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영화로 세계 속으로] 프랑스: 파리 외곽으로 카메라를 돌려라!
[박정수의 영화로 세계 속으로] 프랑스: 파리 외곽으로 카메라를 돌려라!
  • 박정수
  • 승인 2023.10.2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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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프랑스 리얼리스트"

흔히 사람들은 프랑스 영화가 '전위적'이고 '지적'이며 '사색적'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20세기 최고의 영화 운동이라 할 수 있는 '누벨바그'가 프랑스에서 싹텄기 때문이다. 누벨바그를 이끈 개척자들은 기존 영화의 문법을 전복하거나(끌로드 샤브롤, 장 뤽 고다르), 공적이고 특별하던 영화를 사적이고도 소박하게 다뤘으며(에릭 로메르, 아녜스 바르다, 프랑수아 트뤼포), 단선적인 구성을 복잡하게 뒤집거나 비틀어 보았고(자크 리베트, 알랭 레네), 극단적인 리얼리즘(모리스 피알라, 장 외스타슈)을 추구하는 등 영화로 해볼 수 있는, 그야말로 모든 것들을 실험했다. 뿐만 아니라 음악의 추상성을 빌려오거나, 원전이나 각본에 종속되지 않는 고유한 영상화의 시도, 연극과 비교하며 영화의 본질을 모색하는 등 영화의 '순수함'이 과연 무엇인지를 탐구하였다. 이처럼 프랑스 영화가 여전히 실험적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누벨바그의 유산이 오늘날 프랑스 영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브루노 뒤몽 <잔 다르크>(2019)

그러나 누벨바그로만 통칭될 수 없는 빼어난 성취가 프랑스 영화 다른 한 구석에 내재해있다. 바로 '사회적인 영화'이다. 누벨바그 몇몇 기수들이 순수 영화를 지향하는 나머지 현실과의 끈을 놓아버렸다면, 이후 세대의 몇몇 프랑스 시네아스트들은 현실과의 다리를 재건하다 못해, 본인의 영화가 현실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진실을 담아냈다.

누벨바그 및 포스트 누벨바그(좁게는 필립 가렐, 샹탈 아커만이 속하고, 넓게는 장 외스타슈, 모리스 피알라도 포함한다)가 저문 20세기 후반의 프랑스에선 '신극단주의'가 태동한다. 영화 운동이라 하기에 신극단주의는 공통된 도그마를 설정하지 않았고, 서로 간 교류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프랑스 영화에서 발견되는 일관된 특징이 있기에, 이를 설명하고자 탄생한 개념이다. 신극단주의로 묶이는 감독으로는 '프랑수아 오종', '가스파 노에', '클레어 드니', '브루노 뒤몽' 등이 있다. '극단'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처럼 이들은 성의 추잡하고도 사악한 민낯을 노골적으로 까발렸으며,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연출을 모색했다.

이들 중 드니와 뒤몽의 영화를 신극단주의로만 읽어낸다면, 그들의 또 다른 특징을 외면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일단 이 둘의 영화는 아주 건조하고 객관적이다. 물론 최근 드니의 <하이 라이프>(2018), 뒤몽의 <잔다르크 2부작>(2017, 2019), <프랑스>(2021) 등의 작품은 리얼리즘과 거리가 멀지만, 201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들은 리얼리즘을 우직하게 밀고나갔다. 그런데 이들이 20세기의 선배들이 일궈놓은 리얼리즘을 안일하게 반복했더라면 국제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리얼리즘의 특징 중 하나는 프랑스 영화의 가장 흔한 배경으로 사용되는 '파리'를 벗어나서 '외곽 지역'의 진실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물론 프랑스 변두리는 로메르의 작품에서 '휴가지'로 간간히 등장하곤 했지만, 이들의 경우 '거쳐 가는 공간'이 아닌 '삶의 터전으로서 주변부'를 깊게 탐구했다는 점이 차이다. 드니는 프랑스 '식민지'나 거기서 유입된 '흑인'들의 삶, 뒤몽은 플란데런 등 '북부 프랑스'로 카메라를 돌렸다.

 

ⓒ 클레르 드니 <백인의 것>(2009)

뒤몽은 고향이기도 한 북부 프랑스를 초기부터 최근 <슬랙베이>(2016), <릴 퀸퀸 시리즈>(2014, 2018)까지 비추었는데, 그가 촬영한 북부 프랑스는 아주 건조하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뒤몽은 프랑스 자연주의를 선도한 '로베르 브레송'의 적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매번 해변이나 습기로 가득 찬 숲을 포착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가 메마른 이유는, '동물로서 바짝 마른 인간의 본성' 위에 '인간다운 촉촉함'이 덧입혀지지 않은 날것의 초상을 이어내기 때문이다. 그는 백인이 선전하는 문명화된 서구의 이성적인 풍경이 아니라, '식인'이 발생하고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유럽의 참혹한 민낯을 까발린다. 계몽의 성전으로서 '파리', 거룩한 희생과 구원·기적으로 반짝거리는 '기독교'의 베일을 한 꺼풀 걷어낸 서구의 실체란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에너지만 바글거린다.

