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여전히 책을 포기할 수 없는 당신을 위해
[Interview] 여전히 책을 포기할 수 없는 당신을 위해
  • 홍상현
  • 승인 2023.12.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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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동네책방 폴란> 나카무라 코타 감독 인터뷰
「동네책방 폴란」은 코로나 19 사태라는 재난뿐만 아니라 오늘날 ‘책’이라는 문자매체가 직면에 있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C)2022 Polan Film Partners
<동네책방 폴란>은 코로나 19 사태라는 재난뿐만 아니라 오늘날 '책'이라는 문자매체가 직면에 있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 2022 Polan Film Partners

겨울의 한기가 채 가시지 않고 있던 2014년 2월의 어느 목요일. 교회 옆 낡은 건물을 개조해 만든 공연영상원으로 수업을 받으러 다니면서 수도 없이 지나치던 이랑씨어터에 공연을 보러갔다. 연극배우인 대학선배가 “이건 꼭 봐줘야 해!”라고 권하며 다짜고짜 표를 쥐어주는 바람에 사양의 시옷 자도 꺼내지 못했다.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너 이상 있을까 싶다”는 소리에 어렴풋이 대학로에 차고 넘치는 라이브 코미디 쇼는 아닐 거라 예상했을 뿐.

극단 인어의 <변태>.

난방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조한 공기를 느끼며 객석에 앉으니 책장을 표현하는 구조물이 둘러쳐진 가운데 테이블이 놓인 무대가 보인다. 작품의 무대인 도서대여점 '책사랑'을 묘사한 세트. 막이 오르면 본업은 시인이나 생계 때문에 가게를 운영하는 주인공 민효석과 아내 한소영, 그리고 민효석에게 시작을 배우는 동네정육점주 오동탁이 둘러앉을 것이었다. 소극장 공연의 무대답게 심플하면서도 쉽게 지나칠 수 없을 만큼 느낌이 강렬했다. 콘셉트를 소개하는 아래의 글을 미리 읽을 때 말 그대로 '한자 한자 가슴에 날아와 박혔기' 때문일까.

 

장편다큐멘터리영화 데뷔작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나카무라 코타 감독. 그는 양친 모두 문학연구자인 환경에서 책과 벗하며 자랐다. (C)JIFF
장편다큐멘터리영화 데뷔작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나카무라 코타 감독. 그는 양친 모두 문학연구자인 환경에서 책과 벗하며 자랐다. ⓒ JIFF

 

"지식인 민효석과 한소영의 삶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정신 활동의 장소인 '책 사랑'의 내부는 수많은 책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온갖 자본주의적 욕망이 들끓는 외부와 철저하게 고립된 느낌을 준다. 이것은 이중의 의미를 갖는데, 역동적인 공간(혹은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타인들과의 투쟁과 협력의 공간)인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이들만의 '은신처'라는 부정적 의미와 타락한 자본주의적 욕망이 들끓는 외부 공간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들만의 정신의 명징성을 지켜낼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는 긍정적 의미 가 그것이다."

내용도 인용한 글 이상으로 인상적이었다. 운영난에 시달리는 도서대여점 주인으로 담뱃값이나마 벌어보자고 오동탁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민효석. 끝이 보이지 않는 생활고에 지쳐 오동탁에게 남편의 일자리를 부탁하는 아내. 그렇게 육체노동을 하게 되지만 닷새도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온 시인을 짓누른 것은 (권수가 아니라) 플라톤의 『시학』이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든 킬로 당 백 원이 매겨지는 헌책들의 가격이었다. 연극이 초연된 건 2011년, 작가는 인근의 도서대여점이 통닭집으로 바뀌는 것을 보며 '그래, 당연하지. 통닭에 맥주가 잘 되지. 책방이 잘 되겠어'라는 생각과 동시에 '저 도서대여점을 하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인 나카무라 코타 감독의 장편다큐멘터리영화 데뷔작이자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동네책방 폴란>은 <변태> 같은 사회극이 무대에 오르는 21세기의 일사분기를 살아온 청년의 '아니야'라는 반론이요. 책으로 살아가는, 혹은 여전히 책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변론이다.

도쿄 서북쪽 배드 타운에서 자란 나카무라 감독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동네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지만 책방을 넘어선 '문화시설'로 자리매김, 어느 날은 작은 음악회, 또 어느 날은 낭독 공연 등으로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던, 그렇게 세대와 연령을 초월한 이웃들로 붐비며 35년 세월을 함께해온 헌책방을 사랑했다. 그리고 이 공간이 팬데믹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2021년 2월 7일 문을 닫자 깊은 슬픔과 분노를 담은 자신만의 이별가를 영상에 담아냈다.

