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BEST] '단 한 편의 영화'를 찾아서
[2023 BEST] '단 한 편의 영화'를 찾아서
  • 함윤정
  • 승인 2024.01.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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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윤정 영화평론가의 2023년 베스트 필름

'단 한 편의 영화'를 꼽기 힘든 한 해를 보냈다. 아니, 그렇게 어물쩍 한 해를 보냈다고 여겼다. 봄이 오기도 전에 순위 너머에서 나를 잡아끄는 영화를 만났던 지난 몇 년과 달리, 끝내 그런 만남이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른단 불안에 시달린 시간이었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허비한 시간에 대한 보상 심리로 다음 작품을 찾게 하는 영화 대신, 더는 무엇도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나를 아프게 하는 영화. "좋다"란 말보다 차라리 "무섭다"란 말이 앞서는 영화. 여러 이유로 영화와 가까워진 만큼 멀어진 2023년엔 결국 그런 영화를 만나지 못했다.

새해의 시작으로 '2023 BEST10'을 요청받고 마치 빈 교실에 홀로 남아 밀린 숙제를 끄적이는 열등생이 된 기분이었다. 듬성듬성한 목록을 채우기 위해 황급히 놓친 개봉작을 뒤지는 꼴이 우습기도 했다. 그러다 거짓말처럼 발견한 단 한 편의 영화! 이토록 늦게, 어쩌면 너무 빨리 발견한 올해(?)의 영화에 관해 쓰며 더없이 모순적이고 임의적인 잣대로 목록을 꾸린 것 같아 조심스러워진다. 하지만 이런 어긋남이야말로 내가 영화에 기대하는 만남의 모양새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단 한 편의 영화'가 무엇일지는 독자의 추측에 맡긴 채, 이제 정말 2023년을 떠나보낸다.

 

<파벨만스 The Fablemans>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 2022

ⓒ 영화 &lt;파벨만스&gt;(2022)
ⓒ 영화 &lt;파벨만스&gt;(2022)

스필버그는 '자전성'이라는 영화 바깥의 개념이 작품을 형용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영화라는 픽션의 세계가 스스로 자전성을 구축하는 과정을 목격하며 감탄할 수밖에. 카메라의 운동만으로 영화의 외부와 내부를 환기하고 구획된 두 장소를 겹쳐보게 하기. 영화 속에서 연습된 시선의 역학을 변주해 픽션과 실제의 차원을 연결 짓게 하기. 이는 감독으로서 자신의 역량과 '관객'이란 원초적 자리에 대한 믿음 없이 불가능한 연출 아닐까. 스필버그가 말하는 삶이란 두 손끝에 전달되는 활력과 두 눈으로 무언가를 직시하는 용기다. 나의 손과 눈이 자신을 아프게 할지라도 끝내 삶을 긍정하고 영화를 통해 자신의 두려움을 마주보는 일. '새미'의 당찬 걸음이 <파벨만스>라는 세계로 도착한 순간, 스필버그의 영화가 전하는 그의 내밀한 이야기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 김덕중|2021

<에듀케이션>(2019)을 연출한 김덕중의 두 번째 장편. 장면 곳곳에 어질러진 불화의 감각을 충돌하는 신체의 형상으로 수렴시켰던 데뷔작에 이어, 영화에서 가능한 대화의 형식과 장면 내부의 장력을 실험한 끝에 '영화의 대화'란 실천으로 뻗어나간 작품이다. <컨버세이션>의 마지막 장면에서 김덕중의 카메라는 숲길을 걷는 두 남녀를 따라나선다. 어찌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팔로잉 숏, 그러나 내게는 최근에 본 무엇보다 생생하고 야심 찬 카메라의 움직임이었다. 고안된 형식 속에서 유영했던 말들이 단 한 번의 활력을 위한 동력이었음을 실감한 대목이기도 하다. '에듀케이션'과 '컨버세이션', 다소 경직된 제목에 대한 첫인상이 감상 후 통째로 뒤집어지길 두 차례. 제목으로 내용을 그러쥐지 않는 시도에 애착이 생겼다. 그러니 새해 소원 중 하나를 김덕중 감독에게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가 평생 '제목 학원'에 발붙이지 않게 해주세요!

