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섬은 남고 비극은 반복된다
[Interview] 섬은 남고 비극은 반복된다
  • 함윤정
  • 승인 2023.10.17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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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더 킹 타이드> 크리스찬 스팍스 감독

장편 데뷔작 <그림자>(2014)로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플래시포워드 부문에 초청되었던 크리스찬 스팍스 감독이 9년 만에 다시 부산을 찾았다. 그의 신작 <더 킹 타이드>(2023)는 외딴섬에 내려진 선물과도 같은 소녀 '아일라'에 관한 영화다. 누구든 소녀의 곁에 다가가기만 해도 상처가 치유되고, 소녀가 바다에 손을 넣으면 엄청난 양의 물고기 떼가 몰려든다. 그런 아일라의 능력 덕에 마을 사람들은 10여 년간 본토와의 교류 없이도 평화롭고 안락한 삶을 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섬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혼란의 한복판에서 아일라는 하루아침에 마법 같은 힘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아일라를 중심으로 결집했던 마을 공동체에 불신과 폭력의 불씨가 번진다.

지난 10월 8일,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크리스찬 스팍스 감독과 그의 세 번째 장편 <더 킹 타이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품이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로 공개된 지 꼬박 12시간 만의 만남이었다. 조금 흐린 부산의 하늘이 고향 뉴펀들랜드의 날씨와 비슷하다며 천진난만한 인사를 건넨 그는 곧장 지난밤 상영에 대한 감회를 펼쳐놓았다. 특유의 낙천적이고도 쾌활한 에너지에는 고향 캐나다 뉴펀들랜드(Newfoundland)에 대한 깊은 애정과 언제나 관객의 즐거움을 1순위에 두는 감독으로서의 철학이 짙게 배어있었다.

 

크리스찬 스팍스 ⓒ 부산국제영화제

함윤정

우선, 로케이션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겠다. 각본에 적합한 장소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 같은데.

크리스찬 스팍스

나는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작은 섬 출신이고, 영화 각본 집필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그래서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이곳과 유사한 환경에서 발생하겠단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로케이션의 경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아주 떨어져있다는 느낌을 주는 섬을 물색했다. 영화의 촬영지는 뉴펀들랜드 레브라도(Labrador)의 '킬스(Keels)'라는 어촌 마을이다. 여름엔 고작 70명 정도의 주민이 거주하고, 그마저도 겨울에는 40명 정도로 주민 수가 줄어드는 곳이다. 화면에 보이는 것처럼 굉장히 아름다운 풍경을 갖고 있으면서도, 예스럽고 고풍스러운 미학이 돋보이는 섬이라 촬영지로 정했다.

함윤정

이토록 천혜의 환경에서 화재 장면을 찍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촬영 과정은 어땠나.

크리스찬 스팍스

많은 장면이 실제로 촬영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가짜 장식으로 구현된 장면이 많다. 영화에 등장하는 병원 또한 실제로는 마을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주차장에 세트를 만들어 세운 것이다. 그마저도 앞면만 만들었기 때문에 건물 뒤로 돌아가 보면 실제 방이나 가구 등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타는 집 또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안전하게 촬영했다.

 

ⓒ 부산국제영화제

함윤정

데뷔작 <그림자>의 엔딩에서 주인공 소년은 홀로 남아 자신의 심연과 마주한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으나, <더 킹 타이드>에서도 혼자가 된 소녀를 비추며 영화가 끝난다. 이번 영화의 주인공 '아일라'의 정체성은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란 장소의 특수성과 맞닿아 있는데, 이 점에서 "And so the island remains."란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해당 대사가 반복될 때마다 매우 시적인 정취가 느껴졌는데, 캐나다에 있는 시구를 차용한 것인가.

