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영화 안과 밖의 삶이 교차하는 곳에서
[Interview] 영화 안과 밖의 삶이 교차하는 곳에서
  • 홍상현
  • 승인 2024.01.22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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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소리를 따라가다> 스기타 교시 감독 인터뷰
「소리를 따라가다」의 도입부에서는 주인공 하루가 오래된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에 녹음된 소리를 듣고 있는 장면이 1분 36초 동안 이어진다. (C)2023 Following the Sound Film Partners
「소리를 따라가다」의 도입부에서는 주인공 하루가 오래된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에 녹음된 소리를 듣고 있는 장면이 1분 36초 동안 이어진다. ⓒ 2023 Following the Sound Film Partners

영상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상영되었지만, 지금과 상황이 사뭇 달랐으니까. 코로나19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던 2021년 이야기다. 객석간 거리두기와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킨다는 전제하에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되기는 했지만 당연하게도 해외게스트 초청이 극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줌을 통한 원격 GV가 진행될지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초청작 감독이 준비해 보낸 감독 메시지는, 작품을 판단하는데 있어 소중한 참고자료였다.

그렇게 본편의 한 장면이 촬영된 카페를 배경으로 등장해 유창한 영어로 <하루하라상의 리코더>(2021)에 관한 소개와 제작, 연출의 의도를 설명하는 감독, 스기타 교시와의 첫 만남의 이뤄졌다. 다만, 이후에 개인적인 루트를 통해 연락을 취하고 본지에 연재되는 지면에 실릴 원격인터뷰까지 진행했지만, 창작자와 마주하며 특유의 아우라나 대화 사이사이에 흐르는 공기의 느낌마저 참고하는 심층취재 특유의 느낌을 완벽하게 살려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치 않았을까. 이 묘하고, 지적이며, 유쾌하기 그지없는 영화작가와의 대면이 실현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첫 인터뷰가 게재되고 대략 15개월쯤 지났을 무렵 필자가 시니어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다카사키영화제의 시상식에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하러 온 그를 만났다.

 

코로나 19 사태로 엄격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유지되던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동영상으로 인사하고 있는 스기타 교시 감독. (C)BIFF
코로나 19 사태로 엄격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유지되던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동영상으로 인사하고 있는 스기타 교시 감독. ⓒ BIFF

스기타 감독과의 대면을 필자가 굳이 언급하는 건, 그 일이 일상회복이 주는 감동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설명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영화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결국 삶 자체를 이해하는 일'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와 영화의 서사를 공부할 때 ABC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전통적인 3막 구조 즉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라는 틀을 넘어선 서사를 구축하는 무빙이미지로서의 영화개념이다. 보통 기획자의 제의가 아니라 친한 배우와의 약속 같은 의외의 동기가 주어지면 즉흥적으로, 늘 함께하는 스태프들과 '그냥' 촬영을 진행하는 스기타 감독은 그날그날의 스케줄 표를 짜지 않는다. 촬영이 끝나면 이튿날의 촬영지가 어디인지 정도만 공유할 뿐 딱히 시간약속조차 하지 않고 모인다. 그렇게 촬영된 영상은 사전정보나 주문 없이 늘 함께 작업하는 편집기사에게 전해진다.

좀 뜬금없지 않느냐고? 아니다. 남동철의 지적처럼 "익숙한 드라마라면 채워져 있어야 할 곳이 비어 있는 그의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사연을 구구절절 풀어놓는 대신 주인공이 경험하는 몇 가지 사건들이 얼핏 아무 맥락도 없는 듯 펼쳐"지며 "어떤 행동이 어떤 이유로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대신 주인공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일들이 차례로 보여"진다. (<하루하라상의 리코더>) 아울러 김영진이 포착한 바와 같이 "서로 연관돼 있을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신중하면서도 섬세하게 풀어내며 카메라는 인물들이 사는 곳에서 그들의 행동을 애정을 갖고 지켜본"다. "극적으로 대단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은 없지만, 공기의 결, 숨소리 하나도 포착하려는 듯한 화면의 분위기가 관객을 자연스레 화면에 동참"시키는 것이다. (2017년 작, <빛의 노래>) 그 어떤 전형성도 거부하는 가운데 태어나는 스토리텔링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이외에도 베니스국제영화제를 거쳐 도쿄국제영화제, 빈국제영화제에까지 이르는 광폭행보를 보인 신작 <소리를 따라가다>(2023)도 마찬가지다.

