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살 겨울, 나는 고양아람누리도서관에 처박혀 살았다. 어쩌다 거기서 다른 두 예술 장르에 매혹당했다. 하나는 '영화'고, 다른 하나는 '음모론'이다. 지금도 그 두 장르를 사랑한다. 어쩌면 당신은 '세상에 해를 끼치는 음모론이 무슨 예술이냐'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음모론이 왜 예술이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음모론에 매혹되었던 이유를 먼저 고백하고 싶다. 음모론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먼저 개념을 정정하고 가야 할 듯하다. 다만 조나단 갓셜의 지적대로 음모론은 정확하지 않은 단어다. 되려 음모담이 정확한 단어일 것이다. 음모는 이야기로만 성립된다. 체계적인 논리를 지니는 이론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음모(conspiracy)의 매력은 아름답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아서 생긴다. 그만큼 음모담이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영화와 문학과 마찬가지로 음모론도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파수꾼이다. 가끔 음모론이 내 정체성의 뿌리라는 생각까지 한다.
그즈음 나는 꿈을 포기했다. 음악을 뒤늦게 시작한 나는 연습을 조금이라도 더 하려고 중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렀다. 학교 대신에, 집에서 두 시간 거리의 연습실을 들락날락했다. 아침 7시에 나가서 밤 11시 즈음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10월쯤이었다. 집안 형편이 급작스레 어려워진 탓에 예고를 진학하기 직전 레슨을 그만두었다. 연습실을 함께 쓴 입시생 몇 명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동안에 어떠한 감정도 안 생겼다. 수년간 노력한 모든 것이 급작스레 끝나니까 되려 허무함도 느껴지지 않아서 무작정 걸었다. 감정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지하철에 탄 순간부터다. 지하철 안이 휑했다. 돌이켜보니 늦은 오후에 지하철을 탄 것이 처음이었다. 칸 하나에 사람이 셋뿐이었다. 나머지 둘은 노약자석에 앉아서 코를 골던 중이었다. 지하철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당시에는 강사가 연습량을 검사했다. 강사에게 혼날까 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때 멍하니 창밖의 한강을 보았다. 번쩍거리는 물비늘을 보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은 내 인생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같잖은 자기연민이자 중2병이었다. 차라리 눈물샘을 쥐어짜기로 했다. 재능이 없어서 혼날 때 종종 그러했듯이 지치고 난 뒤에는 눈물도 안 날 테니까.
중학교쯤부터 인간을 혐오했다. 피해의식이 가득했으며, 사람을 만나기를 꺼렸다. 그때의 나는 중 2병이었다. 심지어 찐따이기까지 했다. 찐따는 찌질이와 다르다. 루저나 아싸, 오타쿠, 히키코모리 등 단어와도 다르다. 앞서 나열한 단어에는 그를 인간으로 보는 최소한의 온정이 배어 있다. 찐따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찐따라는 단어에는 상대방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깎아내리려는 모멸감이 배어 있다.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나대지 말라는 비웃음 하나만으로 말이 묵살당하기 일쑤다. 자아가 파괴당해도 그 고통만큼의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다. 불시에 비명을 질러서 심리상담소에 간 순간부터는 돌이킬 수 없다. 상대 부모까지 욕하는, 일명 패드립이라는 암묵적 제약까지 풀려버려서다. 어떻게 아냐고? 다 경험해보았으니까. 지금은 만인의 농담 소재로 쓰인다.
찐따의 내면은 병리적인 단어의 나열로만 설명할 수 있다. 피해망상과 대인기피증, 자기연민, 자격지심과 자의식 과잉, 분리불안, (당연히 여성혐오를 포함한) 인간혐오가 막 뒤엉켜 있다. 순수했던 찐따는 있을 수 있어도, 순수한 찐따는 존재하기 힘들다. 학교에다가 불을 지르지 않는 이상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서 살았다. 이 글에 적혀진 세계와 거리를 두고 싶은 당신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상에서 벗어나 남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당신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중2병은 학교라는 전체주의 사회가 만든 가상의 질병이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해도 멀쩡하면 중2병이고, 평균 미만이면 찐따다. 도스토옙스키는『지하에서 쓰는 수기』에서 이러한 아웃사이더의 고뇌를 한 문장으로 적었다. "저들은 전체인데 나는 혼자다." 그러한 심정으로 산 적이 있다.
