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인 너무나 운명적인 '퍼스트 카우'
운명적인 너무나 운명적인 '퍼스트 카우'
  • 이현동
  • 승인 2021.11.1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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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우정이 있었다"

<퍼스트 카우>(2019)의 주제의식은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내놓은 시집인 '지옥의 격언'의 다음 대목을 소재로 한다.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

제46회 텔루라이드 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은 <퍼스트 카우>(2019)를 관람한 후에 오프닝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답고 시적인 영화'라며 극찬을 보낸 바 있다. 이러한 감상은 앞서 언급한 시구가 영화와 접합하는 지점에 관한 고찰과 연관성이 있다. 그녀의 이전 작품들인 <올드 조이>(2006)와 <웬디와 루시>(2008), <어떤 여자들>(2016)의 '제이미'의 에피소드에서 두드러진 '우정'이란 소재는 개인과 개인이 마주하는 격양된 상황을 느슨하고도 처연하게 다룰 때 형성되는 아스라한 기억의 감각들로 점철된다.

통상적으로 '작별'로 종결되는 엔딩은 켈리 라이카트의 서사를 드러내는 방식일 텐데, 이례적으로 <퍼스트 카우>는 등장인물의 만남과 죽음이 도래하기까지 작별이란 서사가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주로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이성 관계에서 주어지는 '사랑'이 아닌, 동성 관계에서(혹은 동물) 비롯된 '우정'이라는 오브제를 다루는 측면은 실상 관습적으로 반복되는 영화 언어를 답습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관측되기도 한다. 덧붙여서 많은 비평가들이 <퍼스트 카우>의 오프닝 장면을 인상적으로 평가하는 건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의 정체성을 총체화하는 장면이기에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 영화사 진진

속도에 대한 믿음

오프닝에서 유유히 물가를 가로지르는 증기선의 속력은 이미지를 구현하는 방식과 연출의 속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반듯하게 계산된 정물이 프레임과 마찰하여 생성되는 파동의 행렬은 가시적인 공간을 넘어 화면 밖을 탈주하는 진기한 체험의 산물로 도래하며 <믹의 지름길>(2010)에 이어 4:3으로 제작된 화면비는 사막의 개방감과 풍경과는 반대로 폐쇄적인 숲을 소박하고도 친근한 장소로 구현하기 위해 최적화된 장치로 작동하면서 자연의 생동감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한편으로 속도와 관련하여 많은 이들은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를 상기할 때 일반적으로 '느린 영화'로 규정할 것이다.

조너선 로젠봄의 말을 빌려 다소 과격하리만큼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느림'으로 규정되는 영화들은 실상 대중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가 쉽지는 않다. '느린 영화'의 대표적인 예로 로베르 브레송, 허우 샤오시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오즈 야스지로, 장 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 자크 리베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같은 감독의 영화들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재적인 시간의 영역을 형식화하는 '느린' 영화의 특징은 작가주의의 특성이자 영화란 매체의 또 하나의 개척지로 존립하면서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확장해나가는 교두보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퍼스트 카우>는 이 지점을 대중적으로도 훌륭하게 성취해낸 작품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결론적으로 이는 단호하리만큼 영화가 선사하는 속도에 대한 일관적인 믿음에 기인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이질적이나 이질적이지 않은 것 : 관계에 관하여

<퍼스트 카우>의 시작과 끝을 집약하는 두 개의 해골은 인간과 땅의 역사에 대한 소고를 반영하는 시퀀스이다. 수미쌍관을 이루는 이 장면은 과거와 현재를 전시하는 플래시 벡으로 현시되며 궁극적으로 인간이 회귀해야 할 장소로 관철된다. 땅의 무한한 생명력을 착취하는 인간 군상들을 비집고 등장하는 쿠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오티스 피고위츠(존 마가로)의 존재와 킹루(오리온 리)는 <퍼스트 카우>의 독립적인 형상이자 대비적인 형체로 묘사된다. 유대인인 쿠키와 중국인인 킹루의 인종이란 장벽이 드러내는 이질적인 조우와는 별개로 '공간'이란 범주 안에 귀속된 인간의 긴밀한 연대는 낯선 환경을 초월한 이민자들의 모호하고도 신비로운 우정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야기된다.

 

ⓒ 영화사 진진

1820년대 초반에 항구와 조선업의 중심지로 거듭난 메릴랜드 출신인 쿠키는 급격한 산업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성'을 표상하는 청년이다. <행복한 리짜로>(2018)에서 시간과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리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가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부유하는 것처럼 쿠키는 문명이 발화하는 유물론적 사유와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는 인물로 위치한다. 반면에 킹 루는 역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인 '로어 컬럼비아'에서 우리의 방식대로 역사를 맞을 수 있다는 열렬한 야망을 갖고 미래를 설계해나가는 미래 지향적인 인물이다.

