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BEST] '너'가 '나'를 앞지르는 순간이 사랑이다
[2023 BEST] '너'가 '나'를 앞지르는 순간이 사랑이다
  • 이지혜
  • 승인 2024.01.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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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영화평론가의 2023년 베스트 필름

2023년 개봉영화 중 단 7편만이 손익분기점을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사이,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가 완전한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지역에서는 무기한 휴업에 돌입하거나, 폐관하는 극장이 늘었다.

영화산업의 위기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문제점은 '볼만한 영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볼만한 영화는 분명히 있었다. 다만, 너무 많은 영화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공급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영화는 언제든지 보기를 미룰 수 있는, 게다가 과하게 공들여 오랜 시간 집중해야 하는 좀 부담스러운 콘텐츠가 되었다.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믿기 시작했다. 문제는 나부터였다. 내가 그랬다. 그러한 도중에도 '나'를 앞지른 영화들이 있다. 그 영화들을 2023년의 영화로 선정했다.

 

<너와 나 The Dream Songs> 조현철|2023

ⓒ <너와 나>

기억은 '나'가 살아온 시간의 일부분이다. 그런데 꼭 생명이 있는 존재에게만 기억이 깃드는 것은 아니다. 캠코더 속 테이프나 메모리 칩, 펜과 편지지, 하은과 세미를 비추는 거울에도 조각조각 찰나의 기억이 머문다. 이렇게 수많은 기억들이 모여 하나의 존재가 된다. 

세미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너와 나>의 제목은 '나와 너'가 아니라 '너와 나'이다. 기억은 스스로 공유하기 전까지 오로지 '나', 즉 개인의 것이다. 그러나 기억으로 남는 시간 대부분은 내가 홀로 있었던 시간보다, 세상과 상호작용하던 때이다. 그러므로 세미의 기억은 하은과 상호작용했던 순간이 대부분일 것이다. 세상에 '나'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나는", "내가", "저는"으로 시작하는 말들이 기준인 삶에서 "너는", "네가", "당신은"이 앞지르는 단 한 순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세미는 하은이를 사랑하므로, 그리고 하은이가 응답했으므로 서로는 '나와 너'가 아닌 '너와 나'가 된다. 이 영화의 제목이 '너와 나'일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다.

 

<세기말의 사랑 Ms. Apocalypse> 임선애|2023

ⓒ <세기말의 사랑>

맨드라미의 꽃말은 '치정'과 '시들지 않는 사랑'이다. '치정'의 사전적 정의는 남녀간의 사랑으로 생기는 온갖 어지러운 정을 뜻한다. 그러니까 분명히 <세기말의 사랑>은 영미, 유진, 도영의 치정극이 맞다. 하지만 영미와 유진 사이에, 도영과 유진과 영미 사이에, 유진과 준 사이에, 결국은 시들어도 괜찮은, 그래도 한결같이 씩씩할 사랑이 존재한다.

오래 숨기고 싶던 흉터가 비단 몸에 남은 화상자국뿐이겠는가, 그런 자국들을 맨드라미꽃처럼 보아주는 마음이 있다. 그런 게 사랑 아닐까? 시들지 않는 사랑이 세상에 존재하므로 고단하고 어지러운 치정 속에서도 부대끼며 살아갈 가치가 있다. 모노톤이었던 내 삶을 컬러풀하게 만들어 주는, 이 순간 최악이지만 삶에 있어서는 최선이었던 어떤 계기들. <세기말의 사랑>은 근 몇 년 동안 본 '사랑영화' 중에 단언컨대 최고의 영화.

*참고: '사랑이 아닌 단어로 사랑을 말해요'

 

<괴물 MONSTER> 고레에다 히로카즈 Koreeda Hirokazu|2023

ⓒ <괴물>

각본가인 사카모토 유지와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 시작과 동시에 "괴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담은 카드를 관객들의 이마에 붙여놓는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상영시간 내내 괴물이 누구인지 뒤쫓고, 종국엔 괴물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영화관을 나선다. 그러나 "괴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의도적인 맥거핀이다. 이 영화는 "괴물은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인가?"를 묻는 영화다. 다시 말해 수많은 인간 중에서 괴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괴물 중에서 인간은 누구인지,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지, 인간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라는 기준으로 괴물을 정의한다면 그 정의는 어떻게 내릴 것인가. 인간의 뇌를 가진 돼지와 돼지의 뇌를 가진 인간 중에서 무엇이 인간인가. <괴물>은 이 질문에서부터 바라보아야 한다.

 

<킬링 로맨스 Killing Romance> 이원석

ⓒ <킬링 로맨스>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그리고 상업영화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이원석 감독의 <킬링로맨스>가 바로 그런 영화다. 상업영화의 터치로 제작되었으나 독립영화의 모양새에 맞닿아 있는, 예술영화라고 하기는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다. 걸출한 배우들이 출연했지만, 흥행성적은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그러나 'SNS'의 가호를 받아 영화의 특정 씬들이 밈이 되는 바람에 디지털 필름이 사장되기 직전, (처음의 성적에 비교해) 흥행 역주행에 성공한 영화가 바로 <킬링로맨스>이다. 출연한 배우들이 작품에 갖는 자부심과 만족감, 감독의 세계관, 이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이 합일되어 완성된 대단히 서브컬처적인 경향을 갖는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노랫말 덕분에 타자의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 '자아'를 되찾는다는 자기구원서사보다 좋았던 건, 향수를 자극하는 다양한 패러디와 다소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상황 속에서 역설적으로 빛나는 미감이다.

