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오늘의 공포'는 어떤 방식으로 유효해지고 있는가
[Critique] '오늘의 공포'는 어떤 방식으로 유효해지고 있는가
  • 배명현
  • 승인 2021.08.21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공포영화 탐구"

최근 공포영화가 개봉할 때면 극장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은 역시 "하나도 안 무섭다"이다. 왜일까. 필자는 생각한다. 시간을 약간(?)만 돌려보면, 여름에 공포영화를 보는 게 당연한 시절이 있었다. 90년대, 혹은 00년대 초중반, 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꼰대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그만두겠다. 하지만 분명 그런 시절도 있었다. "공포영화를 보며 더위를 잠시나마 잊는다"라는 말이 유효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공포영화를 통해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끼는 일이 쉽지 않게 되어버렸다.(공포의 기준을 어떻게 상정할 것인가라는 중요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정할 문제가 아니니 잠시 차치하기로 하자) 이것은 장르적인 한계인가. 더 많은 점프스퀘어와 서늘한 사운드 그리고 어두운 암부를 더욱 더 활용해야 하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많은 관객들이 공포라는 장르의 연출적 메커니즘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더는 같은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영화 <유전> ⓒ (주)팝엔터테인먼트

공포영화는 이제 새로운 길을 모색하여야만 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현실적으로 너무나 어렵다. 이것이 문제다. 새로운 길에 대한 모색. 가장 쉽게 언급되곤 하지만 현실화하기에 가장 어려운 그것. 그러나 희망은 있다. 공포영화의 당대성을 만들어내는 감독들이 있다. 그들은 공포를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영역에서 가져온다. 가장 먼저 나와야 할 이름은 역시 미국 영화감독 '아리 에스터'일 것이다. 그는 기존의 호러영화로부터 빚진 것들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드러냄으로서 과거의 유물을 오늘의 것으로 재탄생 시킨다. <유전>(2017)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악마의 씨>(1968)>를 재배치시킴으로써 '불안한 타자라는 서사'가 가지고 있는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기억해보자. <악마의 씨>는 '로즈마리'(미아 패로우)라는 인물을 타인이라는 존재 그리고 소외를 핵심으로 다루었다. '시대적 징후'의 공포를 매우 시의적절하게 포착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이다. 이제 타인이란 공포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새롭지 않다. 그래서 아리 에스터 감독은 그 존재 안에 외부자로 이웃들을 설정하지만, 정작 알고 보니 범인은 이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리고 영화 전체를 이끌던 주인공 '애니'(토니 콜렛)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불안이라는 서사를 한 번 더 뛰어넘은 새로운 공포로 다가간다. 심지어 '내'가 '유전'이라는 악마의 운명론적 게임에 빠져들었다는 점이 이 영화를 추동하는 힘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이 영화가 도달한 지점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  속 불행이 운명적 게임, 그러니까 악마 파이몬(Paimon)에 의해서든 아니든, 결국 내가 행동한 행위 안에서 실제의 사건은 벌어진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유전> 속 사건의 비극은 어떻게 비극이 될 수 있었는가. 영화 안에서 대사로 전달되듯, "헤라클레스는 선택권이 없었어, 선택권이 있었다면 더 비극적이었을까?" 이 대사는 유전 전체를 압축할 수 있을만한 대사이다. 하지만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 속 캐릭터의 반응인데, 질문을 받은 피터(알렉스 울프)는 질문의 요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정작 자신에게 다가올 문제를 전혀 모르고 있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며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은 관객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파이몬의 축제가 끝났을 때, 영화 속 현실은 미니어처를 보여주고 이 작은 세계의 이야기가 현실의 우화임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 전달은 현실에 있는 우리에게 영화의 메시지를 다시금 복기하게끔 만든다. 아니, 명령한다.

필자는 '이것'을 현대의 공포를 말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관객에게 폭력적으로 공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관객 내부에 있는 공포를 복기하게 하는 것(과거 영화의 재생산이 아님을 밝혀둔다). 공포는 이미 관객 내부에 있으니 그것을 영화라는 기폭제로 촉발시켜 다시금 지금-이곳에서 타오르게 만드는 것이다. 기민한 공포영화감독들은 현실을 복기시키는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택했다.

