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후배와 재회했다. 인도네시아인 프로듀서의 초대로 참석한 부산국제영화제의 파티에서. 허나 절차가 다소 복잡했는데, 후배가 지석상 노미네이트작으로 초청된 <그녀에게>(2023) 주연배우라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예나지금이나 변함없이 소탈하고 서글서글한 성격 때문에 어림잡아 백 수십 명이 모여 있던 홀에서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일일이 화답하며 스몰토크를 나누느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자리가 파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간신히 이상철 감독 등과 함께 있던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김재화, 재화 맞지? 오랜만이다. 나 기억나?"
"어, 오빠? 상현이 오빠!"
한 학번 후배, 배우 김재화. 몇 번이나 눈길이 마주치는 와중에 혹시나 하면서도 인파에 밀려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단다. 하긴, 초청작은 둘째 치고 그간의 출연작만 40편이 넘는 국가대표 연기파 배우 아닌가. 인사를 나누자마자 2차 장소로 옮겨가는 그녀 일행과 동행했다. 그리고 거의 아침까지 이어진 20년 묵은 이야기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시간을 오가며 수많은 화제가 등장했지만 내내 필자의 머릿속을 메운 것은 군복무 후 복학한 2001년의 <오구>, <시련>, 그리고 2003년 <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 등의 작품에서 감탄하며 보았던 그녀의 연기였다.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동기들 중에서도 단연 발군이라 할 만했던.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잊혀 지지 않는 것은 그런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칭찬을 듣던 그녀가 단 한 번도 으쓱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흔한 겸손의 제스추어나 자신감의 결여가 아니었다. 매번 연습을 시작하면서 '막공(마지막 공연)' 무대에 오르는 순간 때까지 '연기를 그만둬야 할까'라는 고뇌를 거듭했다는 고백이 돌아왔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당연한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연기란 단순히 흉내나 자기현시의 동작이 아니라 상상의 자극에 반응하는 작업, 상상하기 힘든 고통이 수반되는 창작의 과정이다.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다른 배역을 맡아 해석하고 행동, 표정, 행위 전체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 내기 위한. 이 모든 일을 해내는데 재능만큼 절실한 것이 용기다. 작품을 끝내고 난 뒤, 때로는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마저 경험하며 연기한 인물을 분리해 내야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게 해 주는 에너지.
일본영화 어드바이저로 치른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폐막작이며 공교롭게도 부산국제영화제가 개막하던 10월 4일 개봉한 시미즈 다카시 감독의 신작 <사나: 저주의 아이>의 주연배우 호시 토모코를 만나면서 필자가 새삼 떠올린 것도 ― 서로 무척 다른 스타일이기는 하지만 ― 김재화가 모범을 보여준 '배우의 조건', 용기였다.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에서 담긴 정체불명의 허밍을 들은 방송국관계자가 하나둘 사라지고 인기 아이돌그룹(제너레이션즈)의 멤버들마저 저주에 휘말리자 매니저(하야마 아카리 분)와 형사출신 탐정(마키타 스포츠)이 목소리의 주인공 사나(호시 토모코 분)의 미스터리한 사연을 추적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호시 배우의 데뷔작이다. 문자 그대로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냘픈' 이미지가 오히려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는 그녀는 <사나: 저주의 아이>에서 <링> 시리즈의 사다코에 비길만한 캐릭터를 연기해냈다.
홍상현
데뷔작이 아시아 최대의 장르영화 페스티벌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되셨고, 한국 개봉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호시 토모코
오래전부터 한국을 너무 좋아해서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봤어요. 그렇다 보니 영화제에 초청되어 폐막식 레드카펫 행사에 참여한 것도, 또,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한 것도 너무 기쁩니다. 최대한 많은 관객 분들과 영화를 통해 만나고 싶어요.
홍상현
"홍상현의 인터뷰"를 통해 뵙는 분들께 늘 드리는 질문인데요. 즐겨 보시는 한국드라마ㆍ영화나 좋아하시는 감독ㆍ배우가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호시 토모코
공유 배우가 주연한 드라마 <도깨비>가 지금껏 접한 한국 콘텐츠 중에 제일 기억에 남아요. 덕분에 상대 캐릭터인 지은탁을 연기한 김고은 배우도 좋아하게 되었고요. OST와 캐스팅, 훌륭한 연기와 연출 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최고의 작품이었습니다.
