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영화를 게을리 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훌륭한 영화는 여전히 많았고, 영화는 여전히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BEST 10'을 보며 느끼는 기분 탓인지 올해는 유독 서사에 있어 도전적인 혹은 전복적인 영화가 많았다. 2021년을 이 영화들로 기억할 것 같다.
1. <라스트 나잇 인 소호 Last Night in Soho> 에드가 라이트Edgar Wright|2021
사심이 가득 담긴 이 리스트에 올해의 영화를 하나 고르라면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이다. 에드가 라이트의 반가운 신작. 그는 감독으로서, 예술가로서 세계에 대한 현재의 감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가 바라보는 시각적, 미학적, 감독으로의 곤조, 윤리적 감각 모두 훌륭했다. 물론 후반부에 급격하게 힘이 빠지는 약점이 보이긴 했지만, 그 점은 그 이전까지 보여준 장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리 야박하게 굴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2. <드라이브 마이 카 Drive My Car> 하마구치 류스케Hamaguchi Ryusuke|2021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드라이브 마이 카』(2014)를 읽었을 때, 나는 좀 의외라고 생각했다. 무라카미의 그 많은 단편 중 이 작품으로 선택했다고? 그리고 이 소설로 칸에서 각본상을 받았다고? 물론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런 내 생각을 완전히 전복시킬 영화를 보여주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사실 그가 말하고자 하는바 '그 자체'는 <해피 아워>(2015)와 <아사코>(2018)를 경유한 입장에선 이미 본 것이었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그 방식'은 여전히 유효했다. 심지어 그 방식과 형식은 '경지'에 도달한 듯 보였다. 굳이 덧붙여 미사여구를 붙이는 것이 무람할 정도로. 영화 속 유스케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체호프는 두렵다"고 말했듯 이제 나는 류스케의 영화를 말하는 것이 겁날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보았다면) 말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3. <쁘띠 마망 Petite Maman> 셀린 시아마Celine Sciamma|2021
이제 이 감독을 현존하는 최고의 여성 서사 감독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아니, 이건 셀린 시아마의 절반밖에 말하지 않을 걸지도 모른다. <워터 릴리즈>(2007), <톰보이>(201), <걸후드>(2014)의 한가운데에 '성장'이 있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녀는 '여성-성장하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다. 그리고 <쁘띠 마망>은 셀린 시아마의 반가운 신작이다. 이 영화 역시 이전 영화의 연장선에 있는 여성-성장 영화이다. 하지만 그 이전의 답습이라면 이렇게 호평받았을 리 없다. 이 영화는 두 인물이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동시에 이 관계로 기묘한 왜곡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성공은 작품 밖에 있는 관객과의 모종의 긴장을 형성하는데 다시 한번 성공한다. 이 두 번의 성공은 지금 이 시대의 서사가 나아갈 씨앗 중 하나가 될 것임을 굳게 믿는다.
4. <프렌치 디스패치 The French Dispatch> 웨스 앤더슨Wes Anderson|2021
2021년에 개봉한 영화 중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이다. '역시 웨스앤더슨'이라 말할 수 있는 영화. 설명은 웨스 앤더슨의 '하고 싶은 거 다해' 정도로 끝낼 수 있지 않을까. 단절된 서사가 잡지에 쓰인 기사의 형식으로 묶이는 과정에 더해지는 다채로움은 그의 영화를 재관람하는 데 풍부한 정보들을 제공해준다. 시각적으로나 서사적으로나 어디 하나 모난 부분이 없다. <개들의 섬>(2018)에서 살짝 주춤했다 제대로 반등했다.
5. <애플 Apples> 크리스토스 니코우Christos Nikou|2020
'올해의 발견'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장르적 상상력을 가지고 온 후 이것을 감정의 결로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 거기에 논리에 정합한 시나리오와 블랙유머가 더해졌다면 어쩔 수 없다. 홍보에는 '제 2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라고 쓰여있지만, 글쎄... 단지 그리스 출신, 환상 서사를 다룬다는 공통점만으로 엮기엔 이 감독의 특색이 너무나 돋보인다. 그저 '크리스토스 니코우'라는 감독으로 명명했으면 한다.