드니는 뒤몽보다 한 발짝 더 멀리 떠난 시네아스트다. 프랑스령 아프리카에서 유년기를 보낸 드니는 프랑스 식민통치를 겪었던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로 향하거나, 프랑스령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흑인들의 '게토'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에서 드니는 '만인에게 동등하지 않은 자유'를 해부한다. 백인은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다. <백인의 것>(2009)에서 아프리카의 선주민들이 자유와 독립을 위해 사활을 걸고 내전을 벌이는 와중에, 백인은 유유자적 사욕을 추구한다. 심지어 백인의 이익을 위해서 흑인은 주권을 포기하고 봉사를 자처해야 한다. 흑인은 프랑스령 아프리카에서도, 이주한 프랑스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백인에게 유리한 경제 체제 속에서 아첨과 굴종을 포기하면 생존이 위태로워지지기에(<35 럼 샷>(2008)), 백인의 눈요기를 위한 '투계'가 되길 기꺼이 승낙한다.(<죽음은 두렵지 않다>(1990)) 즉 뒤몽과 드니는 '일반적인 프랑스'의 이미지를 의심한다. 자유·평등·박애를 말하는 프랑스의 실체엔 복종과 차별과 박해로 가득하다.

 

ⓒ 스테판 브리제 <앳 워>(2018)

물론, 1990~200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프랑스 사회파 감독의 이름은 드니와 뒤몽에서 멈추지 않는다. <글로리아를 위하여>(2019)로 국내 관객들에게 알려진 '로베르 게디기앙', <아버지의 초상>(2015), <여자의 일생>(2016)으로 유명한 '스테판 브리제'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각자의 고향, 브리제는 '렌'에서, 게디기앙은 '마르세유'에서 대체로 터를 옮기지 않고 '장소특정성'을 반영한 영화를 연출한다. 이런 점에서 드니 및 뒤몽과 흡사하다고 여길 수도 있으나, 이들과 구별되는 특유한 차이가 있다.

대체적으로 뒤몽과 드니의 작품들은 서로가 프리퀄이나 시퀄로서 이어지지 않는 독립적인 형태를 띠는 반면, 브리제와 게디기앙은 거의 모든 작품들이 '느슨한 연작'처럼 이어진다. 물론 브리제와 게디기앙의 작품들 또한 연작이라고 굳이 못 박지 않고, 또 배역의 이름이 다음 작품에 이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배역의 이름은 달라져도, 감독들의 '페르소나'가 맡는 유사한 배역들은 이후 작품에 늘 이어진다. 게디기앙의 경우 '아리안 아스카리드', '제라드 메이란', '장-피에르 다루생' 등이 초기작부터 꾸준히 출연하였고, 최근에는 '아나이스 드무스티에'도 사단에 합류하였다. 브리제의 뮤즈로는 '뱅상 랭동'이 있고, '상드린 키배를랭' 또한 자주 출연하는 편이다. 그리고 배우들이 이전 작품에서 겪은 사건이 이후 작품에 느슨하게 반영된다. 가령 브리제의 <아버지의 초상>에서 인간성을 택한 행동이 다음 작품 <앳 워>(2018)에서 노조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달지, 그 시도가 실패로 귀결되자 이후 작품 <어나더 월드>(2021)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변절자로 등장하는 등 말이다. 게디기앙의 작품 또한 설정은 매번 달라지지만, 이전 작품에 남아있던 특징들이 이후 작품에 느슨하게 반영되며 '시간의 흐름'을 생생히 녹여낸다.

다시 말해 드니와 뒤몽이 '공간'에 더 주목한다면, 게디기앙와 브리제는 '시간'에 더 주목한다는 차이가 있는데, 그 흐름은 살벌하고 냉혹한 '신자유주의'를 오늘날에 불러왔다. 브리제와 게디기앙은 소수 자본가의 무한한 이윤 추구를 비호하는 신자유주의가 노동 계층, 특히 경제적으로 열악한 프랑스 지방의 노동자들에게 입힌 피해를 분석한다. 브리제의 <아버지의 초상>, <앳 워>, <어나더 월드>에선 '구조 조정'이 일관되게 발생하고, 게디기앙의 경우 자본가의 이윤 추구를 위해서 발명된 '기술'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상황을 비판한다. 즉 두 사람 모두 다 지방의 '실업'을 주된 화두로 삼는다. 그래서 이들은 영국의 대표적인 사회파 감독인 '켄 로치'와 유사하다는 평이 따라다니며, 그 점이 형이상학적인 접근을 하는 뒤몽 및 드니와의 또 다른 차이다. 경제가 인간을 소외하는 참혹한 물결, 그 와중에 브리제는 '연대'를, 게디기앙은 '사랑'을 부각한다. 자신의 고향에서 치열하게 인간다움을 물색하는 이들은 때때로 '상업적인 드라마'나 '역사극' 등의 장르로 궤도를 이탈하나, 이런 와중에도 게디기앙은 치열하게 타자와 연대하는 메시지를 녹여내고, 브리제는 렌을 떠나지 않으며 인간 및 공간의 진실을 포기하지 않는다.