내용은 이렇다. 영화는 하루(오가와 안 분), 유키코(나카무라 유코 분), 츠요시(마시마 히데카즈 분) 세 사람의 일상을 따라간다. 길을 찾던 하루는 자기 어머니 나이대의 여성 유키코를 만나 가고자 했던 카페에 도착하지만 카페 문이 닫혀 있지 당황한다. 유키코는 하루를 외면하지 않고 집으로 데려가 오믈렛을 만들어 준다. 이어 하루는 츠요시라는 중년 남자와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정확한 내막을 알 수 없지만 하루의 이야기를 듣던 츠요시가 울컥 눈물을 쏟을 뻔한 순간이 온다.

 

영화는 하루(가운데)와 유키코(왼쪽), 그리고 츠요시, 세 사람의 일상을 따라간다. (C)2023 Following the Sound Film Partners
영화는 하루(가운데)와 유키코(왼쪽), 그리고 츠요시, 세 사람의 일상을 따라간다. ⓒ 2023 Following the Sound Film Partners

홍상현

장편영화 데뷔작부터 많은 국제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아오셨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빛의 노래>가 전주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 <하루하라상의 리코더>와 <소리를 따라가다>가 부산국제영화제 초청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요. 감독의 작품이 특히 한국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스기타 교시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너무 영광이고 고마운 일이에요. 제가 만드는 영화가 매일의 생활이 반복되는 가운데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는 작은 감정을 다루고 있다는 것과 관계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눈을 돌리는 작업.'

이것이 일본의 관객들뿐만 아니라 한국 관객 여러분께서도 제 작품에 주목해주시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홍상현

특히 이번 <소리를 따라가다> 같은 경우, 베니스영화제로 시작해 부산국제영화제, 도쿄국제영화제를 거쳐 빈국제영화제에 이르는 '유라시아 횡단'의 행보를 보여주었습니다. 관객과의 대화(GV)도 매번 아주 즐거웠을 것 같은데요. 혹시 기억에 남는 관객의 질문이나 감상이 있다면 소개해주시겠습니까.

스기타 교시

부산국제영화제 GV에 결말부의 한 장면에서 부르는 노래가 작품의 주제와 이어지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영화의 메인스토리와 그렇게까지 관련은 없지만 제게는 무척 의미가 있었던 장면인 까닭에 주목해주서서 기뻤어요.

거기 나오는 "바람"이라는 노래를 작곡한 게 하시다 노리히코 씨인데요. 몇 년 전 한국에서 이랑이라는 가수가 번안해 부른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의 "임진강"을 만든 분이기도 해요. 그 장면에서 카페의 바 쪽 자리에 앉아있던 하시다 니나 배우(니나 역)의 부친이시기도 하죠. 극 중에선 카네코 다케노리 배우(하타다 역)가 먼저 등장해서 "바람"을 부르기 시작하는데, 제가 이 다케노리 배우와 니나 배우가 어떤 라이브에서 하시다 씨의 노래를 같이 부른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하시다 씨의 수많은 노래들 가운데 "바람"을 고른 것도 저였어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촬영을 하다 니나 배우한테 듣자니 원래 "바람"은 그녀의 부친께서 젊었을 때 돌아가신 친한 친구를 위해 쓴 곡이었다더라고요. 그리고 보면 내용이 기사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더라도 제가 노래에서 뭔가를 느꼈던 거 아닐까 싶습니다.

 

홍상현

거의 <하루하라상의 리코더>로 다카사키영화제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하신 직후에 <소리를 따라가다>의 제작에 착수하신 것 같은데요. 그렇게 서둘러 작품을 기획하셨던 계기가 있었나요.

