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식물성의 유혹' 사진과 영화, 그 모호한 기행
[Critique] '식물성의 유혹' 사진과 영화, 그 모호한 기행
  • 이현동
  • 승인 2023.12.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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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영적 유토피아를 향하여"
ⓒ <영화의 역사(들)>(1988)

유운성 평론가의 『식물성의 유혹』은 이전에 그가 언급한 바 있는 수동성을 가진 매체인 사진을 겨냥하여 그 논의를 확장한 에세이다. 여기서 '수동성'이란 움직임이 소진된 형태이자 대상에 의해 움직임의 강도와 방향성이 지시되는 잠재적 속성을 지닌다. 저자가 말하듯 특정한 시점에 멈춰 있는 사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사진이 시간을 담보로 하는 동시에 맥락에 의해 의미가 결정되거나 유보되기도 하는 어떤 모호한 형상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모호함이란 단어를 떠올리면서 동시에 이 책의 장르가 에세이라는 사실도 자각했다. 저자가 본 글에서 인용한 리오타르의 말에 의하면 에세이란 판단을 위한 보편적 규칙이 일반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이질적 대상들에 관한 관찰·비교·단상·주석의 장르라고 말했다. 에세이란 이론을 정립하는 학술서도 아니고 단순히 일상생활을 담은 일기장도 아니다. 다만 확실한 건 결여된 자신을 불온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장르다.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는 사진을 닮았다.

사진술 발명가인 윌리엄 헨리 폭시 탤벗은 "사진의 매력 중 하나는 발견에 있고 사진은 늘 발견을 위해 자신을 빌려준다"고 말하며 탐구적 힘이 사진의 미적 가치라고 여겼다. 또한 사진사가 피사체를 어떠한 의도를 갖고 찍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대상에 관한 의미를 주변의 기호라는 도구를 통해 발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사진은 끊임없이 기억을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진은 기억의 불화를 조장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사진으로부터 퇴각한 기억은 도리어 망각이란 기능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이식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들뢰즈나 베르그송이 정의해왔던 이질적 다양성과 잠재적 공존, 차이와 반복으로 발생하는 유기체적인 존재로 변화함을 뜻한다. 그는 모호한 사진의 의미 작용이 이중적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모호한 사진 혹은 이미지란 가설과 픽션이란 요소에 영향받았기 때문이다. 유운성 평론가가가 첫 번째 화두로 던지는 이런 모호함은 「얼굴 없는 표면」이라는 제목으로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1988)의 도입부 장면을 예시로 하여 나아간다. 그 사진에는 남자의 얼굴과 소녀의 얼굴이 서로 마주하고 있지만 화질이 흐릿할뿐더러 행동의 의미를 명확하게 식별할 수 있는 단서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맥락에서 등장하게 된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이 사진에서 우리는 사진의 속성이 시간과 공간, 그 세계의 맥락 속에 잠재하고 있는 기호들로부터 도주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님을 파악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모호한 사진이 상상을 자극하면서도 필연적으로 해독을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세계는 비로써 현존하게 된다.

 

ⓒ 영화 <김군>(2019)
ⓒ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미국인들(The Americans)』

강상우 감독의 영화 <김군>(2019)을 시작으로 한 챕터 2장에선 사진적 불안에 관한 개념이 등장한다. 이러한 불안을 함축하여 말하자면, 기록과 보존에 집착하는 전근대적 가치에 함몰된 이들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지에서 '있음'만이 현재성을 지닌 것이라 느끼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불안'이란 개념을 하이데거의 본래적 실존을 개방하는 방식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불안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본래적 자기를 회복하는 가능성 말이다. 불안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진에서만 '있음'이 존재할 것이라는 망상에서 탈각하는 것이다. 영원히 타자의 모습이 변하지 않을 것이란 이 불안은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와 더불어 생생히 삶을 사는 타인으로서의 이미지"로 자각할 때 비로써 해소될 수 있다. 논의를 확대해 보자면 타자론을 주장했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사물의 사물성을 보존하기 위해 함께 '거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진술은 윤리적 가능성을 초월하여 사진과 영화의 지위를 결합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와 사진과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논구하는 3장에는 이 책에서 가장 주요하게 서술되는 인물 중 한 명인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로버트 프랭크'를 소개한다. 저자는 1958년 제작한 사진집 『미국인들(The Americans)』은 사진에서 영화로 이끈 숨은 동기를 고찰해 보자는 것으로 시작한다.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찍은 이 작품에서 저자는 사실적 존재와 허구적 존재라는 이중화(분리된 것이 아닌)된 속성을 간파해 낸다. 먼저 『미국인들』에서 특정 사진은 미국 국기로 몸의 일부만이 보이도록 가린 이미지를 통해 사실과 허구라는 속성을 동시에 표상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는 이러한 존재론적 양극성 사이에서 어긋나 보이지만 불가결하게 마찰하는 관계에 주목하는 그의 영화 작업을 동시에 포착해 낸다. 알프레드 레슬리와 공동 연출한 첫 번째 영화 <풀 마이 데이지>(1958)에서는 공교롭게도 『미국인들』에게서의 사진을 연상케 하는 성조기에 자기 몸을 가린 채 설교하는 전도사가 등장한다. 이를 보면 사진과 영화의 중첩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그의 <나와 내 동생>(1965/1968)에서 도입부의 말과 연결해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사실이다. 사실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이건 순전히 나의 상상이다"라는 첫 안내 문구는 이 영화가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실재와 허구의 가능성, 즉 존재론적 양극성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시하게 한다.

