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오해에서 출발해 격려하는 입장으로
[Interview] 오해에서 출발해 격려하는 입장으로
  • 함윤정
  • 승인 2023.09.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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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 정한석 프로그래머

"평론가로서의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이상을 전제하고, 영화를 보며 그 이상을 따라간다. 반면에 프로그래머로서 작품을 보면, 격려를 하는 입장으로 돌아간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에 근접하지만 기능적으로 약간 떨어진다 할지라도, 작품에 줄 수 있는 심정적이고도 제도적인 지원까지 생각하며 작품을 볼 수밖에 없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선정을 맡고 있는 정한석 프로그래머는 평론가와 프로그래머로서 느낀 상이한 지점을 언급했다. 좋은 평론가가 곧 좋은 프로그래머가 될 것이라 막연히 추측한 때도 있었으나, 그런 등식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지난 몇 년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결론이다. 그에 따르면 '좋은 프로그래머'에게 요구되는 역량은 다음과 같다. 평론가로서의 좋은 안목, 기획자로서의 기획력, 외교관이 갖는 일종의 친화력, 상인의 셈법과 언어 그리고 정책가의 판단력까지. 구체적으로는 좋은 작품을 선정하고, 이를 소개하는 무대를 꾸밀 뿐 아니라, 해당 작품과 관객이 보다 잘 만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면서도, 작품을 조력하는 제도적 과정 속에서 효율과 효과를 판단하는 능력 전반이 필요하단 의미다. 그의 말처럼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일이란 참으로 '잡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그러니 이 모든 잡스러운 일을 얼마나 잘 조율하느냐는 것이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의 관건일 될지도 모르겠다.

한편, 정한석 프로그래머와의 대화에서 해당 역량 너머에 있는 어떤 태도의 중요성을 감지할 수 있었는데, 이 태도는 한 영화에 관한 '오해'를 남다른 차원으로 도약시키는 그만의 '추론'에서 시작된다. 그에게 오해란 문자대로 그릇된 해석에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출발한 추론의 과정은 옳고 그름의 차원을 넘어, 차라리 한 편의 영화를 더 섬세하게 감각하기 위해 거칠 수밖에 없는 만남의 경로에 가깝다. 그렇게 작품에 성큼 다가가 무엇보다 이를 격려하는 입장에 서는 작업. 그가 해마다 보여준 프로그래머로서의 역량이 이토록 따뜻한 포용의 태도 위에 비로소 가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18일, 영화제 개막을 보름가량 앞둔 시점에 정한석 프로그래머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부산국제영화제 정한석 프로그래머 ⓒ 사진=함윤정 영화평론가

함윤정

올해 선정된 한국영화의 전반적 특징과 주요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

정한석 프로그래머

올해 특징에 대해서는 '도발적인 영화'와 '주제나 소재적으로 완숙한 작품들'이 많은 편이라 요약할 수 있겠다. 물론 이는 선정한 한국영화 중 메인 스트림의 상업 영화를 제외하고 비전이나 뉴 커런츠, 파노라마의 일부 작품을 전제로 한 이야기다.

올해의 경향에 관한 질문을 자주 듣는데, 나는 프로그래머로서 '경향'보다 '지향'을 중요시한다. 내 지향은 간단하다. 내가 '이 작품의 독창성에 흥미롭게 반응하고 있는지'가 제일 중요하다. 모든 응모 과정이 그렇지만, 일정 후반부에 많은 작품이 밀려 들어온다. 그럴 때는 솔직히 말해 심신이 굉장히 피로할 때라, 내가 정말 좋게 느낀 것 외에는 크게 관심을 못 갖는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한해 다급하고 피곤한 순간에도 흥미를 자극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재미를 느끼게 하는, 더불어 끝까지 관심을 유지하게 만드는 작품이 있다. 그게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며 선정을 하고 있다.

함윤정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섹션에는 매년 신진 감독들의 작품이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다. 담당 프로그래머로서 출품작들을 일별하며 고민한 지점이 있나.