 

<밀회 Brief Encounter> 데이비드 린 David Lean|1949

무심히 흐르는 시간처럼 속절없이 출발한 열차는 사랑하는 이를 싣고 떠났다. 이별조차 온전히 허락되지 않는 야속함. 로라(셀리아 존슨)와 알렉(트레버 하워드)의 마지막은 그들의 성정을 닮아 무척이나 고결해서 더욱 사무친다. 또 다른 열차에 몸을 맡긴 채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간 로라를 맞이하는 건 내밀한 사랑의 오디세이를 끌어안는 남편의 목소리다. "당신이 그동안 멀리 간 것 같았는데, 다시 돌아와줘서 고마워." 아내의 연애담을 종결하는 프레드(시릴 레이몬드)의 말은 차마 전해지지 못한 고백에 대한 눈물겹도록 다정한 응답처럼 들린다. 로라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밀회>는 페이 무의 <작은 마을의 봄>(1948)에 이어 로맨스물에 도통 취미가 없는 내 마음을 뒤흔든 고전으로 남았다. 무엇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이보다 어울리는 영화는 앞으로도 만나기 어렵겠단 생각이다.

 

<유레카 Eureka> 리산드로 알론조 Lisandro ALONSO|2023

"미국의 다른 시공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영화를 한 폭의 그림으로 보고 직접 느껴 보시길 바라요. (...) 즐겁게 보시길 바라고, 그렇지 않았다면 다시 봐주시길 바랍니다."

느끼지 못했다면 다시 볼 것. 지레 움츠러들 만큼 당돌하고 노골적인 감독의 요청에 최면이라도 걸린 걸까. <유레카>를 관람하는 내내 '슬로우 시네마(slow cinema)'의 호흡과 늘어진 러닝타임에 붙잡히기는 커녕, 섬세하게 빚어진 장면의 역량에 눈을 뗄 수 없었다. 3부에 걸쳐 서로 다른 차원을 매개하는 <유레카>는 각기 다른 사라짐의 형상과 이후의 풍경을 차례로 주시한다. 폭력과 구원, 해방과 자유, 꿈과 현실(사실 나는 이를 다른 용어로 부르고 싶지만, 아직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모든 이항들의 틈을 비집고 등장한 것은 새로이 결심된 사라짐과 시공간을 횡단하는 탐색의 몸짓이며, 이때 발견되는 것은 오직 '영화'란 길이다. 리산드로 알론소의 전작 <도원경>(2014)을 처음 봤을 때 느낀 황홀감과는 다른 체험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게 됐다.

 

<우리들의 공화국 Republic> 진지앙 JIN Jiang|2023

눈길을 사로잡는 현실의 소재와 성실한 1인 작업으로 이룬 성과. 2023년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꼽는다면 단연 <우리들의 공화국>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첫 인터뷰로 만난 그와의 대화 덕에 올해 사적인 차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이기도 하다. 얼마 전, 일본으로 이주한 진지앙 감독이 그의 세 번째 장편 <우리들의 공화국>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조명되지 않는 삶들을 기록해 스크린 너머로 전달하고, 넓고도 비좁은 '중국'이란 장소와 사회의 관계를 역설하는 그의 작업이 더 많은 관객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괴인 a Wild Roomer> 이정홍|2023

도무지 진전이 없는 원고 '잠자는 한국 영화의 사람들'의 한 꼭지를 차지한 작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괴인>이 처음 상영되었을 때 쓴 글을 오랜만에 꺼내보았다.

"<괴인>에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어긋남의 순간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상황을 미묘하게 어그러뜨리지만, 큰 변화의 기준점이 되지 못하는 작은 일들. 영화는 사건을 문자 그대로 '사건화'하려는 강렬한 의욕을 내비치지도, 불쑥 튀어나오는 작은 사건들을 억누르려는 안간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서로의 공간을 활보하고 점유하는 인물들의 움직임과 발화의 양태는 어느새 서서히, 때로는 일순간 대담하게 변화한다. 이때마다 좁혀지고 벌어지는 인물과 인물 사이의 거리, 그 거리만큼 수축하고 늘어지는 리듬을 포착해 영화에 담아낸 연출자의 감각이 돋보인다. 장면의 틈새에서 피어오른 묘한 기류가 인물과 공간을 유유히 감싸 흐르는 풍경 끝에 당도한 영화의 엔딩, 관객은 어긋남과 동시에 별안간 마주치는 어떤 형상을 목격한다. 고정되지도, 나아가지도, 수습되지도, 어쩌면 달리 심각할 것도 없는 이 결말에서 느껴지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상. <괴인>의 괴력은 끝에서 시작된다."

시작이 있으면 과정과 끝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 보통의 순리고, <괴인>은 이를 미묘하게 어그러뜨리며 내달리는 영화란 점에서 분명 매력적이다. 정식 개봉한 작품을 다시 보며 느낀 바는 당시와 조금 달랐지만, 여전히 보기 드문 흡인력을 가진 영화란 생각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Ryuichi Sakamoto: Opus> 네오 소라 Neo Sora|2023

문장을 쓰고 지우길 반복하다 누군가에게 부친 편지로 코멘트를 대신한다.