 

영화 <팔로우> ⓒ (주)영화사 오원 , (주)브리즈픽처스

이런 지점에서 보았을 때 미국 영화감독 '데이빗 로버트 미첼'은 분명 흥미롭다. 그는 2010년대 이후의 뉴웨이브 공포에 새로운 방점을 남긴 <팔로우>(2014)를 제작했고, 이후 공포와 미스터리를 기반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인 <언더 더 실버레이크>(2018)를 찍었다. 그는 현재의 훌륭한 감독들이 그러하듯 장르를 기반하고 있는 설정을 비틀고 재조합한다. <팔로우>는 여느 틴에이저 호러처럼 보이지만 그 설정은 도망에 있다. 악령은 좀비처럼 천천히 따라오고 영화는 그에 대한 리액션인 도망을 중심으로 진행한다. 10대가 가진 성적 욕망과 갈망 그리고 그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정신적 불안을 은유하여 관객에게 공포를 복기하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악령과 접촉했을 때 관객은 당황하게 된다. 악령이 위해를 가하는 방법이 물리력이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물리력을 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전까지 영화에서 귀신 혹은 유령으로 등장한 존재가 위협을 직접 가하는 모습이 등장한 적이 있던가. 영화는 고어 혹은 슬래셔 영화가 아닌 이상 다음 쇼트로 넘기거나 인물을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버린다. 그러나 로버트 미첼 감독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관습적으로 찍지 않았던, 관객의 상상에 맡겼던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내고야 만다. 그리고 <팔로우>는 이 물리적 설정으로 가지고 와 적극적으로 활용한 영화이다. 그리고 이 폭행(이 식별할 수 없는 존재의 자리에 관객은 그 누구라도 대입시킬 수 있다)을 보며 관객은 내면에 있는 무의식적 혹은 과거의 기억을 퍼 올린다.

<팔로우>에서 죽음은 성병에 대한 은유일 수도 혹은 부모와 같은 대리인의 육체, 정신적 폭력의 은유일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그리고 이 신체 폭력과 정신적 불안의 만남의 만남은 그야말로 관객의 기억 속에서 악령을 생성시킨다. 하지만 두 감독의 영화에서 죽음과 도망 그리고 방황은 언뜻 모호하게 보인다. 왜인가. 우리는 과거의 공포와 현재의 공포 두 장르가 전하려는 차이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과거 공포영화들은 현실에서 '직면'한 문제를 은유하는데 중심을 두었다. 가령 앞서 언급한 <악마의 씨>를 포함해 돈 시겔 감독의 <신체 강탈자의 침입>(1956), 토브 후퍼 감독의 <텍사스 전기톱 살인 사건>(1974)와 같은 당시의 공포영화가 그렇다. 그러나 이 직면한 위험이란 무엇인가. 이 영화들은 '익숙지 않은 타자'를 공포의 자리에 두기를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의 공포는 이 위험한 타자의 자리를 비워둔 대신 그 자리에 '나'를 채워 놓는다. (이론을 그대로 대입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문장에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다. 나라는 존재가 세계를 인식하고, 내가 사유하는 것이 존재의 증거라고 했을 때, 과연 내가 미치지 않았을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문장으로 말이다.

 

영화 <언더 더 실버레이크> ⓒ (주)팝엔터테인먼트

우리는 '세계를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성적 질문 없이 타자에게 공포의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가. 오늘의 공포를 만드는 영민한 감독들은 이 질문의 폐부를 찌르고 기어코 피를 보게 만든다. 그렇기에 오늘의 공포영화는 오늘날 더욱더 매혹적이다. 점프스퀘어를 남발하며 안온한 자리에서 공포를 체험하게 해주는 공포포르노가 아닌, 오늘의 공포는 영화가 끝난 후에서 극장 그 너머의 공간을 상상하게 한다.

물론, 깊이 혹은 훌륭한 영화에 대한 제단적 확언을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이 오늘의 공포에 대한 필요성은 다르다. 영화는 시작과 끝이 정해진 닫힌 매체이기에, 관객에게 다가가기 전에 완성되어 있다. 관객이 모르는 건 완성된 그 결과이고 그 결과조차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를 '관람'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관람은 관람자의 인식에 남아 그 개인의 생 전체를 바꾸기도 한다. 나는 영화의 힘을 믿는다. 그만큼 관람자 또한 믿는다. 어쩌면 이 부분으로 소비자와 관람자를 나눌 수 있는 건 아닐까. 좋은 예술은 모르겠지만 분명 좋은 관람에 대한 태도는 존재한다. 그 좋은 태도는 영화와 세계를 바꾼다. '오늘의 공포'는 세계를 바꾼다. '오늘의 공포영화 탐구' 시리즈는 그런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