정학석 프로그래머

우선, 올해는 다른 해보다 많은 작품이 출품되었다. 이 작품들을 보며 한 가지 우려랄까, 혹은 변화를 감지하게 됐다. 바로 '웹툰과 드라마 시리즈물의 영향력'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의 신인 감독들 혹은 완벽한 상업 영화를 제외한 독립영화 감독들 사이에서 웹툰과 드라마 시리즈의 영향력이라는 것이 작품의 형식을 결정하는 데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느꼈다. 전에도 이 부분을 인식하지 못한 건 아니나, 올해 획기적일 정도로 전세가 바꼈다고 해야 하나. 문제라 한다면 나는 얼마간 20세기적 전통 안에서 영화를 봤던 사람이고, 그 부분에서 나도 몰래 영화의 이상치를 놓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출품된 작품 중 이러한 기준에서 그다지 좋은 걸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 영화의 배우를 캐스팅한다고 생각해보자. 기본적으로 내가 감독이고 당신이 배우라면, 당신에게서 느껴지는 바를 통해 내가 선택을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웹툰의 영향을 받았다고 느낀 영화의 경우, 앞서 말한 경로가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웹툰의 인물 그리고 그 인물에게서 느꼈던 느낌을 기반으로 해 사람을 만난 후, 그 사람을 해당 기반에 이입시킨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배우가 등장인물로서 연기를 하고 있는데도, 뭔가 계속 괴리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인물 자체가 만화적이라거나, 애니메이션 같다거나 하는 문제와는 또 다른 층위의 이야기다.

드라마 시리즈의 영향에 관한 경우,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시리즈는 짧으면 회차 당 약 40분으로 8부작에서 16부작 등 다양하지 않은가. 그 드라마를 만들 때는 소(小)정점들, 그러니까 작은 클라이맥스들이 분명 있어야 하고, 전체적으로 긴 시간 동안 이를 어떻게 가져가며 리듬을 맞추느냐의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일부 작품의 창작자들이 영화를 만들며 열 시간짜리 드라마의 리듬을 두 시간에 맞춰 넣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기본 만듦새에 속하는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를 잘 못 잡는다든지, 이제 막 10부작 드라마의 도입부처럼 보인다든지 하는 작품들이 꽤 많았다.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이것이 미학적 기준이나 하나의 흐름이 된다면, 나는 몇 년 뒤에 물러나야 되는 건가." 어떤 우열이나 옳고 그름의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마치 세기마다 예술의 사조가 달라졌듯 해당 기반의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면, 이를 인정하고 내가 좋았던 어떤 세대와 시대에 대해 말하고 살아도 되겠구나 생각을 한 거다. 이제는 없는 로마 유적지에 대해 평생 연구하며 사는 사람도 있잖나. 그렇게 될지, 아닐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연출자들이 현재 주변의 영상적 환경으로부터 어떤 세밀한 영향력을 받고 있는 부분이 그들의 창작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게 예년에 비해 가장 크게 느낀 우려이자 변화라 말하고 싶다. 물론 출품된 작품이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는 어쩌면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의 감각보다, 아마 그동안 내가 해온 평론가로서의 감각이 작동한 걸지도 모르겠다.

 

영화 <딜리버리> ⓒ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해야 할 일> ⓒ 부산국제영화제

함윤정

웹툰이나 드라마를 각색한 영화가 아님에도, 그들의 형식적 특성에서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 작품이 많았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해당 기조 속에서도 돋보이는 지점을 보여주어 선정한 작품이 있는지.

정한석 프로그래머

<딜리버리>란 작품이 있다. 이 영화가 드라마 시리즈의 영향력을 얼마나 받았는지 확언할 수는 없으나, 해당 작품이 추구한 가장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가 바로 드라마 자체에 대한 집중력이다. 영화의 스토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 어떤 가난한 달동네에 사는 커플이 있다. 이들은 아이를 원하지 않지만, 어느 날 덜컥 아이가 생겼다. 그리고 꽤나 풍족한 산부인과 부부가 있다. 이 사람들은 아이가 반드시 있어야만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받는데, 아이가 생기질 않는다. 그래서 전자의 커플이 후자의 커플의 산부인과에 낙태를 하러 갔다가, 돈을 받고 아이를 양도하기로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때 드라마를 연결하는 연출가의 자질이 매력적이라, 앞서 전제했던 흐름들 속에서 가장 적합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창작자가 나는 전혀 그런 걸 의식하지 않았다고 얘기하면, 그냥 단지 나의 추론이자 프로그래머로서의 감각이라는 것. 하지만 질문 안에서 내가 느낀 것을 말하자면 이렇다.