스기타 교시

아주 심플한데요. (웃음) <하루하라상의 리코더>를 좋아해 준 어느 프로듀서가 제게 '당신과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해준 게 계기입니다. 저는 평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그렇게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누군가에게 권유를 받는다든지 어떤 계기가 주어졌을 때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는 편이죠.

 

「소리를 따라가다」는 부산국제영화제 외에도 베니스국제영화제를 거쳐 도쿄국제영화제, 빈국제영화제에까지 초청되는 광폭행보를 보이며 극찬을 받았다. 사진은 도쿄국제영화제 레드카펫 행사에서 캐스트ㆍ스태프와 함께한 스기타 감독. (C)TIFF
「소리를 따라가다」는 부산국제영화제 외에도 베니스국제영화제를 거쳐 도쿄국제영화제, 빈국제영화제에까지 초청되는 광폭행보를 보이며 극찬을 받았다. 사진은 도쿄국제영화제 레드카펫 행사에서 캐스트ㆍ스태프와 함께한 스기타 감독. ⓒ TIFF

홍상현

역시 독특하시네요. (웃음)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촬영, 편집, 음향, 음악 등을 항상 같은 분들이 담당해 주셨습니다. 이른바 "구미(한국에서는 '사단' 등의 표현을 씀. ※ 주)"로 불리는 일본영화계 특유 문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밖에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스기타 교시

다른 감독들처럼 딱히 "구미"로서의 정체성을 의식하는 건 아니고요. 그냥 영화를 만들 때 같이 만들어 주십사 주로 상담을 하는 게 다름 아닌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팬이거든요. 제가 감독의 역할을 맡아 열심히 하면 그들의 신작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동기로 작용하는 거지요. 이들의 공통점은 각자의 자리에서 카메라나 마이크를 향하게 되는 현상계의 사람, 혹은 사물에 대한 경의를 갖고, 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는 거예요. 물론 이런 사고가 꼭 영화 만들기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겠지만 행동 하나하나에 충분한 고민의 여지를 담을 수 있다는 점만은 분명할 겁니다.

 

홍상현

게다가 협업의 형태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촬영을 할 때도, 예컨대 하루의 촬영을 끝내고 "내일도 촬영을 하자"고 말씀하시지만 딱히 시간을 정하는 게 아니고, 편집 역시도 사전에 구성에 대한 언급 없이, 촬영한 영상들을 그냥 오오카와 케이코씨에게 넘기신다고 들었어요. 왠지 감독의 영화의 독특한 작풍과 관련이도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요.

스기타 교시

<소리를 따라가다>에 한해서 말씀드리면, 이번엔 배우분들의 스케줄 문제도 있어서 처음으로 2주라는 짧은 기간 안에 촬영을 끝낸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웃음) 촬영을 끝내고 다음날 찍을 분량에 대해 스케줄표를 작성해 나눠준 일도 있었죠.

언제나 소수의 인원만 가지고 조감독조차 없는 시스템에서 영화를 만드는 까닭에 스케줄 관리도 누군가가 따로 맡아서 해 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물론 예전에 상업영화나 TV드라마의 조감독을 오래 했기 때문에 남들처럼 할 수도 있지만요. (웃음) <하루하라상의 리코더>는 말씀하신 방식으로 3주 정도의 기간 동안 여유 있게 촬영을 진행했기 때문에 캐스트와 스태프의 작품을 대하는 자세도 이번 작품과 달랐을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는 스케줄이 꽤 빡빡한 편이었습니다.