찐따에게 마음의 안식을 제공하는 콘텐츠는 '아니메'뿐이었다. 오래도록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대화하는 능력이 퇴화하기 마련이다. 또 만화 안에서는 선악이 나뉘고 죽고 죽이는 일이 일상다반사다. <데스노트>를 본 뒤 노트에다가 나를 괴롭히는 아이는 물론 반 전체 아이의 이름을 내리 적기도 했다. <배틀 로얄>같은 서바이벌 상황이 일어나기를 꿈꿨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노 츠네히로가 제로년대의 상상력이라 이야기한 작품이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의 인류보완계획이 실현되기를 바라면서 방에 처박혀 있는 오타쿠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다. 오히려 살아남으려면 적극적으로 타인을 죽여야 한다는 생존의식의 감수성을 지녀야 했다. 찐따 사이에서 살아남으려 또 다른 찐따와 싸우기 마련이다. 찐따를 만든 일진과 반 전체인 방관자는 생사를 걸고 하는 찐따의 혈투를 코미디로 본다. 차라리 오타쿠로 살아가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즈음 행운으로 검정치마 등의 인디밴드나 고다르 같은 영화를 접하고 힙스터로 살아가는 삶이 최선이다. 부끄러운 순간을 견디지 못한 순간에 찐따는 더욱 지하로 가게 된다. 인터넷 폐인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어떤 수로든 친구를 사귀고 싶었다. 학교도 텅 비어 있는 집도 끔찍했다. 나는 부모님이 밤늦게까지 일하고 오는 날마다 온갖 사이트를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유머와 개드립을 검색해 보려고 한 것이었다. 어쩌다가 올리는 사람과 어울렸다. 오프라인에서는 입에 올리기에 끔찍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냈다. 거기서 만난 내 또래의 남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죄다 끔찍했다. 거부감을 느끼기는 했다. 그만한 환대를 느낀 적이 없기에 그들과 동화되던 중이었다. 아마도 그들과 어울렸더라면 나는 영영 악순환에 갇혀서 외롭게 지냈을 것이 뻔했다. 어느 순간 그들에게도 버려져 구제하기가 불가능한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친구를 사귀는 감각이 퇴화되어서 혼자 지내야 했을 것이다.
그들과의 친분은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그즈음에 비밀 챗방에 들어오겠냐고 권했다. 일루미나티나 프리메이슨이라도 된 듯 여럿이서 비밀 서약을 나누었다. 입회 시험으로 해킹 프로그램을 깐 뒤 인터넷 게시판에다 "김경수 다녀감"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한가득 도배해야만 했다. 순간이 겁나서 꺼버렸다. 최소한 범죄자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양심이 외로움을 처음으로 이긴 것이었다. 다행히 본명을 공유한 적은 없다. 범죄의 세계에 발 들일 뻔했다는 사실에 가끔 놀라고는 한다. 가끔 죄의식에 악몽을 꾸기도 한다. 인간을 혐오하더라도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에 다른 길을 모색했다. 내 증오를 돌릴 만한 곳이 필요했다. 악기에 몸을 맡기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보다 한 달 뒤 일이었다.
동네에서 한 선생님을 만났다. 나이는 70살쯤이었고, 실용음악과에서 강의했다가 최근에 은퇴한 사람이었다. 동네 아이에게 악기를 가르치면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큰 키에 펑퍼짐한 몸매, 인자한 성격, 굵고 뚜렷한 목소리를 지닌 사람이었다. 성인을 가르쳐서 번 돈으로는 기부했고, 주말마다 인근의 큰 교회에서 아동부 예배를 집행했다. 작고 귀여운 치와와를 한 마리 길렀다. 산타 할아버지가 살아있다면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부모님은 심리상담을 전전하던 내게 악기라도 배우면 정신 건강이 나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레슨 첫날부터 나는 문제아로 지냈다. 말을 더럽게 안 따랐다. 악기를 연주하는 순간만은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루는 선생님이 화나서 악기를 연주하는 순간만큼은 타인과 대화를 안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음표가 대화를 대신하기를 바랐다. 공부보다 악기에 열중했고, 대화보다 독서에 열중하고 싶다고. 내 이야기를 다 들은 그는 내게 포옹했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면서 흐느꼈다. 그러더니 내 손에 『데미안』을 건넸다. 레슨비도 안 받으면서 그저 나를 인간으로 기르겠다며 레슨을 이어갔다.
그분과의 생활은 겨우 일 년도 채 안 되어서 끝났다. 그는 나더러 예술가로의 미래를 살아야 한다고 왕복 네 시간 거리인 연습실의 다른 선생에게 보냈다. 회색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겨우 20평짜리 방에 7명의 예고 준비생이 머무르며 예고를 준비했다. 예고에서는 비주류인 악기이었으므로 연습실에서 합격할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셋 정도다. 이미 실기에 내보낼 예정자는 진즉 정해졌다. 내 인생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계속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밥을 혼자 먹었다. 그때 인간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악기를 그만둔 뒤에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기에 1분 1초가 두려웠다.