<해야 할 일>의 경우, 부산의 조선업 회사 인사팀에 이제 막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이 구조조정을 해야 해서 겪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겪는 고충을 다룬다. 이 작품은 두 시간 동안 드라마의 밀도가 매우 높다. 더불어, 드라마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아이디어가 굉장히 좋은 작품으로 <막걸리가 알려줄거야>가 있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상상할 때 쉽게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극과 극의, 혹은 산발되어있는 아이디어들을 갑자기 근접시켜 재미난 무언가로 탄생시키는 재주가 있는 영화다. 막걸리의 보글거리는 기포 소리와 모스 신호, 페르시아어, 로또 복권 4등 그리고 우주가 탄생한 비밀을 이렇게 연결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함윤정

위와 다른 측면에서 눈에 띄었던, 구체적으로는 형식적 독창성을 보여준 한국영화가 있다면.

정한석 프로그래머

프로그래머를 하며 사극을 선정할 거라곤 상상을 못 해봤는데, <바얌섬>이라는 작품이 있다. 왜군에 맞서기 위해 거북선을 타고 전쟁에 나가다 표류한 세 남자가 무인도로 들어온다. 등장인물은 그들과 세 명의 여인으로 분하는 한 명의 배우뿐이다. 이렇게 시작된 영화가 해학적이고 익살스럽게 굴러가면서도 점점 더 SF같은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어떤 지점쯤 가면 "<인터스텔라>야?"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 공간 내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구현한다든지, 시간의 흐름을 같은 공간에서 다르게 만들어내는 척한다든지, 제법 뻔뻔하게 사극 SF를 만들어가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화면을 구성하는 능력 또한 세련된 작품이라 느꼈는데, 또 하나 특징적이었던 게, 인물들이 쓰는 '고어(古語)'와 관련해서다. 그들의 옛말이 창작된 것인지 실제로 고증에 의해 쓰인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자막을 가리니 대사를 이해할 수 없더라. 그래서 최초로 있는 일인데, 상영 시 자막을 띄우기로 했다. 나로서는 자막과 말 사이에 있는 간격을 더듬으며 추론하게 되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영화 <바얌섬> ⓒ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한 채> ⓒ 부산국제영화제

<한 채>라는 작품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나의 오해 혹은 추측하는 습성을 전제로 해서 본다면, 한국독립영화들이 많이 다뤘던 소재나 어떤 맥을 담고 있으면서도 아주 멀리 잡아 다르덴 형제의 기풍도 느낄 수 있었던 영화다. 가난한 집안의 늙은 아버지,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그의 딸, 그리고 이 부녀와 전혀 알지 못하는 한 남자가 있다. 세 인물이 청약 때문에 가짜 가족 행세를 하며 영화가 시작된다. 프로그램 노트에도 썼지만, 이 작품의 제일 큰 매력은 늘 어떤 사태가 먼저 오고, 그다음에 그 사태를 설명하는 사실들이 뒤늦게 온다는 점이다. 그 부분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 흔히 두리번거리게 되지 않나. 그럼에도 이 영화는 사기 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줬다. 영화의 끝에 이르렀을 때는 어떤 '신의' 같은 게 생겼다. 장면마다 밀도가 높고 긴장감이 가득한데, 영화 전체적으로는 매우 고요하다는 것이 매력이다.

더해서 <지난 여름>은 시골에 살고 있는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인데, 극의 배경이 되는 마을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이들이 영화에 등장하기도 한다. 실제 인물이 체감하는 삶 안으로 극을 밀어넣으려 하는 방식이 다큐 픽션의 대가들이 하는 일만큼 완벽하고 유려한가 묻는다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이 자기만의 형식을 취하되, 그 형식에서 굉장히 따뜻한 감정의 온도를 전한다고 느꼈다. 그가 해당 장소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거나, 혹은 그러고 싶어 하는 이야기 사이의 관계를 깊게 성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더라.