홍상현
잡지모델 등으로 활약하시다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셨는데요. 연기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호시 토모코
좀 뻔한 대답이라고 느끼실지도 모르겠는데(웃음), 나 아닌 누군가가 될 수 있다는 거요.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잖아요. 예컨대 다른 시대에 살던 사람을 연기할 수도 있고, 일상생활에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연기를 통해 접할 수 있다는 데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홍상현
그렇죠. <사나: 저주의 아이>에서도 현실에서는 아예 존재할 수 없는 캐릭터를 연기하셨으니까. (웃음) 그런데, 이 작품이 호러영화잖아요. 개인적으로 그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호시 토모코
저도 꼭 호러영화만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웃음) 장르영화라는 게 워낙 종류가 다양하니까요. 판타지와 코미디도 즐겨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여러 가지 장르영화 중에 일상과의 간극이 가장 좁은 게 호러영화 아닐까 싶어요. 사건 자체도 실제로 일어날 법한 것들이 많고, 그러니까 영화관을 나가 집에 돌아가서도 계속 떠오르죠. 다 본 뒤에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을 가장 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장르가 호러영화 아닐까 싶습니다.
홍상현
그럼 이제부터 작품에 대해 좀 더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할까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어떠셨나요.
호시 토모코
호러영화 팬으로 비교적 많은 작품들을 봐온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진짜 완전히 새롭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일종의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는데, 극중에 등장하는 제네레이션즈도 실재 존재하는 아이돌그룹인 데다 멤버분들도 그냥 본인 역으로 출연하시거든요. 여기에 호러적인 요소와 음악이 조화된다는 것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홍상현
이번에 연기하신 사나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가요.
호시 토모코
오디션에 응시했을 당시 사나라는 캐릭터의 특징과 성장 과정이 적어있는 자료를 받아보고 느낀 건데요. 엄청난 외로움과 슬픔 속에 태어난, 정말 불쌍한 괴물이구나 싶었어요. 자료의 내용이 영화에서 전부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생각할수록 눈물이 날 거 같아요. 지금 제 앞에 있으면 한번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다만, 관객분들께서는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탐정과 함께 풀어나가는 제네레이션즈의 매니저, 린 쪽에 더 감정이입이 되시지 않을까 합니다.
홍상현
연기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호시 토모코
시나리오를 읽는데 절대 상상만으로 연기하면 안 되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실제로 사람을 해쳤던 미성년 범죄자가 등장하는 논픽션소설이나 그밖에 시미즈 감독이 추천해주신 책들을 모두 읽고, 제가 머릿속에 그리는 사나의 캐릭터와 어떤 점이 일치하는지 일일이 메모했어요. 그리고는 따로 "사나 노트"한 권을 마련해서 모든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정리했죠. 그렇게 제 안에 사나를 만들어갔습니다.
홍상현
많은 배우들과 같이 연기를 해 보는 건 처음이셨을 텐데, 힘드시지 않던가요?
호시 토모코
말씀하신 것처럼 처음이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전혀 힘들지 않고 너무 즐거웠습니다. 다른 캐스트 분들과도 친해져서 연기 외에 캐치볼 같은 게임을 하거나 서로의 연기와 관련한 조언도 주고받을 수 있어서 좋았고요.
홍상현
배우의 입장에서 보는 시미즈 타카시 감독은 어떤 연출자인가요.
호시 토모코
제가 영화현장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보니까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나 엄격한 감독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긴장했는데 첫 촬영 날부터 그런 생각이 기우였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늘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캐스트ㆍ 스태프를 미소 짓게 만들어주시는 분이세요. 특히 찍기 어렵거나 무서운 장면을 촬영할 때는 도리어 현장 분위기를 더 부드럽게 해주셔서 편안하게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홍상현
사나에 대한 시미즈 감독의 디렉션 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있으신가요?
호시 토모코
"좀 더 조심스럽게, 좀 더 오버하면서"라고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얼핏 듣기에는 뭔가 상충하는 내용 같지만 결국 '균형을 유지하라'는 의미거든요. 이조차도 제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봐 리허설을 하면서 준비한 연기를 보여드리고 나면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조정해주셨습니다.