 

<애프터썬Aftersun> 샬롯 웰스Charlotte Wells | 2022

ⓒ <애프터썬>

타자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찍는 것이다. 카메라로 찍어 기록물로 출력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료 속의 타자는 정물처럼 붙박여 있다. 소피가 발견한, 캠코더 속에 기록된 캘럼도 그렇다. 소피가 기억하는 아버지 캘럼과 기계가 기록한 캘럼 사이에는 지독하게 주관적인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은 어린 소피가 캘럼 만큼의 나이를 먹어야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 나'에 천착해 있던 시야는 '지금의 소피'만큼 달라진다. 그러니까 세월이 지나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이해하며, 우리는 종종 속절없이 슬픔에 빠진다. 혹시 <애프터썬>을 보고 울었다면,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캘럼이나 소피만큼 나이를 먹지 않았을까.

 

<엘리멘탈 Elemental> 피터 손 Peter Sohn|2023

ⓒ <엘리멘탈>

<엘리멘탈>을 관람하고 극장을 나서며 범람하는 실사화 영화들을 떠올렸다. 그 영화들을 제쳐두고, 그래도 애니메이션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누군가 묻는다면 당분간은 <엘리멘탈>을 내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애니메이션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러니까 실사가 아니라서, 고작 인간을 기준으로 삼은 세계가 이 우주의 전부가 아님을 증명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고 믿는다. "내가 널 처음 만났을 때, 난 물에 잠긴 듯한 기분이었어. 하지만 네 빛, 네 안의 그 밝은 그 빛이 날 살아있게 만들어줬지. 난 너와 가까이 있고 싶어. 너랑 나 둘이서 함께." (중략) "네 빛이 일렁일 때 정말 좋더라"를 듣는 순간, 만화 속 캐릭터와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안 되는 수많은 이유가 있음에도 너를 사랑"하는 관념적 마음을 객관적 이미지로 표현해 낸 수작.

 

<스즈메의 문단속 Suzume> 신카이 마코토|2023

 

ⓒ 

<스즈메의 문단속>이 신카이 마코토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만듦새가 훌륭한 아니메는 아니다. 개인의 감정을 세계 전체의 운명으로 귀결짓는 일본식 세카이계 서사는 평이하고, 여고생 스즈메가 첫눈에 반해 "잘 생겼다"고 되뇌게 만드는, 그가 운명적 사랑을 느끼고 뒤쫓는 소타의 외양은 객관적인 잘생김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고백하건대 초반 30분은 졸았다. 하지만 소타가 의자로 변한 후부터 재기발랄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의자가 된 채 스즈메에 의지하는 소타는 잦은 불행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재해의 위험에서 세계를 구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춘기 여고생 스즈메가 자신의 마음을 단속하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바라보면 충분히 아름다운 아니메로 기억될 여지가 있었다.

 

<어파이어 Afire> 크리스티안 펫졸드 Christian Petzold|2023

ⓒ <어파이어>

이창동의 영화들이 파편적으로 떠올랐다. 개중 <버닝>에 <오만과 편견>을 적절히 섞어 유물로 남기면 이런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때때로 결말보다 과정이 중요한 영화가 있는데, <어파이어>야 말로 결말보다 과정이 중요한 영화였다. 모조리 태우기 위해 틔워낸 불씨가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불로 고통받는건 유물로도 남지 못하는 작은 동물들일까? 산불로 죄 없는 생명이 타들어 가는 사이, 욕망에 허덕이던 인간의 마음만 '아스라'같은 유물로 남는다.

네 이름은 무엇 그리고 네 종족은?

예, 저는 마호멧 족속으로

사랑을 하면 그 갈망에 죽고 마는

아스라입니다.

- 하인리히 하이네 시 '아스라' 중에서

나디아가 읊는 시는 레온의 마음에 노래처럼 남아, 불길에 휩쌓인 죽음 사이에서 기적과도 같은 우연을 상상하게 한다. 그 참혹한 아름다움을, 지질한 사랑을 탐미하며 죄의식을 느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Concrete Utopia> 엄태화|2023

ⓒ <콘크리트 유토피아>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카피가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유행처럼 떠돈 적이 있다. 칸의 영광 속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은 위 문장을 고스란히 계승하는 영화다. 왜냐하면 '반지하' 문화란 오직 한국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2023년에는 또 한편의 '한국적 문화'를 계승한 영화가 등장했다. 바로 <콘크리트 유토피아>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파트'이다. '꿈도 희망도 없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주제로 그 인간군상을 해부하고 톺아보는 영화는 수도 없이 많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인공은 끝까지 '아파트', 즉 '집'이다. 인물들은 집을 위해 투신하고, 집착하고, 사람을 죽인다. 한국인에게 '아파트'가 갖는 의미에 세계가 공감할 수 있다면, 이 영화는 기생충만큼이나 세계 관객들 사이에서 좋은 결과를 내리라고 믿는다.

[글 이지혜 영화평론가, leehey@ccoart.com]

이지혜
이지혜
 영화가 삶을 바꾸지는 못해도, 세계관의 일부가 될 수는 있다고 믿는다. 인생 첫 영화는 주말 저녁 부모님과 본<패왕별희>(첸카이거, 1993)였지만, <러브레터>(이와이 슌지, 1999)가 세계관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OTT로는 <레디 플레이어 원>(스티븐 스필버그, 2018)를 본다. 지독한 사랑영화 처돌이이기도 하다. 제16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부문으로 등단했다. (공식인스타 @leehey_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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