크리스찬 스팍스

그 대사는 시나리오 작가가 직접 쓴 구절이다. 사실 우리는 그것이 일종의 종교적 낭송처럼 들리길 원했다. 구체적으로는 이 대사를 외우는 마을 사람들이 마치 종교적 공동체처럼 보이길 바랐던 것이다. 영화를 보면 마을 사람들이 아일라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주지 않나. 그만큼 그들은 아일라와 공동체를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결국 모두가 자신의 이익에 위협이 가해질 때 언제라도 아일라를 이용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다. 결국 그들의 탐욕과 이기심이 남김없이 드러나는데, 엔딩에서 혼자 남은 소녀의 모습을 통해 마을 사람 모두가 받아 마땅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함윤정

<그림자> 때와 달리 <더 킹 타이드>에서는 카메라 무빙이 굉장히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때로는 횡적인 움직임으로 장면의 정보를 확장하고, 때로는 공간으로 깊이 들어가 특정 인물에 시선을 집중시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드물게 등장하는 고정숏, 그중에서도 부감숏이 더욱 강렬한 이미지로 전해졌다.

크리스찬 스팍스

<그림자>와 <더 킹 타이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제작비의 규모'다. 데뷔작의 제작비는 약 20만 달러였는데, 이번 작품의 제작비는 약 900만 달러에 달했다. <그림자>에서 고정숏을 썼던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에는 카메라를 움직일 수 없는 예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굉장히 넉넉한 제작비가 주어졌지 않나. 그래서 카메라를 많이 움직일 수 있었다.

<더 킹 타이드>처럼 상업적 임팩트를 가진 스릴러를 만들 때,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관객의 마음을 밀고 당기는 효과를 매우 풍부하게 활용해야 한다. 그만큼 모든 카메라의 움직임은 특정한 목적을 갖는다. 카메라의 속도를 빠르게 할수록 플롯이 긴박하게 진행되며 불안과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고, 카메라가 느리게 움직이면 비교적 정서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는 점을 활용했다. 만약 모든 장면에서 카메라가 멈춰있거나 움직인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으나, 두 기법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다양한 효과를 구현할 수 있었다. 특히 언급된 부감숏은 관객들로 하여금 장면에 빨려가는 듯한 느낌을 주고, 아주 깊은 울림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사용했다.

함윤정

엔딩에서 홀로 남은 아일라의 모습이 매우 다양한 구도로 비춰진다. 마지막 장면을 구성하며 어떤 생각을 했나.

크리스찬 스팍스

영화를 만들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게 바로 엔딩이었다. 모두가 이에 놀라고 또 충격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관객이 이때의 끔찍한 광경을 풀샷으로 한번에 파악하기보다도, 아주 느리고 점진적으로 깨달아가길 바랐다. 아일라의 시야 자체가 좁은 방에서 시작해 점점 넓은 곳으로 넓혀지지 않나. 관객 또한 그 쪼개진 시선을 따라가며 숨을 멈추고, 커져만가는 공포를 느꼈으면 했다. 마지막 숏의 후경에 보이는 두 척의 배는 본토에서 온 것인데, 이를 보며 관객 모두가 각자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을 테다. 그러나 나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마치 운명처럼 이 배가 아일라를 어디론가 데려가겠지만, 결국 아일라의 이야기는 섬보다 조금 더 큰 공간으로 옮겨질 뿐, 같은 비극은 반복되리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함윤정

상황의 국면이 전환될 때마다 화면보다 소리를 앞세우는 연출이 돋보인다. 때로는 이미지가 제시되는 순서와 무관하게 화면보다 소리의 효과가 더 큰 힘을 갖는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벌' 소리가 등장해 장면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이끄는데. 사운드 디자인에 상당한 공을 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찬 스팍스

'벌'은 서사의 측면에서 굉장히 의도적이고도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지잉거리는 벌 소리는 할머니 캐릭터의 치매를 상징하지만, 더 깊은 관점에서 양면성을 갖고있는 존재의 모티브로 사용되기도 했다. 실제로 벌은 달콤한 꿀을 생산하지만, 잘못 건드리면 아주 무서운 존재가 되니까. 이 영화의 엔딩은 굉장히 충격적이지만, 이를 미리 예감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영화 초반에 숨겨놓았다. 아일라의 손이 온통 벌로 덮였다가 일순간 그 벌들이 모조리 죽어있는 장면이 있다. 이를 엔딩에서 죽음을 맞이한 마을 주민들에 대한 전조로 볼 수 있을 테다. 일종의 티저처럼, 나중에 만나게 될 이미지에 대한 암시인 거지. 관객들은 무의식 속에서 이러한 엔딩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난 영화의 사운드야말로 매우 강력한 스토리텔링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한번 주어진 사운드는 관객의 무의식 안에 숨어있다가, 나중에 그와 관계된 단서가 나올 때 다른 무언가로 관객을 이끈다.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걸 봤을 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무언가가 일어나겠다는 예감을 갖게 되는 것처럼. 그래서 영화를 만들며 사운드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활용했다.