<소리굴다리> 역시 조금 다른 방식의 다큐 픽션이다. 이 영화는 한쪽으로는 SF를 자처한다. 말하기로는 2046년의 일이란다. 그런데 이게 완전히 엉터리다. 조금은 험악하게 생긴 두 남자가 등장하는데, '아나킨 프로젝트'라는 인디 밴드의 일원이기도 하다. 이처럼 비전문 배우 두 명을 데려다 놓고, 인류의 멸망을 감지한 '구원'이라는 AI로부터 정보를 접수한 이들이 인류를 구원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 방법은 굴다리에 가서 음악적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다. 전혀 동의할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닌가. 그런데 이 영화에 갑자기 빠져들기 시작한 결정적인 대목이 있다. 굴다리에 가서 두 남자가 굿판을 벌이듯 연주를 하는데, 이때 감독이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일련의 이미지들을 굉장히 유희적으로 혹은 장난스럽게 화면 안에 넣기 시작한다. 말로는 이 장면의 흥취를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이때의 고집스러운 유희와 도발이 매력적이다. 이후에 펼쳐지는 엉터리 이야기들을 재미나게 보면서 간간히 받은 느낌도 있다. 가령, 야시장을 보여주는 숏에서 이 연출자에게 숏을 포착해내는, 본능적인 맹수의 기질이 있다고 느꼈다. 이 모든 부분이 전체적인 작품을 어떤 가능성 있는 미완으로 만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작품의 만듦새가 모든 이에게 전적인 공감을 얻을 만한 성취의 단계는 아닐지라도, 도발하는 매력 자체만으로도 소개할 이유와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 여름날의 거짓말> ⓒ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부모 바보> ⓒ 부산국제영화제

함윤정

아시아 신인 감독의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장편 경쟁 부문인 '뉴 커런츠'에 선정된 작품은 뛰어난 완성도와 독창성으로 해마다 화제가 된다. 총 열 편의 선정작 중 두 편의 한국영화 <그 여름날의 거짓말>과 <부모 바보>에 관해 소개해 달라.

정한석 프로그래머

사실 두 작품 모두, 앞서 언급한 형식적인 측면에서 강조해 말할 수 있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그 여름날의 거짓말>은 흔히 봐온 성장 영화의 짜임새처럼 흘러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고1 학생들의 연애사와 갈등을 이렇게 다뤄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치열하게 그리는 한편, 영화의 아주 중요한 대목마다 보이는 비밀스러운 미스터리가 돋보인다. 이때 실제로 내가 보는 것이, 영화가 보여준 것 그 자체가, 모두 사실인가 싶어진다. 내가 보는 것과 영화가 보여주는 것, 영화가 보여줬다고 말하는 것과 인물이 스스로 말한 바를 기억하는 것. 이런 틈 사이마다 비밀이 있다. 그것들이 비밀이라고 자신하거나, 거드름피우지 않고, 예쁜 함정들을 갖고 있는 영화다.

<부모 바보>는 전체적으로 기괴한 유머를 갖고 있는 한편, 영화 자체의 성격이 매우 도발적이다. 단순한 장면들을 여럿 반복하고 재반복하는데, 그 과정이 지루하긴커녕 점점 더 복합적인 어떤 느낌을 자아내더라. 프로그래머로서의 오해를 바탕으로 얘기하자면, 알랭 기로디의 어떤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호수의 이방인>(2016) 같은 영화를 볼 때의 어떤 느낌, 그런 미니멀한 장치들이 가져오는 풍족한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전지전능하진 않으니까, 그런 오해도 나의 것이지 않겠나. 그런 재미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뉴 커런츠 섹션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가끔 비전과 뉴 커런츠의 경계와 그 기준에 관해 궁금해하는 감독들이 있다. 물론, 내용과 형식면에서 수준급이라 다른 아시아권의 감독들과 겨룰 수 있는 작품을 뉴 커런츠 섹션으로 보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해마다 다른 기준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 비전과 뉴 커런츠 간 '차등'의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2021년에 비전 섹션에 선정된 <컨버세이션>은 그 해 상영작 중 내가 가장 좋아한 작품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함윤정

전반적으로 작품 수 변화에 눈길이 간다. '파노라마' 선정작은 3년 연속 줄어드는 추세고, 2021년도에 신설된 '온 스크린'은 2년 차에 비약적으로 작품 수가 늘었다 올해 중간 지점을 찾았다. 지난 두 해 동안 열두 편을 채웠던 '비전' 상영작 역시 올해는 열 편에 그쳤다. 이러한 변화에서 어떤 흐름을 읽을 수 있을까.