홍상현
표정연기가 사나라는 캐릭터의 절반이상을 표현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훌륭했는데요.
호시 토모코
감사합니다. (웃음) 호러나 서스펜스, 혹은 사이코패스가 주인공인 영화들을 보면서 거울 앞에서 다양한 표정을 연습했어요. 이렇게 하면 더 무섭지 않을까? 제 가장 무서운 표정은 뭘까? 뿐만 아니라 몸의 움직임과 관련해서는 촬영장에 함께 계시던 전문적인 안무가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런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홍상현
아무래도 데뷔작인 만큼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도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호시 토모코
클라이맥스에서 사나가 계단을 비스듬히 내려오는 신이 있었는데요. 몸에 묶인 와이어 두 개를 스턴트맨 두 분이 붙들고 계셨어요. 계단 모서리에 다리를 걸치면서 내려가면 거기 맞춰서 와이어 길이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촬영했는데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워서 시간이 걸리고, 그럴수록 저도 더 긴장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도 나무라시는 분하나 없고,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니까 지켜보던 캐스트 여러분이 훌륭했다고 칭찬해주셔서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홍상현
그 외에 뭔가 좀 오싹한 일도 있었다던데요.
호시 토모코
아, 네. (웃음) 처음 제가 등장하는 신을 찍던 날 춤 연습을 하는 신도 같이 촬영했는데 현장에 놔뒀던 동료 연기자의 음성인식 어플리케이션이 혼자 몇 번이나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라는 대답을 반복하는 거예요. 그 일 말고도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면 같이 이상한 소음이 들려오기도 하고. 무슨 심령현상 같은데 첫날부터 이러면 어떡하나 싶어서 걱정을 많이 했죠.
홍상현
영화가 히트할 조짐 아니었을까요? (웃음) 어느새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요.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신가요?
호시 토모코
꾸준하게 노력해서 연기파ㆍ실력파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또, 아무래도 전형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쉬운 외모를 가진 만큼 틀에 얽매지 않고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해 보고 싶네요. 앞서 언급했던 감독님의 재미있는 말씀처럼 (노력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일관되면서도 (연기력을 발휘하는 영역에 있어서는) 변화무쌍한 방향성을 추구하는 연기자로 성장해나가고 싶습니다.
홍상현
배우께서 소개하시는 <사나: 저주의 아이>는 어떤 영화인가요.
호시 토모코
호러와 팝음악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그래서 눈을 감아도 무섭고 귀를 막아도 무서운, 한 마디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공포를 선보이는 호러영화입니다. 그렇다고 피해가지는 마시고요. (웃음) 조금만 용기를 내셔서 보다 많은 분들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호러영화 팬이시면 두말할 나위 없이 제대로 즐기실 수 있을 테고, 아니시더라도 다른 재미와 감동의 요소들이 많이 담겨있으니까 함께 봐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웃음)
"한국 관객 여러분께서 저를 기억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마지막으로 직접 소개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일본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호시 토모코라고 하고요. 올해 스물 세 살이에요. 첫 영화 출연이라 무척 설레고 긴장되는데, 앞으로 분발해서 다양한 작품을 통해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호러영화를 좋아하지만 특정 장르를 고집하기보다 많은 작품에 도전하면서 여러분과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습니다."
차분한 음성에 여전히 10대 같은 순수함이 배어나오는 어조. 거기에 묘한 호소력을 더하면서 자연스레 대화의 흐름을 리드해나가던 호시 배우와의 인터뷰를 떠올리며 인스타그램 계정에 접속했다. <스트랜딩(Stranding)>이라는 제목의, 고래를 모티브로 한 단편영화에 출연한다는 소식. 예고편을 찾아보니 해안으로 밀려온 고래를 상징하듯 모래사장에 누워있던 그녀가 서서히 눈을 뜬다.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그녀로 인해 자주 놀라게 될 것이라는 점. 물론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일단 <사나: 저주의 아이>에서부터겠지만.
[인터뷰 홍상현 영화평론가, krpopper@ccoart.com]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