 

2021년 2월 7일 문을 닫기까지의 35년 동안, 폴란은 지역사회에서 언제나 주민들로 붐비는 어엿한 ‘문화시설’로 자리매김해 왔다. (C)2022 Polan Film Partners
2021년 2월 7일 문을 닫기까지의 35년 동안, 폴란은 지역사회에서 언제나 주민들로 붐비는 어엿한 '문화시설'로 자리매김해 왔다. ⓒ 2022 Polan Film Partners

홍상현

그간 작업해 오신 단편들이 많은 영화제에 초청되셨지만 하나같이 비대면 형식으로 치러졌었는데요. 첫 장편다큐멘터리영화로, 게다가 완전하게 통상 개최되는 전주국제영화제에 오셔서 정말 감회가 깊으실 것 같습니다.

나카무라 코타

국제영화제 자체가 처음이라 무척 긴장했는데, 관계자 분들이 워낙 친절하고 헌신적으로 대응해주셔서 편안하게 즐기고 있습니다.

어제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요나스 메카스의 전기를 다룬 <낙원의 파편>(2022)를 봤는데 관객 분들이 GV에 정말 열심이시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늘 오전에 있었던 <동네책방 폴란> 첫 상영 GV에서도 그랬고요. 일본의 영화제와 무척 다른 분위기입니다. 특히 관객 분들의 질문이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짚어가면서 사고의 기회를 제공해주시니까 너무 기쁘더라고요. 거리 전제가 영화제로 술렁이는 느낌도 좋고, 프로그램 면에서는 마니아부터 영화를 자주 보지 않는 평범한 관객까지 아우를 수 있도록 전문성과 확장성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감동했습니다.

 

홍상현

다음은 “홍상현의 인터뷰”를 통해 뵙는 분들께 항상 드리는 질문인데요. 한국영화, 즐겨보시나요? 좋아하는 작품이나 감독, 배우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나카무라 코타

한국영화요. 상당히 좋아합니다. (웃음) 좋아하는 작품으로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를 첫 번째로 꼽고 싶네요. 다음으로 영국(셰필드대학교) 교환학생 시절 런던영화제에서 본 <벌새>(2018)가 있습니다.

한국영화를 처음 접한 건 릿쿄대학교 신입생 시절 다문화커뮤니케이션 학부에서 아시아영화연구라는 수업을 담당하시던 이향진 선생님 덕분이었습니다. 정말 많은 한국영화를 소개해주셨죠. 그밖에 테루오카 소조 오사카아시아영화제 프로그래머의 강의에서 1960년대 작품을 많이 보았고요. 학부를 졸업하고 교토대학교 대학원(인간ㆍ환경학연구과)에 들어와서는 영화제작 현장 관계자나 연구자를 많이 초청하는 수업의 조교를 맡고 있는데요. 수업에 초빙되어 오셨던 이일하 감독의 <모어>(2021)도 너무 좋았습니다.

 

폴란의 점주 이시이 씨.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라 타이틀 롤대로 도쿄의 서북쪽의 한 배드타운에 자리 잡고 있던 책방, 폴란이다. (C)2022 Polan Film Partners
폴란의 점주 이시이 씨.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라 타이틀 롤대로 도쿄의 서북쪽의 한 배드타운에 자리 잡고 있던 책방, 폴란이다. ⓒ 2022 Polan Film Partners

홍상현

2020년에 리모트 형태로 제작하신 <마지날>도 그렇지만, 세대가 세대이신 만큼 코로나 19가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카무라 코타

코로나 19가 제 삶에 처음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건 1년 예정이던 영국 교환학생 파견을 중단시켜버린 겁니다. 일본으로 돌아와서 몇 주간 자택격리를 했는데요. 그때 자크 리베트의 <아웃 원>(1971)이라는 영화를 보게 됐어요. 러닝타임이 743분이나 되는데 즉흥적으로 전개되는 내용이 많거든요. 영화가 가지고 있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에 무척 많은 영감을 받다보니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예전에 같이 단편작업을 하던 친구들한테 연락을 했습니다. 처음 시도해 본 제작방식은 당시 보편적이던, 캐릭터가 줌 화면에 등장해서 카메라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편집하는 거였는데요. 너무 밋밋하고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궁리해 낸 게 실제로는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인물들을 편집을 이용해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작품이 <마지날>이죠.