음악을 그만두고 가기로 한 고등학교는 기숙사 학교였다. 아마 거기에 입소한 날부터는 문화생활은 하나도 누리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때 우연히 본 영화 <2012>의 종말론을 떠올렸다. 그 영화는 볼품없었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가 그러하듯이 스펙터클에 집중한 나머지 내러티브는 허술했다. 심지어 <인디펜던스 데이>(2000)와<투모로우>(2004)에서 그러했듯이 역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결론까지 이른다. 그런데도 위안이 되었다. 2009년에 제작된 영화는 2012년에 지구가 종망한다는 음모론을 바탕으로 한다. 그야말로 한탕주의의 표본이다. 마야력이 2012년을 끝으로 인류의 미래를 더는 기록하지 않으며, 때마침 흑점 폭발이 2012년 12월 21일에 일어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이 세상은 끝나야 마땅했다. 2012년에 지구가 망해야만 했으므로 나는 그 증거를 더하려고 2012년 지구 종말을 다루는 책을 죄다 빌려서 보았다. 당시에 유행한 이리유카바 최의 『그림자 정부』 시리즈와 『시온 의정서』를 보았다. 온 세상이 그림자정부의 지배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볼수록 세상이 망하는 것이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인터넷을 하릴없이 돌아다니느니 차라리 도서관에서 내가 평생 볼 만한 예술은 다 보고 죽자는 마음이 생겼다. 종말론이 지금의 나를 살게 한 셈이었다. 그때 고양시 아람누리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세 권이었다. 『죽기 전에 보아야 하는 영화 1001개』와『죽기 전에 보아야 하는 소설 1001권』, 로저 에버트의『위대한 영화』다. 그 세 권의 책을 읽고 영화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가 그토록 되기를 바랐던 힙스터가 된 셈이다.
인생 처음으로 예술 영화를 제대로 보았다. 고양시 아람누리도서관 디지털자료실 오후 4시였다. 그날 『위대한 영화』에서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1976)에 대한 설명을 접한 뒤 곧장 DVD를 빌렸다. 인생 첫 예술 영화가 <택시 드라이버>가 아니었더라면, 영화에 매혹당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트래비스가 택시 뒷자리에 탄 시장에게 뇌까리는 대사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창밖의 뉴욕을 보고는 언젠가 저런 인간말종을 쓸어내릴 비가 올 것이라는 그의 대사를 몇 번씩 돌려보았다. 그 대사는 그때의 내가 버릇처럼 한 말이었다. 트래비스의 행적을 보는 동안에 중학생 시절을 생각했다. 중학생 때 조금만 더 어긋났더라면, 짝사랑하는 이에게 포르노와 포르노를 보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와 똑같은 인간은 세상은 없을 것이고, 없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트래비스는 우리 모두가 아슬아슬하게 악을 피하고, 안간힘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고독해지는 순간에 언제든 거기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도.
무엇보다 인상적인 설정은 트래비스가 백미러를 통해야만 타락한 뉴욕을 제대로 응시한다는 것이었다. 오프닝 시퀀스 속 백미러에 반사된 트래비스의 눈빛은 섬뜩했다. 나는 그 눈빛에 이끌려 영화에 빠져들었다. 영화는 내게 뒤틀리거나 정반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아도 충분하고, 되려 뒤틀린 시선만이 진실을 포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날부터 나는 줄곧 영화감독을 꿈꾸었다.
그때 하필 음모론에 빠져든 것은 왜일까. 미뤄둔 질문에 대답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음모담은 사실 예술이라기에는 우스꽝스럽다. 아폴로 13호의 달 착륙이 사실 스탠리 큐브릭이 연출한 영화라는 음모담은 터무니없다. 인간으로 둔갑한 외계인 렙틸리언이 세계 각국의 수뇌부를 장악하는 중이라는 음모담도 마찬가지다. 지금 유행하는 어떤 음모담을 사례로 들어도 비슷할 것이다. 음모담은 아름답지 않다. 쓸모없고 해악을 끼치기까지 한다. 포털사이트 뉴스에 도배된 댓글, 광화문 광장에서의 시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지하철역 공중화장실에도 전 대통령이 금괴를 200톤 숨겼다는 낙서가 빼곡하다. 저토록 많은 사람이 출처 없는 이야기에 홀려 있다. 어딜 가든지 간에 음모론이 들려서 지겹기까지 한 이유도 그러하다.
