일했던 프로리그의 해설위원 중 한 명인 엄재경의 몫이었다. 그은 패관문학과 (그것의 후계자인) 무협의 장르적인 문법을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에 부여해 무림으로 만들었다.<스타크래프트>가 대중문화의 반열에 오른 이유도 엄재경이 되살린 패관문학의 세계 때문이 아닐까.

 

ⓒ 영화 <타짜>

하지만 패관문학이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문학비평가 오혜진은 천명관의 소설을 비롯한 이야기꾼의 소설 계보를 비판한다. 이야기꾼이 그려내는 패관문학의 계보 속 민중은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민중이라는 것이다. 천명관의 경우 파란만장한 한국의 현대사를 그려내고자 민중의 목소리로 가정된 상스럽고 질펀한 말투를 사용한다. 이는 정치적 올바름과는 거리가 멀다. 여성과 소수자를 혐오하거나 배제한다. 

패관문학은 그것이 다루는 거대 서사의 뒤편으로 밀려난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일상 속의 억압도 회피하기도 한다. 천리안의 한 인터넷 유저인 Jonedoe의 <거꾸로 보는 프로야구>와 이를 표절한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만드는 언더독의 공동체는 남성이 뭉쳐서 만든 것이었다. 스타크래프트 문화도 마찬가지로 남성중심적 문화다.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전반에서 여성 프로게이머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최근에도 넷플릭스에서 상영된 드라마 <수리남>은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끝내 남성의 입에서 낭만으로 말해진다.

만일 패관문학의 공동체가 여성이 밀려난 자리에 건설된 것이라고 한들, 거기에 절망하지는 말자. SNS로 모두가 서로와 소통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오히려 패관문학의 리부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성공 사례를 보았다. 2023년 화제의 드라마 강풀의 <무빙>은 패관문학의 전통적인 형식을 따라가되 1980년대의 현대사를 남성만의 전유물로 두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이 아니더라도 MBTI는 패관문학의 정신을 긍정적으로 승계한 사례다. MBTI가 대화 소재로 쓰일 때 대화에 참여하는 이는 MBTI가 규정한 16개의 성격에 따라 자신과 상대를 임의로 정의한다. 이때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 열린다. 패관문학은 이처럼 수천 년 가까이 우리에게 새로운 공동체가 있어야 할 때마다 되살아난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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