말씀처럼 코로나 19는 일단 제작환경의 제약이라는 형태로 등장해서 20대에 문턱에 들어선 우리 또래들의 정서나 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당시의 우리로서는 무작정 언제가 될지 모르는 팬데믹의 끝을 기다리면서 손을 놓고 있기보단 이전과 다른 일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뭔가를 도모하는 게 훨씬 자연스러웠으니까요.

 

홍상현

자, 그럼 <동내책방 폴란>에 대한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영화는 제목처럼 “작가가 사는 동네에 있던 오프라인 서점”이 주인공인 이야기입니다. 가게를 왜 사람처럼 지칭하는 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릴 텐데요. 작가인 감독께서는 이 서점의 '임종'에 대한 예고를 듣고 충동적으로 영화의 제작에 착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이 제작의도에서 진정성을 예감했던 건 감독의 성장기에 사진이나 영화만큼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문자매체, 즉, 책이었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서였어요.

나카무라 코타

그렇습니다. 책을 읽는 걸 너무 좋아해요. 다만, 글을 쓰는 것과 읽는 것은 또 다른데, 저는 후자와 더 친숙했죠. 부모님이 모두 문학연구자라서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 항상 책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영화 이상으로 저와 가까웠을 지도 모르겠네요.

 

배경이 자주 흐려지거나 어두운 곳에서도 최대한 아름다운 컷을 잡아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나카무라 코타 감독은 촬영에 시그마 줌렌즈(Art 18-35mm F1.8 DC HSM)를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 한 컷의 스틸사진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듯 그의 선택은 탁월했다. (C)2022 Polan Film Partners
배경이 자주 흐려지거나 어두운 곳에서도 최대한 아름다운 컷을 잡아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나카무라 코타 감독은 촬영에 시그마 줌렌즈(Art 18-35mm F1.8 DC HSM)를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 한 컷의 스틸사진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듯 그의 선택은 탁월했다. ⓒ 2022 Polan Film Partners

홍상현

영화의 표현에서 텔롭이 중요하고도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그처럼 문자와 친숙한 정서적 배경을 가지고 계셔서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나카무라 코타

촬영을 시작할 당시, 구성을 딱히 생각하지 않고 우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전부 기록했다가 나중에 재미있어 보이는 것들을 추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폴란 관계자들을 인터뷰해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 내용에 근거해 스토리를 미리 짜놓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죠. 영화적인 리듬감을 살려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아울러 생각한 게 영상언어에 초점을 맞춘 스토리텔링에 텔롭을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아시다시피 <동네책방 폴란>은 결국 책에 관한 다큐멘터리이고, 글자와 뗄 라야 뗄 수 없는 관계죠. 따라서 이 작품을 선택하신 분들이라면 텔롭을 주의 깊게 읽어주실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분들께 '영화를 보는' 체험과 더불어 '텍스트를 읽는' 체험을 제공해드리고 싶었다고 할까요.

 

홍상현

한편 나카무라 감독께서는 평소 영상을 '광학의 예술'로 보는 관점을 본인의 작품에 충실히 반영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2019년 작 <잔영>에서부터 이어지는 경향이 그 예인데요. <동네책방 폴란>에서도 라이팅의 활용이 도드라지는 느낌이에요. 특히 좁은 공간에서의 조명이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더군요.

나카무라 코타

말씀처럼 조명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거나 조명 그 자체가 복선의 역할을 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기는 한데, <동네책방 폴란>과 관련해서 이런 취향을 의도적으로 반영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씀드리면 작품의 촬영 자체를 모두 혼자 진행했기 때문에 작은 라이트 하나 밖에 사용할 수 없었고, 카메라를 세팅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인터뷰 장소도 대부분 책장과 책장 사이의,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좁은 공간이 대부분이었고요. 그래서 배경이 자주 흐려지거나 어두운 곳에서도 최대한 아름다운 컷을 잡아낼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가 시그마 줌렌즈(Art 18-35mm F1.8 DC HSM)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홍상현

개인적으로 <동네책방 폴란>이 어떤 사건에 집중하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영화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미학적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승화되는 이유는, 역시 서점이라는 공간에 인격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폐점이라는 과정을 '장례'처럼 디테일하게 따라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기인한 걸로 보이데요.

나카무라 코타

아, GV에서도 같은 부분을 지적해주신 관객이 계셨어요. (웃음)

폴란은 이시다 씨 내외와 점원인 미나미 씨, 이 세 사람이 이루는 균형으로 인해 생명력을 얻는 공간이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게 아니라 각자 서로의 위치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는데,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의 움직임처럼 유기적으로 조화되었던 거죠. 이 조화가 자기장처럼 작용하면서 흩어져있던 이야기들이 모이고 끝내는 폴란조차 '생물' 같은 공간이 되어갔습니다.