다만, 편집과 관련해서는 달라진 게 없었는데요. 전처럼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일단 그날그날 촬영한 영상을 전달하고, 나중에 오오카와 씨가 그걸 붙여놓으면 같이 보면서 의견을 나누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초면인 사람을 집에 데려와 음식을 대접하거나 경계 없이 내면을 드러내는 대화를 나누는 등 「소리를 따라가다」에서는 ‘무상의 선의’에 대한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C)2023 Following the Sound Film Partners
초면인 사람을 집에 데려와 음식을 대접하거나 경계 없이 내면을 드러내는 대화를 나누는 등 「소리를 따라가다」에서는 '무상의 선의'에 대한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 2023 Following the Sound Film Partners

홍상현

<소리를 따라가다>는 단가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 않은 오리지널 시나리오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전작들과 차별화되는데요. "저쪽의 노래"라는 일본어 원제를 보면 뭔가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스기타 교시

저는 첫 장편을 만들던 시절부터 근본적으로는 같은 영화를, 그때그때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물로써 만들어오고 있는 거 같아요. 타이틀을 <하나의 노래>(2011)로 한 것도 이런 정서를 반영한 거였죠. 앞으로의 인생을 걸어 하나의 노래를 불러가고 싶다는 의지도 담겨있었고요.

 

홍상현

주인공이 1분 36초 동안 오래된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에 녹음된 소리를 듣고 있는 도입부의 신을 보다가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간 개인적으로는 감독께서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연출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편이시라고 생각해왔기에 더 강렬한 느낌이 있었는데요.

스기타 교시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원래 각본에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촬영 마지막 날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는데 바로 그 순간 작품의 시작 부분도 따로 구성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쿄에서 차로 약 다섯 시간 거리에 있는 로케지로 찾아가 추가촬영을 진행했죠.

<소리를 따라가다>의 러닝 타임은 84분이에요. 장편영화치고는 짧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주연을 맡은 오가와 안 배우의 어느 순간의 눈을 찍어 관객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었던 제 의도에 따른 겁니다. 지금껏 영화를 만들어오면서 이처럼 뚜렷한 목적을 가져본 적도 처음이거니와, 이런 의도가 시작부분의 연출에도 담겨있었어요. 다시 말해 <소리를 따라가다>의 촬영과정은 이 영화가 오가와 배우의 눈에서 시작해서 눈으로 끝나는 작품이라는 것을 각본을 집필할 당시부터 촬영 마지막 날까지에 걸쳐 알아가는 작업이었던 겁니다.

편집을 맡은 오오카와 씨도 이 부분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이번 영화는 전작들과 달리 편집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막이 오르고 무대가 시작되는 것 같은 템포가 되어있더라고 말했습니다.

 

스기타 감독은 술회했다. “이번 작품으로 부산을 찾았을 때, 역 개찰구에서 용케 저를 알아보고 인사와 격려의 말을 전해주시거나, 거리에 멍하니 서 있던 제게 말을 걸어 작품을 보신 감상을 길게 들려주시는 분이 계셨어요.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C)BIFF
스기타 감독은 술회했다. "이번 작품으로 부산을 찾았을 때, 역 개찰구에서 용케 저를 알아보고 인사와 격려의 말을 전해주시거나, 거리에 멍하니 서 있던 제게 말을 걸어 작품을 보신 감상을 길게 들려주시는 분이 계셨어요.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BIFF

홍상현

그런데, 작품에서 '소리'의 메타포는 무엇인지요.

스기타 교시

대단히 추상적인 이야기인데 이 세계에는 각자 그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음악이 떠돌아다니고, 그것을 들은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로 불렀을 때 그 존재를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는 생각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 사람의 삶은 우선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까요? 결국 소리가 우리에게 세계의 본질을 알려주는 것이죠.

 

홍상현

유키코나 츠요시 같은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등, 격정을 표출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영화에서는 그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제시되지 않고, 어떤 동기에 대한 묘사도 나오지 않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요하는 그들의 감정이 객석으로까지 전해지더군요.

스기타 교시

예컨대 주인공의 긴 인생을 놓고 보면 장편영화 속의 1분이든, 러닝 타임 전체이든 가져올 수 있는 변화의 크기란 지극히 미미할 겁니다. 아울러, 그 안에서 목도하게 되는 어떤 행동과 관련해서도 꼭 영화 속에서 앞뒤의 정보를 하나하나 획득하는 게 아니라, 그저 순간순간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접하면서 가슴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수 있겠죠. 따라서 저도 영화를 만들 때 극 중 사건의 서사적 위치보다 사건 그 자체를 얼마나 제대로 묘사해 낼 수 있을지에만 집중해요.