6. <돈 룩 업 Don't Look Up> 아담 맥케이Adam McKay|2021
아담 멕케이의 영화는 언제나 즐겁다. 이 즐거움이 풍자 자체의 유쾌함을 의미한다기보단 불편함을 유발하는 것에 대한 마조적인 즐거움이긴 하지만. <돈 룩 업>은 여전히 정치적이고 풍자적이며 현실을 거의 있는 그대로 (미래를) 재현한다. '이 이상한 재현'은 우리의 위태로운 상황과 상상을 보여준다. DC 코믹스 『브이 포 벤덴타』(1982)가 자본주의 세상은 바뀔 수 있다는 상상을 제시했다면, <칠드런 오브 맨>(2006)은 자본주의의 몰락 보다 세상의 멸망을 더 상상하기 쉽다는 상황에 도달했다. 그리고 2021년 <돈 룩 업>은 '에라, 모르겠다'라는 절망적인 상상과 상황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7, <티탄 TITANE> 쥘리아 뒤쿠르노Julia Ducournau|2021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티탄>이 '좋은' 영화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강렬한' 영화임은 틀림없다. 외면하고 싶어도 말할 수밖에 없는 영화라고 해야 할까. 인물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무엇이 영화를 추동케 하는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쥘리아 뒤크루노 감독의 이번 영화는 유효한 것 같다. 영화에 동의하는가 보다는, 그 메시지 자체 그리고 도달하고자 하는 방향만은 이 시대의 변화를 말하고 있기 때문.
8. <그린 나이트 The Green Knight> 데이빗 로워리David Lowery|2021
올해 유독 서사적 도약에 성공한 작품이 눈에 띈다. 영화가 끝난 이후 다시 시작되는 영화. 기존의 선형 유형의 서사가 아닌, '3차원의 입체적 서사'는 기존의 서사 예술로부터 한 차원 도약해나간 진화된 무엇을 보여줄 것이다. 재미있는 건, 그런 도약으로 삼은 <그린 나이트>의 원작은 중세 서사시 『가웨인 경과 녹기사』라는 고전 이야기에 있다. 이 아이러니는 일종의 감독인 데이빗 로워리 위트로 보인다. 감독의 이전 작품인 <고스트 스토리>(2017)가 이건 우연이 아닌 실력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다음 영화인 <피터팬과 웬디>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9.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Judas and the Black Messiah> 샤카 킹Shaka King|2021
사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그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정치적 대격변기인 60~70년대의 흑표당을 중심으로 스파이의 시선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인 만큼 심리적 서스펜스와 동시에 프레스 햄프턴(대니얼 칼루야)의 사상과 사람을 홀리는 연설을 듣는 재미가 돋보인다. 물론, 영화적 완성도는 뛰어나다.
10. <퍼스트 카우 First Cow>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2019
<퍼스트 카우>는 내게 두 가지 요소로써 다가왔다. 주류의 역사에서 배제된 인물에 대한 새로운 기록과 관객은 좁은 문으로 그 두 사람의 이동을 맞이한다는 점. 조심스레 움직이는 인물들을 보고 있자면, 나조차 그들의 세계로 들어와 있는 듯하다. 영화는 넓은 화면비로 보아야 한다는 기존의 관습에 저항하며 거시(巨視)가 아닌 오히려 좁고 깊게 들어가려 움직이고 그 결과로 침강한다. 세상에서 위로 융기하려는 이야기들 사이 오히려 가라앉는 이미지(유골, 언덩 아래로 움직이는 인물들 등)를 보고 있노라면, 이 이야기가 방향성만으로 특별해지는지 촉각으로 느낄 수 있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