한때 세상에 성공한 1퍼센트의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 있다고, 무언가를 강력하게 믿으면 그에 따르는 기운이 따라온다는 책이 유행하기도 했다. 꿈은 생생한 현실이 된다고 말하는 책도 마찬가지다. 인스타그램에서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의 7가지 특징이라는 제목이 적힌 바이럴 광고가 퍼져 있고, 심지어 상대를 정죄할 때도 사건의 단면만을 보고는 인간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든지 하는 방식으로 음모론을 만든다. 솔직히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음모담으로 소통하고, 음모담을 통해서 스스로를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호러 소설가인 토마스 리고티는 우리의 삶 자체가 우연히 생긴 자의식이 우주의 허무함과 무의미를 견디려 만든 음모담이라고 이야기한다.
조나단 갓셜은 음모담이 사람을 자극하게끔 하는 이유를 스토리텔링 차원으로 분석했다. 음모담은 보통 사람은 모르는 이 세계의 진실을 내가 알고 있다라는 생각을 심는다. 음모담에 빠져든 개인은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악당과 싸우러 밖으로 나선다. 조지프 캠벨이 이야기한 영웅 서사의 첫 단계인 '모험에의 소명'이다. 음모담이 만드는 도파민은 상상을 초월한다. 랩틸리언 음모론이 생긴 시기와 MCU의 전성기가 맞물리는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대리충족을 하든 음모담을 소비하든 우리는 모두가 영웅이고자 하는 시대에 사는 것이다.
음모담이 고전적으로 형성된 가치의 준거 기준이 자본주의로 통합되면서, 가치가 사라져버린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는 서사라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지적도 눈여겨볼 만하다. 음모담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 현대인이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을 주체로 서게끔 하는 최후의 발악일 수도 있다. 예술을 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음모론자가 되고, 최악의 상황에는 히틀러가 된다. 우리가 다급히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음모담을 예술로 재평가하는 일이다. 토마스 드 퀸시가 살인을 예술로 재평가했듯이 말이다. 음모담의 순기능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기껏해야 옴진리교나 JMS와 같은 사이비 종교로 전락하는 저질 음모담을 골라내기 시작할 테니까 말이다.
훌륭한 음모담은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듯하다. 첫 번째로 개인에게 숨겨진 영웅심리를 자극할 만큼만 불완전해야 한다. 그 이상으로 넘어가는 순간부터 음모담을 읽는 이는 스스로 신이라 여긴다. 어니스트 베커는 인간이 영웅이 되려는 심리로 인해서 서로를 죽인다는 비관적 통찰까지 이야기했다. 두 번째는 정치적이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인 음모담은 필연적으로 잘못된 선택으로 이어져 모두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터무니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웃기거나 터무니없는 음모담이야말로 미학적이다. 음모담에 이입할 여지가 안 줄뿐더러, 조금은 무서운 괴담이 그러하듯 그저 아득한 썰로 넘기기에 충분하다.
한편으로는 세계가 음모담을 총동원해도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우스꽝스럽고 난해하다는 사실이 묘한 위안을 준다. 프리메이슨은 그래서 위대하다. 삶이 힘들어도 프리메이슨를 탓하면 그만이다.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언더 더 실버레이크>(2019)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인히어런트 바이스>(2014)는 이러한 맥락에서 건강한 음모담이다. 이는 음모담을 예술의 경지로 올리려는 여러 작가의 영향 아래서 탄생한 영화이어서다. 로버트 단턴은 매스머리즘이라는 사이비 과학이 민중 사이에 건강한 음모담을 생성했고, 그것이 프랑스 혁명의 기원이라고 본다. 때마침 68혁명과 맞물려 출간된 이 책은 음모담이 양날의 검이라 이야기한다. 한편 <인히어런트 바이스>의 원작자이기도 한 토마스 핀천은 음모담을 통해서 언론에 드러나지 않은 소수자를 드러내고 현대인의 혼란을 포착하려고 했다.
나는 영화도 음모담이라 생각한다. 영화야말로 음모담과 닮은 예술이다. 왜곡된 프레임으로 세계를 잘라내고, 그것을 이어서 큰 이야기를 만든다는 점이 그러하다. 비평은 음모담에 음모담을 한 번 더 더하는 행위다. 큰 이야기를 해체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다른 큰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잘 쓴 영화비평은 음모담과 구분하기 힘들다고 믿는다. <택시 드라이버>에 매혹당한 날부터 나는 내가 쓴 모든 글이 종말론과 음모담이라 생각했다. 내 이야기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은 음모담이고 비약이다. 그런데 글을 계속 쓰는 것은 세상이 음모담으로 해석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닐까.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는 가능성을 믿는 것을 희망이라 부르고 싶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는 음모담과 인간은 고쳐 쓸 수 있다는 음모담 중 나는 후자를 믿고 싶다.
2012년 12월 21일 지구는 멀쩡히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12월 22일은 바로 내 생일이었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