예컨대 극중에서 이시다 씨가 가게를 접는 그 순간까지 책장에 책들을 채우는 일을 중단하지 않잖아요. 저는 이 모습을 보고 사람의 세포가 재배열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울러 폴란 자체가 미학적으로 보더라도 무척이나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공간이기 때문에 그 마지막, 다시 말해 '장례식'을 최대한 아름답게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촬영을 시작할 당시부터 했었습니다.

 

「동네책방 폴란」에는 짙은 슬픔이 배어나오는 장면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 폴란의 끝을 다루는 내용이 서사의 중심축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C)2022 Polan Film Partners
<동네책방 폴란>에는 짙은 슬픔이 배어나오는 장면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 폴란의 끝을 다루는 내용이 서사의 중심축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 2022 Polan Film Partners

홍상현

빈번한 롱 테이크와 길고 긴 러닝 타임이 어느새 클리셰로 자리 잡게 된 일본의 장편다큐멘터리영화들을 떠올려 보면 75분 동안 효율적인 스토리텔링을 전개하는 <동네책방 폴란>은 도리어 신선하다는 느낌을 주던데요.

나카무라 코타

러닝 타임을 1시간 15분 정도로 하자는 건 장편을 만들기로 결심했을 당시부터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촬영을 마치고 보니까 70시간 분량을 찍었더라고요. 그리고는 2022년 3월에 있을 피아필름페스티벌 응모를 위해 편집을 하는데 2021년 12월 기준으로 6시간이 나왔습니다.

물론 '폴란의 시간'을 최대한 담아내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도 없지 않았지만, 작품이 좀 더 확장성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컸죠. 또 한 가지 이유는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각각의 컷에 적절한 길이가 존재하는데 이게 어느 수준을 넘어가면 수용자의 집중력을 떨어뜨리기 시작한다고 믿어요. 체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홍상현

보통 '헤어짐'을 그리는 보통의 작품은 결말을 정해놓고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점층 구조로 그려서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동네책방 폴란>은 오프라인 서점 폴란의 '임종' 뒤에 '스노우 드롭(snowdrop)'이라는 새로운 가게를 통한 '전승'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나카무라 코타

미나미 씨가 새 서점을 오픈하신다는 이야기를 인터뷰하다 처음 들었습니다. 무척 놀라운 한편으로 '결국 스토리를 이 방향으로 전개할 수밖에 없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폴란은 코로나 19로 인해 문을 닫은 수많은 가게들 가운데 제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부족해보였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목적(goal)'으로서 미나미 씨의 새 가게를 위치시키면 오히려 폴란이 어떤 존재였는지 좀 더 부각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TV나 신문 등에서 노포의 폐점을 다루는 뉴스는 많았지만 제가 기억하는 한 죄다 '그래서 슬프다'는 내용들이었거든요.

저는 폴란에 관한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소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폴란이 폐점하게 된 데에는 팬데믹으로 정상적인 영업을 할 수 없고, 문을 닫은 자리에 다른 가게가 입점을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건물주 측에서 임대료를 조금도 깎아주지 않았다는 배경도 있었으니까요.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직면해야 했던 사회적 현실이죠. 아울러 폐점이라는 '사건'만을 드라마틱하게 부각시키기보다 그 후의 이야기까지 끈기 있게 다뤄보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고요.

 

빈번한 롱 테이크과 길고 긴 러닝 타임이 어느새 클리셰로 자리 잡고 있는 일본의 장편다큐멘터리들을 생각한다면 75분 동안 효율적인 스토리텔링을 전개하는 「동네책방 폴란」은 도리어 신선하다는 느낌을 준다. (C)2022 Polan Film Partners
빈번한 롱 테이크과 길고 긴 러닝 타임이 어느새 클리셰로 자리 잡고 있는 일본의 장편다큐멘터리들을 생각한다면 75분 동안 효율적인 스토리텔링을 전개하는 <동네책방 폴란>은 도리어 신선하다는 느낌을 준다. ⓒ 2022 Polan Film Partners

홍상현

일부러 슬픈 OST를 삽입하는 등 의도적으로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 엔딩이 오히려 더 기억에 남습니다.

나카무라 코타

음악을 담당한 야마자키 유타는 제 오랜 친구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같이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제가 작품을 만들게 되면서부터는 쭉 음악을 맡고 있죠. 일단 둘의 취향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까닭에 협업하기 편한 친구예요.