 

홍상현

영화를 보는 내내, 이를테면 초면인 사람을 집에 데려와 음식을 대접하거나, 서로에 대한 경계 없이 내면을 드러내는 대화를 나누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등, 대부분의 인물들이 '무상의 선의'를 표현하는 휴머니즘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스기타 교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무척 심플한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제 삶에 도움을 주신 분들이 바로 그랬다는 이유가 가장 클 거예요.

 

스기타 감독은 오가와 안 배우로부터 여러 가지 영감을 얻어 시나리오를 썼다. 하루라는 인물은 연출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자연스럽게 태어났다고 한다. (C)2023 Following the Sound Film Partners
스기타 감독은 오가와 안 배우로부터 여러 가지 영감을 얻어 시나리오를 썼다. 하루라는 인물은 연출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자연스럽게 태어났다고 한다. ⓒ 2023 Following the Sound Film Partners

홍상현

창가에서 <하루하라상의 리코더>와 같은 구도로 마주 앉아 대화하는 하루와 츠요시의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어떤 작가적 의도에서 만들어진 신인지요.

스기타 교시

사람과 사람이 정면으로 마주하는 구도는 결투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상대방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놓치는 순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상대방의 모든 변화를 읽기 위해서는 서로 정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요. 언급하신 <하루하라상의 리코더>의 장면도 결국 일종의 '결투 장면'이었던 거고요. (웃음)

다만 제 영화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결투를 하려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잖아요. 그러니 말씀하시는 구도를 선택하게 되는 거고요. 또한 <소리를 따라가다>에는 이런 순간에 어쩔 수 없이 조성되는 긴장감을 완화하기 위해 장소를 카페로 설정하고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소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홍상현

작품에서 '영화를 만들고 보는 행위'가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창작자인 동시에 교육자이시기도 한 감독의 자기반영 아닐까 싶은데요. (웃음)

스기타 교시

실제로 <소리를 따라가다>에 등장하는 장면은 제가 15년 이상, 그것도 영화 속 바로 그 장소에서 진행하고 있는 영화강좌의 모습입니다. 또한 극 중의 강사가 수강생들에게 내는 과제도 제가 실제로 영화워크숍에서 내는 것이고요.

자신의 인생에서 계속 마음에 남아 있는 누군가와 보낸 시간을 영화로 만들고자 할 때는 태어나서 처음 캠코더를 손에 쥔 사람이라도 어떻게 촬영할지, 어떻게 연출을 할 지 망설이는 법이 없습니다. 각자에게 가장 적절한 형태를 어렵지 않게 찾아내죠. 카메라의 포커스를 자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맞추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상대방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맞추는 경우도 있고,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장소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무의식중에 선택을 하게 되죠.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의 거리도, 카메라의 움직임도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오직 망설이지 않는다는 점만이 공통적이고요.

저는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이상의 작품은 없다고 항상 실감해 왔어요. 해서, 제게 이런 식의 영화강좌를 한다는 건 중요한 수행과도 같은 일인 동시에, '이 이상의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너는 과연 픽션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는 일과 같습니다.

아울러 이 강좌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각자 찍은 장면들을 스크린으로 함께 보는 시간인데요. 촬영을 하던 시점에 스스로 뭘 찍었는지에 대해 별로 자세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다른 수강생들과 영상을 같이 보면서, 그들의 반응을 동해 깨닫게 되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견고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존재할 것 같지만 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어떤 전제를 설정해놓은 게 아니라, 그저 삶의 한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해 놓은 것 같은 무작위적인 구성이 피부로 전해진다는 점은 「소리를 따라가다」의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C)2023 Following the Sound Film Partners
상당히 견고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존재할 것 같지만 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어떤 전제를 설정해놓은 게 아니라, 그저 삶의 한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해 놓은 것 같은 무작위적인 구성이 피부로 전해진다는 점은 「소리를 따라가다」의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 2023 Following the Sound Film Partners

홍상현

주인공 '하루'를 연기한 오가와 안 배우에게 캐릭터 구축과 관련해서 어떤 주문을 하셨나요.

