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력을 잃지 않고 점멸하는 영화들
생명력을 잃지 않고 점멸하는 영화들
  • 이현동
  • 승인 2022.04.24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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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코아르CoAR 리스트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인 4월. 계절을 측량할 수 있는 미온의 온도가 차츰 피부에 접촉할 때쯤에 만개하는 '벚꽃'은, 마치 그 순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신의 선물과 같이 피고 흩날린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욕망과는 별개로, 당혹스럽게도 벚꽃의 행방은 며칠 사이에 희미해져 오로지 기억에만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영화는 이처럼 활짝 피었다가 소리소문없이 추락하고 결국엔 보이지 않는다. '찰나의 시간 동안 기억에 각인되는 영화가 있다면 무엇일까'

스크린에 응축된 타인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추천한다는 건, 자신의 세계가 어떠한지를 소개하는 일 하고도 전혀 무관하지 않다. 한편으론 영화 취향이 일률적이지 않더라도 '좋은' 영화라고 치부된 영화들이 리스트에 오르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코아르CoAR에서 작업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영화사적으로도 유의미한 영화들을 보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선행적으로 파편화된 영화의 흔적들을 응시하면서, 후행하여 잉태된 영화들을 연결시키는 작업은 영화의 의미를 발견하는 숭고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많은 영화가 지금도 식별이 불가능한 퇴적물로 축적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점멸하는 영화들을 볼 때마다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나에게 여운이 남았던 세 작품을 말하고자 한다.

 

<피 The Blood> 페드로 코스타Pedro Costa|1989

ⓒ 영화 <피>(1989) 스틸컷

페드로 코스타의 데뷔작인 <피>(1989)는 로베르 브레송, 스트로브-위예 등의 누벨바그를 위시한 작법들이 절묘하게 세공된 작품이다. 흑백, 무채색의 색감, 비전문 배우 섭외, 감정의 소거 등은 비움의 시학으로서 그들을 계승한 작품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그에게 있어서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영화사의 지원을 받은 제대로 된(?) 영화라는 것을 주지한다면, 독립적으로 제작에 뛰어들었던 <반다의 방>(2000)과는 분명 다른 질감의 영화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피>는 빈곤한 가정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버지의 죽음 이후를 두 형제의 행방을 그린 휴먼 드라마이다. 형인 빈센트에겐 빚쟁이들이 찾아와 위협을 가하고, 동생인 니노를 입양하려는 삼촌의 강압적인 행위는 혈육으로 묶여진 이들의 삶을 지속적으로 분리시킨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결국 둘은 마주하지 못한 채 영화는 종결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마지막 쇼트에서 둘의 결합이 공간적으로 이어짐을 시사한다. 그들을 둘러싼 '물'의 풍광이 시각-이미지와 서사를 교직하는 장면임을 주목하면 이는 선명해진다. 아버지가 죽었던 호숫가에 있는 빈센트와 삼촌의 곁에서 탈출한 니노가 배를 타고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끝끝내 묶여 있는 피의 정체를 발견하게 된다. 페드로 코스타의 영화가 점차 공간의 어두움에 진척하기 이전에 구체적인 서사의 흐름이 존재하는 <피>는 그의 전기 영화로 이후의 작품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감상이 될 것이다.

 

<태풍 클럽 Typhoon Club> 소마이 신지Shinji Somai|1985

ⓒ 영화 <태풍 클럽>(1984) 스틸컷

'일본적'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작가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지만, 더 나아가 소마이 신지는 일본적이면서도 초월적이며 전복적인 이미지를 구현한다는 점이 그의 독특한 특색일 것이다. 그렇게 그의 첫 작품이자 대중들에게 큰 인상을 심어주었던 <세일러복과 기관총>(1981)은 소마이 신지의 영화적 속성을 애초에 대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일러복과 기관총, 그리고 야쿠자라는 이 혼종성안에서 세일러복을 입은 순진무구한 소녀는 끊임없이 어른들에게 저항한다.

이 기묘한 조합을 통해 장르의 해체를 선언하는 듯한 그의 유희는 <태풍 클럽>(1984)에서도 진술되는 기이하면서도 순수한 풍경들로 발산된다. 학교 안에서 저항의 극한을 모색하는 아이들의 행위는 광기 어린 춤을 추는 것으로 이미지화된다. 제목의 출처가 집약되어 있는 이들의 광란은 태풍의 끝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태풍을 회피하지 않는 움직임은 그 자체로 <태풍 클럽>의 은유이며 소마이 신지가 돌파하려는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다. 클럽이 되어버린 학교에서 아이들의 저항의 종착지는 '눈부신' 죽음이다. 15년 뒤에 나처럼 될 것이라는 선생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이의 잠잠한 죽음에 대한 고백과 자살은 그의 영화적 주제를 탐색하게 되는 강렬한 경험이자 일본 영화의 전형성을 탈피하려는 파괴적인 시도로 관측된다.

특히, 소마이 신지는 53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영화들이 계속해서 언급되는 이유는 유운성 평론가의 말대로 일본 영화계에서 상업적 가능성, 작가영화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그의 영화는 현재까지도 유령처럼 일본 영화계를 떠돌아다니는 정신이자 표지임이 명증해진다.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The Enigma of Kaspar Hauser>

베르너 헤어조크Werner Herzog|1974

ⓒ 영화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1974) 스틸컷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1974)는 필자가 어린 시절에 생각했던 궁금증을 해소시켜줬던 작품이다. '인간이 만약 언어를 비롯한 교육과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않고 신체만 어른인 상태로 사회로 진출한다면 과연 교화가 가능할까'라는 질문 말이다. 주인공인 카스파 하우저(브루노 쉴라인스타인)는 가난한 농부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된 채로 살아가다가 그마저도 형편이 좋지 않아 버려진 인물이다. 보통 이런 인물의 특징은 사회 현실을 응시하는 감독의 보고로 발견되기 마련이다. 카스파에게 문명화되는 과정은 온갖 조롱으로 점철된다.

특히, 문명화의 가장 큰 요소로 작동하는 종교와 이성에 대한 물음은 그에게 과격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는 격리 생활로 인해 신의 존재, 하나님이 무에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논리학 교수와의 대화에서 타인의 이해를 촉구하는 그의 태도 속에서 문명화의 오만함은 카스파는 어떠한 희망도 주지 못한다. 후반부 들어서 카스파 하우저는 "어두운 지하실이 밖보다 나았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대목은 문명화가 한 개인의 삶을 특정 지었을 때 발생하는 혼돈이다.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에서 우리는 문명화의 비극을 묵도하게 된다. 문명화 비문명의 경계에서 순수성을 포착하려는 그의 관심사는 카스파의 마지막 말에서 압축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라는 말, 이 말을 실천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걸프전의 중심지였던 쿠웨이트로 달려갔고,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행동으로 관철시킨 '베르너 헤어조크'는 지금까지도 현존하는 뛰어난 행위예술가이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이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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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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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헤어조크 2023-04-18 13:53:12
스스로 돕는 자를 돕지 않는다입니다. 수정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