킹 루는 제빵사인 쿠키에게 빵을 제조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 문제적 행위를 시도하게 된다. 이 지역에 한 마리 젖소가 무역업자인 픽터 대장에게 운반되면서 쿠키와 킹 루는 유일한 우유의 공급원인 젖소에게서 몰래 우유를 채취하게 된다. 총 3번에 걸친 우유를 채취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지는 쿠키의 태도는 <퍼스트 카우>에서 비버 사냥을 통하여 가죽과 꼬리의 유용성과 맛을 설파하던 사냥꾼들의 태도와는 판이한 대조를 이룬다. 쿠키는 단순히 젖소를 착취와 지배의 대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쿠키는 젖소를 만남을 통해 <웬디와 루시>에 이어 인간이 아닌 동물과의 관계 가능성을 확장한다.

실상 쿠키와 소의 대화라는 건 마치 자막 없이 관객들의 귀에 횡행하던 원주민의 말과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믹의 지름길>에서 생포된 인디언이 명료하게 해석될 수 없는 말과 행위에도 우정이 전달되는 건 불가해한 것을 믿음으로 승화하려는 숭고한 인간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황미요조 영화평론가가 제기한 '비남성적-비인간적인' 관계란 건 더 나아가서 언어가 아닌 '마음'과 단단하게 밀착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1) 온전하게 해석될 여지가 없는 소리의 운율은 차분하고도 격정적인 방식으로 마음을 뒤흔든다. 소리 없는 그림을 관망하는 방식처럼 말이다.

 

ⓒ 영화사 진진

불법적인 현장을 목격한 팩터 대장의 집사로부터 그들의 고대했던 꿈이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영화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도주를 위해 절벽 위에서 물가에 뛰어드는 킹 루와 숲에 숨어 있는 쿠키의 도주 경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서로 다른 삶의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킹 루의 움직임을 대변하는 상승과 하강의 모티브는 쿠키가 우유를 채취할 때 그가 감시자로 위치했던 나무 위와 절벽에서 추락하는 장면과 동일한 방식으로 구현되는데, 이는 킹 루의 야망이 상실되었음을 목도하는 은유적인 요소다. 쿠키는 그만 발을 헛디뎌 바위와 부딪혀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그 과정에서 쿠키의 생명을 구원하는 건 '원주민'이다.

서부 개척 시대의 미개척지에서 원주민은 '자연'과 밀접한 존재이며 더 나아가 '자연'을 형상화하는 상징적 요소로 자리한다. 그들과 함께 공존하고 있는 모든 생명의 근원지인 땅에서 인간이 회복되는 장면과 그 후에 앞서 언급한 죽음에 당면하는 회귀적 장소로 치환되는 이 모든 과정에는 운명을 덤덤하게 맞이하는 켈리 라이카트의 삶의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서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줄곧 추구해왔던 '영화적'인 것으로부터 거리를 멀리할 때 발생하는 척력은 어쩌면 연출적인 측면에서 이방인을 자처하는 그녀의 영화적 태도와 닮아 있다. 결국 약속이라도 한 듯 집에 돌아온 쿠키와 킹 루는 나무에 걸려 있는 빵을 팔아 번 돈을 챙겨서 떠난다. 상처가 깊은 쿠키와 걸음을 맞추기 위해 킹 루는 얼마 가지 못해 함께 휴식을 취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 영화사 진진

<퍼스트 카우>에서 자본을 향한 관점과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 인물의 흥미로운 대비는 그들을 이어주는 단단한 끈으로 직결되면서 이민자들의 삶을 지시한다. 이는 긍정도 아닌 부정도 아닌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자연의 움직임과 마찰하며 일상의 아름다움을 소소하게 표현해낸다. <퍼스트 카우>를 작업할 때 그녀는 미조구치 겐지의 <우게츠 이야기>(1953)와 사트 야지트 레이의 <아푸> 3부작을 찾아보았다고 한다. 작은 빈민가에서 출발하는 이 이야기들은 전쟁과 근대화과정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에피소드들이다. 반면에 <퍼스트 카우>가 그 두 작품보다 희극적인 건 백골이 된 상태에서 여전히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아닐까. 처음에 백골을 발견한 개와 여자에게 비명이 들리지 않는 건 바로 이런 이유임을 명시적으로 나타낸다. 우리는 <퍼스트 카우>를 감상한 후에 분명히 봉인되어 있는 우정을 끄집어 보게 될 것이다.

1) <퍼스트 카우>, 황미요조(영화평론가), 사사로운영화리스트, KMDb, 2020.12.04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영화사 진진

퍼스트 카우
First Cow
감독
켈리 라이카트
Kelly Reichardt

 

출연
존 마가로
John Magaro
오리온 리Orion Lee
린 어벌조노이스Rene Auberjonois
토비 존스Toby Jones
테드 루니Ted Rooney
딜란 스미스Dylan Smith
앨리아 쇼캣Alia Shawkat
이완 브렘너Ewen Bremner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19
상영시간 122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11.04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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