 

크리스찬 스팍스 ⓒ 부산국제영화제

함윤정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두 번째 장편 <해머>(2019)를 접할 경로가 없다. 따라서 <그림자>와 <더 킹 타이드>만으로 당신의 영화 세계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데, 두 작품 모두에서 '파도'와 '그림자'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오프닝에서는 늘 거센 '파도'의 이미지가 제시되지만, 결국 인물을 집어삼키는 건 외부의 파도가 아니라 그들 안의 어두운 면, 즉 '그림자'다. 스스로 이러한 모티브에 끌리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

크리스찬 스팍스

훌륭한 관찰이다. 확실히 내가 인간의 어두운 면에 끌리는 건 사실이다. 내가 왜 이런지 심리분석가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기하다. 왜냐하면 실제 내 성격은 꽤 밝고 태평한 축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추측한다면, 내 고향 '뉴펀들랜드'의 특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의 자연환경은 아주 황량하고 척박하다. 그래서인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 역시 '마녀'라든지, 아주 '고딕'한 것들이 많다. 인간의 삶에 관한, 굉장히 어두운 우화나 비유가 아주 만연해있다고나 할까.

그 중 '캠프파이어'라는 모티브에 대한 이끌림이 강한 편이기도 한데, 어쨌든 나도 몰래 이처럼 어두운 뉴펀들랜드의 이야기 전통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인간에 대한 불신이랄까. 때로는 타인에게 해가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욕망에 굴복하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알게 된 게 아닐까.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정작 살아가며 내가 만난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때로는 어두운 측면을 보여주었으면 싶은 정도다. 그들이 이런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려줘서 오히려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함윤정

척박한 환경이 만든 어두운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협업할 수 있었다는 점이 스릴러 영화 감독이 되기 위해 좋은 조건이 된 것 같다. 네 번째 장편에 관한 소식을 들었는데, 이번에도 스릴러물인가.

크리스찬 스팍스

네 번째 장편은 제작이 이미 마무리된 상태다. 내 고향의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한, <Sweetland>라는 영화다. 이번 작품은 '뉴펀들랜드'의 현재 모습을 담은 드라마이자 판타지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인데, 현재 캐나다 정부에서는 뉴펀들랜드의 마을을 유령 마을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도회지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곳까지 전기나 수도를 공급하기에 너무나 큰 비용이 들다보니, 어업이 쇠퇴해 먹고살 길이 없어진 주민들에게 약 10만 달러의 지원금을 주면서 그들을 이주시키는 거다. <Sweetland>는 바로 이와 같은 지역의 실제 현실에서 출발한다. 영화에는 주인공으로 모두가 떠나버린 마을에 홀로 남아 이곳을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노인이 등장하는데, 그는 자신의 죽음을 가장한 후 일 년여의 시간을 혼자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점점 미쳐가면서도, 자신의 자아와 삶의 목적을 주장한다. 이 작품을 통해 부산을 다시 찾았으면 좋겠다.

[인터뷰 함윤정 영화평론가, badasal2@ccoart.com]

함윤정
함윤정
부산 가덕도에서 생활하며 영화와 바다에 대해 생각하고, 극장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운영하는 꿈을 꾼다. 미학을 공부하러 간 대학에서 영화를 찍은 후로 좋은 관객이 되면 나은 삶을 살게 되리란 이상한 믿음을 갖게 됐다. ‘좋은 관객’이란 무엇일까? 나의 글과 말은 늘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좋은 관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영화를 더 아끼게 되고, 지난밤 꿈에서 본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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