"선생님은 영화를 사랑하시지요? 영화 없이 살 바엔 죽음이 나으신가요? 고백하자면 저는 아닙니다. 전 영화 없인 살아도 음악 없인 못 살거든요. 영화가 제게 어떤 계기로 와서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긴 했지만, 그보다 더 오래전에 음악이라는 첫사랑이 와버려서요. 영화는 아마 어지간해서 그 자리를 밀어내기 어렵다고 봅니다. 재밌는 사실은, 음악에 대한 애정의 민낯을 폭로한 게 바로 영화라서 제가 이를 붙잡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영화는 말합니다. 대충 사랑하지 말 것. 저는 텅 빈 상자 속 침묵을 포착한 이 무시무시한 괴물에 빚을 져버렸고, 매번 '다시 쓰기'라는 이자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평생 다 갚지 못할게 뻔해서 이자라도 열심히 내야 하지 않을까, 늘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걸 희망이라 부르는데요. 때에 따라 절망이 되는 것도 가능합니다."

 

<괴물 MONSTER> 고레에다 히로카즈 Koreeda Hirokazu|2023

극장을 나오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태풍이 지나가고,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자신의 전작 <태풍이 지나가고>(2016)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을 조합한 신작으로 돌아왔단 의미가 아니다. 감상 도중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두 작품이 떠오른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괴물>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건물 위로 타오르는 불과 잔잔한 호수의 대비, 이들 이미지를 좌표 삼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되는 사건. 그 끝에 맹렬히 몰아치는 비바람이 기적(汽笛)이 들려오는 기적(奇跡)으로 관객을 이끌기까지. 그렇게 나의 중얼거림은 다시 감동하지 않을 줄 알았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 대한 '아멘'이 되었다. <괴물>은 여러모로 내 마음을 고쳐먹게 한, 2023년 가장 고마운 영화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Asteroid City> 웨스 앤더슨 Wes Anderson | 2023

어떤 감독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웨스 앤더슨'이라 답할 때마다 기어들어가는 내 목소리가 너무 싫다. 돌아오는 건 주로 "왜요?" 아니면 "아..."하는 애매한 반응. 어느 쪽을 들어도 울고 싶은 기분이고, 이유를 잘 말하고픈 욕구에 말문이 막혀 답답함만 쌓인다. 웨스 앤더슨이 <프렌치 디스패치>(2021)를 발표한 후로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원래도 진짜 아끼는 것에는 '좋다'란 말을 붙이길 꺼려하지만, 이제는 전과 다른 이유로 그 말이 쉽게 나오질 않기 때문이다. 이번엔 '상실 이후'를 지시하는 다층의 이야기와 '극 바깥의 극'이란 구조를 활용해 거대한 우주적 농담을 완성한 웨스 앤더슨이다. 솔직하게는 단순히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아니라 '<프렌치 디스패치> 이후의 <애스터로이드 시티>'로 목록에 넣고픈 심정인데, 이는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2004)과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2009)에 애정을 느낀 지난날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아무래도 이러한 변화의 흥미로움에 관해 또박또박 말하는 것을 새해 목표 중 하나로 정해야겠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Small, Slow But Steady> 미야케 쇼 Miyake Sho|2023

ⓒ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필름의 질감이 영화의 소리가 된 듯했다. 바스러질 듯 자글거리는 화면과 음향이 주인공 케이코(키시이 유키노)의 이야기와 어우러져 나를 간지럽혔다. 마음이 비친 눈빛과 의미를 담아낸 몸짓 그리고 담담히 쓰인 문장들. 말을 대신한 모든 언어를 매만지듯 감각하게 하는 이 영화는 오직 리듬만으로 가득하다. 삶의 어떤 조건도 쉬이 모른 척 하지 않는 영화의 태도를 되짚으며, 그 리듬 속에 모든 멜로디가 함축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규칙적인 리듬 속에서 안정을 느끼고 변박에 허를 찔려 쓰러지는 링 위의 게임. 그러나 정박은 변박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미야케 쇼가 들려주는 동시대 풍경 속 인물의 이야기는 연약한 채로 완전해서 "이게 바로 삶"이란 말 이상의 설명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나긋하게 들여다보면 비로소 들리는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오래도록 그렇게 기억될 것 같다.

[글 함윤정 영화평론가, badasal2@ccoart.com]

함윤정
함윤정
부산 가덕도에서 생활하며 영화와 바다에 대해 생각하고, 극장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운영하는 꿈을 꾼다. 미학을 공부하러 간 대학에서 영화를 찍은 후로 좋은 관객이 되면 나은 삶을 살게 되리란 이상한 믿음을 갖게 됐다. ‘좋은 관객’이란 무엇일까? 나의 글과 말은 늘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좋은 관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영화를 더 아끼게 되고, 지난밤 꿈에서 본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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