<동네책방 폴란>을 제작하면서 합의한 점은 일단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사운드 트랙은 절대로 만들지 말자'였습니다. 그리고서 잡은 방향이 '폴란이라는 공간에 흐르는 시간을 음악으로 표현해보자'는 거였어요. 그래서 일단 두 개의 스코어를 만들어놓고 이걸 반복하는 패턴으로 사운드트랙을 구성했습니다. 엔딩과 관련해서는 아예 처음부터 따로 음악을 삽입하지 않기로 결정했고요.

다만, 혹시 눈치 채셨을지 모르겠는데 서점 문을 열 때 들려오는 방울소리를 삽입했어요. 모든 것들이 완전히 치워진 뒤 텅 비어있는 서점 자리에 방울소리가 살짝 들리게 한 거죠. 엔딩에 와서 <동네책방 폴란>을 통틀어 가장 픽션에 근접한 표현을 등장시킨 겁니다. (웃음)

 

홍상현

역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여지를 남기는 표현이란 다큐멘터리영화에서도 유용하지 않나 싶습니다. (웃음) 영화를 촬영하면서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도 무척 많았을 것 같은데요. 한 가지만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카무라 코타

폴란이 문을 닫은 지 1년 뒤에 추가촬영을 했거든요. 이때 경험이 대단히 특별햇습니다.

이시다 씨한테 연락해서 추가촬영 말씀을 드렸더니 흔쾌히 응해주시면서 '부탁이 하나 있다. 하루만 아르바이트를 해 보지 않겠냐'고 하시는 거예요. 온라인으로 전환해서 운영 중인 폴란에 큰 헌책 거래가 있는데 이걸 제가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카메라 없이. 그렇게 하루 동안 폴란의 모든 업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요. 이게 또 보기와 다르게 엄청난 에너지를 요하는 육체노동이더라고요. (웃음) 이 날의 경험으로 <헌책방 폴란>에서 몸의 움직임에 관한 표현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작가적 관점의 보완 또한 무척 많이 이뤄졌습니다.

 

보통 ‘헤어짐’을 그리는 작품은 결말을 정해놓고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점층 구조로 그려서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경우가 대부분. 하지만 「동네책방 폴란」은 오프라인 서점 폴란의 ‘임종’ 뒤에 ‘스노우 드롭’이라는 새로운 가게를 통한 ‘전승’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C)2022 Polan Film Partners
보통 '헤어짐'을 그리는 작품은 결말을 정해놓고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점층 구조로 그려서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경우가 대부분. 하지만 <동네책방 폴란>은 오프라인 서점 폴란의 '임종' 뒤에 '스노우 드롭'이라는 새로운 가게를 통한 '전승'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 2022 Polan Film Partners

"<헌책방 폴란>은 책방이라는 곳을 삶의 터전이던 사람들이 폐점이라는 결정을 그들 안에서 어떻게 납득해 받아들이고, 이후 어떤 길로 나아가게 되는지에 대해 다룹니다. 여기에는 물론 코로나 19 사태라는 '특수성'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책이라는 활자매체가 오늘날 처해있는 상황이라는 '일반성'도 못지않게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지요.

폴란의 폐점을 맞아 점주인 이시다 씨가 몇 번이나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오히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혹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대해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하지만 여기서 또한 중요한 건 그렇게 폴란이 폐점한 후에도 미나미 씨처럼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크고 작은 헌책방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무쪼록 <동네책방 폴란>이 저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서점은 단지 '거래'가 이루어지는 점포일 뿐만 아니라 삶의 공간, 누군가의 설자리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 인식하고 공감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를 정리하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자 '일단 한국의 서점에 들러 사람들이 그곳에서 주로 어떤 책을 구입하는지 관찰하다 마침 책을 구입하시는 분이 계시면 그 책을 집어 들고 카운터로 가 대금을 지불하는 일련의 행동을 촉발한 계기가 뭐였는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서점은 물론 낡은 영화관처럼 최근 들어 사라져 가는 삶 속의 공간들에 대해 앞으로도 작가적 관심을 기울이고 싶다'는 첨언도 함께.

그래서였을까. 지난 10월 원주 아카데미극장에 철거 관련 기사를 읽는 순간 인터뷰에서 폴란의 마지막 순간을 이야기하다 살짝 격앙된 모습을 보이던 나타무라 감독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언젠가 한국의 헌책방이나 오래된 단관 극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숨을 죽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인터뷰 홍상현 영화평론가, krpopper@ccoart.com]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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