스기타 교시

<소리를 따라가다>를 만들면서 저는 오가와 배우로부터 여러 가지 영감을 얻어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하루라는 인물은 연출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자연스럽게 태어났어요.

 

홍상현

<소리를 따라가다>의 하루는 관찰자인 동시에 주인공으로서 여러 가지 감정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합니다. 요컨대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열린 서사의 영화'라는 감독의 스타일을 대단히 적절히 보여주는 인물 아닐까 하는데요.

스기타 교시

어휴 정작 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보니 질문을 받으면서 놀라고 있는데요. (웃음) 다만, 저라는 존재를 통해 많은 분들이 제작에 참여해주신 결과 재미있는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한다는 생각을 유지해 왔으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제 작품들과 지적하시는 부분 사이에 접점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홍상현

츠요시라는 인물이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스기타 교시

이 질문에 뭔가 대답을 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패스해도 될까요.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 거짓말이 될 것 같아서요. (웃음)

 

홍상현

그렇군요. (웃음) 상당히 견고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존재할 것 같지만 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어떤 전제를 설정해놓은 게 아니라, 그저 삶의 한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해 놓은 것 같은 무작위적인 구성이 피부로 전해진다는 점이 <소리를 따라가다>의 놓칠 수 없는 매력 아닐까 합니다.

스기타 교시

말씀하신 대로인 것 같아요.

여러 명의 영화감독이 한 인물을 그릴 경우 각자 그 인물의 삶에서 어떤 부분을 영화에 '온(ON)'하느냐 혹은 '오프(OFF)' 하는가에 있어 차이가 나타날 겁니다. 그러한 선택, 그리고 편집이 사람을 표현함에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해요. 좀 더 깊이 있게 말씀드리면, 등장인물과 창작자의 삶이 교차하는 곳에서 영화가 태어난다는 거죠.

한편 <소리를 따라가다>를 만들면서 유키코 역을 맡은 나카무라 유코 배우에게는 유키코의 반생에 대해 다소 디테일하게 쓴 글을 미리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면서'이 내용만으로도 또 다른 영화 하나를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스기타 감독은 「소리를 따라가다」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고독을 응시하는 영화”라고 정의했다. 실로 적확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C)2023 Following the Sound Film Partners
스기타 감독은 「소리를 따라가다」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고독을 응시하는 영화"라고 정의했다. 실로 적확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 2023 Following the Sound Film Partners

"<소리를 따라가다>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고독을 응시하는 영화입니다.

이번 작품으로 부산을 찾았을 때, 역 개찰구에서 용케 저를 알아보고 인사와 격려의 말을 전해주시거나, 거리에 멍하니 서 있던 제게 말을 걸어 작품을 보신 감상을 길게 들려주시는 분이 계셨어요.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 여러분을 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소리를 따라가다>의 현지 개봉 후 2주가 되어가는 목요일 0시 1분. 스기타 감독이 자신의 X(트위터) 계정을 통해 근황을 전해왔다. 주연을 맡은 오가와 안 배우가 첫 시사 이래 작품을 보러 자주 극장을 찾고 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내용. '역시 독특하고 영화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감독과 배우라니까'하며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꽤 붐볐지만 이제는 쓸쓸한 장소가 되어버린 어떤 건물이 무대라는 새 작품은 지금쯤 촬영을 시작했을까.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 요란한 홍보문구와 전혀 무관한, 팔리지 않는 영화에는 유난히 싸늘한 한국의 영화관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울 것 같은 그의 신작을.

[인터뷰 홍상현 영화평론가, krpopper@ccoart.com]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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