정한석 프로그래머

이유는 간단하다. 예산의 문제를 포함해, 올해 초 부산국제영화제가 겪었던 사태의 여파로 인해 특히 이번에는 크게 부풀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편수를 소폭 줄였고, 한 섹션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조금씩 줄였다. 나의 경우에는 비전 섹션에서 두 편 정도를 예년보다 줄이게 됐다. 내년에는 편수를 복원하려 하는데, 기본적으로 열두 편이 해당 섹션이 감당하고 소개해야 하는 양인 것 같다. 비전에 열두 편 정도를 선정하고 보면, 이런 생각이 늘 든다. 이 중에 서너 작품 정도는 사람들에게서 비판을 받거나, 의문의 대상이 되겠다는 생각. 그럼에도, 그 작품들에 던져질 수 있는 의문과 비판의 여지까지 영화제가 끌어안으며 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내가 완전하게 좋다고 느끼는 것보다 관용치를 좀 더 가져가는 것, 그 수치가 비전 섹션에 있어서 열두 편이라는 수치다.

 

함윤정

개막작인 <한국이 싫어서>은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 <달이 지는 밤>(2022),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2022) 등으로 부산국제영화제와 인연이 있는 장건재 감독의 신작이다. 프로그램 노트를 보니 한국 사회와 동시대 젊은 관객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일 것 같다. 최근 들어 한국의 독립 영화 뿐 아니라 주류 상업 영화에서 '돌아갈 곳으로서의 집'을 기대할 수 없거나 그러지 못하는 사례를 접해서인지, 직관적인 제목이 더욱 눈에 띄었다.

정한석 프로그래머

개막작은 프로그래머들이 다 같이 논의를 하며 선택하는데, 취합된 의견의 핵심은 <한국이 싫어서>의 솔직함과 형식적 측면에서의 밀도와 침착성, 배우의 매력에 큰 호소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이 싫어서>이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사실 개막작의 경우 5,000명의 관객 앞에서 상영되다 보니, 도발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고 품이 넓은 작품이어야 한다. 제작비나 상업적인 측면에서 더 세고 크고 영향력 있는 작품을 선정할 수도 있었지만, 올해는 그러지 않았다. 이 소박한 청춘에 대한 이야기, 한국에 대한 솔직한 논평을 개막작으로 선정해도 좋겠다는 판단에서 선정했다.

질문에서 언급한 '돌아갈 곳으로서의 집'에 대해서 말하자면, 영화 에서 계나 역을 맡은 고아성 배우가 뉴질랜드로 떠나는데, 그때의 삶 중에 포착되는 어떤 장면들이 있다. 이와 연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쾌활하면서도, 아주 향수 어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주 무국적적으로 복잡한 여러 심리를 느끼게 하는 화면들이다. 이를 보다 보면, 우리가 이 안에서 지정학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들과 확실히 별도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감정적인 거리나 감정적인 재확인을 스스로 하게 되는 과정이 있는 것 같긴 한다.

함윤정

끝으로 올해 중요하게 여기는 행사나 야심차게 준비한 이벤트가 있나.

정한석 프로그래머

한국영화 담당이다 보니, 아무래도 이벤트 프로그램에 많이 관여할 수밖에 없다. 야외무대나 오픈 토크를 직접 맡아서 짜기도 한다. 한 가지를 콕 집어 말하자면, 《액터스 하우스》를 말할 수 있겠다. 작년을 기점으로 두 번째 해를 맞으며 행사에 대한 인지도가 매우 높아진 상황이다. 올해는 배우 윤여정, 한효주, 송중기, 존조가 참여한다. 예년만큼이나 인기가 있지 않을까 예상한다.

[인터뷰 함윤정 영화평론가, badasal2@ccoart.com]

함윤정
함윤정
부산 가덕도에서 생활하며 영화와 바다에 대해 생각하고, 극장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운영하는 꿈을 꾼다. 미학을 공부하러 간 대학에서 영화를 찍은 후로 좋은 관객이 되면 나은 삶을 살게 되리란 이상한 믿음을 갖게 됐다. ‘좋은 관객’이란 무엇일까? 나의 글과 말은 늘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좋은 관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영화를 더 아끼게 되고, 지난밤 꿈에서 본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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