 

ⓒ 니콜라 필리베르 <파리 아다망에서 만난 사람들>(2023)

주변부를 기록하는 프랑스 리얼리즘은 '픽션'에서만 시도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에서도 소외된 외곽과 타자의 진실을 밝히려는 몸부림이 활발한데, 이를 '니콜라 필리베르'가 선도한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그는 낙후되어가는 프랑스 지방의 학교(<마지막 수업>(2002)), 소외된 장애인들의 삶(<들리지 않는 땅>(1992), <작은 것들>(1997)), 동물(<네네트>(2010)) 등을 향해 카메라를 돌린다. 그래서 우린 필리베르의 영화에서 타자들과의 만남을 기대한다. 하지만 타자들이 처음부터 제 모습을 순수하게 드러내진 못한다. 필리베르는 비장애인이나 보편자들의 압력으로 인해서, 타자가 불순하게 변형되거나 억눌리게 되는 환경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주인공이어야 마땅한 타자들이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는 반면, 사회가 일반적이고 정상적이라 규정한 것들이 대신 프레임에 들어찬다.

필리베르는 단순히 '다른 대상'들만 보여주지 않는다. 이 사회가 얼마나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지 간접적으로 연출에 반영한다. 동시에 필리베르는 치열하게 타자들을 이어낸다. 지금껏 타자들이 특유함을 포기하거나 지우고 정상성에 순응했다면, 이제는 보편자들이 '관객'이나 '수용자'가 되어 타자를 이해하고 따라하게 만들어본다. 그렇게 필리베르의 영화는 소외된 다름을 보존하면서도 이를 보편에 편입시켜, 일반성의 범위를 드넓게 확장한다.

 

ⓒ 알랭 기로디 <호수의 이방인>(2013)
ⓒ 레쥬 리 <레미제라블>(2019)

위와 같은 프랑스 영화의 성취는 오늘날의 큰 영향을 끼치며 발전되어가고 있다. 먼저 프랑스 '백인'들이 흑인이나 이민자를 대상으로 한 영화를 '대신' 연출함을 넘어서, '흑인 및 이민자'들이 직접 '메가폰'을 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레미제라블>(2019)을 연출한 '래드 리', <아테나>(2022)를 연출한 '로맹 가브라스' 등이 이 수혜자다. 특히 래드 리는 <레미제라블>에서 펼쳐지는 사건을 본인이 직접 겪은 일화로 유명하다. 백인 및 부르주아에겐 온화하지만, 정작 소수자 및 약자에겐 폭력적인 공권력을 오열하고 절규하는 듯한 연출로 증언한다. 설령 본인이 주체가 아니라 한들, '파니 리에타르'와 '제레미 트로윌' 콤비가 연출한 <가가린>(2020)처럼, 그 현장에 깊이 녹아든 이후 연출하는 '참여적 성격'을 발전시켜 나간다.

나아가 필리베르의 영향은 <온 콜>(2016)이나 <우리>(2020)를 연출한 다큐멘터리 감독 '앨리스 디옵'에게 이어졌다. 디옵 역시 하얗고 부유한 것들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노동자와 이민자들을 '우리'로서 연결한다. 또 프랑스 외곽을 조명하는 리얼리즘은 <걸후드>(2014)에서의 '셀린 시아마', <호수의 이방인>(2013)과 <스테잉 버티컬>(2016)로 유명한 '알랭 기로디'가 이어가고 있는데, 이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발전된 특징으로는 '섹슈얼리티의 타자'들을 함께 밝혀낸다는 점이다.

디옵은 <생토메르>(2022)에서 유색인종 및 이민자 여성들을 발견하고, 시아마는 흑인 여성과 레즈비언, 기로디는 게이를 편입시킨다. 또 이들의 영화는 '기존 이론'이나 '통념'에 들어맞지 않는 분방함이 일관되게 나타난다. 디옵의 <생토메르>에서 흑인 및 이민자 여성들이 보여주는 반응은 예측불허한데, 그 이유는 백인 여성의 시점으로 집필한 보편적인 페미니즘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기로디의 작품에서는 성 지향성의 스테레오타입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전유가 매번 반복된다. 즉 오늘날의 프랑스 리얼리스트들은 '직접 말하고', '이론에 종속되지 않은 자유분방한 진실'을 다루며, '다양한 영역의 타자'들을 더 급진적으로 포용한다.

프랑스의 리얼리스트들은 '외곽의 진실', '타자들의 진실'을 향해 카메라를 돌린다. 그 시도가 올해, 그리고 내년 우리 곁에 도달할 예정이다. 필리베르의 <파리 아다망에서 만난 사람들>이 개봉 예정이고, 브리제의 <오르-세종>, 게디기앙의 <그리고 파티는 계속된다>, 뒤몽의 <제국> 등이 차례로 공개를 앞두고 있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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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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