이 영화와 같은 맥락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텐>(2001)도 동일한 가능성을 실험한 영화다. DV 카메라를 운전석과 조수석에 각각 고정해 찍은 이 영화는 시나리오가 존재하지 않고 출연하는 배우들도 창녀를 제외하곤 모두 비전문 배우를 기용했다. 어떠한 서사나 주제가 정해져 있지 않고 각각의 상황에 따라 대화를 만들어가는 이 영화의 역량은 결국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허구인지를 구분하는 데서 정체되지 않는다. 사진이나 영화나 재현을 토대로 한 존재론적 양극성은 모호함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존재론적 물음, 인식론적 물음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필자는 2022년에 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했던 로빈 훈징어의 <숨겨진 편지, 그리고 사랑>(2021)이라는 영화를 상기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영화는 동성애를 주제로 그들이 교류했던 수천 통의 편지를 토대로 하여 재구성된 영화다. 당시에 영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은 이 영화를 사진과 아방가르드 영상을 유기적으로 조합해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제작되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사실과 허구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할 수 없는데, 우리는 이 영화를 사실도 아니고 허구도 아닌 이야기로 인식한다. 더 나아가 사진과 영화 안에 잠재하고 있었던 사실과 허구라는 이분법을 해체하고 이야기가 위치할 때 모든 이들은 실재라는 환영을 제거할 수 있는 셈이다.

 

영화 <은판 위에 여인>(2016) ⓒ 안다미로
ⓒ 영화 <24프레임>(2017)

이어서 저자가 식물성이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떠올려 본 작품인 구로사와 기요시의 <은판 위에 여인>(2016)가 논의된다. 이 영화에서는 다게레오타입으로 촬영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저자가 본 장면은 이 장면이라기보다 식물성의 감각을 드러내는 온실을 지목하면서 의의를 확대한다. 필자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론을 쓰면서 유령적 속성에 대해 다룬 바 있는데, 그에게 있어 유령의 운동감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어떤 기묘한 구석이 있다. 그의 영화가 섬뜩한 이유는 비가시 영역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며 부동하는 세계가 언제 들이닥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종말 3부작이라 불리우는 <큐어>(1997), <회로>(2001), <절규>(2006) 부동하는 유령의 움직임을 차츰 드러내고 있듯이 우리는 저자가 이야기 한 사진으로부터 영화로 움직이는 정체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사진으로부터 영화로 변주하듯이 말이다.

그의 논의는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현재와 미래를 전망하며 가상현실이 가져온 매체의 의미를 되짚기도 한다. GPT가 가세한 세계를 보며 인간적인 것을 모방하고 강화하고 능가하게 될 것이란 보도에서 조너선 크레리와 저자는 반문한다. 크레리는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신자유주의적/기업주의적 개념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제거했다고 말한다. 가령 GPT와 같은 인공지능은 그저 체계 아래에서 알고리즘을 반복적으로 숙달하여 모방을 지속할 뿐, 어떤 현실도 구현하지 못하는 가상화된 테마파크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2018)과 박윤진 감독의 다큐멘터리의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비교적 먼 미래의 일을 상정하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세계는 현실과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지만 좀처럼 사진을 찍는 일이 없음을 지적한다. 실시간으로 저장이나 재생이 가능한 세계에서 사진은 좀처럼 그 의미를 찾기가 힘들지만, <내언니전지현과 나>에선 길드원들이 모여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증숏'이 드문드문 모습을 보이는 이 영화는 보존과 기억을 향유하기 위한 인간의 원초적 경향성을 다루고 있다. 더 나아가서 <레디 플레이어 원>에선 모든 것이 데이터로 변모한 세계이므로 보존의 원리는 소멸하고, 미션의 성취에 주력하는 유저들이 모인 현재적 세계를 모사한다. 이것은 이제 메크로를 돌리는 세계로 변해버린 일렌시아의 표면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마지막 6장의 영화 없는 유토피아의 서두에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대표적인 테제인 "예술은 리얼리티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리얼리티"를 가져온다. 그의 유작인 <24프레임>(2017)이 어떤 유동적인 형상이 아닌 부동적 형상, 말 그대로 식물성과 같은 그림이라는 지점에서 어쩌면 가장 유언의 적합한 작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를 영화라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키아로스타미의 말처럼 반영된 현실을 보여주는 이미지란 모두 리얼리티로 인식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제임스 베닝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필자는 유사한 예로 장 끌로드 루소의 작품을 떠올리기도 했다. 지속되는 이미지에서 모종의 개념과 구조를 추출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관객에게 그들의 작품은 어떤 믿음을 요청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개인적 경험이 맴도는 마지막 장은 김신욱 작가의 <네스호의 괴물>을 지극히 물질적인 환상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현존하지 않는 괴물을 사진으로 끌어올리는 작업, 그렇다면 그 안에 무엇이 존재하는 것인가. 여기서 언급되는 물질적 환상이란 사진과 영화, 사실과 허구라는 모호한 경계를 다시금 자각하는 동기가 된다. 우리의 경험과 선이해가 투과하는 문화와 예술, 종교와 지역 산업 등을 통해 물질 안에 담긴 의미 혹은 픽션을 주목하게 되는 건 우리 안에 설정된 반영의 유토피아가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 『식물성의 유혹』은 그 가능성에 대해 끈질기게 분석함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이해방식을 촉구한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 보스토크프레스

식물성의 유혹: 사진 들린 영화

저자 유운성

 

출판사 보스토크프레스

쪽수 224쪽
발행일 2023년 10월 31일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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